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별별미술마을 1
귀애정이 있는 귀호리, 화산리
영천 귀애정(龜厓亭, 문화재자료 제339호)은 공조참의를 지낸 귀애(龜厓) 조극승(1803~1877)을 추모하기 위해 동생인 성재(省齋) 조규승(1827~1908)이 지은 정자다.
귀애정에 들어서면 마음이 확 열린다. 담장 없이 건너편에 길이 있고 그 너머에 들이 있다. 이곳과 저곳의 경계 없음이 만들어내는 자유는 흔하게 느껴볼 수 없는 색다른 경험이다.
귀애 고택이 그 앞에 자리잡고 있는데 그 안에는 연꽃이 활짝 피는 연못이 있고 그 가운데 섬을 만든 다음 육각정자와 돌거북을 두었다. 더불어 귀애정과 정자를 통행하도록 함으로써 아름다움의 극치를 구현했다. 이 또한 누구의 소유로도 느껴지지 않는 것은 경계 없음이 만들어내는 미덕이다.
정자는 장대석 기단 위에 두 칸 온돌방, 한 칸 마루방, 한 칸 온돌방을 기본 구성으로 한 뒤 툇마루를 두고 난간을 설치했으며 누마루는 툭 튀어나오게 만들어 운치를 한껏 높였다.
귀애정이 있는 화남면 귀호리와 붙어 있는 화산면 화산리는 별별미술마을의 일부다. 그래서인지 귀애정에도 설치미술 작품이 몇몇 놓여 있다. 하늘에 별을 다는 모습으로도, 아니면 하늘에서 별을 따는 모습으로도 보이는 아이의 모습도 거기서 나왔다. 같은 별별미술마을 범주에 들어가는 화산면 가상리는 좀 많이 떨어져 있다.
- 별별미술마을 2
'지붕 없는 미술관'의 매력, 가상리와 시안미술관
가상리에 마련된 '별별미술마을'은 마을 전체를 대상으로 삼고 있다. 미술작품은 대체로 폐쇄된 공간에 가둬져 있기 마련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편하게 세상 밖으로 끌어내 놨다.
하여 붙은 이름이 '지붕 없는 미술관'이다. 미술에 대한 특별한 지식이 없어도 불편하지 않다. 가상리 별별미술마을은 그래서 즐겁고 유쾌하다.
미술마을이라고 미술작품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앞산 뒷산과 들에 실개천이 흐르는 농촌으로 재실과 정자·서원이 있는데 그 자체로도 훌륭한 작품이다. 거기에다 옛날 정미소 우물, 정류장, 토성, 빈집, 폐가 등 옛 모습을 찾아내는 즐거움도 쏠쏠하다.
행복을 찾아가는 다섯 갈래의 길을 따라 걷다보면 전국 공모 작가 50명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걷는길(자연상태 미술조각공원 9점), 바람길(찾아다니며 감상하는 거대한 동네미술관 9점), 스무골길 (비보풍수와 예술의 만남 9점), 귀호마을길(물길을 거슬러 올라가 만나는 예술 9점), 도화원길(복숭아 향기를 따라 걷는 길 9점)이 그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2011마을미술프로젝트추진위원회와 지방자치단체가 주관한 '행복마을만들기 프로젝트-신몽유도원도'를 통해 일상생활 공간을 공공미술로 가꿔 놓았다. 특히 마을 앞 버스 정류장이 잘 꾸며져 있어 눈길을 끈다.
가상리 별별미술마을 옆에는 시안(CYAN) 미술관이 있다. '시안'은 그냥 편안(安)하게 보시라(視)는 뜻. 폐교를 활용한 유럽식 건축물로 꾸몄는데 작가들의 작품 전시와 지역민들에게 교육서비스를 제공하는 지역 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로 지정돼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폐교의 느낌을 최대한 살려 공간 차체를 작품처럼 만들어 놓았다.
2005년 한국여행작가협회가 선정한 '폐교를 활용한 가장 아름다운 미술관'으로, TV 드라마 촬영지로도 인기를 끌고 있다. 전국 작가들의 파격적이고 수준 높은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어 언제 찾아도 그 발품을 아깝게 하지 않는다.
- 임고서원
포은 정몽주의 일편단심을 기리는 곳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리>(이방원 '하여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정몽주 '단심가')
이 시조만큼은 대개 외우고 있을 것이다. 별을 찾아 가는 문화유산 여행길의 마지막은 임고서원(臨皐書院, 경상북도기념물 제62호)이다.
여기는 죽어서 우리 역사에서 별이 된 단심가의 주인공 정몽주(1337~1392) 선생을 기리는 서원이다. 임고서원 소장 전적은 보물 제1109호, 포은 정몽주 영정은 보물 제1110호로 지정돼 있다.
정몽주는 여진족 토벌과 왜구 정벌에도 공을 세웠고, 외교관으로도 능력을 발휘했다. 또 성균관에서 경서를 강의한 선생으로도 부족함이 없어 '동방이학지조(東方理學之祖)'로 일컬어졌던 이다. 위기에 빠진 고려를 지키기 위해 죽음으로 맞서 절의를 지킨 포은의 고향은 영천이다. 그래서 영천 사람들은 임고서원을 세웠고 이 서원은 소실과 중건·정화를 거치면서 지금처럼 남았다.
서원 앞에는 500년 햇수의 은행나무가 지나온 세월을 껴안은 채 서 있다. 살아서는 그이를 쓰러뜨린 사람이 권세와 영화를 누렸지만 세월이 흐른 다음에는 이렇게 처지가 뒤바뀌었다.
*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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