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문화재방송.한국 www.tntv.kr

동영상

[동영상 캠페인:순국선열의 날]대한민국 국민으로써 '순국선열의 날'을 모르면 부끄러운 일이다.

문화재방송 2021. 11. 16. 11:36

자신보다 대한민국을 소중히 여긴 사람들, 순국선열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

 

11월 17일은 ‘순국선열의 날’입니다. ‘순국선열’이란 일제의 국권 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 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항거하다가, 그 항거로 인해 순국한 사람들로서 그 공로로 건국훈장, 건국포장 또는 대통령표창을 받은 자를 지칭합니다. 자신의 목숨보다 우리나라 영토, 백성, 글, 정신을 소중히 여긴 많은 사람들. 국권회복을 위해 헌신했던 순국선열의 독립정신과 희생정신, 그들의 얼과 위훈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법정기념일이 바로 ‘순국선열의 날’입니다.

정부는 11월 3일 ‘학생독립운동 기념일’과 17일 ‘순국선열의 날’을 일제강점기 일제에 항거한 선열들의 독립정신과 희생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정부기념일로 제정했으며, 제82회 순국선열의 날 중앙기념식 ‘또 하나의 별을 노래하자’는 11월 17일 수요일 오전 10시 독립기념관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인 ‘순국선열’이란 무슨 말일까요? 

사전적 의미의 ‘순국선열(殉國先烈)’은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선조(先祖)의 열사(烈士)를 뜻합니다. 

조금 더 정확히는 ‘일제의 국권 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 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항거하다가 그 항거로 인하여 순국한 자로서 그 공로로 건국훈장, 건국포장 또는 대통령표창을 받은 자를 뜻하고 있습니다. 

순국선열은 생존했던 애국지사와 더불어, 한국의 자주성과 독립성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들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순국선열의 날’은 숭고한 순국선열의 활동을 기억하고 추모하며 현재화한다는 의미에서 광복절만큼이나 뜻 깊은 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 ‘순국선열의 날’의 유래

 

 

 

‘순국선열의 날’은 왜 11월 17일일까요? 

바로 1905년 11월 17일에 체결된 을사조약(乙巳條約)의 치욕을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이날을 순국선열의 날로 정한 것은 1919년 중국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였습니다.

1939년 11월 21일에 열린 임시의정원 제31회 임시총회에서 지청천(池靑天)과 차이석(車利錫)을 비롯한 6인은 

11월 17일을 ‘순국선열공동기념일(殉國先烈共同記念日)’로 제안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원안은 의결되어 순국선열의 날이 시작되게 된 것이죠.

 

순국선열공동기념일의 추모행사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거쳐 광복 초기에는 민간단체가, 1955년 이후에는 정부 주관으로, 또 1962년 이후부터는 국가보훈처에서 주관하였습니다. 

1970년 이후에는 정부 행사 간소화 조치로 인해 현충일 추념식에 포함되어 거행되었지만, 독립유공자 유족들의 오랜 여망과 숙원에 따라 1997년에 순국선열의 날이 다시 정부기념일로 복원됨에 따라서 정부가 추모행사를 주관하게 되었습니다. 

[순국선열의 노래]

온 겨레 나라 잃고 어둠 속 헤매일 때

자신을 불살라서 횃불마냥 밝히시며

국내외 광복 전선서 오롯이 목숨 바친

님들의 그 충절이 겨레의 얼 지켰네

우리는 순국선열을 우러러 기리면서

그 후예다운 떳떳한 새 삶을 다짐한다 [내용 출처 : 국가보훈처]



(왼쪽부터- 한용운, 윤봉길, 김좌진, 이봉창, 강우규, 안창호, 안중근,
유관순, 신채호, 민영환, 나석주)

이 분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다
11월 17일은 ‘순국선열의 날’이다

1905년 11월 17일은 대한제국의 국권이 실질적으로
침탈당한 을사늑약이 체결된 날인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나라를 빼앗긴 치욕을 잊지 않고,
순국선열의 독립정신과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11월 17일을 ‘순국선열 공동기념일’로
제정했던 것이 ‘순국선열의 날’의 시작이었다

오늘은 그날... 82회!
선열들의 헌신 정신을 가슴 깊이 새긴다

                                       

    이강연 의병장이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
              (승아에게 유언하며 보냄)
 
             네 아비의 평생에 품은 단층은
          왕가의 일에 죽고자 한 것인데,
          이제 뜻을 이루니 또 무엇을 한탄하랴.
          놀라고 두려워하기에 이르지 말고
          정신을 수습하여 네 아우를 데리고
          그날 옥문 밖에서 기다리도록 하라.  
 

