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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

[동영상-'처절한 장진호 전투'], 북경 조선전쟁박물관의 미 보병연대 기

문화재방송 2013. 6. 25. 01:55

 

 북경 조선전쟁박물관 소장 사진들
 자료출처:http://cafe.daum.net/greenty/LwVg/331?docid=3750725444&q=%BA%CF%B0%E6%20%C1%B6%BC%B1%C0%FC%C0%EF%B9%DA%B9%B0%B0%FC%20%BC%D2%C0%E5%20%BB%E7%C1%F8%B5%E9&r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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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월 27일은 정전협정에 서명한 날입니다.

한국전쟁 정전협정조인 55년을 맞아 북경 조선전쟁박물관이 소장하고있는 사진들을

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1950년 11월 27일 - 12월 1일 사흘간 장진호탈출작전이 전개되었읍니다.

온세상이 눈으로 덮혀있었고 그리고 계속해서 눈발이 휘날리고 있었읍니다.  

칼날같은 바람과 강추위속에 장진호 동쪽 비탈길 4십리를 전투와 후퇴를 밤낮없이 계속하면서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나오는데 미병력 3000명중에 1000명이 전사했읍니다.

그때 빼앗긴 미제31보병연대 깃발이 북경 조선전쟁박불관에 걸려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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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0월 14일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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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0월 25일 - 11월 5일 전개된 일차 공세

중공군은 제38군, 39군 그리고 40군이 일차공세를 해 왔는데 각군은 3만명의 병력으로 되어 있읍니다.

거의 보병으로 짜여저 있으며 경험이 풍부한 군으로 총기 다루는 기술과 군순찰등 베테랑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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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0월 말 중공군 42군 제124사단 사령관 린치앙이 혜산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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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1월 2일 일차공세때 후퇴하고 있는 미군병력을 앞질러가서 미군 장교를 생포하는 장면.

미 제2대대 B중대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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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차 공세에서 8기병연대소속 미군 생포장면.

중공군은 9mm Sten Mark2 기관총과 일제 6.5mm 38구경 장총을 들고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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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1월 25일 계천(Gyechon)에서 적을 기다리는 중공군 39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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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0월 25일 운산(Unsan)에서 한국군 6사단을 공격하는 중공군 40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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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 1차 공세, 1950년 10월과 11월사이에 용산봉에 있던 한국군 1사단을 공격하는 장면.

고장(Kojang)에 있던 한국군6사단 7연대와 운산(Unsan)에 있던 15연대는 거의 전멸 되다시피함.

장비와 무기도 다 빼앗겼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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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공세에서 중공군 제4군이 청천강전투에서 소민봉을 공격하고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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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1월 중공군 제39군이 UN군 추럭 수십대를 파괴하고 공격하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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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에서 미32연대 1대대를 공격하기에 앞서 준비하고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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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에서 중공군 80사단이 미군 32연대 1대대를 공격하고있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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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 80사단이 괴멸된 미1대대로 진격해 들어옵니다.

앞에 미군시체가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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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에서 미제57야전포대대와 D중대 그리고 15대대가 버리고 간 장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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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2월 6일 제2차공세에서 평양에 입성하는중공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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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사진설명에 의하면 미제24흑인보병연대에서 생포된 포로라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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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월 4일 독립문을 통과하는 중공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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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월 8일 한강을 넘는 중공군, 3차 공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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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2월 12일  횡성에서 한국군 8사단을 공격하는 중공군.

중공군3개사단과 북한군2개사단이 횡성지역에 있던 한국군 8사단과 3사단을 포위했읍니다.

포위망을 뚫고 원주로 후퇴하는데 병력손실이 극심했읍니다.

2월 11일-13일 사이에 사상자는

한국군 3사단   ---------- 1,238            

          5사단      ---         1,141                          

          8사단      ---         7,465                          

미군    2사단      ---         1,769                                          

         7사단                       190

         187공수연대  --            5

합계                              11,8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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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커에 있는 중공군 7.62mm Ruchmoy Pulemyot 기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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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1월 영국군 포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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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에 참가한 중국 공군.

적기 1대를 추락시키고 3대를 파손시켰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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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4월 24일 제5차공세때

중공군 40군이 미24사단을 포위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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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차공세때 진군하는 중공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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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에 쓰여저있는 글을 읽어주고있는 중공군 장교.

허리에 방망이 수류탄을 차고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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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 T34 대포를 산정상에 숨겨놓고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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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월 개성 정전회담장에서 나오는 북한군과 중국군.

위의 사진들은 중공군측에서 촬영한 것입니다.

 

[만물상] 장진호 전투

1950년 11월 함경남도 장진호(湖)까지 진격했던 미 7사단 3개 대대가 중국군의 매복에 걸려 궤멸당했다. 중국군이 개입하리라는 첩보를 무시한 채 무모하게 내린 북진 명령 탓이었다. 알몬드 10군단장은 "중국의 세탁·청소부 몇몇 때문에 멈춰선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해병 1사단은 되도록 천천히 진격했다. "항상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라"는 소신을 갖고 있던 스미스 사단장은 곳곳에 병력과 보급품을 남겨두고 야전 활주로도 닦아 뒀다.

