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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중계]권번(券番)의 예기(藝妓)를 통해 이어 온 치맛자락 풍류가 넘치는 '교방굿거리춤'

문화재방송 2021. 5. 21.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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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강령예술단(단장:백은실/단원;정미덕. 김해수. 정선모. 김도연. 변경분)

 

본래 교방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여기(女妓, 기녀)의 가무를 관장하던 국가 기관이다. 교방은 중앙뿐 아니라 전국 주요 도시의 지방 관아에 소속한 관청의 하나로, 여악(女樂)의 양성 및 관리 기관이다. 여악은 악가무(樂歌舞: 악기연주·노래·춤)를 공연하는 여자 악인을 뜻한다.

 

교방을 처음 설치한 국가는 중국 당나라이다. 당나라와 남북국시대의 발해 및 신라는 삼각외교 관계에 있었고, 『금사(金史)』에서 발해 교방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신라는 당나라의 도움을 얻어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켰던 만큼 신라와 당의 관계는 매우 밀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 교방 관련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당나라 초기에 처음 설치된 교방 제도는 우리 남북국과의 긴밀한 교류를 통해 동시대의 연향 문화에 일정부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사료된다. 고려를 개국한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훈요십조(訓要十條) 중 4조에서 이미 고려 이전부터 중국 ‘동방의 국가들은 당나라 풍속을 본받아 문물과 예악을 갖추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이로써 남북국시대에도 이미 당 풍속이 만연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교방에 관한 실제 기록은 현종(顯宗) 즉위 년(1009)에 궁중에 소속된 ‘교방의 궁녀 100여 명을 파면하여 내보낸 것’에서 시작된다. 이 말은 이미 고려에 교방이 설치되어 있었기에 파면할 대상도 있었음을 나타낸다. 『고려사·악지』에서 볼 수 있는 당악정재의 가사로 볼 때는 역시 송사(宋詞)가 유행했던 송나라 교방문화의 영향을 살필 수 있다. 고려조 가례(嘉禮)의 연향과 팔관회(八關會)·연등회(燃燈會) 등에서 교방 여제자(女弟子)의 춤과 노래가 연행되었다.

 

조선시대의 여기(女妓)·관기(官妓)·창기(娼妓, 倡妓)는 여악(女樂)의 구성원이 되었다. 전국의 교방에 여기-여악이 있었다. 서울의 음악기관에 소속되어 활동하는 여기 즉 경기(京妓)는 대개 외방여기(지방 소속 여기) 중 재예가 뛰어난 자를 뽑아 올렸다. 외방의 여기는 중국 사신과 일본 사신 등 외국 사신을 접대하기 위해 그들이 지나는 고을에 있었고, 여기는 주로 군사의 위로 및 지역 잔치를 위해서 존재했다. 조선조 말까지 여악은 궁중의 내연을 담당하며 존속했다. 국가에 소속된 이들을 관기(官妓)라고 했는데, 1908년 대한제국 장악과(掌樂課)에서 관할하던 기녀의 관리를 경시청(警視廳)이 맡으면서 교방문화에는 급속한 변화가 일어났다. 일본의 기생조직인 권번의 운영방식이 국내에 이식되어 기생조합이 조직되면서 궁중 여악이나 관기 제도는 실질적으로 해체되었다. 일제강점기 권번제도를 거친 기녀들의 춤 종목을 통칭하여 ‘기생춤’이라고 불렀다. 이상과 같이 교방과 권번의 역사를 일괄하고, 그에 소속된 기생 신분의 사람들이 추었던 전통춤에 대해 근자에는 ‘교방춤’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교방의 역사적 정통성을 우대한 용어이다.

 

아내 22명, 아들 45명…사우디 왕실 비극의 씨앗

 홍주희 기자

 

 
유럽 왕실의 이야기는 늘 흥미롭습니다. 사람들은 20년 전 세상을 떠난 다이애나비에 여전히 열광하고, 젊은 왕자·공주의 연애를 궁금해합니다. 동화 같은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일 겁니다.  

알고보면 쓸모있는 신기한 세계뉴스
⑩사우디 왕실의 권력다툼 <1>


그러나 세상의 모든 왕실이 이렇지는 않습니다. ‘잔혹 동화’를 쓰고 있는 왕실도 있는 거죠. 대표적인 사례가 사우디아라비아의 로열패밀리입니다.  
전 세계 유가(油價)를 좌지우지하는 중동의 패권국 사우디아라비아의 통치자는 21세기에 어울리지 않는 비민주적 절대 왕정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그 어느 왕실보다 호화롭지만,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아름답지도 않고요.
[알고보면 쓸모있는 신기한 세계뉴스] 이번엔 최근 또 한 번의 ‘왕실 쿠데타’로 왕세자를 갈아치운 사우디의 왕실 이야기입니다.  
 

