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은 진주의 역사와 문화가 집약되어 있는 진주의 성지(聖地)이다. 본시 토성이던 것을 고려조 우왕 5년(1379)에 진주목사 김중광(金仲光)이 석축하였다. 조선조 선조 24년(1591) 7월, 경상감사 김수(金수:1537∼1615)는 진주성을 수축하고 외성(外城)을 쌓았다.
선조25년(1592) 10월, 임진왜란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1554∼1592)이 3,800명의 군사로서 3만 여명의 왜적을 물리쳐 진주성대첩을 이룩하였다. 안타깝게도 김시민 장군은 전투가 끝나갈 무렵 죽은 척 하고 누워 있던 왜병의 총탄에 맞아 숨졌다. 장군의 나이 약관 38세엿다. 조정에서는 장군에게 충무공 시호를 내렸다. 그의 사당인 충민사는 이 곳에 있지 않고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에 있다.
왜 그럴까?
장군은 지금의 충남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 백전부락에서 부 김충갑(金忠甲)공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 김충갑의 자는 서초(恕初)요 호는 구암(龜岩)이며 고려충신 충렬공 김방경(金方慶)장군의 12세손이다.
장군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기골이 장대하였으며 병정놀이를 좋아하고 언제나 대장이 되어 지휘하였다. 8살 때 길가에서 병정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이때 마침 천안군수행차가 있어 수행원이 길을 비키라 하자 “한고을 사또가 감히 진중을 통과 할 수 있느냐”고 호령하면서 조금도 기가 꺽이지 않았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원님이 말에서 내려 장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큰 재목이구나” 하면서 길을 비켜 지나갔다 한다.
9 살 때 일이다. 백전부락 입구는 백전천(지금의 병천천)이 굽이 돌아 흐르고 있었는데 이 백전천가에 물에 잠긴 바위가 있고 그 속에 큰 굴이 하나 있었으며 이 굴속에는 큰 이무기 뱀이 살면서 수시 출몰사여 사람을 놀라게 하고 가축에 해를 끼치기도 하였다. 이때 장난꾸러기 소년 김시민은 이무기 퇴치를 궁리하였다. 뱀은 뽕나무활에 쑥대화살로 쏘아 잡는다는 고사를 읽고 동네 아이들과 함께 개울가로 가서 이무기 뱀을 나타나게 한 후 활로 쏘아 없애 버렸다 한다.
제2차 진주성 전투는 1593년 음력 6월 22일부터 같은 달 29일까지 3천여 명의 조선군과 6만여 명의 민간인이 10만여 명의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진주목사 서예원을 비롯하여, 김천일, 최경회 등 대부분의 지도부가 남강에 투신하거나 전사를 하였다.
성에 진입한 일본군은 모든 거주민과 살아있는 동물을 모두 학살하고 주변을 약탈했다. 그러나 전투에서 심한 손실을 입어 전라도로의 진출은 좌절되었고, 조선군이 부산으로 이동하자 진주성을 포기하고 퇴각하였으며, 이후 진주성은 왜군의 방어선에서도 제외된다.
선조 37년(1604)에는 합포(合浦, 마산(馬山))의 우병영을 진주성으로 옮겨 온 이래로 경상우도 병마절도영이 있었고, 고종 32년(1895) 5월부터는 진주관찰부, 건양 원년(1896) 8월부터는 경상남도관찰사의 감영이 있었다. 그리하여 1925년까지는 경상남도의 도청이 있었다. 성의 둘레는 1.7㎞이다. 성내(城內)에는 촉석루·창열사·의기사·북장대·서장대·영남포정사·국립진주박물관·진주성임진대첩계사순의단·촉석문·공북문·호국사 등이 있다.
주논개는 전라북도 장수 계내면 대곡리 주촌마을 출생으로, 성은 주(朱)이며, 1574년 주달문(朱達文)과 밀양박씨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주달문은 신안군의 주촌의 훈장으로 생활했으며, 일직 아들 주대룡을 두었으나 15세에 괴질로 사망했다. 그뒤 40이 넘은 나이에 딸 논개을 보았다.
1578년 부친 주달문의 사망 후 숙부 주달무의 집에 의탁했으며, 어린 조카를 김풍헌의 집에 민며느리로 보낸다는 약조를 하고 금품을 받고 도망간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논개의 어머니는 논개를 데리고, 친청으로 피했다가 체포되어 장수 관아에 수감된다.
1579년 장수 현감 최경회의 심리로 재판이 열리고,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돌아갈 곳이 없어 모녀는 침방관비를 자청했다. 1592년 17세에 최경회의 부실이 되고, 모친상을 당하게 된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최경회가 전라우도의 의병장으로 의병을 모집하고 군사를 훈련할 때 논개는 의병 훈련을 뒷바라지했다.
1593년 최경회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제수되어, 2차 진주성 전투를 할 때 성안에서 전투의 뒷수발을 들었다. 진주성이 함락되고, 최경회가 순국하자, 논개는 일본 장수들이 촉석루에서 잔치를 벌이고 있을 때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유인해 끌어안아 함께 남강에 떨어져 죽었다.
주논개가 왜장을 끌어 안고 남강에 뛰어 내린 바위
촉석루의 2층루
임진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진주대첩의 주인공 김시민 장군의 승전비각이다.
蛇足:진주성 유감
김시민 장군 전사 후 효종 3년 1652년, 진주성(당시는 촉석성)안에 장군의 사당 충민사가 건립되고 조정으로부터 사액을 받았다.
고종 1년 대원군의 사원 철폐령으로 충민사가 사라졌다.
진주성 안에는 창의사 김천일 장군 등을 모신 충렬사만 있을 뿐 김시민 장군의 사당을 볼 수 없어 부척 아쉽다.
충민사 복원이 안되는 것은 일제하인 1910년 김시민 장군을 향한 증오심과 민족혼 말살 정책으로
충민사가 있던 자리에 여과지를 만들어 그 흔적을 철저하게 없앴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아쉬운 마음에 충북 괴산의 충민사와 장군의 영정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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