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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

[4월28일 충무공 이순신 장군 탄신일]임진왜란 격전지, 이순신 장군의 자취를 따라

문화재방송 2021. 4. 26. 00:07

 

- 견내량
옥포해전과 한산대첩 현장

 

 

23전 23승, 그는 싸움에서 단 한번도 패한 적이 없었고 이런 그를 두고 우리는 '불멸의 이순신'이라 한다. 우리 역사인물 가운데 세종대왕과 더불어 이순신에 대한 관심이 유독 큰 까닭이다. 업적 못지않게 인간적인 면모도 한몫을 한다. 사령관으로서 카리스마와 백성과 부하에 대한 애정, 부모에 대한 효성에 이르기까지. 여기에 더해 1960~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이순신 유적지 성역화는 그를 국민적 영웅으로 만들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자취를 따라 떠나는 여행길은 통영 견내량(見乃梁)에서 시작된다. 통영에서 거제로 가는 길 끝에 두 다리가 있다. 하나는 옛 거제대교이고 또 하나는 거제대교다. 거제대교 입구에 그럴듯한 건물이 서 있는데 통영타워 전망대이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면 견내량이 한눈에 들어온다. 견내량은 경남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와 통영시 용남면 장평리를 잇는 좁은 해협으로 옥포해전(玉浦海戰)과 한산대첩(閑山大捷)의 현장이다.
한산대첩은 조선 수군의 제해권을 확립하고 전라도 곡창을 지킨 전투였다. 이로써 조선은 왜군에 맞설 수 있는 뒷심을 갖추게 됐다. 1592년 음력 7월8일 학익진(鶴翼陣)으로 전투에 나선 왜군을 전멸하다시피 만들었다. 작전은 여기 견내량에 있던 적선을 한산도 앞바다로 끌어내는 데서 시작했다. 견내량의 왜선 76척 앞으로 이순신은 13척의 배만 보냈고 그것을 전체 병력으로 착각한 왜군은 곧바로 추격해 너른 바다로 나오고 말았다. 미리 준비하고 있던 조선 수군은 왜선을 포위하듯이 접전을 벌여 적선 47척을 깨뜨리고 12척을 나포했다. 왜적은 9000명 가까이 죽은 반면 조선 수군은 3명이 전사했을 따름이다.

- 칠천도
원균의 칠천량해전 패전을 계기로 이순신은 복권

 

 

그러나 이어지는 칠천도(七川島)는 엄청난 패배의 현장이다. 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 7월16일(음력) 조선 수군은 여기서 전멸하다시피 했다. 삼도수군통제사 원균(1540~1597)은 전사했다. 김완(1577~1635)은 <해소실기>에서 처음에 조선 수군을 공격한 왜군 병력이 단 두 척이라고 기록했다. 김완은 칠천량해전에서 조방장으로 나섰으나 왜군에게 사로잡혀 일본으로 끌려갔다 탈출해 돌아온 인물이다. 칠천도는 2000년 1월 거제도와 연륙교로 연결되었다.
제대로 전투도 못해 보고 무너졌음은 <선조실록>에서도 확인된다. 1597년 7월22일치 세 번째 기사에서 유성룡이 임금에게 아뢴 내용이다. <칠천도에 도달했을 때가 밤 2경이었는데 왜적은 어둠을 틈타 잠입해 있다가 불의에 방포하여 우리 전선 4척을 불태우니 너무도 창졸간이라 추격해 포획하지도 못했고, 다음날 날이 밝았을 때에는 이미 적선이 사면으로 포위하여 아군은 부득이 고성으로 향했습니다. 육지에 내려보니 왜적이 먼저 진을 치고 있었으므로 우리 군사는 미처 손쓸 사이도 없이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조선 수군이 입은 손해는 엄청났다. 거북선을 비롯해 판옥선 100척 남짓이 침몰됐으며 군사 2만명 정도가 목숨을 잃거나 포로로 잡혔다. 경상우수사 배설(1551~1599)이 갖고 달아난 전선 12척이 남아 있는 전부였다. 반면 왜군은 100명 안팎만 죽거나 다쳤고 전선 피해는 한 척도 없었다.
이로써 제해권은 왜군에게 넘어갔다.
이순신과 원균, 그 차이는 무엇일까. 칠천량해전 당시 이순신은 군중에 있지 않았다. 앞서 선조임금은 1597년 2월6일 이순신을 잡아오고 원균과 교대시키라고 명령했다. 3월13일 선조는 이순신을 죽여야 한다면서 신하들에게 처리 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으며 4월1일 이순신에게 백의종군 명령이 떨어졌다.

