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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8월 29일 국치일]나라를 빼앗긴 울분으로 자결한 순국선열을 기리며...태극기(조기) 게양

문화재방송 2014. 8. 27. 00:01

 

"8월 29일 국치일(國恥日)에는 태극기(조기)를 게양합시다"

 

인천광역시는 지난 1월 9일에 제정된

‘인천시 국기 게양일 지정 및 국기 선양 등에 관한 조례’에 따라

나라를 일제에게 강탈당한 치욕을 잊지 않기 위해

8월 29일 국치일에 각 기관은 물론 일반 가정에서도 태극기(조기)를 게양하도록 홍보해 왔다. 

 

 

29일 조기로 게양된 태극기(인천 월미도 스텔라 마리스 호텔)

 

 

한일 병합 조약(韓日倂合條約, 일본어: 韓国併合ニ関スル条約 (かんこくへいごうにかんするじょうやく)), 한일 합방 조약(韓日合邦条約), 또는

한일 병탄 조약(韓日倂呑條約)은 1910년 8월 22일에 조인되어 8월 29일 발효된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이루어진 합병조약(合倂條約)이다.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제3대 한국 통감인 데라우지 마시타케가 형식적인 회의를 거쳐 조약을 통과시켰으며, 조약의 공포는 8월 29일에 이루어져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흔히 한일 합방 늑약(韓日合邦勒約) 또는 국권피탈(國權被奪), 경술국치(庚戌國恥) 등으로도 호칭한다.

 

을사조약 이후 실질적 통치권을 잃었던 대한제국은 일본제국에 편입되었고,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었다. 특이한 점은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성립한 당시에는 조약의 이름이 존재하지 않았고, 순종이 직접 작성한 비준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병합 조약 직후 수많은 우국지사들이 스스로 목슴을 끊었고 대대적인 항일운동이 전개됐다.

 

 

 민영환의 자결

충정공 민영환(忠正公 閔泳煥. 1861 ~ 1905),

1905년 11월 17일 을사보호조약으로 조선은 허울만 남은 나라가 되자

같은 달 30일 민영환은 왕조의 몰락에 책임을 지고 자결로 속죄했다.

 

.

 

<충정공 민영환 선생의 유서>

 

오호라, 나라의 수치와 백성의 욕됨이 바로 여기에 있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경쟁하는 가운데 모두 멸망하려 하는도다.

무릇 살기를 바라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하는 자는 삶을 얻을 것이니 여러분께서

이를 어찌 헤아리지 못하리오?  나 영환은 다만 한번 죽음으로 우러러 임금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그럼으로써 우리 이천만 동포형제에게 사죄하노라.

영환은 죽되 죽지 아니하고, 구천에서도 여러분을 기필코 돕기를 기약하니, 바라건데 우리 동포 형제들은 더욱 더 분발하여 힘쓰기를 더 하고 그대들의 뜻과 기개를 굳건히 하여

그 학문에 힘쓰고 마음으로 단결하여 힘을 합쳐서, 우리의  자주 독립을 회복한다면 

죽은 나도 마땅히 저 어둡고 어둑한 죽음의 늪에서나마 기뻐 웃으리라.  오호라,  조금도 실망하지 말지어다.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마지막으로 고하노라..... 

 

 

 

민영환 선생이 자결한 후 피묻은 옷을 간직하였던 마루에서 대나무가 솟아 올랐다.

민영환의 피를 먹고 대나무가 솟아 났다는 이른바 "혈죽(血竹)"사건은

당시 1906년 7월5일 대한매일신보에 보도되어 커다란 화제가 됐다.

 

 

더욱이 발견된 대나무 잎의 숫자는 45개로 민영환의 나이와 같았다고

하여 더욱 놀라웠다고 한다.

 

광복 이후 대나무를 고이 수습하여 보관하고 있던 충정공의 부인 박수영 여사는 이를 폭 8cm, 길이 50cm 정도의 나무 상자에 보관하여 자줏빛 보자기로 쌓아 1962년 고려대학교에 기증했다.

고대박물관에는 혈죽과 1906년 일본인 사진기사 기쿠다가 촬영한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일본인 기쿠다가 촬영한 혈죽 사진과 1906년 안중식이 그린 혈죽도(血竹圖)

 

 민영환의 자결 소식을 듣고 조병세, 홍만식, 이상철 등 많은 인사들이 뒤이어 자결하였고, 전국 곳곳에서 義兵이 일어 났다.

