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직후 부서진 남대문
대통령령인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따르면 이 전쟁은 1977년부터 40년 가까이 6·25 사변이 공식 명칭으로 통용돼 왔다. 이후 '무력을 사용하는 난리'라는 뜻을 가진 사변(事變)을 계속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이 고개를 들면서 공식명칭이 바뀌었다. 올 해 시행된 개정 규정에 따르면 6월 25일이 6·25 사변일에서 6·25 전쟁일로 바뀌었다. 이로 인해 공식 명칭도 6·25 전쟁이 된 것이다. 하지만, 이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심지어 일부 보훈업무 담당 공무원조차도 6·25 공식명칭이 별도로 정해져 있는 것을 숙지하지 못하고 있을 정도다. 공무원들이 쓰는 수첩과 달력 등에서도 여전히 6·25 사변으로 잘못 표기된 사례도 부지기수다. 실제 대전교육청 공무원들이 쓰는 다이어리에는 해당 날짜가 6·25 사변일로 표기돼 있다. 지역 대학이 찍어낸 달력에도 같은 오류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홍보 부족 탓에 6·25 전쟁에 대한 공식 명칭이 국민에게 전해지지 않고 있는 셈이다.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올해부터 6·25 전쟁으로 공식 명칭이 바뀌었고 보훈처가 주관하는 행사에는 모두 이를 쓰고 있다”며 “앞으로 이에 대한 홍보를 강화할 것이다”고 말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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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자 칼럼] 우리를 감동시킨 전쟁고아 아버지들
6월이 오면 눈가에 이슬이 맺히는 사람들이 많다.
6.25 전란을 겪으며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고통 받은 사람들이다.
그 많은 비극의 주인공 가운데 전쟁고아 만큼 슬픈 추억을 지닌 사람들이 어디 있으랴 !
6.25 전란으로 약 10만 여명의 전쟁고아가 생겼다는 기록이다.
포화 속에 버려진 이 많은 어린이들을 돌본 세 분의 전쟁고아 아버지 얘기가 우리를 감동시킨다.
한국민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첫번 째 감동의 주인공은 한국전쟁 영화 '전송가'의 딘 헤스 대령이다.
이제 고인이 된 할리우드 스타 록 허드손이 주연을 맡아 1956년에 제작된 영화가 '전송가'다.
딘 헤스 대령은 1950년 7월 초부터 이듬해 5월말까지 약 11개월 동안 250여 회 출격한 한국전쟁의 영웅이다.
그의 전투기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친히 써 준'신념의 조인(鳥人)'이 새겨져 있었다.
헤스 대령은 1.4 후퇴 당시 브레이즈델 목사가 보호 중이던 907명의 전쟁고아를 김포공항을 통해 제주도로 공수
하는 작전을 수행했고, 일본에서 비행기로 식량을 공수해 이들을 보살폈다.
1999년 83세의 헤스 대령이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 전쟁고아들을 위해 헌신한 구순의 황은순 여사(영화 전송
가에서 순이역으로 나온 실제 주인공, 휘경여고 창립자,작고)와 60대 초로의 전쟁고아 출신들이 감격의 해후를 한
장면이 보도되어 전 국민을 감동시켰다.
한국 공군 창설과 육성에도 공을 세워 대한민국 무공훈장을 받았다.
<대구 공군부대의 조촐한 헤스 대령 기념비>
2006년 8월 8일 서울 태평로 한국언론재단 사무실에서 피부색이 다른 두 노인이 얼싸안고 발을 동동 굴렀다.
당시 76세의 조지 F 드레이크 박사와 63세의 조우연씨다.
조씨가 6.25 전쟁 중 동생 둘과 장충동 고아원에서 고생할 때 드레이크 병사를 만났다.
1952년 통신병으로 한국에 파병된 드레이크씨는 6살 짜리 어린 여자 아이가 2살 짜리 동생을 등에 업고 음식을 구
걸하는 모습을 봤다. 굶주리고 피부병으로 뒤덮혀 있는 어린이들을 데려다가 씻기고 먹였다. 아이들은
일주일 만에 건강해져 그를 보고 활짝 웃었다.
