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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관용 경북지사가 추모사를 하고 있다.(사진/김락현기자) ⓒ2013 CNB뉴스 | |
'의병의 날'을 맞아 이 나라 이 강토를 지키기 위해 초개같이 목슴을 버린 유명. 무명의 의로운 숨결을 찾는다.

처인성 전투(민족기록화-중학교 국사 교과서)
유라시안의 대제국 몽고와의 처인성전투는 유일하게 몽고가 패한 전투로서 의미를
갖는 대신 고려로서는 유일하게 승전한 전투다.
이 전투는 고려의 관군이 연전연패함에 왕이 강화도로 도피하고 몽고군은 국토
곳곳을 분탕질하다가 드디어 처인성에 이르러 징기스칸의 차남 총사령관인
살리타이-察羅台가 우리의 승장 김윤후의 화살에 맞아 살장터에 쓰러진 다음,
할 수 없이 철수한 몽고군은 다시 재침하면서 이 지역에 대해 철저한 보복으로
돌한 개 조차도 포개어두지 못하게 할 정도로 여지없이 초토화했다. 지금
흔적조차 히미해진 이 성터가 말해주고 있는 모습으로도 그 당시의 상황을
역력히 짐작하게 한다. 지금의 성터는 훗날 임진왜란 당시에 이성터를 다시 쌓고
승전한 곳이여서 그나마 작은 성터로서의 모습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경기도 기념물 제44호 / 1977년 10월13일
위치:경기 용인시 남사면 아곡리 산 43 마곡마을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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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인성지 경기도 기념물 제11호 |
고려 때 수주(지금의 수현)에 속해 있던 처인부곡(處仁部谷)의 토성(土城)으로 오랜 세월 |
김윤휴는 누구인가?
김윤후. 그는 원래 무인이 아니었다.
천민부락인 부곡(部曲)에서 주민들을 대상으로 불법(佛法)을 전하던 승려였다. 그는 전혀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다. `고려사' 기록을 전부 훑어보아도 몽고군 침입시 처인성 전투에서 처음 등장하는 인물이다.
처인성 전투에 참여할 당시에도 그는 승려의 신분이었다.
고려 시대만 하더라도 아무나 승려가 될 수는 없었다. 광종 때부터 시행된 불교 분야의 과거제인
승과(僧科)제도를 통해 승려로 발탁되든지, 아니면 왕족이나 특권 귀족 출신만이 승려가 될 수 있었다.
예컨대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은 문종(文宗)의 넷째아들이자 선종의 동생이었으며,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은 명종(明宗)대에 승과를 통해 승려가 된 당대 최고의 승려이자
선각자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는 면세·면역의 특전이 부여됐기에 승려의 세속적 권위 또한 적지
않았다.
당시 2800간이나 되는 대규모의 흥왕사(興旺寺)를 비롯해 수많은 사찰이 즐비한 왕도 개경을 떠나
자진해 천민 부락인 처인부곡(處仁部曲:오늘날의 경기도 용인)의 성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생활하며
불법을 전한 김윤후는 분명 깨어 있는 사람이었다.
1232년(고종 19년) 몽고의 제2차 침입 때 김윤후는 처인성 부곡민들과 함께 몽고군과 맞서 싸웠고
끝내 적장 살리타이(撒禮塔)를 사살하는 전과를 세우고 그들을 격퇴했다. 이처럼 국가가 위난에 처했을
때 비록 부곡민들이지만 이들을 결집시켜 적과 싸운 호국의 의지로 충만한 인물이었다.
이 전투에서 적장 살리타이를 사살하고 몽고군을 물리친 공로로 국가는 그를 상장군으로 임명했으나
그렇게 큰 직책을 받을 수 없다며 끝내 사양하면서 섭랑장(攝郞將) 정도의 미관말직만을 자청했으니
그 겸손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보통사람 같으면 조그마한 공적을 세우고도 이를 침소봉대해
자랑하고 과도한 국가포상을 요구할 터인데 김윤후는 그와 정반대였다.
이와 같이 김윤후는 처인성 전투를 계기로 승려에서 무인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그 후 21년의 세월이
흐른 1253년(고종 40년) 몽고군의 제5차 침입 때에도 김윤후는 방호별감랑장(防護別監郞將)이 돼
충주성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다. 충주성 전투의 주역 또한 천민들이었고 이들의 지휘자 또한
김윤후 장군이었다.
