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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

[문화유산 답사기] 의로움을 실천한 옛사람의 얼을 따라

문화재방송 2021. 4. 10. 16:32

 

- 합천 영암사지
쌍사자석등이 뿜어내는 씩씩한 기운

 

 

합천 영암사지(靈岩寺址, 사적 제131호)는 황매산 남쪽 기슭에 있는 절터다. 절터 앞에 서면 우선 모산재가 뿜어내는 기상에 압도당한다. 폐사지의 스산한 기운 따위는 없다. 대신에 씩씩함이 느껴진다. 쌍사자석등(보물 제353호)과 삼층석탑(보물 제480호), 그리고 귀부(보물 제489호)는 절터에서 나온 건물 받침돌, 각종 기와조각들과 어우러져 있다.

쌍사자석등에 얽힌 마을 사람들의 충정은 유명하다. 1933년께 일본인이 반출하려던 것을 마을사람들이 막아 면사무소에 보관해 놓았다가 1959년 절터에 암자를 세우고 원래 자리로 옮겨왔다. 석등 화사석 네 면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새겨져 있다. 사천왕은 불법을 지키는 신이다.
그러니 이 석등을 지키려는 마을 사람들의 의로움이 예사로 여겨지지 않는다. 9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지는데, 쌍사자 엉덩이의 토실토실하고 부드러운 실감은 만져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영암사가 언제 지어졌는지 일러주는 기록은 없다. 다만 서울대학교도서관의 적연국사자광탑비(寂然國師慈光塔碑) 탁본에 고려 현종 5년(1014년)에 적연(932~1014)이 여기서 83세에 입적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세워졌으리라 짐작이 된다. 건물터는 여느 절간과 다른 특징이 많다. 금당이 있는 축대의 가운데가 튀어나와 있고 그 좌우에 가파른 돌계단이 있는 점, 금당터 면석에 얼굴이 새겨져 있고 앞면과 좌우 세 면에 사자상 등의 동물상이 돋을새김돼 있는 점 등이 그렇다. 또 최근 이어진 발굴에서는 회랑까지 확인돼 이 절의 사세가 예전에는 아주 대단했음을 알 수 있게 했다.
영암사지 삼층석탑은 쌍사자석등의 남다름에 밀려 조금은 소박해 보인다. 통일신라의 석탑 양식을 잘 이어받았으나, 기둥 표현이 약하고 지붕돌 받침수가 줄어들어 있다. 위쪽 금당터를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자리잡은 영암사지 귀부들은 아주 잘 생겼다. 전체 모습은 거북이지만 머리는 용이다. 새겨진 것들이 정교하면서도 강한 생동감이 느껴지는데 두 거북을 비교하면서 보는 재미도 있다. 하나는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있어 씩씩해 보이고 다른 하나는 고개를 숙이고 있어 다소곳하다.


- 삼가장터
1919년 3월1일 그날의 의로운 만세

 

삼가장터는 여느 오일장터와 마찬가지로 규모가 예전만 못하다. 삼가는 한우가 유명한데 장날이 아니어도 한우 요리를 맛볼 수 있는 식당들이 들어서 있다. 삼가장터 한 모퉁이에는 삼가 3·1만세운동기념탑이 있다. 꼭대기에는 선열을 형상화한 모습이 양쪽으로 새겨져 있는데, 하늘을 나는 모습에서 힘찬 기상이 우러난다. 앞면에 새긴 그림은 아름답고 뒷면에 쓰인 글씨는 씩씩하다. 한쪽에는 100년 전 의병활동을 벌인 이들을 기리는 빗돌도 놓여 있다.
1919년 삼가 장날인 3월22일 두 차례 일어난 이 거사에는 삼가·쌍백·가회면 주민 등 참가자가 무려 3만여 명에 이르렀다. 삼가처럼 작은 지역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만세를 불렀음은 쉽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일이다. 일제의 진압은 무자비해서 40명 남짓이 목숨을 잃었고 150명 정도가 크고작게 다쳤으며 50명 가량이 감옥으로 끌려갔다. 게다가 그에 앞서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의병전쟁이 벌어졌을 때도 이곳 지역민들은 떨쳐 일어났다. 이런 기개의 배경에는 같은 삼가 출신인 남명(南冥) 조식(1501~1572)의 영향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라고 지역 사람들은 보고 있다.