 

              
        國恥民辱(국치민욕)/나라의 수치, 백성의 치욕
       乃至於此(내지어차)/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不死何爲(불사하위)/죽지 않고 어찌 하리오.  
       父葬未成(부장미성)/아버님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國權未後(국권미후)/나라의 주권도 회복하지 못하였어니
       不忠不孝(불충불효)/충성도 못하고 효도도 못한 몸이
        死何暝且(사하명차)/죽은들 어찌 눈을 감으랴.
             

 

                                                           

 

 

              다시 돌아 보는 윤봉길 의사의 최후

윤봉길 의사는 역사적 의거일인 1932년 4월 29일 일찍 교포 김해산(金海山)의 집에서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 김구(金九) 단장과 함께 아침식사를 했다. 그는 식사가 끝난 후
수통으로 위장된 폭탄 1개와 도시락으로 위장된 폭탄 1개를 김구 단장으로부터 받아
하나는 어깨에 메고 하나는 손에 들었다.
그리고 윤봉길 의사는 자기가 찬 새 시계와 김구 선생이 찬 헌 시계를 바꾸어 갖고,
사용하고 남은 의거 준비금을 김구 단장에게 돌려주었다.

그 후 그는 김구 단장의 전송을 받으며 택시를 타고 홍커우공원으로 갔다.
차에서 내려 수통으로 위장된 것은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으로 걸고, 도시락으로 위장된 것은
오른손에 들고 홍커우공원 정문을 들어서면서 중국인 문지기에게 일본인이라고 응대하며
통과하였다.
오전 7시 50분경 공원 안으로 들어가 미리 정해 두었던 지점에 이르러 폭탄을 투척할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홍커우공원 안에는 상해거주 일본인이 1만 명, 상해 침략 일본군이 1만 명,
그밖에 각국 사절, 각계 초청자 등을 합하면 2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모여 성황을 이루었다.
그들은 중앙의 높은 식단을 중심으로 하여 그 전면에 일본관민이 질서정연하게 도열해 있었고,
그 앞에는 일본 학생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리고 그 좌우에는 열병행사에도 참가할 일본 육해군의 군대가 정예무장을 하고 도열해 있었다.
식단 뒷면에는 기마 헌병이 단 밑으로 단상을 호위할 뿐 아니라, 그 뒤 수 미터의 간격을 두고
경비병력이 이중 삼중으로 삼엄하게 경계하고 그 뒤에 일반 군중이 회집해 있었다.

높고 넓은 단상 위에는 도륙 표적물인 일제 침략군 사령관 시라카와(白川義則) 대장과 함대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郞) 중장이 중앙에 자리 잡았고, 
 그 좌우로 일제 제 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重光葵),
거류민단장 가와바다(河端貞次), 주중총영사 무라이(村井倉松), 민단간부 토모노(友野盛) 등
 7명의 상해사변의 원흉들이 천주(天誅)를 기다리며 착석해 있었다.

윤봉길 의사는 미리 작정했던 후편 오른쪽 군중 속으로 들어가 투척 장소와 시간을 맞추어
의거의 최후 준비를 하였다.
오전 11시 20분경 그들 축하식의 제 1차 순서인 관병식(觀兵式)을 끝내고 이어 제 2차 순서인
축하식순(祝賀式順)으로 들어가 일본국가가 제창되어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드디어 역사적인 11시 50분경, 윤봉길 의사는 도시락으로 된 자살용 폭탄을 땅에 내려놓고
어깨에 걸메고 있던 수통 형 폭탄의 덮개를 벗겨 가죽끈이 붙은 그대로 오른손에 쥐고 왼손으로
안전핀을 빼면서 앞사람을 헤치고 2미터 가량 전진하여 17미터 내외 떨어진 중앙 단상 위로
힘껏 투척하였다.
그 폭탄이 그대로 노무라(野村吉三郞)와 시게미쓰(重光葵) 면전에 명중하면서 폭발,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을 내고 식장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아수라장으로 변하였다.