 

또 있다.

“망국에 한 사람도 자결않는다면 되겠는가”

매천 황현은 조선왕조 최후의 대표적인 시인이자 문장가이며, 나라가 망하는 비참한 때를 

맞아 선비로서의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신 순국열사였다.



전남 광양시 석사리의 매천이 태어난 집. <사진작가 | 황헌만>

매천은 세종 조 명승 황희의 후손이지만

임진왜란 때의 유명한 장수 황진의 10대 후손이다.

 

진주성 싸움에서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한 장수의 혼이

매천의 피에도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망국의 소식을 듣자 비탄에 빠진 선비 매천은

참다운 선비가 어려운 시절에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곰곰 생각했다.

선비정심의 본질을 보여 준 것이 매천의 자결이었다.

 

 

 

 

 

 

 

 

   매천의 절명시 4수(친필). <사진작가 | 황헌만>

 

 

 

 

 




그의 짤막한 유서(遺書)는 떨리는 손으로 쓰여졌다. “내가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다만 나라에서 선비를 양성한 지 500년인데, 나라가 망하는 날에 한 사람도 나라를 위해 죽어가는 사람이 없다면 어찌 통탄스럽지 않으리오. 나는 위로 하늘에서 받은 떳떳한 양심을 저버리지 못하고 아래로 평소에 읽었던 책의 내용을 저버리지 않으려 눈을 감고 영영 잠들면 참으로 통쾌함을 느끼리라. 너희는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지어다”라는 유서는 비장하기보다 오히려 담담한 선비의 일상적인 담론으로 느끼게 해준다.


"충(忠)이 아니라 인(仁)을 이룸이다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유시에서 같은 뜻을 밝히고 있다.
큰 집을 지탱함에 서까래 반쪽의 공도 없었으니 曾無支厦半椽功
다만 인을 이루려 함이지 충은 아니라네 只是成仁不是忠
겨우 윤곡(尹穀)을 쫓는 데에 그쳤을 뿐이니 止竟僅能進尹穀
당시의 진동(陳東)의 행동 실천 못함 부끄러워라 當時愧不陳東"

이렇게 읊어서 죽는 이유를 또 설명했다. 나라에 벼슬하여 정치에 관여한 일도 없고 녹을 받아 생활한 적도 없으니 나라에 충성하려는 생각보다는 인간된 도리, 선비된 도리를 이루려는 인(仁)을 실현하려는 뜻에서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다만 북송 때의 진동처럼 간신들을 처단하자는 독한 상소를 올려 죽음당한 일을 못하고, 겨우 남송 때의 윤곡처럼 나라의 망함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나 했으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냐고 한탄하는 대목에서 그의 의기는 더욱 굳세게 보인다.

새나 짐승도 슬피 울고 바다와 산도 찡그리오 鳥獸哀鳴海岳嚬
무궁화 우리나라 이미 망했구려 槿花世界已沈淪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옛 역사 회고하니 秋燈掩卷懷千古
글자나 아는 사람 되기가 이렇게 어려운지 難作人間識字人

이 절명시는 글자나 아는 사람, 즉 지식인의 책무가 얼마나 무겁다는 것을 통절히 읊어준 시다. 세상 돌아가는 것도 개의치 않고, 역사의식도 느끼지 않으며 살아가는 일반인들처럼 글을 몰랐다면 왜 죽을 이유가 있겠는가.

옛 성현들의 글을 읽어 인생이 무엇이고 역사와 세상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지식인이기 때문에, 나라가 위기를 당해서 괴롭고 아프다는 내용이 가슴을 떨리게 해주고 있다.

 


역사적 소명의식을 향한 고뇌와 갈등
황현은 일찌감치 벼슬을 포기하고 지리산 자락으로 낙향하였다. 그는 시골에 있으면서도 항상 깨어 있는 정신으로 세상의 흐름에 눈을 부릅뜨고 주시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매천야록』과 『오하기문』을 저술하여 망국까지 무려 47년간의 시대의 흐름을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당대 역사를 향한 올곧은 황현의 시대정신은 벗에게 보낸 편지에 그대로 묻어나온다.

