이차돈 초상화
신라는 삼국 중에서 가장 나중에 불교를 받아들였다. 고구려에 비해 상대적으로 공인이 늦은 백제보다도 143년이나 지난 법흥왕 14년(527)에 이르러서야 공인됐다. 고구려나 백제를 통해 곧바로 전해졌을 불교가 143년이 지나서야 공인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신라사회의 반발이 컸음을 의미한다.
신라불교 공인을 보는 견해
신라불교는 법흥왕 14년에 일어난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를 계기로 뿌리를 내렸다. 이차돈의 순교를 바라보는 학자들의 견해는 대체로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지배체제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보는 견해고, 다른 하나는 불교가 자리잡아 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기존의 종교 또는 문화와의 갈등 때문에 일어났다는 시각이다.
앞 의 설은 법흥왕이 치세 동안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확립하려 했다는 점에서 비롯된 주장이다. 법흥왕은 즉위 4년(517)에 병부를 설치해 병권을 장악한데 이어 즉위 7년에는 율령을 반포하고 백관의 공복(公服)을 제정하는 등 왕권 강화에 힘쓴 왕이다. 따라서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장려한 것도 왕권 강화 정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는 설.. 왕권을 강화하는데 가장 걸림돌이 되었던 것은 부족연맹체적 사회체제의 정신적 지배이념이었던 재래신앙이었고 이를 대신할 새로운 지배이념으로 불교가 채택됐다는 주장이다.
뒤의 설은 귀족이나 부족 간에 신봉되던 재래신앙과 왕실을 비롯해 폭넓게 자리를 잡아가던 불교가 법흥왕의 흥불정책으로 충돌하는 과정에서 이차돈의 순교가 일어났다는 것.
동기야 어찌됐든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는 신라의 정신이념으로 자리잡았고 삼국통일과 찬란한 민족문화를 꽃피우는 밑바탕이 됐다.
또 다른 이차돈의 초상화
이차돈의 순교
이차돈은 박씨로 지증왕의 생부인 습보갈문왕의 손자이다. 이름은 염촉(厭髑, 厭은 고슴도치를 의미하는 異次 또는 伊處의 한역. 髑은 頓, 道, 獨 등과 같이 글 쓰는 사람들의 편의에 따라 붙여진 조사)이다. 이차돈은 법흥왕이 신하들의 반대로 불교 공인을 이루지 못함을 보고 자신의 몸을 버려 그것을 이루고자 했다. 왕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모든 것 중에 버리기 어려운 것이 몸과 목숨[身命]입니다. 그러하오나 소신이 저녁에 죽어 불교가 아침에 행해지면 불법은 반드시 일어나고 성주(聖主)께서는 길이 편할 것입니다.”라며 허락을 었다. 이에 이차돈은 거짓으로 어명을 전해 천경림(天鏡林)에 절을 짓기 시작하고 법흥왕은 그것을 구실로 처형한다.
경주 백률사 범종에 새겨진 이차돈 순교 모습
이 차돈은 죽음에 앞서 “부처님이 신령하다면 내가 죽은 뒤 상서로운 일이 일어날 것”이라며 하늘을 향해 기도했다. 목을 베자 머리가 금강산 꼭대기에 떨어졌고 잘린 목에서는 흰 젖과 같은 피가 솟았다고 한다. 또 하늘은 캄캄해지고 땅은 진동했으며 꽃비가 내렸다.
이에 왕과 신하들은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불교를 공인하였다. 이때 이차돈의 나이는 22세...
백률사의 창건
이 차돈의 머리가 떨어졌다는 금강산은 토함산(동), 선도산(서), 남산(남), 낭산(중)과 함께 경주 5악의 하나인 북악으로 신라인들이 신성시 여기던 곳이다. 이곳에 이차돈을 장사지내고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창건한 사찰이 백률사이다.
최초의 이름은 지추사(刺楸寺).