결국 상해침략의 원흉인 총사령관 육군대장 시라카와(白川義則)는 전신에 24개처의 탄편을 맞아
신음하다 5월 24일 사망하고, 해군총사령관인 제3함대 사령관인 해군중장 노무라(野村吉三郞)는
실명하였으며 제9사단장 육군중장 우에다(植田謙吉)는 다리를 절단하였다. 그리고 주중공사 시
게미쓰(重光葵)는 다리가 부러져 절뚝발이가 되었고 거
류민단장이며 상해사변의 민간 원흉인 카와바다(河端貞次)는 창자가 끊어져 즉사하였다.
이밖에도 단상에 있던 주중 총영사 무라이(村井倉松)와 민단간부 토모노(友野盛)도 각기 부상하여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의탄을 맞았다.

윤봉길 의사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땅에 잠시 내려놓았던 자폭용 도시락 폭탄을 들어올려 안전핀을
뽑으려는 순간, 부근 경비를 맡았던 일제군경의 제지를 받았고 군중과 그들로부터 즉석에서
포위당해 집중구타당하는 바람에 혼도하고 말았다.

의거 현장에서 윤봉길 의사를 포박한 일제 군경은 윤봉길 의사를 전시 군법회의 대상자로
상해(上海) 일본군 사령부 수금소(囚禁所)에 감금하고 혹독한 고문과 냉혹한 심문을 통해 의거
전말과 그 배후를 추궁하였다.
그러나 윤봉길 의사는 한인애국단 김구 단장이 그 해 5월 10일 ‘홍구공원작탄진상’이란
성명서를 통해 그 진상을 세상에 공포할 때까지 일체 배후와 사건 경위를 함구하였다.

그러나 윤봉길 의사는 1932년 5월 28일 상해파견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 때 윤봉길 의사는 “이 철권으로 일본을 즉각 타도하려고 상해에 왔다”고 떳떳이 주장했다.

사형이 확정된 후 윤봉길 의사의 유서가 나돌자 헌병대에서 다시 윤봉길 의사를 호출했다. 그
 자리에서 윤봉길 의사는 자신이 쓴 유서를 확인해 주며 “현재는 우리나라가 힘이 약하지만
세계 대세에 의해 반드시 우리는 독립한다. 일본은 지금 열강이지만 시든 나뭇잎같이
항복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연행 당하는 윤봉길 의사>

 

<백범 김구 선생(왼쪽)이 윤봉길 의사 사후인 1946년 4월 26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윤봉길 의사 생가를
    방문했을 때의 모습. 왼쪽부터 백범 선생, 윤 의사의 부친인 윤황, 모친인 김원상, 부인인 배용순, 아들인 윤종 씨.>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광장에 위치 

                                                        민족의 魂 그릇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순국하신 독립운동가들의 넋을 기리고 되새기기 위해

                    조성된 작품입니다. 내부에 순국하신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순국선열 추모비

국가보훈처, 제82회 '순국선열의 날 기념식' 개최

 
 

'또 하나의 별을 노래하자'

독립기념관 겨레의 큰마당에서 처음으로 개최

제82회 '순국선열의 날' 홍보 포스터 (사진=국가보훈처 제공)

(내외방송=석정순 기자) 국가보훈처(이하 보훈처)는 일제강점기 국권 회복을 위해 희생하신 순국선열을 기리고 그분들의 독립정신과 희생정신을 기억하기 위한 '제82회 순국선열의 날 기념식'을 오는 17일 오전 10시, 독립기념관에서 거행한다고 16일 밝혔다.