조카 대신 아들 선택한 ‘왕실 쿠데타’

지난 6월 사우디 왕실은 왕세자 교체를 전격 발표했습니다. 살만 국왕의 조카인 무함마드 빈나예프(58)에서 국왕의 아들인 무함마드 빈살만(32)으로 왕위계승 1순위를 교체한 거죠.
조카 대신 아들을 선택한 국왕의 결정은 당연해 보입니다. 그럼에도 난데없는 권력 재편의 내막이 무엇인지 전 세계의 이목이 사우디 왕실에 집중됐습니다. 절대왕정 국가에서 왕은 곧 국가니까요.  

지난 6월 빈 살만 왕자를 새로운 왕세자로 책봉하는 자리에 모인 사우디 왕가의 왕자들. [EPA=연합뉴스]

자신에게 왕세자 자리를 넘긴 빈 나예프 왕자의 손에 입 맞추는 빈살만 왕세자.(왼쪽 사진) 아버지인 살만 국왕에게 예를 표하는 빈살만 왕세자. [AP·EPA=연합뉴스]

정통한 관계자들을 취재한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왕세자 교체는 이른바 ‘왕실 쿠데타’였습니다.  

권력에서 밀린 빈나예프 전 왕세자는 발표 하루 전날 ‘왕궁으로 오라’는 전갈을 받았고, 영문을 모른 채 소환됩니다. 감금된 상태에서 그는 ‘자리를 넘기라’는 압박을 받습니다. 밤새 버텼지만 백기를 들고 맙니다. 자신을 밀어낸 사촌 동생에게 축복을 비는 동영상도 찍어야 했죠. 잡음 없이 왕세자를 갈아치우기 위해 사우디 왕실이 치밀한 시나리오를 준비해 뒀던 셈입니다.  
이후 빈나예프는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으며, 수도에서 1000㎞ 떨어진 제다에서 가택연금 중입니다. 새 왕세자가 기반을 다질 때까지 숨 죽이고 있으라는 의미겠죠.
 
권력의 속성이라지만 참으로 비정합니다. 왕세자였던 자를 단칼에 쳐낸 것도 모자라 저 멀리 유배까지 시켰으니

말이죠. 하지만 사우디를 통치하는 알사우드 가문의 과거를 되돌아본다면, 이번 왕세자 교체는 평화롭습니다. 누구의 손에도 피가 묻지 않았으니까요.    
  
아내 22명, 아들 36명…피튀기는 형제간 다툼  
사우디는 왕위를 형제가 세습합니다. 1953년 사망한 초대 국왕 이븐 사우드가 아들에게 왕권을 물려준 뒤 지금까지 그 형제들이 사우디를 통치해 온 거죠.  
22명의 아내를 뒀던 이븐 사우드 국왕은 아들만 45명을 낳았습니다. 살아남은 아들이 36명. 이 중 지금까지 6명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2대 사우드(2남), 3대 파이살(4남), 4대 칼리드(7남), 5대 파드(11남), 6대 압둘라(13남), 7대 살만(32남) 현 국왕이 그들입니다. 
어머니가 제각각인 이복형제들 사이에 왕권을 둘러싼 치열한 다툼이 없었을 리가 만무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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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년 처음 왕권을 물려받은 사우드는 이븐 사우드의 두 번째 아내 소생입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왕관과 석유를 물려받으면서 막대한 빚도 받았습니다. 즉위한 뒤 빚은 곱절이 됐고요. 그런데도 호화로운 생활을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이것이 빌미가 되었죠.  

즉위 직후부터 권력 다툼을 벌였던 이복동생 파이살이 그를 몰아낸 겁니다. 파이살은 형이 치료를 위해 해외에 체류 중일 때 측근들을 처치하고 형을 퇴위시켰습니다. 사우드는 그리스로 망명했고 사망한 뒤에야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망명·복수·피살·참수…권력 앞에 가족 없다
형을 몰아내고 왕권을 쟁취한 3대 국왕 파이살은 석유 생산을 늘려 재정을 안정화하고, 사우디를 현대적으로 개혁했습니다. 국민들에게 인기도 높았습니다.
 
그러나 그 끝은 비극이었습니다. 즉위 10년만인 1975년 조카인 파이살 빈 무사이드 왕자에게 피살된 겁니다. 정확한 동기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가설로 거론되는 것은 ‘복수’입니다. 왕자가 파이살이 쫓아낸 사우드 전 국왕의 딸과 결혼할 예정이었다는 거죠. 어쨌든 왕자는 광장에서 공개 참수됐고 국왕 암살 사건은 막을 내립니다.  
 
뒤 이어 즉위한 칼리드 국왕은 6년만에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1982년 파드 국왕이 집권합니다. 그는 사우디 왕실의 핵심 ‘수다이리 세븐’ 중 맏아들입니다. ‘수다이리 세븐’은 초대 국왕의 열 번째 아내인 하산 알 수다이리가 낳은 아들 7형제를 말합니다. 


배다른 왕자가 너무 많은 왕실에서 ‘어느 왕비의 아들이냐’는 파벌을 나누는 핵심 요인이 됐습니다. 다른 아내들보다 많은 아들을 낳았으며, 왕의 총애를 받았던 수다이리 왕비의 핏줄이 강력한 파벌을 형성할 수 있었고요.  
 