삼가장터 둘레에는 삼가장터 3·1만세운동기념탑 외에 삼가 기양루(岐陽樓,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93호)와 삼가향교(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29호)가 있다. 기양루는 옛날 고을 수령들의 연회장으로 쓰였던 건물이라 한다. 동쪽에 남아 있는 동헌터와 관련지어 볼 때는 삼가현 관아의 문루로도 짐작되는데 합천에서 가장 오래된 누각이다. 삼가를 휘감으며 흐르는 양천 건너 교동마을에는 우람한 삼가향교가 언덕배기 높은 데 자리해 있다. 풍토를 교화한다는 유교 특유의 계몽주의가 담긴 현판 풍화루(風化樓)가 걸린 대문은 올려다보면 주눅이 들 정도로 기세가 대단하다. 안에 있는 명륜당 건물 축대는 보통과 달리 화강암이 아니고 지역에서 많이 나는 검고 푸른 퇴적암을 얇게 겹쳐 쌓아 눈길을 끈다.

 

- 남명 조식 선비길과 생가터
경(敬)과 의(義)로 집약된 선비정신

 

 

남명 조식 생가로 이어지는 '선비길'과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로'가 겹쳐 있는 두모마을에는 커다란 정자나무가 있고 그 아래 정자가 하나 놓여 있다. 여기를 일러 괴정(槐亭) 쉼터라 하는데 백의를 입은 이순신이 권율이 있는 합천 초계 율곡 도원수부로 가던 길에 들러 하룻밤을 묵으면서 다리쉼을 한 자리이다.

이순신이 종들에게 마을 사람들 쌀로 밥을 짓지 말라고 일렀는데도 종들이 이를 지키지 않자 엄히 다스리고 쌀을 갚아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지는 곳이다.
남명 조식 선생 생가지(경상남도기념물 제148호)는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에 있다. 남명은 30대 후반에 이미 '(경상)좌도에 퇴계 이황이 있다면 우도에는 남명이 있다'는 찬탄을 받았다고 한다.
남명의 사상은 경(敬)과 의(義)로 집약된다. 모든 사람과 세상 만물을 공손하게 대하고 세상살이에서 의로움을 실천하라는 선비정신이었다.
퇴계와 남명은 둘 다 벼슬살이를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퇴계는 임금의 부름을 뿌리치지 못하고 벼슬을 했고 남명은 한번도 그 부름을 받아들이지 않아 처사(處士)로 남았다. 대신 그는 한편으로는 학문을 닦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자를 길렀다. 그가 길러낸 제자들이 없었다면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는 더욱 큰 위기에 직면했을 터이다. 임진왜란 육전과 해전을 통틀어 첫 번째 승리를 기록한 의병장 곽재우도 남명의 문인이었고 합천을 지켰던 의병장 정인홍(1535~1623)도 남명의 제자였다. 곧게 살다 간 남명의 이런 영향은 시대를 뛰어넘어 근대로까지 이어졌다. 그가 태어난 고장 삼가에서 을미의병이 많이 나왔고 일제강점기 3·1만세운동에서도 삼가는 다른 데와는 크게 달랐다.