1914년 백율사 부근서 뒹굴고 있던 이차돈 순교비
이 차돈의 묘는 지금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지만 《해동고승전》을 지은 각훈 스님이 백률사를 찾을 때까지는 남아있었던 듯 스님은 “어느날 경주로 여행을 갔다가 금강산에 올랐다. 그곳에서 나는 염촉의 외로운 무덤과 낮은 비석을 보고 비통함을 금할 수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헌덕왕 9년(817)에는 국통 혜륭(惠隆)·대통 녹풍(鹿風)·대서성 진서(眞恕)·법주 효원(孝圓) 스님, 김상랑(金相郞), 파진찬 김의 등이 이차돈의 무덤을 고쳐 큰 비를 세우고 이 무덤에 예불할 향도(화랑)를 결성하고 매달 5일 법회를 열기도 했다.
백률사에는 1914년까지 이차돈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순교비가 있었다고 합니다.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돼 있는 이 순교비는 1면에 이차돈의 순교 장면을 부조하였고, 2~6면에는 순교와 불교 공인에 대한 글을 새겼다.
이차돈순교비(앞면)
순교비의 뒷면
이차돈순교비는 높이 1.04m이며, 각 면의 너비가 29㎝이다
육각기둥모양으로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비는 육각형의 복련(覆蓮)으로 새긴 대좌 위에 세워져 있으며, 원래 는 위에 옥개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비(碑)의 제1면에는 이차돈의 순교장면이 부조로 표현되어 있다.
땅이 진동하고 꽃비가 내리는 가운데 잘린 목에서는 흰 피가 솟아 오르는 장면이 좁은 석면(石面)에 간결하면서도 극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나머지 다섯 면(2-6면)에는 네모칸[井間]을 치서 한 면마다 7줄이 되고 한 줄에 25자가 되도록 칸을 마련하여 각 칸마다 글자 크기 3cm정도의 글씨를 써 새겼다.
그 내용은 법흥왕이 백성들을 위해 불법을 널리 펴고자 하는 마음과 이를 위해 이차돈이 순교한 사실 그리고 그때 사람들이 이차돈의 숭고한 뜻을 간절히 기리며 이 비를 세우는 사정으로 이루어졌다
각 면에 새겨진 명문은 마멸이 심하여 절반 정도만 판독이 되나, 명문의 대강은 '삼국사기'나 '삼 국유사'의 기록으로 미루어 알 수 있으며, 특히 명문 중의 “頸中白乳一丈(경중백유일장)”이라는 문장은 이들 기록과 합치되고 있다. 또한, 이 순교비석당기를 목판에 새긴 법첩(法帖) 2종 '흥린군신각금생서(興隣君新刻金生書)' ' 원화첩(元和帖)'이 전하고 있어 마멸된 부분을 더욱 보충할 수 있게 되었다.
순교비의 명문 중에는 건립연대라고 고증할만한 확실한 연호나 연도는 없으나 '삼국유사' 염촉멸신조(厭觸滅身條)의 기사에 의하여 건립연대를 당 헌종 원화(元和) 12년(헌덕왕 9년, 817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서체는 해서이면서도 예서의 필의(筆意)가 담긴 특이한 예라고 한다.
이차돈순교비는 불교 공인을 기록한 현존 최고의 사료로 한국 불교계에 매우 귀중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아니라 제1면의 그림은 당대의 조각연구 및 복식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일제강점기 발굴조사 보고서 등에 따르면, 이순교비는 1910년대 초 백률사 불전 맞은 편 산중, 또는 문전 가시나무 숲 에서 재발견되었으며 1914년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이전된 이후 현재까지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2014년 4월 문화재청이 이차돈 순교비를 보물로 지정예고 한데 대해 불교계가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이차돈 순교비가 국보급 문화재라는데는 이견이 없지만, 보물로 지정이 되면 국가소유가 되기 때문이다,
백율사의 본사인 불국사를 비롯하여 불교계는 순교비가 처음 세워진 곳이 백률사라는 것이 정설이므로 소유권이 백율사 사찰임을 명확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계는 일제시대 때 발굴조사 보고서 등 근대 기록을 근거로 소유권을 주장하고 나서 지금도 문화재로 지정하지 못 하고 있다.
