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합천 영암사지
쌍사자석등이 뿜어내는 씩씩한 기운
합천 영암사지(靈岩寺址, 사적 제131호)는 황매산 남쪽 기슭에 있는 절터다. 절터 앞에 서면 우선 모산재가 뿜어내는 기상에 압도당한다. 폐사지의 스산한 기운 따위는 없다. 대신에 씩씩함이 느껴진다. 쌍사자석등(보물 제353호)과 삼층석탑(보물 제480호), 그리고 귀부(보물 제489호)는 절터에서 나온 건물 받침돌, 각종 기와조각들과 어우러져 있다.
쌍사자석등에 얽힌 마을 사람들의 충정은 유명하다. 1933년께 일본인이 반출하려던 것을 마을사람들이 막아 면사무소에 보관해 놓았다가 1959년 절터에 암자를 세우고 원래 자리로 옮겨왔다. 석등 화사석 네 면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새겨져 있다. 사천왕은 불법을 지키는 신이다.
그러니 이 석등을 지키려는 마을 사람들의 의로움이 예사로 여겨지지 않는다. 9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지는데, 쌍사자 엉덩이의 토실토실하고 부드러운 실감은 만져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영암사가 언제 지어졌는지 일러주는 기록은 없다. 다만 서울대학교도서관의 적연국사자광탑비(寂然國師慈光塔碑) 탁본에 고려 현종 5년(1014년)에 적연(932~1014)이 여기서 83세에 입적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세워졌으리라 짐작이 된다. 건물터는 여느 절간과 다른 특징이 많다. 금당이 있는 축대의 가운데가 튀어나와 있고 그 좌우에 가파른 돌계단이 있는 점, 금당터 면석에 얼굴이 새겨져 있고 앞면과 좌우 세 면에 사자상 등의 동물상이 돋을새김돼 있는 점 등이 그렇다. 또 최근 이어진 발굴에서는 회랑까지 확인돼 이 절의 사세가 예전에는 아주 대단했음을 알 수 있게 했다.
영암사지 삼층석탑은 쌍사자석등의 남다름에 밀려 조금은 소박해 보인다. 통일신라의 석탑 양식을 잘 이어받았으나, 기둥 표현이 약하고 지붕돌 받침수가 줄어들어 있다. 위쪽 금당터를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자리잡은 영암사지 귀부들은 아주 잘 생겼다. 전체 모습은 거북이지만 머리는 용이다. 새겨진 것들이 정교하면서도 강한 생동감이 느껴지는데 두 거북을 비교하면서 보는 재미도 있다. 하나는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있어 씩씩해 보이고 다른 하나는 고개를 숙이고 있어 다소곳하다.
- 삼가장터
1919년 3월1일 그날의 의로운 만세
삼가장터는 여느 오일장터와 마찬가지로 규모가 예전만 못하다. 삼가는 한우가 유명한데 장날이 아니어도 한우 요리를 맛볼 수 있는 식당들이 들어서 있다. 삼가장터 한 모퉁이에는 삼가 3·1만세운동기념탑이 있다. 꼭대기에는 선열을 형상화한 모습이 양쪽으로 새겨져 있는데, 하늘을 나는 모습에서 힘찬 기상이 우러난다. 앞면에 새긴 그림은 아름답고 뒷면에 쓰인 글씨는 씩씩하다. 한쪽에는 100년 전 의병활동을 벌인 이들을 기리는 빗돌도 놓여 있다.
1919년 삼가 장날인 3월22일 두 차례 일어난 이 거사에는 삼가·쌍백·가회면 주민 등 참가자가 무려 3만여 명에 이르렀다. 삼가처럼 작은 지역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만세를 불렀음은 쉽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일이다. 일제의 진압은 무자비해서 40명 남짓이 목숨을 잃었고 150명 정도가 크고작게 다쳤으며 50명 가량이 감옥으로 끌려갔다. 게다가 그에 앞서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의병전쟁이 벌어졌을 때도 이곳 지역민들은 떨쳐 일어났다. 이런 기개의 배경에는 같은 삼가 출신인 남명(南冥) 조식(1501~1572)의 영향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라고 지역 사람들은 보고 있다.