이순신은 4월27일 도원수 권율이 머물던 순천에 도착했고 이어 도원수부가 있던 합천 초계로갔다. 칠천량해전 소식이 전해진 7월18일 해안을 둘러보고 대책을 세우겠노라고 길을 나서 7월21일 남해와 하동 사이 노량에 도착한다. 임금이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삼으라고 명령한 날은 하루 뒤인 7월22일이고 이때부터 이순신은 남은 전선을 수습하는 등 제해권 회복을 위한 활동에 나선다. 칠천량 패전을 계기로 이순신은 복권됐다.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은 지휘관으로서 제 몫을 다하지 못했다. 물론 원균을 두고는 이런저런 평가가 나오고 있다. 칠천량해전 당시 원균은 시기가 안 좋아 지금 싸우면 불리하다 했으나 권율이 곤장을 때리고 출병을 강요했다는 설이 그렇다. 일방적인 원균 매도는 이순신을 영웅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이 점은 분명히 짚을 수 있겠다. 원균은 칠천량해전에 앞서 7월4일 부산포로 나아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물을 얻으러 가덕도에 정박했는데, 이 때 왜군이 기습하자 군사가 400명 정도 남아있는데도 달아났다.
하지만 이순신은 1597년 2월13일 가덕도에서 왜군에게 병사도 아닌 초동(樵童) 1명이 맞아 죽고 5명이 끌려가자 바로 공격해 왜군 14명을 죽이고 17명을 다치게 함으로써 이튿날 곧장 돌려보내게 만들었다. 원균과 이순신의 다른 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옥포대첩기념공원
불패신화의 시작, 옥포해전

 

 

옥포해전은 이순신이 이룬 조선 수군의 첫 승전이다. 1592년 5월7일 경남 거제 옥포 앞바다에서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1556~1630)의 왜군 함대를 무찌른 해전으로 이순신 장군이 이룬 전승 신화의 시발점이다. 불패신화의 시작인 셈이다.

이런 옥포해전을 기념하는 옥포대첩기념공원이 거제시 옥포2동에 있다. 기념관은 거친 바닷바람에 떠있는 판옥선 모습을 하고 있다. 옥포루에 오르면 정면으로 옥포만의 푸른 바다를 볼 수 있다.
기념공원보다 앞서 1957년에는 옥포만이 내려다보이는 당등산에 옥포대승첩기념탑이 들어섰는데 여기 대우해양조선이 들어섬에 따라 1975년 옥포정(1963년 세움)과 함께 지금 위치(대우해양조선 동문 옆 아양공원)로 옮겼다.
이순신 장군의 자취를 찾아가는 길은 거제도를 둘러보고 다시 통영으로 나간다. 빠른 길을 두고 남부 해안도로로 잡은 까닭은 아름다운 해안 풍경을 배부르게 눈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꽃으로 유명한 공곶이, 와현·구조라 해수욕장을 지나 학동 몽돌해수욕장을 지나 해안을 따라가는 길은 일몰도 장관이다. 여차 몽돌해수욕장을 지나는 그 길에서 들르는 곳이 거제현 관아(사적 제484호)다.
거제 기성관(岐城館,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81호)은 조선시대 거제부의 행정·군사를 통괄하던 기관의 중심건물이다. 이 또한 임진왜란과 관련이 있는데 당시 고현성이 함락되자 조정에서는 그곳을 폐성하고 건물을 거제현으로 옮겨 거제현 객사로 썼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초등학교 교실로 쓰였다.
배흘림기둥에 단순소박하게 공포를 뒀고 전체 9칸에서 가운데 3칸은 지붕을 높인 반면 양쪽 3칸씩은 낮춤으로써 역동성을 살렸다.

