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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

[국보 훈빈정음 비화] 안방 벽 도배로 붙여진 몇장의 해례본, 한글로 재탄생

문화재방송 2013. 10. 7. 00:03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 동상 왼손에 든 책은 국보 제70호 解例本(훈민정음원본)이다.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 동상 아래 지하의 '세종대왕 이야기' 

 

 

 

 

 

한글은 수많은 의혹과 오해속에서 언문(상스런말), 암클(여자의글), 아햇글 (아이들의 글)등

천한 글자 취급을 받아오다, 한글 사랑에 평생을 바쳐온 주시경이 어느집 안방 벽에 도배로 붙여진

몇장의 해례본 내용을 찾아내어 한글의 문법을 최초로 정리하고, 1894년 갑오개혁때 언문을

국문이라 개칭한것을, 1913년 국문을 한글이란 이름으로 바꾸었다. 1928년 주시경이 세운

조선 어학회에서 “가갸날”을 “한글날”로 바꾸었다.
 
지구상 수천개의 언어중에 백여개의 말만이 글자를 가지고 있으며, 만든 목적과  만든 사람

만든때를 알고있는 문자로 한글이 유일하다.
 
근대화를 통하여 상당한 정도의 물질적 성취를 이루고, 한글이 디지털시대를 맞아  가장 과학적이고

효율적 문자로  인증을 받는 시점이지만, 한글 창제 567돌을 맞아 이제 내가 누구인지? 한글은 내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에 대해서도 돌아볼 때이다.

 

국보 제70호 훈민정음(訓民正音)
 

 

 

일반설명
이 책은 조선 세종 28년(1446)에 새로 창제된 훈민정음을 왕의 명령으로 정인지 등 집현전 학사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한문해설서이다. 책이름을 글자이름인 훈민정음과 똑같이 ‘훈민정음’이라고도 하고, 해례가 붙어 있어서 ‘훈민정음 해례본’또는 ‘훈민정음 원본’이라고도 한다. 전권 33장 1책의 목판본이다.

구성을 보면 총 33장 3부로 나누어, 제1부는 훈민정음의 본문을 4장 7면으로 하여 면마다 7행 11자씩, 제2부는 훈민정음해례를 26장 51면 3행으로 하여 면마다 8행 13자씩, 제3부는 정인지의 서문을 3장 6면에 1자 내려싣고, 그 끝에 ‘정통 11년’(1446)이라 명시하고 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훈민정음은 세종 25년(1443)에 왕이 직접 만들었으며, 세종 28년(1446)에 반포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이 책에서 서문과 함께 정인지가 근작(謹作)하였다는 해례를 비로서 알게 되었다. 또한 한글의 제작원리도 확연하게 드러났다.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본이다.
전문설명
이 책은 조선 세종 28년(1446)에 새로 창제된 훈민정음을 왕의 명령으로 정인지 등 집현전 학사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한문해설서이다. 책이름을 글자이름인 훈민정음과 똑같이 ‘훈민정음’이라고도 하고, 해례가 붙어 있어서 ‘훈민정음 해례본’또는 ‘훈민정음 원본’이라고도 한다. 전권 33장 1책의 목판본이다.

구성을 보면 총 33장 3부로 나누어, 제1부는 훈민정음의 본문을 4장 7면으로 하여 면마다 7행 11자씩, 제2부는 훈민정음해례를 26장 51면 3행으로 하여 면마다 8행 13자씩, 제3부는 정인지의 서문을 3장 6면에 1자 내려싣고, 그 끝에 ‘정통 11년’(1446)이라 명시하고 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훈민정음은 세종 25년(1443)에 왕이 직접 만들었으며, 세종 28년(1446)에 반포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이 책에서 서문과 함께 정인지가 근작(謹作)하였다는 해례를 비로서 알게 되었다. 또한 한글의 제작원리도 확연하게 드러났다.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본이다.

이 훈민정음(訓民正音)은 현존하는 유일한 판각(板刻) 원본이다.

내용은 총 33장을 3부로 나누어, 제1부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의 본문을 4장 7면에 면마다 7행 11자씩, 제2부는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를 26장 51면 3행에 면마다 8행 13자씩, 제3부는 정인지(鄭麟趾)의 서문(序文)을 3장 6면에 1자 내려 싣고, 그 끝에 정통(正統) 11년(1446) 9월 상한(上澣)을 명시하고 있다. 그 해가 바로 세종(世宗) 28년(1446)에 해당한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은 '세종실록(世宗實錄)'에 의하면, 세종 25년에 친제(親製)하여 동 28년 9월에 반포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본서(本書)에서 서문과 함께 역시 정인지(鄭麟趾)가 근작(謹作)하였다는 해례(解例)를 비로소 알게 되었고, 이것에 의하여 한글 제작의 원리도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한글의 자양(字樣)에 있어서도 제정 당초의 모습을 본서(本書)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훈민정음

 

 


합자해

 

 

 

 

 

용자례

 

 

 


종성해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어 있는 『훈민정음(해례본)』은 국보 제71호로 지정되어 있는 『동국정운』권1, 6과 함께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주촌의 이한걸(李漢杰) 씨 댁에 전래되던 것이다. 1940년에 발견될 당시 원 표지와 첫 두 장이 떨어져 나가고 없었는데 그 후 보충하여 끼워 넣는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다.