이어지는 뇌룡정(雷龍亭,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129호)은 1549년 남명이 지은 정자다. <장자>에 나오는 '연묵이뢰성 시거이용현(淵默而雷聲 尸居而龍見), 깊은 연못과 같이 묵묵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우레처럼 소리치고, 시동처럼 가만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용처럼 나타난다'에서 따왔다. 과연 제대로 된 선비라면 그래야 마땅하겠다. 정자 안으로 들어가면 같은 글귀가 양쪽에 나란히 붙어 있다.
뇌룡정 바로 옆 용암서원은 남명의 학문과 사상을 따르고 기리기 위해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용암서원 앞에는 남명 흉상과 을묘사직소를 새긴 커다란 돌덩이가 나란히 놓여 있다. 단성소라고도 하는 이 상소문은 명종 임금이 1555년 내린 단성현감 자리를 받지 않고 오히려 임금을 호되게 나무란, 경(敬)과 의(義)에 입각한 꼿꼿함이 그대로 표현된 명문으로 이름높다. 생가는 1970년대 새마을사업으로 사라졌다는데 한동안 방치되다 발굴을 거쳐 복원공사가 진행됐다.

 

- 의병장 곽재우 생가터와 충익사
임진왜란 당시 처음 의병 일으킨 홍의장군

 

의령 충익사(忠翼祠)는 임진왜란 당시 처음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킨 망우당(忘憂堂) 곽재우(1552~1617) 홍의장군과 17장령을 비롯해 무명 의병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남겨진 곽재우 유물(보물 제671호)은 잘 보존된 장검을 비롯해 말갖춤(마구), 포도 문양 벼루, 사자철인, 화초문백자팔각대접 등이다. 앞에 있는 의령 중동리 충의각(忠義閣,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522호)은 어느 한 곳도 쇠못을 치지 않은 우리나라 전통 목조건물이다. 옆에는 곽재우장군유적 정화기념비도 우뚝 솟아 있다.

 

 

충익사의 정원은 아주 아름답게 잘 가꿔져 있다. 키가 8.5m에 가슴높이둘레가 3m에 이르는 모과나무(경상남도기념물 제83호)도 있다. 지금은 여기 서 있지만 원래는 수성마을을 지키던 당산나무였다. 줄기가 근육처럼 울퉁불퉁하게 골이 패여 있는데, 오래된 모과나무에서 볼 수 있는 긴 세월을 견디어낸 연륜이겠다.

의령 유곡면 세간리 곽재우 생가터 앞은 늦은 가을이면 온통 노란 물감을 풀어놓은 듯하다. 어린 시절 장군이 놀면서 호연지기를 기르고 학문을 연마했다는 600년 된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302호)가 두눈 가득 들어온다. 마을을 지켜주는 당산나무로, 해마다 음력 정월 초열흘에 은행나무에 금줄을 치고 '목신제(木神祭)'를 지내면서 풍년과 안녕을 빌었는데 제사 비용은 이 나무에서 나오는 은행을 팔아 마련했다니 나무의 크기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은행나무 바로 옆에 곽재우 장군 생가가 있다. 여기서 곽재우는 임진왜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재산을 털어 의병을 일으켰다. 마을 입구에 있는 현고수(懸鼓樹,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97호)는 북을 매단 나무라는 뜻으로 곽재우 장군이 의병을 모으고 훈련을 할 때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니 현고수 앞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이 처음 일어난 역사적인 장소다. 의령군이 해마다 열고 있는 의병제전 행사를 위한 성화는 여기에서 불씨를 받아 출발한다.

1592년 4월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곽재우는 9일 뒤인 4월22일 의병을 일으켰다. 불패신화를 이룩한 바다의 이순신에 버금가는 승리를 그 해 5월과 6월 의령에 있는 강줄기에서 유격전과 심리전으로 일궈냈다. 관군이 아닌 의병이라 활과 창, 농기구가 무기의 전부였을 텐데도 왜군에 맞서 승전함으로써 조선 민관군의 사기를 크게 높였다.
한편 의령 부림면 입산마을에는 백산 안희제(1885∼1943) 선생의 생가(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193호)가 있다. 안채와 사랑채 두 채로 돼 있는데 사랑채는 초가지붕을 이었다. 권위와 꾸밈이 없어 소박한 모습이다.
백산 안희제 선생은 국권회복을 위해 정신적·경제적자강(自强)과 교육과 민족기업 발전에 힘쓴 독립운동가다. 일제 자본에 맞서고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운영했다. 만주
에 건너가 '발해 농장'을 경영하고 학교를 운영하는 등 독립운동에 힘쓰다가 몸을 다쳐 귀국한 1942년 일제에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받은 끝에 보석으로 풀려나왔지만 이듬해 숨지고 말았다.