▶중국군 제9병단장 송시륜은 15만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넌 뒤 낮에는 산에 숨고 밤에만 이동해 장진호 주변에 매복했다. 중국 황포군관학교를 나온 농민유격대장 출신 송시륜은 주력 부대를 산을 따라 배치해 도로로 진군하는 미 해병 1사단과 7사단, 영국 해병 등 3만여명을 커다란 자루에 넣듯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총알과 포탄이 빗발치는 포위망은 계곡을 따라 23㎞에 이르렀다. 영하 45도까지 내려가는 강추위에 병사 절반이 동상에 걸렸다. 스미스 사단장은 "어떤 희생이 있더라도 반드시 돌파하라"고 독려했다. 선두에 섰던 장교는 훗날 이 길을 '지옥불 계곡(Hell fire valley)'이라고 했다. 미 해병은 사망 2500명, 부상 5000명에 이르는 사상자 대부분을 수습해 함께 퇴각했다. 역사상 미군이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됐다.

▶1983년 이 전투에서 싸웠던 미군들이 '초신 퓨(Chosin Few)'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일본 지도밖에 없었던 당시 장진의 일본식 지명 '초신'에, 살아남은 사람이 적다는 뜻의 '퓨(few)'를 붙였다. 소총수로 참전했던 마틴 러스는 '포위망 탈출(Breakout)', 장교였던 조지프 오언은 '지옥보다 더한 추위(Colder than Hell)'라는 책을 펴냈다. 미 해군 순양함 중엔 '초신함(USS Chosin)'도 있다.

▶미 해병 대위 출신 영화감독 브라이언 이글레시아스가 장진호 전투를 기리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다. '초신 퓨' 회원들을 인터뷰해 전멸 위기를 벗어난 영웅들의 이야기를 담는다고 한다. 영화 제목은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이지만 미국인들은 여전히 잊지 않고 기록하고 기념하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6·25 휴전일인 지난 7월 27일을 참전용사를 기리는 국가기념일로 공포했다. '잊혀진 전쟁'이라는 이름은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출처:조선일보 


1950년 12월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의 포위를 뚫고 흥남으로 철수하던 미 1해병사단 장병들이 눈 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AP·미 해병대(USMC)

 

[동영상]장진호 전투(長津湖 戰鬪 Battle of Chosin Reservoir)

 

자료출처:http://cafe.daum.net/seongnampolice/EpbQ/662?docid=1LOEu|EpbQ|662|20110613232329&q=%C0%E5%C1%F8%C8%A3%C0%FC%C5%F5&svc=top3

개마고원 장진호에서 미군 1개 사단이 중공군 7개 사단과 맞서 싸워 흥남부두 피난을 도왔던 장진호 전투를 아십니까?

 

장진호 전투는 미 해병 1사단이 1950년 11월 27일부터 2주간 개마고원 근처 장진호에서 7개사단 규모의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후퇴하기 위해 벌인 전투입니다.

 

이 후퇴작전을 통해서, 미 해병1사단은 10배를 훨씬 넘는 중공군 대 병력의 남하를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 속에서 중공군의 함흥지역 진출을 2주간이나 지연시켰으며,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마지막 관문인 황초령(黃草嶺 장진호 입구 함경남도 장진군 신남면과 함주군 하기천면 사이에 있는 고개 1,210m)을 차단 포위한 중공군도 격멸, 와해시키고 죽음의 함정을 탈출하였고, 흥남에 도착, 흥남 부두를 통해 남쪽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12월 9일에는 사령부로 부터 10군단 전 병력은 흥남 지역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12월 10일 6시 선두부대가 함흥에 들어오는 것을 시작으로 12월 11일 저녁까지 후위 부대 전부가 함흥으로 철수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흥남 부두에서 14일 부터 24일까지 전설적인 해상 퇴각이 벌어지는데 무려 민간인 10만과 UN군 12만이 겨우 백수십척의 배로 탈출하는 전설의 흥남 철수 작전이 이루어지지요.

이 전투의 결과로 전사 3637명, 비전투 사상 3657명을 기록했고 중공군 또한 부상 12500명, 전사 25000명으로 부대 자체가 무력화 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덕분에 초기 중공군 계획대로 흥남까지 밀고 내려간다는 것은 좌절될 수 밖에 없었지요. 또한 이런 심각한 타격으로 인해 미8군까지 기사회생 할 수 있었고 당시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침낭 속에서 잠을 자는 것도 연속된 공격으로 쉽지 않았고 혹여 쉬더라도 침낭 자크를 잠그는 일은 금지되었었습니다.

또한 이 전투의 치열함은 최고 등급의 명예 훈장 (Medal of Honer) 수상자가 131명인데 그 중에 해병대 수상자가 46명이고 그 중에서 장진호 전투로 수상한 자가 13명이 되니 이 며칠의 싸움이 얼마나 무시무시 했는지를 알려주는 사례라 할 수 있겠습니다.

 

장진호 전투로 미군 7200여명이 희생되고 중공군은 미군의 10배 이상이 사망했습니다. 당시 흥남에서 1만4,000명을 태우고 거제도까지 항해한 빅토리아호는 전세계인의 가슴을 울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