대체로 온 세상은 더욱 각박해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처럼 때때로 의논하고 한가롭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일을 과연 몇 사람과 함께 할 수 있겠으며, 또한 며칠이나 그렇게 해나갈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그저 각자가 애써 자중자애自重自愛하며 문을 닫아걸고, 그간 못다 읽은 책이나 읽으며 서로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그리워하며 자신의 지조를 대략 표하는 정도로 지내는 것이 옳은 일인 듯합니다. 말이 여기에 이르고 보니 저도 모르게 탄식을 하게 됩니다. ― 여정만기與鄭萬箕

1907년 정만기라는 벗에게 보낸 편지다. 을사조약 체결 이후 점점 각박해지는 현실과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는 시대조류에서 이를 어떻게 이겨내야 할 지 막막한 심정을 보여준다. 서로의 속내를 주고받는 것도, 세상사를 토론하는 일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질곡의 상황과 일상의 굴레 앞에서 어찌해야할 지 그저 암담하기만 하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깜깜한 나라의 운명 앞에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지조를 지키고 자중자애할 수밖에 없음을 고백할 뿐이다.

이 무렵 황현은 이런 암울한 세상에서 지식인으로 어떻게 살아야할 지를 두고 항상 성찰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참다운 삶을 위한 고뇌와 그 속내를 벗에게 자주 드러내었다. 황현은 1906년에 선배학자 조창준(趙昌駿, 1834~1910)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내
“세상사가 지금에 와서는 희망조차 없습니다만 충절을 다해야하는 책임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곧장 목숨을 바치는 것이 옳은 지 여부는 어찌 쉽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르신께서 식견이 고명하시니, 이에 혹 저의 미욱함을 깨우쳐 주실 것이 있으신지요? ― 여조자곡與趙紫谷” 라 하여 난세의 상황에서 자신은 어떠한 삶을 살아야하는가를 질문한 바 있다. 이처럼 황현은 나라의 존망이 목전에 닥친 상황을 내면 깊숙하게 끌어안고 참다운 지식인의 사명을 위해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되돌아보았던 것이다.

자결로 보여준 지식인의 길
황현은 나라가 망해 가는 것을 보고, ‘붓’을 가진 선비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별로 없다고 생각하였다. 더욱이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 없는 한 선비로서 그저 자괴감만 들 뿐이었다. 그는 이후 한 편지에서 경술국치가 있기 직전의 상황을 직감이나 한 듯, 자신의 고뇌와 감정을 벗에게 적어 보낸다.
세상이 갈수록 더욱 혼란스러워지고 있어 어떤 때는 완전히 잠들어 깨어나고 싶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병 아닌 마음의 병을 앓고 있으니, 누가 다시 이런 제 심정을 알아주기나 하겠습니까? 소문을 들으면, 북쪽에 큰 소요가 있고 또 청성의 변이 있다고 합니다만, 각 신문들은 검열을 받고 구속을 당하는 상황이라 사실을 보도할 수 없다고 합니다. 지금 온 세상이 귀가 멀고 눈마저 멀어 마치 개벽이 되는 와중의 혼돈 상태와 같으니, 가슴을 치며 미친 듯이 울부짖을 뿐입니다. ― 여이난곡건방與李蘭谷建芳

1910년 7월 28일에 심교心交를 나누었던 이건방(李建芳, 1861~1939)에게 보낸 편지다. 황현은 나라의 운명과 이를 마주 대하는 자신의 느낌을 솔직하게 끄집어낸다. 여기서 갈수록 세상이 혼란스러워져 나라마저 망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을 말하는 한편, 차라리 이러한 예감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을 보지 않고 외면하고 싶다는 심정도 함께 드러낸다. 더욱이 황현은 망국의 광경을 차마 보고 싶지 않다는 간절한 심정을 마음의 병에 빗대고 있거니와, 이는 망국을 원하지 않는다는 역설적 표현일 터이다. 이어서 그는 일제는 자신의 이러한 간절한 심정과 바람에 아랑곳 않고 만행을 일삼고 있음도 드러낸다. 이를테면 일제는 강제병합의 만행에 맞선 민족의 저항과 분노에 언론의 검열과 구속이라는 폭력적 방법을 동원하여 양국의 병합을 추진하고 있다고 폭로하고, 그는 어찌할 수 없는 이러한 현실에 절규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현의 예견대로 조선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병합되고 만다. 황현은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절명시絶命詩 네 수를 남기고, 아편을 먹고 자결한다. 1910년 음력 8월 6일 새벽녘이었다. 그는 절명시 한 수에서 “새도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마저 찡그리니/무궁화 세상 이미 빼앗겨 버렸도다./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 역사 생각하니/인간 세상에 지식인 노릇하기 어렵기만 하구나.” 라 하여 망국을 맞은 지식인으로서의 의식과 자세를 강렬하게 표출하였다.

