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문화재방송.한국 www.tntv.kr

문화유산 답사기

[문화유산 답사기] 의로움을 실천한 옛사람의 얼을 따라 2

문화재방송 2013. 12. 1. 07:20

 

 

- 의병장 곽재우 생가터와 충익사
임진왜란 당시 처음 의병 일으킨 홍의장군

 

 

의령 충익사(忠翼祠)는 임진왜란 당시 처음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킨 망우당(忘憂堂) 곽재우(1552~1617) 홍의장군과 17장령을 비롯해 무명 의병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남겨진 곽재우 유물(보물 제671호)은 잘 보존된 장검을 비롯해 말갖춤(마구), 포도 문양 벼루, 사자철인, 화초문백자팔각대접 등이다. 앞에 있는 의령 중동리 충의각(忠義閣,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522호)은 어느 한 곳도 쇠못을 치지 않은 우리나라 전통 목조건물이다. 옆에는 곽재우장군유적 정화기념비도 우뚝 솟아 있다.

 

 

충익사의 정원은 아주 아름답게 잘 가꿔져 있다. 키가 8.5m에 가슴높이둘레가 3m에 이르는 모과나무(경상남도기념물 제83호)도 있다. 지금은 여기 서 있지만 원래는 수성마을을 지키던 당산나무였다. 줄기가 근육처럼 울퉁불퉁하게 골이 패여 있는데, 오래된 모과나무에서 볼 수 있는 긴 세월을 견디어낸 연륜이겠다.

세간리 은행나무 금줄

의령 유곡면 세간리 곽재우 생가터 앞은 늦은 가을이면 온통 노란 물감을 풀어놓은 듯하다. 어린 시절 장군이 놀면서 호연지기를 기르고 학문을 연마했다는 600년 된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302호)가 두눈 가득 들어온다. 마을을 지켜주는 당산나무로, 해마다 음력 정월 초열흘에 은행나무에 금줄을 치고 '목신제(木神祭)'를 지내면서 풍년과 안녕을 빌었는데 제사 비용은 이 나무에서 나오는 은행을 팔아 마련했다니 나무의 크기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은행나무 바로 옆에 곽재우 장군 생가가 있다. 여기서 곽재우는 임진왜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재산을 털어 의병을 일으켰다. 마을 입구에 있는 현고수(懸鼓樹,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97호)는 북을 매단 나무라는 뜻으로 곽재우 장군이 의병을 모으고 훈련을 할 때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니 현고수 앞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이 처음 일어난 역사적인 장소다. 의령군이 해마다 열고 있는 의병제전 행사를 위한 성화는 여기에서 불씨를 받아 출발한다.
왼쪽 현고수 오른쪽 세간리마을 정자에 있는 북

1592년 4월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곽재우는 9일 뒤인 4월22일 의병을 일으켰다. 불패신화를 이룩한 바다의 이순신에 버금가는 승리를 그 해 5월과 6월 의령에 있는 강줄기에서 유격전과 심리전으로 일궈냈다. 관군이 아닌 의병이라 활과 창, 농기구가 무기의 전부였을 텐데도 왜군에 맞서 승전함으로써 조선 민관군의 사기를 크게 높였다.
한편 의령 부림면 입산마을에는 백산 안희제(1885∼1943) 선생의 생가(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193호)가 있다. 안채와 사랑채 두 채로 돼 있는데 사랑채는 초가지붕을 이었다. 권위와 꾸밈이 없어 소박한 모습이다.
백산 안희제 선생은 국권회복을 위해 정신적·경제적자강(自强)과 교육과 민족기업 발전에 힘쓴 독립운동가다. 일제 자본에 맞서고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운영했다. 만주
에 건너가 '발해 농장'을 경영하고 학교를 운영하는 등 독립운동에 힘쓰다가 몸을 다쳐 귀국한 1942년 일제에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받은 끝에 보석으로 풀려나왔지만 이듬해 숨지고 말았다.

