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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

[의병의 날 특집]역사상 첫 의병 '처인성전투'의 승장 김윤후

문화재방송 2013. 6. 5.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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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관용 경북지사가 추모사를 하고 있다.(사진/김락현기자) ⓒ2013 CNB뉴스
조.일전쟁(임진왜란) 당시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에서 망우당 곽재우 장군이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던 음력 1592년 4월 22일(양력 6월 1일)을 기념하여 2010년 제38회 의병제전행사를 진행해오다가 2010. 5. 25 「의병의 날(양력 6월 1일)」이 국가기념일로 제정 공포 되면서 올 해 제3회를 맞았다.


'의병의 날'을 맞아 이 나라 이 강토를 지키기 위해 초개같이 목슴을 버린 유명. 무명의 의로운 숨결을 찾는다. 

 

처인성 전투(민족기록화-중학교 국사 교과서)

유라시안의 대제국 몽고와의 처인성전투는 유일하게 몽고가 패한 전투로서 의미를
갖는 대신 고려로서는 유일하게 승전한 전투다.

이 전투는 고려의 관군이 연전연패함에 왕이 강화도로 도피하고 몽고군은 국토
곳곳을 분탕질하다가 드디어 처인성에 이르러 징기스칸의 차남 총사령관인
살리타이-察羅台가 우리의 승장 김윤후의 화살에 맞아 살장터에 쓰러진 다음,
할 수 없이 철수한 몽고군은 다시 재침하면서 이 지역에 대해 철저한 보복으로
돌한 개 조차도 포개어두지 못하게 할 정도로  여지없이 초토화했다. 지금
흔적조차 히미해진 이 성터가 말해주고 있는 모습으로도 그 당시의 상황을
역력히 짐작하게 한다. 지금의 성터는 훗날 임진왜란 당시에 이성터를 다시 쌓고
승전한 곳이여서 그나마 작은 성터로서의 모습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경기도 기념물 제44호 / 1977년 10월13일

위치:경기 용인시 남사면 아곡리 산 43 마곡마을 입구
 






 


처인성지 경기도 기념물 제11호
 
위치: 경기도 용인시 남사면 아곡리

고려 때 수주(지금의 수현)에 속해 있던 처인부곡(處仁部谷)의 토성(土城)으로 오랜 세월
동안
풍우에 훼손되어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 현존하는 성의 길이는 250m 정도이다.


 

 

김윤휴는 누구인가?

김윤후. 그는 원래 무인이 아니었다.
천민부락인 부곡(部曲)에서 주민들을 대상으로 불법(佛法)을 전하던 승려였다. 그는 전혀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다. `고려사' 기록을 전부 훑어보아도 몽고군 침입시 처인성 전투에서 처음 등장하는 인물이다.
처인성 전투에 참여할 당시에도 그는 승려의 신분이었다.

고려 시대만 하더라도 아무나 승려가 될 수는 없었다. 광종 때부터 시행된 불교 분야의 과거제인
승과(僧科)제도를 통해 승려로 발탁되든지, 아니면 왕족이나 특권 귀족 출신만이 승려가 될 수 있었다.

예컨대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은 문종(文宗)의 넷째아들이자 선종의 동생이었으며,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은 명종(明宗)대에 승과를 통해 승려가 된 당대 최고의 승려이자
선각자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는 면세·면역의 특전이 부여됐기에 승려의 세속적 권위 또한 적지
않았다.

당시 2800간이나 되는 대규모의 흥왕사(興旺寺)를 비롯해 수많은 사찰이 즐비한 왕도 개경을 떠나
자진해 천민 부락인 처인부곡(處仁部曲:오늘날의 경기도 용인)의 성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생활하며
불법을 전한 김윤후는 분명 깨어 있는 사람이었다.

1232년(고종 19년) 몽고의 제2차 침입 때 김윤후는 처인성 부곡민들과 함께 몽고군과 맞서 싸웠고
끝내 적장 살리타이(撒禮塔)를 사살하는 전과를 세우고 그들을 격퇴했다. 이처럼 국가가 위난에 처했을
때 비록 부곡민들이지만 이들을 결집시켜 적과 싸운 호국의 의지로 충만한 인물이었다.

