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규(1911 ~ ?)
평안북도 영변면 출생. 평양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독학을 위하여 학교를 그만두고 형 최완규를 도와 1935년 고려영화사를 만든다. 37년을 전후하여 김신재와 결혼하고, 이필우의 조수로 영화 녹음을 배웠다. 1939년 천일영화사의 <국경>을 통해 감독으로 데뷔하였고, 이후 <수업료>(1940), <집없는 천사>(1941)를 연출했다. 일제 말 그는 <태양의 아이들>(1944), <사랑의 맹세>(1945), <신풍의 아이들>(1945) 등 친일 어용영화를 연출하였는데, 해방 이후에는 이를 만회하려는 듯 <자유만세>(1946), <죄없는 죄인>(1948), <독립전야>(1948) 등 이른바 광복영화 3부작을 만들었다. 이후 <장추화 무용>(1948), <희망의 마을>(1948), <파시>(1948) 등의 몇 편의 기록영화를 만들었고, 6.25 전쟁기간에 납북되었다. 최인규는 무엇보다 홍성기, 신상옥, 정창화와 같은 한국영화의 걸출한 감독을 배출한 감독으로, 해방 후 한국영화의 아버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김종원 외, 『한국영화 감독사전』, 한국영화감독협회 기획, 국학자료원, 2004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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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향과 한정 |
해방 이후 가장 처음 만들어진 한국 영화는 쌀도둑들을 소탕하는 어린이들의 모험담 [똘똘이의 모험]입니다. 하지만 이런 어린이 영화로 새 역사의 문을 여는 게 체면이 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건지, 대부분 역사학자들은 최인규의 [자유만세]를 해방 이후 만들어진 최초의 한국 영화라고 우기고 있답니다. 사실 이 작품은 괜찮은 전주곡입니다. 말 그대로 '자유 만세'를 외쳐대는 내용도 그럴싸하게 묵직하고, 기술적인 완성도도 뛰어난 편이어서, 신상옥은 이 영화부터 한국 영화가 '잘 들리고, 잘 보이는' 단계에 들어섰다고 지적하기도 했지요.
영화의 내용은 정말로 자유 선언입니다. 일본의 패망이 가까워지고, 우리의 주인공 독립투사 아저씨는 조국 독립을 위해 막판 질주를 하는 중이죠. 그러는 동안 동료들이 죽고 투사 아저씨는 총에 맞고, 우연히 투사 아저씨가 숨어사는 집의 딸인 간호사 아가씨는 목숨을 걸고 투사 아저씨를 병원에서 탈출시킵니다.
유감스럽게도 우린 이 작품의 일부밖에 볼 수 없습니다. 전쟁을 거치는 동안 프린트 일부가 소실되었기 때문이지요. 남은 러닝타임은 50분. [대장금]의 한 에피소드보다도 짧습니다. 아마 결말도 날아간 게 아닌가 싶어요. 영화는 투사 아저씨랑 간호사 아가씨가 탈출하는 것으로 끝나는데, 그것만으로는 너무 갑작스럽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둘이 광복의 날을 앞두고 죽는 결말일지도 몰라요.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정보들이 워낙 믿음직하지 못해, 이것도 확신 못하겠지만요.
[자유만세]는 한국 버전 [무방비 도시]일까요? 주제만 따진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요. 아마 당시 관객들에게도 그만한 충격과 감동을 주었을 거고요. 이 영화에 감동먹은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 뿐이 아니었던지, 당시 장제스 총통이 이 영화를 보고 '자유만세, 한국만세'란 휘호를 선사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후대의 관객들이 여전히 그 감동을 물려받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일부는 불완전한 프린트 상태 때문이기도 하고 내용 전달이 거의 안되는 대사 때문이기도 하죠 (때로는 영어 자막이 훨씬 잘 전달된답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완성도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자유만세]는 결코 [무방비 도시]만큼 잘 만든 영화가 아닙니다. 신상옥의 말을 살짝 뒤튼다면 '간신히 잘 들리고, 잘 보이는' 정도예요. 가끔 흥미로운 장면들이 발견되고, 몇몇 장면은 설정상 감동적이며, 그런 거친 느낌이 강한 현실감을 제공해주기도 하지만, 영화의 기술적/예술적 미숙함은 어쩔 수 없습니다. 신파조인 스토리는 경직되어 있고, 설교만 잔뜩 늘어놓는 잘난 투사 아저씨는 정말로 따분한 캐릭터이며, 연기도 그렇게 재미있는 편은 아니지요.
