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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

[등록 문화재]최은희 출연,한국 최초의 문예 불교 영화, '마음의 고향'

문화재방송 2013. 12. 17. 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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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 드라마
필름정보 : 35mm/흑백/스탠다드
상영시간 : 76분
제작사 : 동서영화기업사
출연 : 변기종, 유민, 오헌용, 최은희, 김선영, 남승민, 석금성, 최운봉,
차근수
스탭 : 원작: 함세덕, 각본: 곽일병, 제작·기획: 이강수, 촬영: 한형모,
조명:
고해진, 편집·녹음: 양주남, 음악: 박혜일, 효과: 이상민,
현상:
최규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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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규의 1949년 작 ‘마음의 고향’은 해방기를 대표할 만한 작품이다. 얼마 전까지 제작자가 보관해온 16㎜ 프린트의 열악한 상태로만 볼 수 있었으나, 2005년 일본 국립필름센터에서 잘 관리마스터 필름을 입수했다고 한다. 따로 복원 작업을 거치지 않았으나 영화의 상태는 놀랍도록 양호하다.

‘마음의 고향’은 함세덕의 희곡 ‘동승’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지금껏 수많은 극단이 이 작품을 무대에 올렸으며, 2002년에는 주경중이 연출을 맡아 영화로 재등장한 적이 있다. 한국영화사연구가 김종원은 세 가지 측면에서 ‘마음의 고향’의 특별한 가치를 찾는다.

그의 글에 따르면 ‘마음의 고향’은 최초의 해외 교환 상영작이고, 당시 항일영화 사이에서 보기 드문 문예영화이며, 한국의 첫 번째 불교영화다. 한국 불교영화는 안타깝게도 장르 영화로 안착하진 못했지만, 시발점인 ‘마음의 고향’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해외에 많이 알려진 한국 불교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과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 드리운 ‘마음의 고향’의 그림자를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도성의 어머니는 세 살 먹은 아기를 절에 버리고 떠났다. 주지 스님의 손에 의해 도성은 어린 스님으로 성장한다. 소년은 깊은 산속을 떠나 바깥세상에 나가고 싶고, 어머니의 따뜻한 품이 그립다. 소나무에 새겨 놓은 금만큼 자라면 어머니가 올 거라는 나무꾼 아저씨의 말에, 도성은 툭하면 소나무에 키를 잰다. 하지만 올라가는 금에 맞춰 자라기를 벌써 여러 번, 어머니는 소식 한 번 전하지 않는다.

어느 날 서울 아씨가 공양을 바치러 온다. 예쁜 그녀를 보고 도성은 꿈에 그린 엄마를 만난 듯 마음이 설렌다. 어린 아들을 병으로 잃은 그녀 또한 도성에게 정을 느낀다. 이윽고 아씨는 도성을 수양아들로 받아들이기를 결심하는데, 도성의 업보를 아는 주지 스님은 반대 의사를 밝힌다.

‘마음의 고향’은 불교의 말씀을 친밀한 방식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아이를 잃은 두 여인과 버려진 소년을 통해 인연을 맺는다는 것의 뜻을 묻는다. 감동적인 내용 못지않게 영화의 외형도 인상적이다.

‘마음의 고향’은 이제 감독으로 더 익숙한 한형모(1917~1999)가 카메라를 잡던 때의 영화다. 그는 담담한 톤으로 고혹적인 한국미를 그려 보인다. 도성의 생모가 슬픔으로 떠나는 장면이 압권이다. 풀과 나무와 산과 물, 그리고 길이 어우러진 풍경은 흘러간 시간처럼 다시 보기 어려운 시적 흥취를 자아낸다.

‘마음의 고향’의 또 다른 기쁨은 갓 스물을 넘기던 시절의 최은희(85)를 만나는 데 있다. ‘마음의 고향’은 그녀의 세 번째 출연작이다. 최은희가 1960년대에 출연한 영화에 익숙한 관객은 그녀의 앳된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질 법하다.

 

 

 




 

영화 '마음의 고향'