 

 

 

거제 질청(아전들이 업무를 보거나 수령 자녀들이 공부하던 곳,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46호)은 우아하고 정중한 건축이다. 'ㄷ'자 형태로 가운데 5칸은 대청이고 양쪽 5칸씩은 방들도 두고있는 유별난 모습이어서 눈길이 절로 끌린다.

 

- 국립진주박물관
격전지 진주성 안에 있는 임진왜란 전문 박물관

통영 충렬사(忠烈祠, 사적 제236호)는 세병관 가까이에 있는데 충무공 이순신 위패를 안치하고 제사를 지낼 목적으로 세워진 사당이다.
선조 39년(1606년) 7대 통제사 이운룡이 왕명으로 세웠고 현종 4년(1663년) 남해 충렬사와 함께 충렬사 현판을 하사받았다. 해마다 역대 통제사들이 봄가을에 제사를 지냈다. 충무공의 주된 활동 무대가 한산도를 비롯한 통영 근처였기 때문에 이순신이 숨진 장소인 남해 관음포 이락파와 이곳에 사당을 세웠다.
통영에서 고성 당항포까지는 30분 정도 걸린다. 고성군 회화면과 동해면 사이 당항만은 이순신 장군이 선조 25년(1592년)과 27년(1594년) 두 차례에 걸쳐 왜선 57척을 수장한 전승지다. 당항포 해전과 관련해 재미있는 지명이남아 있다.
'속싯개'는 당항포 일대를 일컫는다. 기생 월이가 왜군 첩자의 지도에다 실제와는 다르게 그려넣어 당항만이 막힌 만이 아니라 트인 바다로 알도록 속였다 하여 생겨난 이름이다. 잡안개라는 지명은 왜군을 잡았다는 '잡은개'에서 바뀐 말이다. 당항리 동쪽 '핏골'은 당시 피로 물들었다 해서, '도망개'는 왜군이 도망간 길목이라 해서, 당항만에 들어오는 좁은 해협을 이르는 '당목'은 닭의 목처럼 길고 좁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당항포 해전이 있었던 옆에는 당항포관광단지가 들어서 있다. 당항포해전관·거북선체험관·충무공디
오라마관·승충사 등이 있다.
국립진주박물관은 임진왜란 최대 격전지인 진주성에 있는 임진왜란 전문 박물관이다. 특정 인물 중심 영웅사관이나 순국사관에 매몰되지 않고, 임진왜란이 일본이 일으킨 참혹한 침략전쟁인 한편 조·명·왜 삼국간의 국제전쟁임을 알리고 있다.

- 남해 이락사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숨을 거두고

 

 

 

이순신의 격전지를 찾아 떠나는 여행길의 마지막은 남해 이락사(李落祠) 일대다. 정식 이름은 남해 관음포 이충무공 유적으로 사적 제232호다.
관음포 앞바다는 이순신 장군이 숨을 거둔 바다라는 뜻으로 '이락파(李落波)'라 한다. 이락사는 순조 32년(1832년) 왕명에 따라 세운 제단과 유허비·비각이다.
이순신은 여기 앞바다에서 1598년 11월 벌어진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숨을 거뒀다. 200척밖에 없는 이순신은 곱절이 넘는 왜군 앞에서도 전투를 명령했다. 200척 넘는 왜군이 격파됐고 나머지 50척 남짓만이 관음포 쪽으로 겨우 달아났다.
이순신 장군은 달아나던 왜적을 뒤쫓다가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싸움이 지금 급하니 함부로 내가 죽었다고 말하지 말라."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선공후사(先公後私)를 했다.



관음포 앞바다는 저녁 해질 무렵이면 붉은 핏빛으로 물든다. 이락사에서 바다 쪽으로 500m 들어가 첨망대에 오르면 그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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