파드 전 국왕은 물론 현 국왕인 살만도 수다이리의 아들입니다. 피 튀기는 권력 다툼 속에서 어머니가 같은 아들이 둘 씩이나 왕좌에 올랐다니. ‘수다이리 세븐’이 얼마나 특별한지 알 수 있습니다.  
‘수다이리 세븐’은 막강한 세력을 구축하게 됐고, 나머지 왕자들과 대결하게 됩니다.  
 
‘사우디 왕실 잔혹사’ 두 번째 이야기에선 수다이리 7형제와 이들을 견제하려는 세력의 권력 다툼에 대해 다뤄보겠습니다. 
 

오일머니 독식…사우디 왕가의 초호화 라이프

사우디아라비아를 통치하는 ‘사우드 가문’은 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집안으로 손꼽힙니다. 초대 국왕 재임 시절 발견된 석유 덕분이죠.  
국부(國富)가 곧 왕가의 재산인 까닭에 사우디 국왕은 ‘알 사우드 주식회사’의 최고경영자(CEO)로 불리기도 합니다.
 
살만 국왕의 재산은 약 170억 달러(약 19조 2500억원). 파리 에펠탑과 세느강변에 위치한 여러 채의 아파트, 프랑스 남동부 휴양지인 코트다쥐르의 고성, 스페인 휴양지 마벨라의 궁전 등이 포함됩니다.  
사우디 국왕은 재산에 걸맞는 호화 생활로도 유명한데요. 움직일 때마다 동원되는 수백 명의 수행원과 수백 대의 검은 리무진은 기본입니다. 여름에 머물곤 하는 홍해 휴양지의 궁궐엔 국왕만을 위한 의료진이 늘 대기 중이고, 프랑스에서 공수한 캐비어·트러플 등을 요리하는 최고의 셰프가 상주하고 있죠.

지난 3월 일본을 방문한 살만 사우디 국왕이 황금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전용기에서 내리고 있다. [AP=연합뉴스]

해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3월의 아시아 순방이 최근의 사례입니다. 당시 보도엔 거동이 불편한 고령의 국왕이 황금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전용기에서 내리는 모습이 포착됐습니다.  

인도네시아 방문 땐 459t 무게의 짐과 메르세데스 리무진 2개를 공수했습니다. 또 인도네시아 체류 중 방문한 모스크에 국왕만을 위한 화장실을 따로 마련됐고, 의회 건물에도 국왕을 위한 맞춤 왕좌가 특별 제작·설치됐습니다. 신선한 낙타젖을 마시기 위해 낙타를 데리고 다닌다는 보도도 있습니다.  
 
국왕이라고 사우드 가문에서 최고 부자인 건 아닙니다.



사우디 뿐 아니라 아랍 왕족 중에서도 가장 부자인 사람은 알 왈리드 빈 탈랄 왕자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초대 국왕의 열두 번째 아들인 탈랄 왕자.  
지난 5월 포브스 기준 그의 자산 평가액은 178억 달러(약 20조 1000억원)였습니다. 300억 달러(약 30조원)를 넘겼던 때도 있었고요.  
 
20년 전까지 그는 부동산으로 돈을 번 아랍 왕족 정도로 여겨졌습니다. 90년대 초 파산 위기에 몰렸던 미국 시티은행 투자로 글로벌 무대에 데뷔했고, 시티은행이 경기 호전에 따라 주가를 회복하면서 대박을 터뜨렸습니다. 투자 금액 5억 5000만 달러(약 6200억원)가 10억달러(약 1조 1000억원)로 불어난 것이죠. 그는 ‘사우디 아라비아의 워렌 버핏’으로 불리며 인정받게 됐습니다. 이후 킹덤 홀딩스를 운용하면서, 애플·아마존·코카콜라·이베이·AOL·포시즌호텔&리조트 등에 투자해 왔습니다.
 
저유가가 장기간 지속되면서 왕족에게 부가 집중된 데 대한 지적이 일고 있습니다. “국민들은 가난해졌는데, 수천 명에 이르는 왕족들은 여전히 호화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는 거죠.  
왕족들은 이런 지적에 아랑곳 않습니다. 뉴욕타임스(NYT)가 프랑스의 부동산 업자를 인용 보도한 데 따르면, 사우디의 왕자·공주들은 지난 해에도 파리의 값비싼 부동산을 여럿 사들였습니다. 한 왕자는 3000만 달러(약 339억원) 넘는 1021㎡ 넒이의 호화 아파트를 구입했다고 합니다.

홍주희 기자 honghong@joongang.co.kr 그래픽=신아영 인턴기자 
 

[출처: 중앙일보] [알쓸신세] 아내 22명, 아들 45명…사우디 왕실 비극의 씨앗
 
https://news.joins.com/article/21920617?cloc=joongang|home|newslist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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