 

 

- 보덕각·망우정
의롭고도 외로운 길을 걸었던 뜻

 

 

쌍절각(雙節閣)은 임진왜란 때 경남 합천 초계 마진전투에서 왜군과 싸우다 숨진 손인갑(1544~1592) 장군과 아들 손약해의 넋을 기리기 위해 1609년 의령군 봉수면 신현리에 세운 것인데 1943년 지정면 성산리로 옮겼다. 보덕각(報德閣, 문화재자료 제66호) 역시 곽재우 장군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1739년 임진왜란 의병의 첫 전투지이자 승전지인 이곳에 세웠다.

당시 영의정 번암(樊巖) 채제공(1720∼1799)이 비문을 썼다. 합천에서 의령으로 이어지는 여정에서는 '앎에서 끝내지 말고 몸소 실천하라'고 강조했던 남명의 정신이 그의 제자 곽재우로 실현된 자취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보덕각이 있는 기강(岐江, 거름강) 나루는 낙동강과 남강이 만나는 자리다. 곽재우는 1592년 5월4일과 6일 갈대밭에 군사를 숨겨두고 강물 아래에는 나무 말뚝을 박아둔 채로 왜군들이 배를타고 오기를 기다려 꼼짝 못하게 한 다음 화살을 쏘아 무찔렀다. 6월 정암진에서 이뤄진 두 번째 승전은 강을 잘 건널 수 있도록 왜군이 꽂아놓았던 표지를 뻘밭 쪽으로 옮겨놓음으로써 승전의 기초를 닦았다.
마지막 걸음은 창녕군 도천면 우강리 망우정이다. 망우정은 곽재우가 말년을 보낸 곳이다. 그이는 전라도 영암으로 귀양 갔다가 돌아온 다음 1602년부터 망우정에 머물렀다. 선조와 광해군의 요구로 잠깐잠깐 벼슬살이를 한 때는 빼고 한결같이 여기 머물렀다. 왜 그랬을까? 아마 제대로 죽기 위해서라고 짐작하는 이들이 많다. 전공이 높은 사람인데도 모함을 받아 죽임을 당하는 등 세상이 어지러우니 벼슬을 하면 오히려 명줄만 줄인다고 봤을 것이다.

곽재우는 또 의병을 일으키느라 재산을 써버리고 패랭이를 만들어 팔았다고도 한다. 말년에는 곡기를 끊고 신선처럼 살았다는데 그로서는 최선을 선택했는지도 모르겠다.
남명 문하에서 동문수학하고 마찬가지로 의병도 일으켰던 합천의 정인홍은 광해군 조정에도 남아 영의정까지 지냈으나 결국 제 명에 죽지 못했다. 망우정은 강가 언덕배기에 숨은 듯 앉아 있다. 망우정에 서면 활처럼 휘어진 강폭을 따라 굽이치는 낙동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뒤에는 1789년 세운 충익공 망우 곽재우 유허비(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23호)와 1991년에 세운 또 다른 유허비가 나란히 서 있다.

 

 

여행쪽지 - 모산재 영암사지(경남 합천군 가회면 둔내리 1659) 영암사지를 더 특별하게 보이게 하는 건 뒤에서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황매산 모산재다. 황매산은 1108m 높이이며, 모산재는 767m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 남명 조식 선비길(경남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 - 외토리 어귀 500년 묵은 느티나무에서 시작된ㄴ 길이다. 생가터를 비롯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뇌룡정, 선생의 덕을 기리고 위패를 모신 용암서원 등을 만날 수 있다. / 충익사(경남 의령군 의령읍 중동리 467-2) 문의 055-573-2629 / 보덕각·쌍절각(경남 의령군 지정면 성산리) / 망우정(경남 창녕군 도천면 우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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