그러면 망국을 맞은 자신은 어찌해야 하는가? 현실적으로는 그저 무력할 따름이다. 이에 황현은 한 유교지식인의 양심을 지키기 위하여 자결을 택하겠노라 다짐한다. 마침내 그는 지식인으로 자각하고 나라를 위하여 기꺼이 죽음을 택하였다. 황현은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유서에서 “나는 이씨 조정을 위해 벼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씨 조선의 종묘사직을 위해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단지 500여 년 동안 선비를 양성했던 나라에 목숨을 바친 선비가 없다면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는가? 내 위로는 하늘에 떳떳한 양심을 저버리지 않고, 아래로는 평소에 독서한 바를 저버리지 않으려면, 죽음을 택하는 것이 옳다.”고 하며 유학을 배운 선비로 한 지식인으로 소명의식을 다하고자 하였다.

이 점에서 황현은 결코 유학을 기치로 한 중세사회의 이념을 위하여 죽음을 택한 것이 아니다. 오직 글 아는 선비로서의 떳떳한 한 지식인의 양심을 지키고 지식인으로서의 역사적 소명의식을 위해 선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요컨대 그의 자결은 숭고한 것임에 틀림없다. 비록 이러한 자결이 나라와 민족을 위한 최선의 길은 아닐 테지만, 유학을 배웠던 한 선비로서 또한 양심을 지닌 참다운 지식인으로서 역사적 소명을 다하기 위한 선택이었노라고 변명해 줄 수 있지 않을까?

글ㆍ진재교 성균관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

 

나라가 몹시 어수선 할 때에 104회 째 국치일을 맞았다.

순국 선열들의 피로서 찾은 대한민국이건만,
북한 공산정권의 끊임없는 도발과 기세 등등한 국내 종북 좌파 세력으로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일본은 독도를 자기 영토라고 주장하며, 중국은 이어도에 대한 야욕은 물론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의

역사까지 자기 역사라는 이른바 '동북공정'을 국책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 어려운 때에 우리는 망국의 한을 품고 자결하신 충정공 민영환 선생과 매천 황현 선생 등

무수한 순국열사의 애국충정을 기려야 한다.

 

일본이 중학교 교과서에 독도가 자기 영토라고 주장, 100년 후를 예비하고 있음에도

우리나라는 국사 교육을 도외시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현실인가? 

 

특히 일본의 침략 전술은

소리없이 차근 차근 교활하게 전개하는 사실을 우리는 직접 겪은바 있다.

 

개항 이후 경술국치에 이르기까지 일제는 항상 침략의 촉수를 감추고 자신을 한국 독립의 지지자는 물론 근대화의 후원자로 포장하였다. 예컨대 일제는 1876년 강화도조약 제1조에서 “조선은 자주지방自主之邦”임을 내세워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주장하는 개화파의 마음을 잡고, 1894년 “시정개선施政改善”을 표방하며 경복궁 쿠데타를 일으켜 친일 갑오내각의 성립을 지원하였다.

 

나아가 1895년 청일전쟁 강화조약인 시모노세키조약 제1조에서 청나라로 하여금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인정”케 함으로써 청일전쟁을 마치 한국의 독립 전쟁으로 포장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1904년 일왕은 러일전쟁 선전 포고문에서 “동양의 평화와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하기” 위해 전쟁을 개시한다고 함으로써 침략 전쟁을‘동양평화의 성전’으로 미화하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한말의 민족지성들은 일찍부터 일제 침략의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을사늑약’의 체결 시기에 와서야 침략성을 깨닫는 한계를 드러냈다. 그 결과 항일 역량을 키우고 조직하는 데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였고, 나아가 통감부가 설치되어 한국의 내정을 본격적으로 간섭하므로 말미암아 효과적인 항일 구국운동을 전개하기도 쉽지 않았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경술국치 104주년..잊혀져가는 치욕의 역사

SBS | 박아름 기자 | 입력 2014.08.29 21:00 | 수정 2014.08.29 21:45

<앵커>

104년 전 오늘(29일)은 일본이 우리 국권을 침탈한 경술국치일입니다. 광복절과 달리, 달력에 표시조차 안 돼 있습니다. 관련된 유적은 방치돼 있습니다. 물론 수치스러운 역사이지만, 다시는 그런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이 날을 오히려 더 기억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습니다.