   
▲ 훈민정음 해례본 (사진제공 문화재청)

 세종 서문의 마지막 글자 ‘이(耳)’가 ‘의(矣)’로 잘못 씌어지고, 구두점과 권성이 잘못되었거나 빠진 것도 있다. 이 책에는 구점(句點; 右圈點)과, 두점(讀點; 中圈點) 및 파음자(破音字)의 성조를 표시하는 권성(圈聲)도 정확하게 표시한 책이다. 구두점과 권성을 다 표시한 것은 『성리대전(性理大全』(1415년)의 체재와도 일치한다. 최근에 이 책 외에 또, 다른 『훈민정음(해례본)』 한 책이 경북 상주에서 발견된 바 있다. 

훈민정음은 1997년 10월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국보 제71호 동국정운<권1,6>

동국정운<권1,6>(東國正韻<卷一,六>)

-서울 성북구  (간송미술관)-

 


                                   동국정운(권1,6)
 

조선 세종 때 신숙주, 최항, 박팽년 등이 왕의 명으로 편찬하여 세종 30년(1448)에 간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표준음에 관한 책으로, 6권 6책이며, 활자본이다.

중국의 운(韻)에 관한 책인 『홍무정운』에 대비되는 것으로, ‘동국정운’이란 우리나라의 바른 음이라는 뜻이다. 당시 혼란스럽던 우리나라의 한자음을 바로잡아 통일된 표준음을 정하려는 목적으로 편찬, 간행되었다.

이 책은 세종 29년(1447) 9월에 완성되자 간행하라는 임금의 명이 있었고, 이듬해인 세종 30년(1448) 11월에 성균관, 사부학당 등에 보급되어, 이 책이 간행되고 보급되었던 시기를 알 수 있다.

현재 이 책은 전 6권 가운데 1권과 6권만이 남아있다. 내용을 보면 본문의 큰 글자는 나무활자이고, 작은 글자와 서문의 큰 글자는 갑인자이다. 글자체는 큰 글자가 진양대군의 글씨이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한자음을 우리의 음으로 표기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지고 있으며, 국어연구자료로서의 중요성도『훈민정음』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또한 한자음의 음운체계 연구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훈민정음의 글자를 만든 배경이나 음운체계 연구에 있어서 기본자료가 된다.

 


                                    동국정운(권1,6)
 

 

조선 세종 때 신숙주, 최항, 박팽년 등이 왕의 명으로 편찬하여 세종 30년(1448)에 간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표준음에 관한 책으로, 6권 6책이며, 활자본이다.

중국의 운(韻)에 관한 책인 『홍무정운』에 대비되는 것으로, ‘동국정운’이란 우리나라의

바른 음이라는 뜻이다. 당시 혼란스럽던 우리나라의 한자음을 바로잡아 통일된 표준음을

정하려는 목적으로 편찬, 간행되었다.

이 책은 세종 29년(1447) 9월에 완성되자 간행하라는 임금의 명이 있었고, 이듬해인

세종 30년(1448) 11월에 성균관, 사부학당 등에 보급되어, 이 책이 간행되고 보급되었던

시기를 알 수 있다.

현재 이 책은 전 6권 가운데 1권과 6권만이 남아있다. 내용을 보면 본문의 큰 글자는

나무활자이고, 작은 글자와 서문의 큰 글자는 갑인자이다. 글자체는 큰 글자가 진양대군의

글씨이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한자음을 우리의 음으로 표기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지고 있으며,

국어연구자료로서의 중요성도『훈민정음』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또한 한자음의 음운체계 연구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훈민정음의 글자를 만든 배경이나

음운체계 연구에 있어서 기본자료가 된다.

 


세종대왕 기념관

 

 

 

홈페이지에 액자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한글실

 

힌글실 내부

 

한글 이전의 우리 글에 대한 설명

 

삼강행실도 (三綱行實圖)
3권 1책. 1428년(세종 10) 진주의 김화(金禾)라는 사람이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이 일어나자,

세종은 효행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책을 펴내 백성들에게 읽히고자 이 책의 간행을 명했다.

직제학(直提學) 설순(偰循) 등이 우리나라와 중국의 서적에서 군신·부자·부부에 모범이 될 만한

충신·효자·열녀 각 35명씩 105명을 뽑아 그 행적을 그림과 함께 기록·간행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효자 4명, 충신 6명, 열녀 6명을 실었다. 각각에 그림을 붙이고 한문으로 행적을 기록한 뒤,

원문을 칠언절구로 정리하고 그중에 몇 편은 사언일구(四言一句)의 찬(贊)을 붙이기도 했다.

〈삼강행실도〉의 그림에는 당시 유명한 화가인 안견(安堅)·최경(崔涇)·안귀생(安貴生) 등이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 수록된 그림들은 조선시대 판화의 주류를 형성하는 삼강오륜 계통의 판화들에 큰

영향을 끼쳤다.

 

〈삼강행실도〉는 1481년(성종 12) 한글로 언해되어 간행되었고, 이후 1729년(영조 5)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 중간되었다. 판화사·국어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며 조선 전기의 풍속을 살필 수 있는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훈민정음 설명 

 

 

 

세종대왕기념관
  

조선시대 세종대왕의 성덕과 위업을 추모하고 이를 길이 보존하기 위해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1970년 11월 준공하고 1973년 10월 개관하였다. 갖가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세종대왕기념관에는

한글실, 과학실, 국악실, 일대기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옥외전시물에는 ‘세종대왕신도비(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2-1호)‘와‘수표(수위측정기)(보물 838호)‘

등이 있다.

 홈페이지 http://www.sejongkorea.org


세종대왕기념관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