이 전투에서 적장 살리타이를 사살하고 몽고군을 물리친 공로로 국가는 그를 상장군으로 임명했으나
그렇게 큰 직책을 받을 수 없다며 끝내 사양하면서 섭랑장(攝郞將) 정도의 미관말직만을 자청했으니
그 겸손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보통사람 같으면 조그마한 공적을 세우고도 이를 침소봉대해
자랑하고 과도한 국가포상을 요구할 터인데 김윤후는 그와 정반대였다.

이와 같이 김윤후는 처인성 전투를 계기로 승려에서 무인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그 후 21년의 세월이
흐른 1253년(고종 40년) 몽고군의 제5차 침입 때에도 김윤후는 방호별감랑장(防護別監郞將)이 돼
충주성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다. 충주성 전투의 주역 또한 천민들이었고 이들의 지휘자 또한
김윤후 장군이었다.

처인성 전투에서 부곡에 사는 천민들의 애국심과 과감한 전투력을 직접 체험한 바 있는 김윤후는 인간의 기본적인 심성을 꿰뚫어 보는 지장이자 덕장이었다.
그는 관노의 문서를 모두 불태워 그들의 신분 해방을 입증했고 몽고군으로부터 빼앗은 소·말 등의 노획품을 골고루 나눠 주자 관노들은 감격, 용전분투했고 끝내 몽고군을 격퇴한 것이다. 이처럼 자유란 실로
놀랍고도 무서운 인간 능력을 발휘케 하는 요소다.

김윤후 장군의 승전 배후에는 전투 주역인 천민들의 자유를 향한 갈망, 이를 꿰뚫어 보고 적절히 활용한
그의 지략과 뜨거운 호국의지가 결합해 있었던 것이다.
즉 신분 해방을 통한 자유에의 갈망이 대몽항전의 큰 원동력이 됐다. 그리하여 김윤후 장군이 지휘하는
천민들의 항전태세는 우유부단하고 소극적인 왕공·귀족·관료 등 특권계급의 임전태세에 비해 몇 배나
견고하고 의연했다.

백성을 버리고 강화도로 도피한 특권층이 환락과 안일에 빠져 있는 동안 목숨을 걸고 굶주려 가면서
몽고군과 결사적으로 싸운 사람들이 바로 김윤후 장군과 그 휘하의 천민 출신 군사들이었다. 그들이
갖춘 무기·장비는 보잘것 없었다.

그러나 나라를 지켜야겠다는 김윤후 장군의 뜨거운 호국의지와 천민들의 자유를 향한 갈망이 결합,
혁혁한 전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김윤후 장군이 특권층인 승려의 신분을
내던지고 천민들과 생사고락을 함께하면서 그들을 군사조직의 일원으로 재편, 조직화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 결과 아시아·유럽 대륙을 석권한 대제국을 상대로 40년 간이나 버틸 수 있었다. 이는 바로
김윤후 장군과 그 휘하의 군사들이 발휘한 불굴의 저항정신과 자주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말발굽이 닿는 곳에 승리만이 있다고 자부하던 몽고군에 처인성·충주성 전투를 통해 참담한 패배를
안긴 김윤후 장군의 승첩이야말로 우리 역사 속에 길이 빛날 것이다.<펌>

'김윤후는 누구인가' 원문 보기
http://cafe.daum.net/yakmakfiend/HZYy/35?docid=1Ns3q|HZYy|35|20110729131001&q=%B1%E8%C0%B1%C8%DE%B4%C2%20%B4%A9%B1%B8%C0%CE%B0%A1%3F

 

▶처인성에서 출토된 고려도검

김윤후의 첫 승전지인 처인성. 이곳에서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많은 유물이 출토됐다. 특히 대몽항쟁의 치열함을 증명하듯 화살촉과 칼이 발견되었는데, 고려시대 칼로는 두 번째에 해당하는 매우 드문 발견이다. 처인성에서 출토된 고려도검은 현재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에 보존되어 있다. 한국사 傳 제작진이 고려도검을 통해 처인성 전투의 흔적을 취재했다.