뉴스 인 뉴스, 박아름 기자입니다.

<기자>

서울 남산에 자리한 이곳은 104년 전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 통감 데라우치가 조약을 맺은 곳입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주권을 빼앗긴 경술국치의 현장인데, 지금은 아무 건물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흔적이 유일하게 하나 남아 있다고 하는데, 어떤 상태인지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사람들이 쉬어가는 디딤돌로 보이는데, 알고 보면 경술국치 당시 이곳에 세워져 있던 일본 공사의 동상 기반석입니다.

보시다시피 아무런 표지판도 없고 설명도 없어서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이순우/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 하야시라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우리나라 일본 공사로 근무했던 사람이거든요. 을사늑약 당시에 조약 당사자라는 의미도 있고요.]

건물터에는 경술국치 100주년을 맞아 지난 2010년 민간단체가 세운 비석만 하나 놓여 있습니다.

정부나 시 차원의 관리가 전혀 안 되니, 역사적 장소라는 걸 알기 어렵습니다.

[김인영/전북 전주 : 그냥 쉬는 공간 아니에요? (역사적 배경이 있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드나요?) 여기가요? 아뇨, 모르겠는데요.]

광복과 달리 '국치'에 대한 역사는 거의 잊혔습니다.

민간연구소에서 식민 시대 유물이나 친일 행적 자료를 모으고 있지만 전시할 공간은 없습니다.

중국은 일제 침략을 받았던 7월 7일을 대대적으로 기립니다.

올해는 시진핑 주석이 참석해 일본의 과거사 역주행을 비판했습니다.

심지어 침략자였던 일본조차 8월 6일 원폭 투하일에 기념식을 엽니다.

경술국치일인 오늘, 우리 정부는 아무런 행사도 열지 않았습니다.

[윤경로/한성대학교 역사문화학부 명예교수 : 반면교사라는 말이 있듯이, 자랑스러운 역사만 역사가 아니라 잘못된 역사를 기억함으로 인해서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는.]

치욕의 역사도 분명 역사입니다.

기억하기 싫어도 잊지는 말아야, 치욕적인 역사를 반복하지 않는다고 역사학자들은 강조합니다.

(영상취재 : 김세경, 영상편집 : 최은진)    

박아름 기자 

출처:SBS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2560593

 

중국 국치일 기념식, 시진핑 등 지도부 총출동...일본 맹비난 

 

2014-07-07 업로드 · 


앵커

오늘은 중일전쟁의 발단이 된 노구교 사건이 일어난지, 77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중국에서는 7ㆍ7사변으로 불리는 국치일인 셈인데요.

이날을 맞아 중국은 일본의 역사 왜곡에 맞서 총공세에 나선 모습이었습니다.

7ㆍ7사변 77주년 기념행사에는 이례적으로 시진핑 주석도 참석해 아베 총리를 성토했습니다.

베이징 이봉석 특파원 연결해서 자세한 소식 들어봅니다.

이봉석 특파원, 먼저 77년 전 오늘,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전해주시죠.

기자

네, 지난 1937년 베이징시에 있는 노구교라는 다리를 놓고 중국군과 일본군이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해 7월 7일 밤 일본군은 병사 한 명이 사라졌다면서 중국군 주둔지역을 수색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중국군이 거절하자 일본군은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으켜 본격적인 대륙 침략에 나섭습니다.

이미 앞선 1931년 만주를 일본에 빼앗긴 중국은 중일전쟁을 통해 베이징을 비롯한 중원을 일본에 점령당하는 치욕을 맛보게 됩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일본군이 실종됐다고 주장한 병사가 사실은 용변을 보느라 늦었다는 점입니다.

일본군은 수천만명이 사망한 중일전쟁을 병사의 용변을 핑계 삼아 일으킨 것입니다.

