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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

[문화유산 답사기]10번이나 주인이 바뀐 국보 제180호 '세한도[歲寒圖]', 드디어 대한민국 국민의 품으로 돌아 오다.

문화재방송 2020. 9. 10. 07:06

보물 제547-5호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1786~1856)영정(影幀)
조선 후기의 서화가로 유명한 추사 김정희(1786∼1856)선생 종가에서 보관해 오고 있는 선생의 초상화이다. 김정희 선생은 순조19년(1819)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냈고 고증학과 금석학을 발전시켰으며, 특히 서화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말년에독창적인 서체인 추사체를 완성하였다. 이 초상화는 머리에 사모를 쓰고 관복을 입고 있으며, 호랑이 가죽이 깔린 의자에 앉아 있는전신상이다. 두 손은 소매 속에서 마주잡고 있어 보이지 않으며 두 발은 여덟 팔(八)자로 벌리고 발받침 위에 가지런히올려놓았다. 그림의 위쪽에는 “추사 김공상(秋史 金公像)”이란 그림의 주인공 이름과 영의정을 지낸 권곽인이 쓴 글이 있고,아래쪽에는 이한철이 철종 8년(1857) 베껴그린 그림임을 알려주는 문장이 남아있다.

[카페 2040] '세한도' 소장史에 담긴 한일 父子

조선일보

입력 2020.08.28 03:14

우리나라 문화재 컬렉션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작품을 꼽자면, 단연 '세한도(歲寒圖)' 아닐까. 1844년 추사 김정희가 유배 시절 도움을 줬던 제자 이상적에게 그려 보낸 이 그림은 180년 동안 10명의 주인을 거쳤다. 이상적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제자였던 김병선과 아들 김준학을 거쳐 한말 권세가인 민영휘 집안으로 넘어간다. 민영휘 아들 민규식을 거쳐 경성제대 교수 후지쓰카 지카시(藤塚隣)가 수집해 주인 따라 바다를 건너가기도 했다. 1944년 컬렉터 손재형의 노력 끝에 극적으로 고향에 돌아왔으나 주인은 계속 바뀐다. 손재형이 정치에 참여하면서 이근태에게 그림을 저당잡혔고, 이후 개성 갑부 손세기 소유가 됐으며 아들 손창근씨가 물려받아 소중히 간직해왔다.

이미지 크게보기추사 김정희 '세한도'(1844년). 국보 제180호. /국립중앙박물관

이 굴곡진 소장사(史)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름이 있다. 일본인 후지쓰카 지카시. 누구보다 추사를 흠모하고 열정적으로 연구한 학자였다. 1926년 경성제대 교수로 부임해 서울에 온 그는 추사의 학문과 예술에 매료됐다. 서울과 베이징의 고서점을 훑으며 부지런히 추사 유품과 자료를 사 모았다. '세한도' 역시 그런 노력의 산물이었다. 1943년 그가 '세한도'를 들고 일본으로 돌아가자, 얼마 뒤 손재형이라는 젊은이가 찾아왔다. 그러고는 100일간 문안하며 '세한도'를 내달라고 간곡히 청했다. 후지쓰카는 그 귀한 작품을 생면부지의 한국인 젊은이에게 아무 조건 없이 내주었다. "그대 나라의 물건이고, 그대가 나보다 이 작품을 더 사랑하니 가져가라"며 돈 한 푼 받지 않았다. 일본인 후지쓰카가 국보 '세한도'를 한국에 기증한 것이다.
그리고 62년이 흐른 2006년 2월, 이번에는 아들이 기증에 나섰다. 아들인 후지쓰카 아키나오(藤塚明直)는 아버지가 수집했던 추사 친필과 관련 자료 등 2700여 점을 경기도 과천시에 기증했다. 당시 그는 본지 인터뷰에서 "사람이 공수래(空手來)는 못해도 공수거(空手去)는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받아서 고마워하고 기뻐할 사람에게 줘야 유물의 생명이 살아있는 것 아닌가." 그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문화재들이 있어야 할 자리가 한국이라고 믿었다.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아버지의 수집품을 돈으로 바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추사 자료실에 써 달라며 과천시에 200만엔까지 기부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허윤희 문화부 차장