우리가 영화에 몰입할 수 없는 건 영화외적인 이유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의 감독 최인규가 이 작품을 만들기 전에 다섯 편이나 되는 일제 선전 영화들을 감독했다는 걸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당시가 험한 시대였다는 건 알고 있고, 당시를 고개숙이며 살았던 대가 약한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관대해질 수도 있지만(로셀리니도 [무방비 도시] 이전의 경력이 그렇게 깨끗한 건 아니니까요), 이 영화가 토해내는 독립투사 예찬이 굉장히 위선적으로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어요.
50여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 우리가 보는 [자유만세]의 한계는 어쩔 수 없이 명백합니다. 이유가 무엇이건, 이 영화는 생명력있는 고전이 되는 대신 예의상 언급하게 되는 참고 자료로 남게 된 듯 해요. (04/01/30)
기타등등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건 박태현의 음악이 아닌가 싶습니다. 당시엔 영화음악에 들일 돈이 없었기 때문에,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론 코플랜드, 무소르그스키, 퍼셀과 같은 작곡가들의 기존음악을 재활용하고 있는데, 박태현이 그럴싸하게 재편집해 영화음악화시킨 이 음악들은 굉장히 효과적입니다. 특히 투사 아저씨가 자전거를 타고 일경에게 잡힌 동료를 추적하는 장면에 나오는 무소르그스키의 음악을 한 번 들어보세요. 그 편집과 활용이 얼마나 교활한지요.
1946년 제작된 항일영화. 고려영화협회 작품으로 전창근(全昌根)이 시나리오를 쓰고 최인규(崔寅奎)가 감독하였으며 촬영은 한형모(韓瀅模), 음악은 박태현(朴泰鉉)이 맡았다. 독립투사인 주인공 최한중은 감옥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일본경찰에 쫓기면서도 항일투쟁을 계속하던 중 체포된 동지를 구하러 나섰다가 포위되자 일본경찰 간부인 난부[南部]의 정부 미향의 집에 피신하지만 헌병대와의 총격전에서 부상을 당하여 대학병원에 수감, 치료를 받는다. 그를 사랑한 간호사 혜자의 도움으로 다시 탈출,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마침내 광복을 맞는다. 광복의 기쁨 속에 한중은 그를 위하여 목숨을 잃은 미향의 무덤을 찾아간다는 내용이다. 《자유만세》는 광복 후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나 새로 탄생한 한국영화의 첫 작품이다. 치밀한 극적 구성, 밀도있는 연출 등이 돋보이는 40년대 한국영화의 대표적 작품이다.
영화 <자유만세>는 1946년에 만들어진, 해방이후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독립영화이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소리가 나오지 않고 자막만 봐야했기 때문에 조금 답답하기도 했다. 자유만세는 최인규를 감독으로 전창근과 황여희가 주연을 맡았다. 이 영화는 일제강점기하에 한 독립군의 독립활동과 사랑을 그린 영화이다. 수업시간에는 여주인공이 일본군에 붙잡힌 남자주인공을 구하는 데까지 밖에 보지 못했다. 그래서 뒷이야기가 궁금해진다. 영화 <자유만세>에 나오는 근대한국의 모습은 매우 인상 깊었다. 비록 영화는 흑백이었지만 영화 속 근대한국의 모습은 지금과 거의 비슷한 생활양식을 보여줬다. 우선 전근대의 한국의 모습은 의식주를 기본으로 보면 의복은 한복을 입고 한국에서 생산되는 음식을 먹고 대부분의 한국의 집은 한옥이며 그 형태는 초가집이나 기와집 등이었다. 전쟁이 일어나고 일제가 우리나라에 주둔하게 되고 지배하게 됨으로써 우리나라의 여러 가지 생활모습의 형태는 매우 다양하게 변화하였다.우선 한옥이었던 한국의 집은 양옥 등 서구의 양식으로 변화하게 된다. 일본식 건물이 축조 되고 현재의 우체국인 우정국, 신식병원, 일제의 사상 등을 가르칠 신식학교의 설립 등이 이루어진다. 영화에서도 이러한 건물의 변화를 볼 수 있었다. 여주인공이 일하는 병원은 그전의 한약방등과는 다른 신식 건물이었고 병원 안에 침대를 놓는 등 그전의 양식에서 서구의 방식을 따라하게 되었다.다음으로 음식의 변화 양상을 보면 주로 집에서 먹던 음식을 밖에서 사먹는 것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일제시대가 지속되는 동안 음식을 판매하는 전문 가게가 생겨나고 커피숍이나 대중식당 등이 만들어 졌다. 그리고 커피 등 서양 음식의 도입과 일본에서 건너온 오뎅이나 여러 가지 음식들이 소개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