앵커

오늘 열린 7ㆍ7사변 77주년 기념행사에는 이례적으로 시진핑 주석도 참석했는데요.

기자

네, 77주년 기념행사는 시진핑 주석 등 중국 지도부가 총출동한 가운데 노구교 인근 항일전쟁기념관에서 열렸습니다.

행사장 뒤에는 '국치를 잊지 말자'라는 표어가 내걸렸습니다.

연설에 나선 시 주석은 일본 아베 신조 총리의 역사 역주행을 어느 때보다도 강한 어조로 비난했습니다.

시진핑 / 중국 국가주석 "누구든 침략 역사를 부정, 왜곡하고 미화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시 주석은 특히 "몇몇 사람이 명백한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면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고 있다"고 역설했습니다.

이 행사에 시 주석이 참석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만큼 일본의 역사 왜곡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메시지가 깔려 있습니다.

앵커

중국 정부는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응하면서 반일 감정을 이용해 애국주의도 고취시키는 모습인데요.

기념행사 말고 일본의 역사 왜곡에 또 어떻게 대응하고 있습니까.

기자

네, 2차 세계대전 이후 중국은 일제 전범 1,100여명을 붙잡아 이들의 죄상에 대한 조사를 벌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중국이 일제 전범들에게서 받아낸 자백 문서는 20만쪽에 달하는데요.

중국은 지난 3일부터 45일 동안 하루에 하나씩 인터넷을 통해 자백 문서 가운데 일부를 공개해오고 있습니다.

7일까지 모두 5탄이 공개됐는데요, 공개된 내용 가운데는 일본군이 중국군 포로 수백명을 살아있는 총검술 교재로 활용했다거나 조선 부녀자 등 20명을 유괴해 위안부로 삼았다는 등 충격적인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시 주석이 최근 방한 때 박근혜 대통령에게 광복 70주년 공동 기념행사를 제안하고 경제 협력이라는 끈으로 독일을 우군으로 끌어들이려 하는 등 중국은 외교적 노력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중국의 이런 행보에 대해 지역 내 평화 협력 구축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난했습니다.

지금까지 베이징에서 뉴스Y 이봉석이었습니다

 

출처:뉴스 Y

http://channel.pandora.tv/channel/video.ptv?c1=06&ch_userid=yunhap&prgid=50805774&ref=da


 

[뉴스 12] 中, 청일전쟁 120주년 해상 추모식

이정민 기자 

등록 2014.08.30 12:30

 

[앵커]
우리는 국치일을 잊었지만 중국은 역사의 치욕을 가슴 깊이, 뼛속까지 새기고 있습니다. 지난달 청일전쟁 발발 120주년 기념의식에 이어 이번에는 중국 해군이 이틀동안 해상 추모행사를 대대적으로 실시했습니다.

이정민 기자입니다.

[리포트]
배 위에 흰 제복차림의 해군 수십명이 나란히 목례합니다. 위로는 '갑오전쟁 120주년 해상 추모식' 이라고 적힌 현수막이 길게 펼쳐져 있습니다.

바다를 향해 포를 쏘고 전몰자를 추모하며 꽃잎을 흘려보냅니다.

중국 동방TV 앵커
"오늘 해군은 산둥성 웨이하이시 유공도 영해에서 청일전쟁에 희생된 영령을 기리는 행사를 해상에서 개최했습니다."

1894년 7월25일, 청일전쟁 발발 120주년을 맞아 지난 27일부터 이틀동안 열린 해상 추모행사 입니다. 

위치는 중국 산둥성 웨이하이 시 유공도 인근 해역. 중국 현대사에서 '치욕'의 현장인 뼈아픈 곳입니다.

중국 관영방송 CCTV는 중국의 해양 굴기와 '중화민족' 부흥을 추진하려면 역사의 치욕을 기억해야 한다고 행사 내용을 비중있게 보도했습니다.

이에 앞서 청일전쟁 발발일이던 지난달 25일, 중국 군은 유공도에서 북해함대 소속군 400여 명을 동원해 기념의식도 가졌습니다.

일본에 패하면서 제국주의의 길이 열어준 청일전쟁을 중국은 온 나라가 통렬한 반성으로 되새깁니다.