지난주 '세한도'가 드디어 국민 품에 안겼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이 일본인 부자(父子)를 떠올렸다. 대(代)를 이어 선행을 실천한 후지쓰카 부자처럼, 이번엔 개성 출신 한국인 가문의 나눔이 퍽퍽한 우리 마음을 적셔 주었다. 개성 갑부였던 손세기는 일찍이 인삼 무역과 재배로 부(富)를 일궜다. 평생 신용(信用)과 근검절약을 철칙으로 삼았으나 고서화 수집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고, 그렇게 모은 서예·회화 200점을 생전 서강대에 기증했다. 다른 대학도 접촉했으나 서강대 외국인 총장이 가치를 알아보고 반색해 기증을 결심했다고 한다. 선친의 정신을 계승한 손창근씨는 시가 1000억원에 달하는 경기도 용인 땅을 국가에 선뜻 내놓았고, 대를 이어 수집한 컬렉션 304점을 아무 조건 없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죽을 때 가져갈 수도 없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박물관에 맡기기로 했다." 2018년 기증식에서 손씨가 한 말은 후지쓰카 아키나오의 말과 묘하게 닮았다. 어떻게 삶을 품위 있게 마무리할 수 있는가에 대한 깊은 울림을 준다. 손씨가 구순을 맞아 컬렉션을 몽땅 기증하면서도 '이것 하나만은 섭섭해 안 되겠다'던 작품이 '세한도'였다. 그 마지막 한 점까지 아낌없이 내놓으면서, 굴곡 많은 작품의 여정도 대미를 장식하게 됐다. 한일 부자(父子)의 대 이은 나눔이 인간에 대한 믿음과 선의를 새삼 일깨워줬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8/27/2020082704811.html

                                     지난 2018년 기증식에 참석한 손창근씨 부부. /국립중앙박물관

 

세한도[歲寒圖]국보 제180호 탄생 비화 

이 그림은 제주도(濟州道)에 유배(流配)온 지 5년이 지난 추사(秋史) 나이 59세(1844년) 때 그린 최고(最高)의 명작(名作)이자 우리나라 문인화(文人畵)의 최고봉(最高峰)으로 손꼽히는 그림으로, 당시 집권 세력(執權 勢力)이던 안동 김씨(安東 金氏) 일파(一派)의 미움 때문에 이미 10년 전에 종결(終結)된 사건(事件)인 ‘윤상도(尹尙度)의 옥(獄)’에 관련되어 헌종(憲宗) 6년(1840)부터 9년동안 제주도(濟州道)에서의 귀양살이를 하는 동안 처음엔 자주 찾아주던 제자(弟子)들의 방문(訪問)도 점차 뜸해졌지만, 그래도 역관(譯官)이었던 우선 이상적(藕船 李尙迪: 1804~1865)만큼은 귀양살이 4년째인 1843년에 계복(桂馥)의『만학집(晩學集)』과 운경(惲敬)의『대운산방문고(大雲房文槀)』를 북경(北京)에서 구해 보내주었고, 이듬해에는 또다시 하우경[하장령(賀長齡)]이 편찬한 총 120권, 79책의 방대한『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을 보내주자제자(弟子)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感動)하여 그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그려준 작품(作品)이다.

 

이 그림의 가치(價値)는 실경(實景)에 있는 것이 아니라 추사(秋史)의 마음 속 이미지를그린 것이기 때문에 그림에 서려 있는 격조(格調)와 문기(文氣)가 생명(生命)으로, 추사(秋史)는 갈필(渴筆)과 건묵(乾墨)의 능숙한 구사로 문인화(文人畵)의 최고봉(最高峰)을보여주었던 원(元)나라 황공망(黃公望)이나 예찬(倪璨) 류(類)의 문인화(文人畵)를 따르고 있는데, 구도만을 본다면 집과 나무를 소략히 배치한 것은 전형적(典型的)인 예찬(倪璨)의 필법(筆法)이지만, 필치(筆致)는 추사(秋史) 특유(特有)의 예서(隸書) 쓰는 법(法)으로 고졸미(古拙美)를 한껏 풍기고 있어 매력이 있다.

 

이 그림이 사람을 감격(感激)시키는 것은 그림 그 자체보다는 아름답고 강인한 추사체(秋史體)의 발문(跋文)과 소산한 그림의 어울림에 있는데, 추사(秋史) 해서체(楷書體)의 대표작(代表作)으로 예서(隸書)의 기미(氣味)가 남아 있는 반듯한 이 해서체(楷書體)는 글씨의 울림이 강하면서도 엄정(嚴正)한 질서(秩序)를 유지하고 있어 심금(心琴)을 리는 강도(强度)가 아주 진하다.

 

그리고 이 그림에 더욱 감동(感動)케 되는 것은 그러서화(書畵) 자체의 순수(純粹)한 조형미(造形美)보다도 그 제작 과정(製作 過程)에 서처연(悽然)한 심정(心情)이 생생히 살아 있기 때문인데, 그림과 글씨 모두에서 문자향(文字)과 서권기(書卷氣)를 강조한 추사(秋史)의 예술 세계(藝術 世界)가 이 소략한 그림과 정제된 글씨 속에 흥건히 배어 있는 것이 이 그림의 본질(本質)이라 할 수 있다.

[출처]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의 작품세계|작성자 ohyh45

세한도 처럼 파란만장의 삶을 산 추사 김정희

55세(1840년) 되던 해, 추사는 안동 김씨의 역모탄핵으로 생부 노경이 윤상도(尹商度)의 옥사에 배후조종혐의로 연루되어 죽음의 문턱에서, 오랜 친구 조인영의 상소로 죽음만은 면해 제주도로 9년 동안의 긴 유배길 을 떠난다. 유배지에서의 삶은 절대고독과 정치가로서 품었던 높은 이상을 달성하기 위한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했다.