▶다인철소 - 고려시대의 포항제철

김윤후의 두 번째 승전지인 충주, 이곳에서 용광로와 숯가마, 그리고 철을 만드는 과정에서 나오는 슬래그(강재, Slag)가 다량 발견됐다. 충주 야철 유적 지표 조사에 의하면 총 41곳의 야철지가 확인되었는데 그 중 35곳이 다인철소 지역이다. 다인철소는 충주시 이류면 일대의 대규모 수공업소로 금, 은, 동, 철이나 종이, 도자기와 같은 수공업생산물을 생산하는 곳이었다. 고려시대 다인철소의 철물 주조기술은 질과 생산량에 있어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다. 국내 최대 규모를 갖추고 있었던 다인철소는 오늘날의 포항제철과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한국사 傳 제작진이 고려시대의 첨단 무기 제작소인 다인철소를 집중 취재했다.

 

 

 

처인성전투 요도



민족전란사(5) 대몽항쟁사(對蒙抗爭史)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발행-

  (개황)
 
 
고려 때 몽고의 침입으로 1231년부터 1259년까지 30년에 걸친
여몽전쟁(麗蒙戰爭)이
있었는데 1차 대몽항쟁은
고종18년(1231) 8월부터
19년(1232) 12월까지 1년여이고, 2차는 고종(1235) 윤7월부터 (1259)
3월까지
24년 간의 장기전이다.

  1차 대몽한쟁 때는 몽고군이 침공을 개시하여 40일 만에 개경250리(100Km) 인
황주까지 진격하였으나
고려는 긴급히 3군(三軍)을 편성하여 남진을 저지하는 한편 서북계북로(西北界北路)의
귀주(龜州)에서
고려 군민이 일치단결하여 남진을 저지하는데 성공하자 점차 몽고군이
불리한
상황이었으나 몽고군은
일부병력을 개경으로 진격시켜 도성을 포위하려 하자 고려 조정에서는
사신을 보내
강화교섭을 추진하고
몽고측도 수락하여 서북계(西北界) 요지에 감독관인 다루치기(達魯花赤, 달노화적)
지휘하에 72명의
군사 잔류하고 1232년 1월에 철수하였다.

  그러나 고려에는 몽고인에 대한 적개심이 고조되어 조야에 강경론이
팽배하여
결국 잔류시킨
다루치기와 군사들을 살해하거나 국경 밖으로 축출하고 장기전에 대비하여
수도를 강화도로 옮겼다.

  이에 1232년 8월 몽고 태종 오고타이는 원수 살리타이(撒禮塔,살례탑)로 하여금
고려 침공을
재개토록 하였는데 9월 국경 진입 후 3개월 만인 11월에 남경(한양)을
함락시키고, 한강을
건너 광주로 진출하였으나 광주 군민의 완강한 저항으로 광주성을
제대로
공략하지도 못한 채 용인
방면으로 남진하였다가 주력을 강화쪽으로 돌리면서 살리타이가
직접 지휘하는
일부병력으로 처인성을
공격하므로서 처인성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처인성전투) 

 
몽고군 원수 살리타이가 지휘하는 제4군은 광주성공격작전에
실패한 후,
그 주력을 용인으로 전진시켰으나
이미 소식을 전해듣고 일대 수령들은 군사와 백성, 무기와 양곡들을
 처인성으로
대피시킨 뒤였으므로
몽고군은 텅 빈 용인현성(龍仁縣城)을 무혈로 입성하였다.

  그러자 살리타이는 제4군 주력을 용인-수원-군포-부평-김포를
연하는
방향으로 강화도
대안의 통진으로 진출시켜 강화도를 압박하는 한편 자신은 일부병력만으로
처인성으로 남하하여 처인성 공략에 나섰다.

  한편 처인성에는 용인을 비롯한 인근 각 고을에서 피난 온
군민1,00여 명과
승장(僧將) 김윤후(金允侯)를 비롯한 승병 100여 명이 방어에 임하고
있었다.