처인성 전투에서 부곡에 사는 천민들의 애국심과 과감한 전투력을 직접 체험한 바 있는 김윤후는 인간의 기본적인 심성을 꿰뚫어 보는 지장이자 덕장이었다.
그는 관노의 문서를 모두 불태워 그들의 신분 해방을 입증했고 몽고군으로부터 빼앗은 소·말 등의 노획품을 골고루 나눠 주자 관노들은 감격, 용전분투했고 끝내 몽고군을 격퇴한 것이다. 이처럼 자유란 실로
놀랍고도 무서운 인간 능력을 발휘케 하는 요소다.
김윤후 장군의 승전 배후에는 전투 주역인 천민들의 자유를 향한 갈망, 이를 꿰뚫어 보고 적절히 활용한
그의 지략과 뜨거운 호국의지가 결합해 있었던 것이다.
즉 신분 해방을 통한 자유에의 갈망이 대몽항전의 큰 원동력이 됐다. 그리하여 김윤후 장군이 지휘하는
천민들의 항전태세는 우유부단하고 소극적인 왕공·귀족·관료 등 특권계급의 임전태세에 비해 몇 배나
견고하고 의연했다.
백성을 버리고 강화도로 도피한 특권층이 환락과 안일에 빠져 있는 동안 목숨을 걸고 굶주려 가면서
몽고군과 결사적으로 싸운 사람들이 바로 김윤후 장군과 그 휘하의 천민 출신 군사들이었다. 그들이
갖춘 무기·장비는 보잘것 없었다.
그러나 나라를 지켜야겠다는 김윤후 장군의 뜨거운 호국의지와 천민들의 자유를 향한 갈망이 결합,
혁혁한 전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김윤후 장군이 특권층인 승려의 신분을
내던지고 천민들과 생사고락을 함께하면서 그들을 군사조직의 일원으로 재편, 조직화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 결과 아시아·유럽 대륙을 석권한 대제국을 상대로 40년 간이나 버틸 수 있었다. 이는 바로
김윤후 장군과 그 휘하의 군사들이 발휘한 불굴의 저항정신과 자주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말발굽이 닿는 곳에 승리만이 있다고 자부하던 몽고군에 처인성·충주성 전투를 통해 참담한 패배를
안긴 김윤후 장군의 승첩이야말로 우리 역사 속에 길이 빛날 것이다.<펌>
'김윤후는 누구인가' 원문 보기
http://cafe.daum.net/yakmakfiend/HZYy/35?docid=1Ns3q|HZYy|35|20110729131001&q=%B1%E8%C0%B1%C8%DE%B4%C2%20%B4%A9%B1%B8%C0%CE%B0%A1%3F
▶처인성에서 출토된 고려도검
김윤후의 첫 승전지인 처인성. 이곳에서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많은 유물이 출토됐다. 특히 대몽항쟁의 치열함을 증명하듯 화살촉과 칼이 발견되었는데, 고려시대 칼로는 두 번째에 해당하는 매우 드문 발견이다. 처인성에서 출토된 고려도검은 현재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에 보존되어 있다. 한국사 傳 제작진이 고려도검을 통해 처인성 전투의 흔적을 취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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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인성전투 요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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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치 : 경기 용인시 남사면 아곡리 산 43 마곡마을 입구 |
도로안내 : 용인시 용인 사거리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45번국도(평택,안성방면)로 11.3㎞ -
송전삼거리, 우회전 82번 지방도(오산방면) - 2.8㎞ - 아곡 사거리, 우회전(1㎞
) - 처인성지 (아곡삼거리에서 오산까지 약 10㎞)
현지교통 : 오산이나 용인에서 완장리 행 버스 이용(1일 3회 운행)
주변숙박지 : 한화리조트 콘도 (031-332-1122 남사면 봉무리)
주변관광지: 한화리조트 콘도 (객실 250실), 수영장, 눈썰매장, 노래연습장, 오락실
골드훼미리 콘도 (객실 100실), 수영장, 눈썰매장 (031-286-9111)
정보제공 : 용인시청 문화관광담당관실 관광홍보담당자
전 화 : 031-324-2067
출처:인터넷 검색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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