국보 제28호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慶州 栢栗寺 金銅藥師如來立像)
백률사에 있던 것을 1930년에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놓은 것이며, 전체 높이 1.77m의 서 있는 불상으로 모든 중생의 질병을 고쳐준다는 약사불을 형상화한 것이다. 머리는 신체에 비해 크지 않은 편이며, 둥근 얼굴·긴 눈썹·가는 눈·오똑한 코·작은 입 등에서는 우아한 인상을 풍기고 있지만, 8세기 중엽의 이상적인 부처의 얼굴에 비해 긴장과 탄력이 줄어든 모습이다. 커다란 체구에 비해 어깨는 약간 빈약하게 처리된 느낌이지만 어깨의 굴곡은 신체에 밀착된 옷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은 두 팔에 걸쳐 흘러내리고 있으며 앞가슴에는 치마의 매듭이 보인다. 앞면에는 U자형의 주름을 연속적인 선으로 그리고 있는데 조금은 도식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신체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중후해지며 옷자락들도 무거워 보이는데, 이것은 상체를 뒤로 젖힘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솟아오른 단전과 더불어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두 손은 없어졌으나 손목의 위치와 방향으로 보아 오른손은 위로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왼손에는 약그릇이나 구슬을 들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소 평면적인 느낌을 주지만 신체의 적절한 비례와 조형기법이 우수하여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26호),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과 함께 통일신라시대의 3대 금동불상으로 불린다.
한국 최초의 승려 아도화상(阿道和尙)
아도화상의 별명은 묵호자(墨胡子)라고도 일렀으니 그의 살빛이 검은 데서 온 것 같다. 아도는 원래 고구려 사람으로 부친은 위(魏)나라 사람 아굴마(阿掘摩)를 찿아 중국으로 들어가던 도중에 부자(父子)가 뜻밖에 상봉하였다. 그는 현창화상(玄彰和尙)에게 수학을 하였으니 그가 한국 최초의 승려이다.
아도스님이 신라의 눌지왕(訥祗王) 때에 일선군(日善郡)에 이르러 모례장자집에서 숨어 포교활동포 할 때 중국 양(梁)나라에서 신라 조정에 두 가지 예물을 보내 왔는데 하나는 의복(衣服)이고 다른 하나는 향내 나는 나무토막이다.
신라 불교 초전법륜지로 성지화된 이곳은1976년 아도화상이 신라에 불교를 전하려 올 때 모셔온 세존 진신사리가 세존사리탑 보수 공사중 금동육각사리함(金銅六角舍利函)에 봉안되어 발견되었다.
국보 제208호금동육각사리함
8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이 되며 현재 직지사 성보 박물관에 위탁 소장되어 있다.
보물 제121호 굴불사지 석불상
경주시 동천동 산4번지 소금강산 기슭에 백률사 입구에 위치 통일 신라시대의 석조불상. 3m 크기의 바위 사면에 불상이 새겨져 있다. 동쪽에 약사여래불, 서쪽에 아미타여래불, 남쪽에 석가여래불, 북쪽에 미륵불이 새겨져 있으나 얼굴이나 상체 등 훼손된 부분이 많다.
아미타여래불은 신체만 돌기둥에 조각했고 머리는 따로 만들어 놓았다. 좌우협시보살의 부드러운 옷주름과 영락 등을 생동감있게 표현했다.
북쪽의 보살상 2구 중에 하나는 6개의 손이 달린 관음보살을 새겼다. 북쪽 미륵불의 얇은 옷주름을 새긴 솜씨가 뛰어나다. 남쪽면은 원래 삼존불이 새겨져 있었으나 일제 때 훼손되고 강탈당해 본래 모습을 잃었다.
“염불소리를 듣고 불상을 세우다”
신라 경덕왕(재위 742~765)이 어느 날 백률사를 찾았다. 어디선가 염불소리가 들려와서 알아보니 땅속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기이하게 여긴 왕은 그곳을 파보라는 명을 내렸다.
신하들이 땅을 파본 즉 커다란 바위만 있을 뿐이었다. 이에 왕은 바위 사방에 불상을 새기도록 하고 굴불사라는 절을 짓도록 하였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전해지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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