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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

[문화유산 답사기]돌과 나무에 새겨진 신비한 그림과 글자 속으로 2

문화재방송 2013. 12. 26. 00:37

 

 

- 흥해 이팝나무 군락
이팝나무 서른네 그루가 빚어내는 꽃축제

 

 

흥해 이팝나무 군락(경상북도기념물 제21호)은 흥해향교(대성전은 문화재자료 제87호) 뒤쪽으로 상수리나무와 뒤섞여 자라는 이팝나무 서른 네 그루를 이른다. 고려 말 또는 조선 초 향교를 지은 후 기념으로 심은 이팝나무에서 씨가 떨어져 번식했으리라 짐작된다. 마을 가운데 공원에 자리잡은 100∼150년 가량 된 이들 나무에 꽃이 피면 장관을 이룬다.
이팝나무는 여름의 문턱에 들어서면 마치 뻥 튀어놓은 쌀밥처럼 하얀 꽃이 핀다고 붙은 이름이다. 이팝나무에 꽃이 많이 피고 적게 핌에 따라 그 해 농사의 풍흉을 점쳤는데 여기에는 다 까닭이 있었다. 이팝나무는 물이 많은 곳에서 잘 자라는 식물이므로 비가 알맞게 내리면 꽃이 활짝피고, 그렇지 못하면 제대로 피지 못한다. 비는 벼농사에 영향을 끼치는 만큼 오랜 경험과 관찰을 통해 도출된 결과였다. 그러고 보면 가뭄에도 물 걱정이 없고 항상 바다와 함께 흥한다는 뜻이 담긴 '흥해(興海)' 라는 지명도 농사와 관련이 깊다 할 수 있다.

 

 

포항 달전리 주상절리(천연기념물 제415호)는 신생대 제3기(대략 200만 년 전)에 분출된 용암이 식으면서 굳은 것으로, 돌기둥이 높이 20m 너비 100m로 모여 있는 모습이 마치 병풍을 펼쳐놓은 듯하다. 주상절리는 대부분 수직으로 서 있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 주상절리는 위쪽은 80도 정도 기울어져 있지만 아래로 내려오면서는 거의 수평에 가까운 기울기로 휘어져 있어 특이하다는 얘기를 듣는다. 용암이 땅 밑에서 지표로 솟아 오른 후 수평 방향으로 흘렀기 때문이다.
이처럼 흘러내린 방향이 유별나서 멀리서 보면 한옥 기와지붕 모습으로도 보이고 마치 부채를 활짝 펼친 모습으로도 보인다. 장작을 켜켜이 쌓아놓은 것 같기도 하다. 달전리 주상절리 앞에서면 타임머신을 타고 아득한 시대로 돌아가 있는 듯한 신비로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포항 북송리 북천수(천연기념물 제468호)는 곡강천을 따라 2.4km로 길게 조성된 솔숲이다. 현재 남아있는 우리나라 마을숲 가운데 세 번째로 길며, 규장각에 있는 <흥해현지도>와 <한국지명총람> <조선의 임수> 등에도 기록돼 있는 예부터 이름난 숲이다. 옛날부터 소나무는 뿌리가 깊어 방풍림으로 쓰였는데, 흥해읍 수해 방지와 바람막이 역할을 했다.
정월대보름에 숲 속 제당에서 동제를 지내고 마을 앞산에서 산제를 지내며 한 해 전에 병에 담아 묻어둔 소금물의 상태를 보고 그 해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풍습이 전해는 등 오랜 기간 마을주민들의 신앙 대상이었다. 규모나 가치로 보면 사람들 발길이 잦을 것 같은데 뜻밖에 한산하고 조용하다. 여기 서쪽 끄트머리 흥해 서부초등학교에는 굵직한 소나무들이 무리를 지어 있는데 그림처럼 아름답다. 여기 북천수에는 사람들이 지금도 나무를 꾸준하게 심고 있다. 마을숲을 과거 유산으로만 여기는 대신 지금도 손을 보태어 숲을 키우는 마음이 아름답다.