삼가장터 둘레에는 삼가장터 3·1만세운동기념탑 외에 삼가 기양루(岐陽樓,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93호)와 삼가향교(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29호)가 있다. 기양루는 옛날 고을 수령들의 연회장으로 쓰였던 건물이라 한다. 동쪽에 남아 있는 동헌터와 관련지어 볼 때는 삼가현 관아의 문루로도 짐작되는데 합천에서 가장 오래된 누각이다. 삼가를 휘감으며 흐르는 양천 건너 교동마을에는 우람한 삼가향교가 언덕배기 높은 데 자리해 있다. 풍토를 교화한다는 유교 특유의 계몽주의가 담긴 현판 풍화루(風化樓)가 걸린 대문은 올려다보면 주눅이 들 정도로 기세가 대단하다. 안에 있는 명륜당 건물 축대는 보통과 달리 화강암이 아니고 지역에서 많이 나는 검고 푸른 퇴적암을 얇게 겹쳐 쌓아 눈길을 끈다.
- 남명 조식 선비길과 생가터
경(敬)과 의(義)로 집약된 선비정신
남명 조식 생가로 이어지는 '선비길'과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로'가 겹쳐 있는 두모마을에는 커다란 정자나무가 있고 그 아래 정자가 하나 놓여 있다. 여기를 일러 괴정(槐亭) 쉼터라 하는데 백의를 입은 이순신이 권율이 있는 합천 초계 율곡 도원수부로 가던 길에 들러 하룻밤을 묵으면서 다리쉼을 한 자리이다.
이순신이 종들에게 마을 사람들 쌀로 밥을 짓지 말라고 일렀는데도 종들이 이를 지키지 않자 엄히 다스리고 쌀을 갚아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지는 곳이다.
남명 조식 선생 생가지(경상남도기념물 제148호)는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에 있다. 남명은 30대 후반에 이미 '(경상)좌도에 퇴계 이황이 있다면 우도에는 남명이 있다'는 찬탄을 받았다고 한다.
남명의 사상은 경(敬)과 의(義)로 집약된다. 모든 사람과 세상 만물을 공손하게 대하고 세상살이에서 의로움을 실천하라는 선비정신이었다.
퇴계와 남명은 둘 다 벼슬살이를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퇴계는 임금의 부름을 뿌리치지 못하고 벼슬을 했고 남명은 한번도 그 부름을 받아들이지 않아 처사(處士)로 남았다. 대신 그는 한편으로는 학문을 닦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자를 길렀다. 그가 길러낸 제자들이 없었다면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는 더욱 큰 위기에 직면했을 터이다. 임진왜란 육전과 해전을 통틀어 첫 번째 승리를 기록한 의병장 곽재우도 남명의 문인이었고 합천을 지켰던 의병장 정인홍(1535~1623)도 남명의 제자였다. 곧게 살다 간 남명의 이런 영향은 시대를 뛰어넘어 근대로까지 이어졌다. 그가 태어난 고장 삼가에서 을미의병이 많이 나왔고 일제강점기 3·1만세운동에서도 삼가는 다른 데와는 크게 달랐다.
이어지는 뇌룡정(雷龍亭,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129호)은 1549년 남명이 지은 정자다. <장자>에 나오는 '연묵이뢰성 시거이용현(淵默而雷聲 尸居而龍見), 깊은 연못과 같이 묵묵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우레처럼 소리치고, 시동처럼 가만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용처럼 나타난다'에서 따왔다. 과연 제대로 된 선비라면 그래야 마땅하겠다. 정자 안으로 들어가면 같은 글귀가 양쪽에 나란히 붙어 있다.
뇌룡정 바로 옆 용암서원은 남명의 학문과 사상을 따르고 기리기 위해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용암서원 앞에는 남명 흉상과 을묘사직소를 새긴 커다란 돌덩이가 나란히 놓여 있다. 단성소라고도 하는 이 상소문은 명종 임금이 1555년 내린 단성현감 자리를 받지 않고 오히려 임금을 호되게 나무란, 경(敬)과 의(義)에 입각한 꼿꼿함이 그대로 표현된 명문으로 이름높다. 생가는 1970년대 새마을사업으로 사라졌다는데 한동안 방치되다 발굴을 거쳐 2012년 11월 현재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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