                            파리 교민이 지닌 옛 한국 영화


  몇개 남아 있지 않은 1940년대 영화 작품 가운데 1948년작 [마음의 故鄕]
(尹龍奎 감독)을 이 작품의 제작자인 파리 거주 李康洙씨(74)가 지니고 있
다. 이 영화는 국내에도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자료 부족을절감하고 
있는 영화 관계자들을 기쁘게 할 것으로 보인다.[마음의 故鄕]은 李씨 개인
의 인생항로를 바꿔 길고긴 他國살이로 이끈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咸世德 원작 희곡 [童僧]을 영화로 만든 것이며 李康洙씨가 시
나리오로 각색하고 기획 제작도 맡았다.출연진은 卞基鍾 石金星 金鮮英 등 
당시 유명배우와 무명시절의 崔銀姬 그리고 아역의 柳民 등이다.촬영은 잘 
알려진 韓瀅模.
  이강수씨는 30세때 이 작품 하나만을 만들고는 영화 제작을 계속하지 못했다.
그는 처녀작에 대한 애착 때문에 40여년간 일본과 프랑스로 삵의 터전을 옮
겨다니면서도 꼭 챙겼다.흑백 16mm 필름인데 보존 상태가 비교적 좋은 편이
다.
  이 영화 주인공은 어느 절의 12살 애기중 道成.이 소년은 얼굴도 모르지
만 착하고 아름다운 어머니가 언젠가 찾아올 것이라고 믿는다.실상인즉 그 
어머니는 고아로서 절에서 성장했으며 어느 남자와 눈이 맞아 도주했다가 
세살 된 도성을 절에 맡기고는 또 다른 남자한테 간 뒤 소식이 없었다.소년
은 이런 내력을 모른다.
 죽은 아들의 齋를 지내러 온 젊고 친절한 미모의 과부 서울아씨(崔銀
姬)가 도성을 수양아들로 삼기로 한다.이 무렵 도성의 생모(金鮮英)가 마음
을 돌려잡고 아들을 찾으러 왔다가 이 사실을 알고는 장래를 위해 아들이
라고 불러보지도 못하고 홀로 슬픔을 억누른채 돌아선다.
 입양은 다른 일 때문에 보류된다.주위 사람의 탄식을 귓곁에 얼핏 들으면
서 도성은 서울아씨와 만나던 애절한 표정의 아주머니가 생모라는 것을 깨
닫는다.봇짐을 꾸려 어머니를 찾으러 떠나는 도성의 걸음걸이가 힘차다.
도성 역 柳民의 연기가 훌륭하고 金鮮英 또한 인상적이다.뒷날 대스타가 되
었고 아직도 현역으로 있는 崔銀姬의 젊을 적 모습을 볼 수 있다.卞基鍾(主
持역)과 石金星(과부의 어머니역)의 이름은 옛 영화애호가들에게 향수를 느
끼게 할 것이다.
 배우 尹靜姬씨는 이 영화를 보고나서 {보고 싶었는데 정말 좋은 영화
였다}면서 {崔銀姬씨의 데뷔작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李康洙씨 말로도
{崔銀姬씨가 전에 다른 작품에도 출연했지만 인정을 받고 있지는 못했다}는 
것으로 보아 출세작으로 보는 데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지금 보더라도 이 영화는 흠잡을 만한 데가 별로 없는 작품이다.李씨의 회
고 대로 개봉 당시 신문들의 찬사가 대단했을 법하다.李承晩 대통령이 각료
들과 함께 감상하고는 법무부 소년원 순회 상연을 지시했다고 한다.
 아역 배우 柳民은 좋은 배우로 성장했을 수도 있을 터인데 {그 뒤 난리가 터
져서 그 통에 어찌 됐는지...} 李씨는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다고 한다.李
씨 자신 또한 {전쟁이 아니었으면 영화 제작을 더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강수씨는 직업적 문필가는 아니었으나 문학을 좋아하여 틈만 있으면 시 소설 
희곡 시나리오를 썼으며 그중 [흘러간 水平線]이란 소설은 신문(어느 신문
인지 본인은 기억하지 못했으나 부인이 결혼 전해인 1940년에 읽었다고 말
함)에 [春人]이란 필명으로 연재했다고 한다.
  영화를 좋아해서 시나리오를 써보곤 했지만 영화 제작 경험도 없으면서
[마음의 故鄕]을 만들게 된 것은 咸世德의 신문 신춘문예 당선 희곡 [童僧]
이 지닌 인간미가 너무 좋아서였다}고 그는 말했다.이 영화를 만드느라 집
을 잡히고 은행 돈을 끌어댔는데 {은행이 영화계에도 돈을 빌려주었다더라}
하고 화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범한무역이라는 회사의 일로 1950년 가족과 함께 日本 도쿄로 건너
가 살게 되었다.가지고 간 [마음의 故鄕]을 일본인 친구에게 보여 준 것이 
그를 영화 수입상인 유니온 영화사에 입사케 하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안정
된 일본 생활을 보장해주었다.업무 때문에 프랑스에 자주 갔다가 파리의 예
술적 환경에 끌려 1960년 가족과 함께 일본을 떠났다.
 생계를 위해 파리에서 일식집을 시작했는데 先見之明이 있었던지 그 뒤 일
본인 유럽 관광바람을 타게 되어 재미를 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들 다섯을 두었으며 이들중에서 몇이 식당업을 이어받았다.
  李씨는 신병으로 거동과 대화가 자유롭지 않으나 [마음의 故鄕]에 대
해서는 되도록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했다.<파리 = 朴康文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