 

추사는 15세 때 동갑내기인 한산 이씨와 결혼했지만 안타깝게도 5년 후 상처한다. 그리고 23세 때 예안 이씨와 재혼한다. 하지만 슬하에 자녀가 없었던 추사는 양자를 들여 ‘육십이 돼서야 부모 소리를 들었다’고 기뻐했다. 두 번에 걸친 10년의 귀양생활과 아내의 죽음으로 말년을 쓸쓸하게 보낸 추사에게 단란한 가족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추사고택 안채 기둥에 ‘가장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 나물이고(大烹豆腐瓜薑菜)/ 가장 훌륭한 모임은 부부, 아들딸, 손자의 모임이다(高會夫妻兒女孫)’라는 주련이 걸려있는 것도 추사의 가정이 쓸쓸했기 때문이다.


죽은 아내를 생각하여 슬퍼하다 -도망시(悼亡詩)- 김정희(金正喜)
배소만처상(配所輓妻喪)귀양 중에 아내의 상을 당하여

那呼月姥訴冥司
나호월모소명사

來世夫妻易地爲
내세부처역지위

我死君生千里外
아사군생천리외

敎君知我此心悲
교군지아차심비

어떡하면 월하노인을 데려다가 저승에서 소송하여
내세(來世)에는 우리부부의 처지를 바꿔서 태어나서
천리 밖에 나는 죽고 그대는 살아남아
나의 이 슬픈 마음을 그대에게 알게 할까

추사 김정희 선생은 1837년 72세의 나이로 임종(臨終)한 친부(親父)의 묘소(墓所)가 있는 과천(果川) 주암  과지초당(瓜芝草堂)에 묻혀 살다가 71세인 1856년 10월 10일 임종(臨終)하였다.

조선후기의 실학자이며 대표적인 서예가였던 추사 김정희 선생의 생가인 추사고택은 추사의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이 건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추사고택은 80.5평으로 솟을 대문의 문간채, ㄱ자형의 사랑채, ㅁ자형의 안채와 추사 선생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는 가옥이다.

ㄱ자형의 사랑채는 남쪽엔 한칸, 동쪽에 두칸의 온돌방과 나머지는 대청과 마루로 되어 있다. 안채에는 6칸 대청과 2간통의 안방, 건넌방이 있다. 이밖에도 추사 선생의 묘소와 증조부이신 김한신과 부인인 화순옹주의 합장묘 그리고 화순옹주 열녀문 즉, 홍문이 있다. 또한 추사고택에서 북쪽으로 600미터쯤 올라가면 천연기념물 제 106호인 백송을 볼 수 있는데 백송은 중국북부 지방이 원산지로 우리 나라에 몇 그루없는 희귀한 수종이다.

 

예산의 백송은 추사선생이 25세 때 청나라 연경에서 돌아올 때 백송의 종자를 붓대 속에 넣어가지고 와서 고조부 김흥경의 묘 입구에 심었던 것으로, 원래는 밑에서 50cm부터 세줄기로 자라다가 서쪽과 중앙의 두 줄기는 부러져 없어지고 동쪽의 줄기만이 남아서 자라고 있다.1980년도에 줄기의 피해 부분을 외과 수술하여 치유하였고, 그 후부터는 철저하게 보호, 관리하고 있다.


故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한 배려로 유적정화사업을 1976년 9월 4일 착공하여 1977년 6월 27일 준공을 보았으며 1977년 9월 22일부터 충청남도 추사고택관리사무소를 설치하여 관리하여 오다가 1980년 1월 1일부터 예산군 추사고택관리사무소로 설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고택옆에 마련된 추사 기념관.

그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 전시관도 훌륭하게 만들어져 있다.

백송 천년기념물 106호

백송...

천연 기년물 106호인 백송은 1809년

동지 부사로 청나라에 가던 아버지를 수행했던 추사가

연경에서 돌아올때 가지고와

증조부 묘 입구에심어 놓은것 수령은 약 200년이 되었다...

우리 나라에 5그루뿐인 귀한 백소나무다....

 

관람순서 : 추사묘 -> 추사고택 -> 잔디관장 -> 화순옹주 홍문 -> 백송

입장료 : 어른 (개인 500, 단체 300) 어린이 (개인 200, 단체 100)

유의사항 : 근처에 숙박시설 없음 (숙박시설 5km)

주차료 : 무료

 

위 치 :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799-2

홈페이지 : 예산군청 www.yesan.go.kr
예산문화원
http://yesan.cult21.or.kr

관 리 청 : 예산군 공공시설관리사업소 추사고택 관리사무실 (041-330-2553)

◀선조들의 숨결어린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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