이번 기념식은 '또 하나의 별을 노래하자'라는 주제로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를 준수한 가운데, 독립유공자 유족, 정부 주요인사 등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다.

'또 하나의 별을 노래하자'는 독립운동가이자 저항 시인인 '이육사' 선생의 시,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에서 착안한 것으로 조국 독립을 위해 희생하신 수많은 선열들의 고귀한 정신이 밤하늘의 별처럼 우리를 비추듯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순국선열 한 분 한 분의 유업을 본받아 이어 나가자는 다짐을 표현했다.

특히, 올해 기념식은 국민의 뜻으로 모아 건립된 독립기념관 겨레의 큰마당에서 '순국선열의 날' 정부 기념식으로는 처음으로 개최된다.

기념식은 독립기념관 내 추모의 자리에서 참배로 시작되며, 본식에서는 국민의례, 여는 영상, 여는 공연, 독립유공자 포상, 기념사, 헌정공연(추모연주 영상, 추념문 낭독, 대합창), 순국선열의 노래 제창 순으로 약 40분간 진행된다.

애국가는 제창에 앞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시기에 순국선열들이 '올드랭사인' 선율에 맞추어 불렀던 옛날 애국가를 홍승연 어린이 뮤지컬배우가 먼저 독창하는 시간을 갖는다.

여는 영상에서는 지난 1923년 서대문형무소에 사형장이 만들어질 때 심어져 순국선열들의 마지막 순간을 빠짐없이 지켜봤던 미루나무, 일명 '통곡의 미루나무'를 통해 순국선열들의 가슴 아픈 이야기와 감옥으로도 가둘 수 없었던 선열들의 독립을 향한 의지를 담아낸다.

여는 공연에서는 음악으로써 나라를 구하고자 했던 항일음악가 한형석 선생이 지난 1939년에 작곡한 항일 투쟁의 의지를 북돋아 주는 '한국행진곡'을 윤형렬 뮤지컬배우의 목소리로 듣는다.(내외방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목동 부부의 이야기를 다룬 최초의 오페라 '아리랑'이 수록된 '한국행진곡'을 편곡한 것이다. (사진=국가보훈처 제공)

이어서 '제82회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독립유공자에 대한 정부포상이 진행된다.

포상은 올해 순국선열의 날을 계기로 포상받는 134명을 대표해서 홍범도 장군의 차남으로 지난 1919년 중국 길림성 왕청현에서 독립군 간부로 활동하고, 지난 1920년 연길성에서 대한독립군 제4군 대장으로도 활동한 고(故) 홍용환 님 등 여섯 분의 유족 등에게 전수될 예정이다.

기념사에 이어지는 헌정공연은 추모연주 영상, 추념문 낭독, 대합창 순으로 진행된다.

추모연주 영상에서는 현악 3중주 연주그룹인 '레이어스 클래식'이 독립기념관을 배경으로 빼앗긴 조국에 대한 순국선열들의 애타는 그리움과 자주독립 정신을 드보르작의 '귀향(Going Home)' 연주를 통해 표현한다.

추념문은 지난 1945년 정인보 선생이 직접 쓰신 '순국선열추념문'을 청년 작가가 새롭게 작성한 추념문인 '선물 받은 빛'을 김보경 뮤지컬 배우가 낭송한다.

합창은 2020년 광복절을 기념해 국립합창단이 제작한 합창교향시 '코리아 환타지' 중 순국선열의 독립을 향한 불굴의 의지와 희망의 메시지를 담은 '일어나라'를 국립합창단 테너 3인의 목소리로 듣는다.

끝으로 '순국선열의 노래'를 참석자 전원이 함께 제창하며 기념식은 마무리된다.

한편, 보훈처는 "나라를 지켜내지 못한 절망과 괴로움 속에서 자신을 불살라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신 찬란한 별인, 순국선열 한분 한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그분들의 독립정신과 희생정신을 되새기고 온 국민이 화합하는 뜻깊은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 [문화재방송.한국(www.tntv.kr) 캠페인]

문화재에는 우리 민족의 얼과 혼이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은 애국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