이런 차원에서 지난달 시진핑 주석은 중일전쟁의 발단이 된 '7·7사변' 77주년 기념식에서도 침략역사를 잊지말자며 일본을 맹비난했습니다.

TV조선 이정민입니다.

 

출처:조선일보

http://news.tv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8/30/2014083090089.html


황현 “나라 망하는 날 죽는 선비 하나 없어서야…”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사를 말하다

| 제224호 | 20110626 입력
세상은 불공평해 보인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야훼에게,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입니까(예레미야 12장 1절)”라고 따져 묻는다. 그러나 때로 역사는 의(義)의 피가 땅에 떨어져 스며들어야 새로운 싹이 난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매천 황현의 초상. 약간의 사시(斜視)였던 황현의 눈에서 그릇된 세상을 바로 보려는 결기가 느껴진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절망을 넘어서
① 자결자들


임시한국파견대사령부(臨時韓國派遣隊司令部)에서 일본 정규군을 동원해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이른바 ‘남한 대토벌’을 자행하던 1909년 가을. 전라도 구례의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910)은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의 귀국 소식을 듣고 서울로 향했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개성 출신의 김택영이 성균관 진사가 된 것은 나이 42세 때인 고종 28년(1891)께였다. 한미했던 그의 부친은 가묘(家廟)에 이 사실을 고하면서 통곡할 정도로 기뻐했다는 일화가 있다. 김택영은 고종 32년(1895) 이듬해 중추원 참서관(參書官) 겸 내각 참서관이 된다.

그러나 순탄한 듯 보이던 그의 벼슬길은 승정원일기 고종 42년(1905) 10월 11일자에 “전 참서관 김택영을 학부위원(學部委員)에서 해임했다”고 전하는 대로 을사늑약이 그의 인생을 다른 길로 데려갔다. 김택영은 중국으로 망명해 상해(上海) 북방 남통(南通)의 한묵림서국(翰墨林書局)에서 교정일을 보았다. 김택영이 김윤식(金允植)의 소개로 만났던 중국인 장건(張<8B07>)이 경영하는 출판사였다.

김택영은 1914년 장건에 대해 장계자 시록서(張季子詩錄序)를 쓰면서 자신을 ‘같은 현의 신민(新民) 한산(韓産) 김택영’이라고 쓰고 있다. ‘한국 출신’ 한산(韓産)이 자호였다. 김택영은 1927년 끝내 남통에서 사망하는데 현지에서는 ‘한국 굴원(屈原)’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남통시 낭산(狼山)에 ‘한국 시인 창강지묘(韓國詩人滄江之墓)’라는 비석이 있다고 전한다.

1 매천집. 1911년 상해에서 발간됐다. 친구 김택영이 상해로 망명해 출판사에서 일했기에 나올 수 있었던 문집이다. 2 황현 묘. 전남 광양시 봉강면 석사리에 있다. 퇴락한 무덤이 이 시대의 정신세계를 보여 주는 듯하다.
김택영과 황현은 모두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이건창은 철종·고종 때 판서를 역임하다가 고종 3년(1866)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를 점령하자 음독 자결한 이시원(李是遠)·지원(止遠) 형제의 손자였다. 또한 조선 양명학을 뜻하는 강화학파의 적자였다. 이건창은 시대에 뒤떨어지지도 않았지만 부화뇌동하지도 않았다. 그의 눈에는 동학(東學)도 문제였고 개화파도 문제였다.

이건창은 고종 13년(1876) 충청우도 암행어사 시절 목도한 농가의 참상을 ‘농가의 추석(田家秋夕)’이란 시로 남겼다. “서울 부호 집은 항상 좋은 시절이지만, 가난한 농촌사람에겐 추석만이 좋은 때라네(京師富貴地 四時多佳節 鄕里貧賤人 莫如仲秋日)”로 시작된다. 남편은 굶주림을 참으며 작은 논에 모내기를 하고 여름을 넘기지 못하고 굶어 죽었다. 남편이 심은 벼를 수확한 추석날 “유복자 안고 죽은 남편을 향해 오열하다가, 기절한 지 오래지 않아, 돌연히 아전들이 사립문을 부수며, 세금 내놓으라고 소리 지른다(抱兒向靈語 氣絶久不續 忽驚吏打門 叫呼覓稅粟)”로 끝난다.