 


- 영일 칠포리 암각화군
규모 면에서 우리나라 최대

 

 

바닷가에 나와 앉은 영일 칠포리 암각화군(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49호)이 바위와 나무에 새겨진 문화유산 여행길의 종착지다. 여기 암각화군은 규모에서 우리나라 최대다. 여행 삼아 다니면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데는 두 군데다. 하나는 길 가다가 오른편 공장 있는 곳에서 산으로 100m 정도 올라가는 기슭(칠포리 201번지)에 있고 다른 하나는 '암각화길' 이라 이름 붙은 이 도로가 바닷가쪽으로 더 나아가 국도 20호와 만나지며 왼쪽으로 휘어지는 왼편 언덕배기 들머리에 있다.
암각화가 새겨진 자리는 옛날 사람들의 제사터라 해도 틀리지 않을 텐데, 여기 두 곳은 모두 제사 지내기에 적격인 자리들이다.
산기슭에 있는 암각화는 모두 세 군데로 흩어져 있다. 가장 위에 있는 바위에는 제법 암각화가 많은데 가운데는 잘록하고 아래와 위가 널찍한 실패 또는 두툼한 칼손잡이 모양 그림이 여럿 새겨져 있고 알구멍(性穴)도 많이 만들어져 있다.
바닷가 언덕배기 들머리 암각화는 고인돌에 새겨져 있는데 뚜렷하게 잘 보이지는 않으나 칼손잡이 모양과 화살촉 모양을 하고 있다.
거기 새겨져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거기에 바위가 있었고 또 절박한 사람이 있어서 무엇인가를 빌고 바라는 심정을 거기에 새겨 넣었던 것이다.
지금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절박한 그 무엇은 무엇일까. 그 무엇을 이루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천전리 서석의 두 남녀는 연인일까, 오누이일까

 

천전리 각석이 있는 골짜기는 이름이 서석골이다. 이를 일러주는 명문이 바로 천전리 서석(書石)이다. 이 서석은 천전리 각석 아래쪽에 있다. 우리 글로 옮기면 이렇다. <을사년(법흥왕 12년, 525년)에 사탁부 갈문왕이 찾아 놀러와 처음 골짜기를 봤다. 오래된 골짜기이면서도 이름이 없어 서석곡이라 이름짓고 좋은 돌을 얻어 글자를 새겼다.> 여기 서석곡에 사탁부 갈문왕과 동행한 사람은 누구일까? <함께 놀러 온 우매(友妹) 여덕광묘(麗德光妙)한 어사추여랑님이다.>
<과거 을사년 6월18일 새벽(昧)에 사탁부 사부지 갈문왕이 누이 어사추여랑님 함께 놀러 온 이후 올해로 14년이 지났다.> 여기 사부지는 법흥왕의 동생이다.
이어지는 글은 이렇다. <누이님을 생각하니 누이님은 이미 돌아가신 분이다. 정사년(537)에는 갈문왕도 돌아가셨다. 왕비 지시혜비는 애타게 그리워했다. 기미년(539) 7월3일 왕과 누이가 함께 써놓은 서석을 보러 골짜기에 왔다.> 이번에는 사부지 갈문왕의 왕비가 여기에 온 것이다.
왕비와 동행한 사람들도 적혀있다. <셋이 함께 왔는데 무즉지태왕비 부걸지비와 사부지왕 아들 심맥부지가 함께 왔다.> 무즉지태왕은 법흥왕이라 하니 그 왕비 부걸지비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박씨 보도부인이다. 아들 심맥부지는 한 해 뒤(540년)에 왕위에 오르는 진흥왕이다.
상황을 재구성해 보면 주인공 자격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사부지 갈문왕과 누이 어사추여랑, 그리고 갈문왕의 조카이면서 아내이기도 한 지시혜비, 그 어머니인 법흥왕비 부걸지비(사부지 갈문왕에게는 형수 겸 장모), 마지막으로 지시혜비의 아들 심맥부지 등 다섯이다.
여기서 해석이 엇갈리는 대목은 '우매(友妹)' 와 '새벽(昧)'이다. 한쪽에서는 우매를 벗으로 사귀는 누이(같은 여자)로 풀고 다른 한쪽은 벗(友)을 별 뜻 없이 꾸미는 글자일 따름이라고 본다. 벗으로 사귀는 누이로 보면 사부지 갈문왕과 어사추는 연인(그 때 근친혼이 성했기에 둘은 친족일 수도 있다)이 되지만 별 뜻이 없다고 여기면 말 그대로 손아래누이가 된다.
‛새벽(昧)’에 눈길을 두는 쪽에서는 나들이의 목적이 제사 지내기에 있다고 본다. 귀신이 활동하는 때가 밤이라는 데에 착안한 얘기다. 반면 놀기가 목적이라 여기는 이들은 (음력) 6월18일과 7월3일이 여름철임을 내세워 피서하러 왔다고 본다. 개연성이 더 높기는 오누이설 쪽인 것 같다.
먼저 세상을 떠난 어사추와 사부지를 그리워하던 왕비가 그이들이 함께 새겨놓은 서석을 보러 나왔다는 내용도 이런 생각을 좀더 뒷받침해 준다.

 

출처: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