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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

[문화유산 답사기]시대를 앞서 간 여인들의 발자취 따라- 나라를 되찾기 위해 의병이 된 여성도...

문화재방송 2020. 8. 15. 07:39

 

 

조선시대의‘이상적인 여인상’이라고하면 가부장제 아래 남편을 잘 섬기는 현모양처를 떠올리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 시기에도 자신의 주체적인 삶을 꿈꾸고, 그 안에서 수준 높은 학문과 예술을 탐구한 여인들이 있었다. 현모양처의 이미지에 가려져 있지만 수준 높은 그림을 남긴 화가 신사임당, 중국과 일본까지 이름을 드높인 시인 허난설헌, 깊이 있는 지식세계를 구축한 성리학자 임윤지당, 나라를 되찾기 위해 앞장섰던 의병장 윤희순까지. 시대를 앞서 간 그녀들의 삶을 따라가본다.

 


- 현모양처의 틀과 여류 화가 신사임당

 

 

강릉에는 맑은 경포호와 푸른 바다만큼이나 유명한 두 여인이 있다. 바로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이 그 주인공이다. 가부장적인 유교 문화 아래 두드러진 활동을 했던 여인이라는 점에서 둘은 종종 비교의 대상이 되곤 하는데, 경포호를 사이에 두고 마주해 있는 오죽헌과 허난설헌 생가에서 닮은 듯 다른 두 여인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신사임당은 흔히 현모양처의 표본처럼 여겨지곤 하는데 그녀를 단순히 현모양처라고만 하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녀가 남긴 그림과 글을 보면 훌륭한 예술가로서도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평가를 받는 이유로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는데, 아들 율곡이 워낙 훌륭한 인물인 탓에 그의 어머니로서의 역할이 크게 두드러진다는 것과 여성의 뛰어난 재주가 인정받기 쉽지 않았던 조선시대의 유교 문화 아래 그녀를 현모양처의 틀 안에 가두어 남성의 시선으로 재단했다는 것이 주종을 이룬다.
그녀가 태어나고 자랐으며 아들 율곡을 낳은 오죽헌은 오천원권 지폐에 등장할 만큼 유명한 명소다. 그녀는 경기도 파주의 이원수와 혼인하였으나 결혼한 이후에도 강릉의 친정에서 주로 머물렀던 것으로 전해진다. 시집을 가면 죽어서도 시댁귀신이 되어야 한다고 했던 가부장적인 사상과는 달랐다는점에서 놀라게 된다. 오죽헌 안에 있는 율곡기념관에는 그녀의 ‘조충도’를 비롯해 ‘초서’와 ‘전서’ 등의 글씨가 전시돼 있는데, 기존의 이미지에 갇힌 신사임당을 고정관념 밖으로 꺼내어 다시금 돌아보아야 할 필요성을 저절로 느끼게 된다.


- 난초향과 눈처럼 깨끗한 성품을 지닌 허난설헌

 

오죽헌을 나서 경포호를 따라 건너편으로 가면 해송이 우거진 초당마을 한편에 있는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을 만난다.
허난설헌은 두 오빠와 남동생 사이에서 유일한 딸로 자랐는데, 그녀의 집안은 일반 사대부가와 달리 상당히 개방적이고 진보적이어서, 어린 시절부터 형제들과 함께 글을 읽고 논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허균 · 허난설헌 기념공원에 들어서자 다섯 개의 시비가 눈에띈다. 4남매와 아버지인 허엽의 글귀를 적은 것이다. 이 다섯을 허씨 5문장가라 칭하는데, 허난설헌은 이중에서도 글재주가 가장 뛰어났다고 한다. 조선 말기의 문장가였던 매천 황현은 허난설헌과 허균, 허봉을 가리켜 “초당 가문에 세 그루 보배로운 나무, 제일의 신선 재주는 경번(허난설헌의 별호)에 속하였네”라고 칭송하였는데, 허난설헌의 글재주가 신선의 재주라 할 만큼 뛰어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처럼 뛰어난 재능을 가진 그녀였지만 여인으로서의 삶은 순탄치 못했다. 15세의 나이에 시집을 갔는데, 시댁은 가부장적 분위기가 강한 탓에 그녀가 글을 읽고 시를 읊는 것을 마땅치 않아 했으며, 고된 시집살이를 겪어야 했다. 그러던 중 친정아버지와 오빠가 세상을 떠나고 친정의 가세가 급격히 기운 가운데, 전염병으로 어린 아들과 딸까지 잃게 되자, 건강을 잃고 점점 쇠약해져갔다. 그녀는 ‘몽유광상산시’로 자신의 죽음을 예언했고, 결국 2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마감하게 되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면서 유언으로 자신의 글을 모두 불태워 주기를 부탁했는데, 남은 작품을 모두 모아놓고 보니 방 하나를 가득 채웠다고 한다. 그런데 누이의 작품이 모두 불태워진 것을 아쉬워했던 동생 허균이 친정에 남아 있던 일부 작품과 자신이 외우고 있던 것을 문집으로 펴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 애틋한 강릉을 뒤로하고 떠나는 길

 

두 여인과의 만남을 뒤로하고 다음 목적지로 향하는 길. 쭉뻗은 고속도로가 아닌 구불구불한 대관령 옛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정상 부근에서 또 한 번 신사임당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저 멀리 아스라이 강릉을 보며 시를 읊노라니 조선시대여인으로 겪었을 삶의 애환이 느껴져 애틋함이 더해진다.