드레이크씨는 부대원들로부터 성금을 모아 수백명 고아를 직접 돌보는 한편 한국의 전쟁고아를 도와 달라는 편
지를 미국 시민들에게 보내기 시작했다. 군 복무 틈틈히 6개월 동안 1000여 통 이상의 서신을 썼다고 회고했다.
미국 시민들로부터 200여 만달러를 받아 고아들을 돌보았던 그는 제대한 후에도 20여톤의 각종 물품을 한국 고
아원으로 보냈다.
드레이크 박사는 2006년 8월 14일부터 3일 동안 광주시청에서 6.25 전쟁 중 전쟁고아들을 직접 촬영한 사진 등
2000여점의 전쟁고아 돌보미 자료를 전시했다.
이 때 박광태 광주시장은 드레이크 박사에게 명예 광주시민증을 수여했다.
<명예 광주시민증을 받고 있는 드레이크 박사>
대다수 한국민들이 1000여 명의 전쟁고아를 수송한 주인공은 헤스대령으로 알고 있다.
그렇지만 영화 '전송가'의 실제 주인공은 고(故)러셀 브레이즈델 목사다.
이 역시 감동의 드라마다.
브레이즈델 목사는 6.25 전쟁 발발 직후 미 제5공군사령부 군목(중령)으로 배속됐다.
그는 당시 한국의 전쟁고아들을 '아이들은 병에 시달리고 해충으로 뒤덮혀 있었다. 많은 아이들이 모든 것을 포
기한 채 죽음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고 회고록에 썼다.
그와 미군, 자원봉사자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고아들을 돌보는데 몰두했다. 하루에 50여명 이상의 고아들을 사회
복지시설로 데려간 날도 있었다.
그 해 11월 중공군 참전에 따라 피란행열로 뒤덮혔을 때 브레이즈델 군목은 후방으로 떠나는 군 부대 차량 등에
고아들을 실어 보냈지만 서울엔 여전히 1000여명의 고아들이 남아 있었다.
그는 이 고아들을 인천으로 옮겼으나 해양수송이 불가능, 다시 김포로 이동 시키는 등 초인적인 노력을 기우렸.
다. 적군이 서울에 들이닥치기 직전인 12월 20일, 그는 극적으로 미 공군의 작전책임자를 만나 제주도로 향하는
C-54 수송기 16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전쟁고아들의 성공적인 수송작전은 브레이즈델 군목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브레이즈델 군목(우측 아래)이 비행기에서 아이들을 안아 내리고 있다>
-광주 충현원 소장 사진-
이와같은 브레이즈델 군목의 노력이 있었음에도 영화 '전송가' 개봉이후 헤스대령만이 전쟁고아의 아버지로 유
명해졌다. 브레이즈델 군목은 이에 대해 말이 없었다. 영화 수익금이 고아 돌보는데 쓰여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지난 해 초 자신의 회고록 '전란과 아이들, 그 일천 명의 아버지'가 나오면 그 판권을 옛 고아원 체험시설을
복원하는 광주 충현원에 주도록 유언을 남긴뒤 97세의 나이로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숨졌다.
한국의 '쉰들러 리스트'인 브레이즈델 목사의 아들 카터 브레이즈델(72)씨가 얼마전 한국을 찾았다.
지난 5월 1일 광주 충현원에서 열린 고 러셀 브레이즈델 목사의 추모식과 회고록 출판기념회에 참석했다.
그는 "하나의 좋은 행동은 또 다른 좋은 행동을 낳는다. 옳다고 생각하면 누가 뭐라던 그 일을 하라"는 아버지의
회고록 내용도 공개했다.
우리에게 감동을 준 세 분의 전쟁고아 아버지들은 소리없이 한국민들에게 충고한다.
한국이 경제대국으로 성장한만큼 '입양 후진국'이란 불명예를 씻고, 전 세계 분쟁국가에서 제2, 제3의 한국인 '전
쟁고아 아버지'가 나와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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