 

안희제 생가

 

 

 

- 보덕각·망우정
의롭고도 외로운 길을 걸었던 뜻

 

왼쪽 보덕각 오른쪽 쌍절각

 

쌍절각(雙節閣)은 임진왜란 때 경남 합천 초계 마진전투에서 왜군과 싸우다 숨진 손인갑(1544~1592) 장군과 아들 손약해의 넋을 기리기 위해 1609년 의령군 봉수면 신현리에 세운 것인데 1943년 지정면 성산리로 옮겼다. 보덕각(報德閣, 문화재자료 제66호) 역시 곽재우 장군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1739년 임진왜란 의병의 첫 전투지이자 승전지인 이곳에 세웠다.

보덕각과 쌍절각을 알리는 빗돌

당시 영의정 번암(樊巖) 채제공(1720∼1799)이 비문을 썼다. 합천에서 의령으로 이어지는 여정에서는 '앎에서 끝내지 말고 몸소 실천하라'고 강조했던 남명의 정신이 그의 제자 곽재우로 실현된 자취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보덕각이 있는 기강(岐江, 거름강) 나루는 낙동강과 남강이 만나는 자리다. 곽재우는 1592년 5월4일과 6일 갈대밭에 군사를 숨겨두고 강물 아래에는 나무 말뚝을 박아둔 채로 왜군들이 배를타고 오기를 기다려 꼼짝 못하게 한 다음 화살을 쏘아 무찔렀다. 6월 정암진에서 이뤄진 두 번째 승전은 강을 잘 건널 수 있도록 왜군이 꽂아놓았던 표지를 뻘밭 쪽으로 옮겨놓음으로써 승전의 기초를 닦았다.
마지막 걸음은 창녕군 도천면 우강리 망우정이다. 망우정은 곽재우가 말년을 보낸 곳이다. 그이는 전라도 영암으로 귀양 갔다가 돌아온 다음 1602년부터 망우정에 머물렀다. 선조와 광해군의 요구로 잠깐잠깐 벼슬살이를 한 때는 빼고 한결같이 여기 머물렀다. 왜 그랬을까? 아마 제대로 죽기 위해서라고 짐작하는 이들이 많다. 전공이 높은 사람인데도 모함을 받아 죽임을 당하는 등 세상이 어지러우니 벼슬을 하면 오히려 명줄만 줄인다고 봤을 것이다.

망우정과 유허비

곽재우는 또 의병을 일으키느라 재산을 써버리고 패랭이를 만들어 팔았다고도 한다. 말년에는 곡기를 끊고 신선처럼 살았다는데 그로서는 최선을 선택했는지도 모르겠다.
남명 문하에서 동문수학하고 마찬가지로 의병도 일으켰던 합천의 정인홍은 광해군 조정에도 남아 영의정까지 지냈으나 결국 제 명에 죽지 못했다. 망우정은 강가 언덕배기에 숨은 듯 앉아 있다. 망우정에 서면 활처럼 휘어진 강폭을 따라 굽이치는 낙동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뒤에는 1789년 세운 충익공 망우 곽재우 유허비(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23호)와 1991년에 세운 또 다른 유허비가 나란히 서 있다.

 

 

여행쪽지 - 모산재 영암사지(경남 합천군 가회면 둔내리 1659) 영암사지를 더 특별하게 보이게 하는 건 뒤에서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황매산 모산재다. 황매산은 1108m 높이이며, 모산재는 767m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 남명 조식 선비길(경남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 - 외토리 어귀 500년 묵은 느티나무에서 시작된ㄴ 길이다. 생가터를 비롯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뇌룡정, 선생의 덕을 기리고 위패를 모신 용암서원 등을 만날 수 있다. / 충익사(경남 의령군 의령읍 중동리 467-2) 문의 055-573-2629 / 보덕각·쌍절각(경남 의령군 지정면 성산리) / 망우정(경남 창녕군 도천면 우강리)


 

 

*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