 

 

慈親鶴髮在臨瀛(자친학발재림영) 늙으신 어머님을 강릉에 두고
身向長安獨去情(신향장안독거정) 홀로 서울길로 가는 이 마음
回首北村時一望(회수북촌시일망) 둘러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
白雲飛下暮山靑(백운비하모산청)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

 


- 가부장적 유교 사상에 반기를 든 임윤지당

 

조선시대 여인들의 활동은 많이 알려지지 않은 데다가 그마저도 대부분 그림이나 문예 등 국한된 분야에서만 활약했다고 생각하기 쉽다. 원주의 임윤지당은 이런 선입관을 깨고 성리학자로서 큰 획을 그은 여인이다.
그러나 그녀의 이야기를 만나기 위해 찾은 원주에서 유적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녀를 기리는 기념비는 원주역사박물관의 도움을 받아서 간신히 찾을 수 있었다. 기념비는 초라한 모습으로 철길 옆 비좁은 공원 한쪽에 놓여 있다. 생전에 여자라는 이유로 남자들에게 가려 주목받지 못하던 그녀의 재능이 지금도 여전히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임윤지당은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형제들이 “네가 대장부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라고 탄식할 정도였는데, 혼인을 하고 시집살이를 하면서 스스로 재능을 숨기고 여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여자에게는 글도 가르치지 않던 당시의 문화 속에서 한문을 읽고 쓴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한글로 편지를 쓰고, 책은 모두가 잠든 밤중에만 홀로 숨어서 볼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다 결혼 8년 만에 남편과 사별하고 어렵게 낳은 아이마저 잃고, 양자로 들인 조카까지 먼저 세상을 떠나는 시련을 겪게 된다.
그런 시련 속에서도 학문에 매진하여 당시 성리학의 주요 쟁점이었던 ‘이기심성(理氣心性)’, 즉 우주와 인간의 본성을 둘러싼 심오한 원리를 체득했다. 이러한 그녀의 사상은 동생 임정주와 시동생 신광우가 유고를 정리해 『윤지당 유고』를 펴내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속에는 유교 경전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성리학적 논문과 중국의 역대 인물을 비평한 역사 평론, 교훈적 내용을 담은 운문 등이 실려 있는데, 사상은 물론 문학성 또한 높게 평가받고 있다.
묘소라도 찾아가 참배하고 싶었으나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원주시 호저면에 그녀의 묘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흔한 비석 하나 없는 탓에 추정만 할 뿐이다. 쓸쓸한 무덤 앞에 서니, 여인으로서 마음껏 기량 한번 뽐내보지 못한 그녀의 삶이 더욱 안타깝다.

 


- 나라를 되찾기 위해 의병이 된 여인 윤희순

 

한편 남자보다 용감하고 높은 기상을 자랑한 여인도 있다. 춘천 시립도서관 뜰에는 눈에 띄는 여인의 동상이 있는데, 한복을 입고 쪽진 머리를 한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여인인 듯하나, 한 손에는 책을 들고 다른 손은 앞으로 뻗어 사람들을 이끄는 모습이 여느 대장부 못지않은 기상을 뽐낸다.
그녀의 이름은 윤희순. 일제의 침략에 맞선 여성 최초의 의병장이다. 그녀의 의병 활동은 시집와서 살았던 춘천시 남면에서 상세히 확인할 수 있다. 화서학파의 학통을 계승한 그녀의 시댁은 위정척사 사상을 잇고 있었으며, 시아버지 유홍석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계기로 의병 활동을 시작했다.
윤희순은 시아버지와 남편의 의병 활동을 돕는 것에 그치지않고 의병가와 경고문을 만들어 여성들도 적극적으로 의병 활동에 나설 것을 독려했다. 더 이상 국내에서 의병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자 시아버지와 함께 세 아들을 데리고 중국으로 건너가 항일운동을 이어갔으며, 조선인 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는 데도 힘을 썼다. 이후 한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중국에서 숨을 거두었는데, 1994년 고국으로 봉환되어 가족 묘역에 안장됐다.
그녀가 시집와서 살았던 곳에는 생전의 활동을 기록한 의적비와 그녀가 지은 최초의 한글 의병가인 ‘안사람 의병가’ 노래비가 들어서 있다. 나라가 위험에 처했는데, 여자라는 이유로 물러서 있기만 해서는 안 된다며 꾸짖는 그녀의 기개가 지금까지 전해지는 듯하다.
척박하지만 깊은 기상이 서려 있는 강원도의 기운이 여인들에게도 전해져 깊은 학식과 굳은 성품을 갖게 한 것일까. 네 여인을 차례로 만나며 강원도의 어떤 힘이 이런 여인들을 키워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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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