  살리타이가 직접 인솔한 500여 기(騎)가 처인성 동북방의 완장리,
매룡리 일대에 포진하여 처인성을 포위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고려 고종19년(1232) 12월 16일 용인으로부터 처인성 동북방 50리
지점에
도착한
몽고군 원수 살리타이는 처인성 동북방 인근 완장리, 매룡이, 화동
등지에
병력을 3개 대로
분산 배치하여 처인성에 대한 공격준비태세를 갖추고, 처인성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하여
몸소 5,6기의 정찰기병만 거느리고 경장(輕裝)으로 처인성 동문을
향하여
접근하였다.

  한편 승장 김윤후는 처인성 동문 밖 300m 지점의 언덕
(속칭 살장터, 殺將址)에 저격병
수십 명을 미리
매복시켜 유사시에 대비하고 있었다. 살리타이 일행이 이 지점에 이르자
매복하고 있던
고려군
저격병들은 몽고군의 주장 살리타이와 수행 기병들을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사살하고, 그 목을 베었다.

  몽고군 진영에서는 이 광경을 목격하고 주장 살리타이를
구출하기 위하여
일제히 처인성 동문으로 돌진하였으나 성을 방어하던 승병들이
성 밖으로 달려나와 역공하므로서 몽고군과 고려군은 처절한
혼전을 벌어졌는데
몽고군은 주장을 구하기는커녕 한차례의 격전 끝에
태반이 사상되고, 마필과
병기를 빼앗기고 그들의 본진으로 후퇴하였다.
이에 고려군은 승세를 틈타서
몽고군 본진으로 반격을 가하여 몽고군을 대파시켰다.

  주장 살리타이가 고려군에게 사살되자 몽고군 전열은 걷잡을 수 없이
와해되고 말았다.
그 결과 몽고군은 더 이상 고려군의 공세를 막아내지
못하고 용인방면으로 패주하였다.

  처인성전투 결과 주장을 잃은 몽고군 부원수 테케는 서둘러
고려와
강화를 체결하고 철군함으로서 제1차 대몽항쟁은 종료되었다. 

  (처인성 승첩의 의의)
 
 
승장 김윤후의 기계(奇計)에 의하여 살리타이를 사살한
처인성 승첩은
여-몽항쟁이 발발한 이래 고려군측에서 거둔 일방적인 최대의 승리였다.
따라서 고려군의 처인성 승첩은 전쟁 발발 이래 시종
고려군이 열세로 몰리던 전세를 일거에 역전시키는 전환점이 되었다.

  한편, 살리타이가 전사한 처인성전투는 몽고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전의(戰意) 를 상실하게 하여 고려로부터 서둘러 철수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몽고군은 고려군의 반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다수가 사로잡히고,
나머지는 대소
규모로 무리 지어
서북변 국경으로 분산도주하였다. 몽고군은 이미 지휘체계가 완전히
붕괴되어
조직적인 퇴각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고려 조정에서는 사리타이를 사살하는데 큰 공로를 세운
승장 김윤후를 표창하여 상장군의 직위를 내렸으나 김윤후는
다음과 같이 완곡히 사양하였다.

  “저는 전시를 당해서도 무기를 잡고 일어서지 못했던 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잘 것 없는 공으로 후한 상을 받겠습니까?”
「고려사」 권103, 김윤후열전

 



위    치 : 경기 용인시 남사면 아곡리 산 43 마곡마을 입구 
주차시설 : 주차장은 없으나 승용차 5대 정도 주차 공간 있음.

도로안내 : 용인시 용인 사거리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45번국도(평택,안성방면)로 11.3㎞ -
           송전삼거리, 우회전 82번 지방도(오산방면) - 2.8㎞ - 아곡 사거리, 우회전(1㎞
           ) - 처인성지 (아곡삼거리에서 오산까지 약 10㎞)              

현지교통 : 오산이나 용인에서 완장리 행 버스 이용(1일 3회 운행)
                                                        
주변숙박지 :
한화리조트 콘도 (031-332-1122 남사면 봉무리)   
                                                                         
주변관광지:
한화리조트 콘도 (객실 250실), 수영장, 눈썰매장, 노래연습장, 오락실
            골드훼미리 콘도 (객실 100실), 수영장, 눈썰매장 (031-286-9111)
                                         
정보제공 : 용인시청 문화관광담당관실 관광홍보담당자

전    화 : 031-324-2067


출처:인터넷 검색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