한성부소윤 시절에는 사실상 상왕 노릇을 하던 청나라 이홍장(李鴻章)의 부하 청국공사 당소의(唐紹儀)에게 맞서 가옥·토지 매매를 금지시킬 정도로 백성을 아꼈다. 이건창에게는 시세(時勢)가 아니라 중심(中心)이 중요했다. 일본군이 서울을 장악하고 동학농민혁명을 무력 진압한 고종 31년(1894) 서울을 떠나 강화도 사기리로 낙향했다. 제1차 김홍집 내각에서 공조참판을 제수했으나 거부했고, 고종 35년(1898) 만 46세로 숨을 거두었다.

김택영이 다시 출국했다는 소식을 들은 황현은 서울에 사는 이건창의 종제 난곡(蘭谷) 이건방(李建芳:1861~1939)과 함께 강화도로 떠나 이건창의 아우 경재(耕齋) 이건승(李建昇:1858~1924)을 만났다. 이건승이 을사늑약 체결 후 황현에게 보낸 편지가 생각났다.

“황운경(黃雲卿:황현)께서는 아직도 인간 세상에 머물고 있습니까? 이보경(李保卿:이건승)은 어리석고 미련해서 구차하게 살아 있을 뿐입니다. 나라는 망했는데 아직 살아 있으니, 사람이 마땅히 죽어야 하는데 살아 있는 것은 다 정상적인 도리가 아닙니다….”

‘나라는 망했는데 아직 살아 있으니’가 그들의 마음이었다. 황현·이건방·이건승은 강화도 양도면 건평리 이건창의 묘를 찾았다. 이건창의 무덤에 술잔을 붓고 절을 올린 황현은 죽은 친구에게 오언율시를 준다. “외롭게 누웠다고 슬퍼하지 말 것을, 그대는 살아서도 혼자가 아니었던가(無庸悲獨臥 在日已離群).”

잘못된 세태와는 어떠한 타협도 거부했기에 이건창은 살아서도 혼자였다. 이건승은 황현에게 보낸 편지에서 “선형(先兄:이건창)께서 살아계셨으면 의(義)를 어느 곳에 두었을지 알 수 없지만 하늘이 준 수명대로 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고도 말했었다. 그랬다. 성현의 말씀을 가슴에 새긴 선비들은 하늘이 준 수명대로 살기 힘들었던 시대였다. 성묘를 마친 황현·이건방·이건승은 서울로 올라와 남산에 올랐다. 이미 남의 것이 되어 버린, 껍데기만 남은 궁궐이 멀리서 보였다. 통곡한 황현은 다시 고향 구례로 내려갔다. 이듬해(1910)가 되자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 일파와 일진회가 누가 망국에 더 큰 공을 세우는지 서로 경쟁했다. 김택영이 중국에서 쓴 황현의 소전(小傳)인 성균생원 황현전(成均生員黃玹傳)에는 “(국망 소식을 듣고) 황현은 비통하여 음식을 먹지 못하다가 하룻밤에 절명시 넉 장을 지었다”고 전하고 있다. 절명시(絶命詩)!

“난리 속에 지내다 머리가 세었네, 몇 번이나 버리려던 목숨이었나, 오늘은 진실로 어찌할 수 없어 바람 앞의 촛불만 하늘을 비추네(亂離滾到白頭年 幾合捐生却末然 今日眞成無可奈 輝輝風燭照蒼天)”…“새 짐승도 슬피 울고 바다 산도 찡그리네, 무궁화 세상이 이미 가라앉아 버렸구나,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천고를 회고하니, 인간 세상 식자 노릇 어렵구나(鳥獸哀鳴海岳嚬 槿花世界已沈淪 秋燈掩卷懷千古 難作人間識字人).”

난세의 두 처신. ‘인간 세상 식자 노릇’이 어려운 사대부와 ‘인간 세상 식자 노릇’을 기회로 삼는 사대부로 나뉜다. 주역(周易)의 대가이자 명필이었던 이완용에게는 식자 노릇이 어렵지 않았다.

황현은 독약을 마시고 나서 자제들을 불렀다. 독이 퍼져 가는 몸으로 “내가 죽어야 할 의무는 없지만, 나라가 선비를 기른 지 오백 년에, 나라가 망하는 날, 한 사람도 죽는 사람이 없어서야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吾無可死之義 但國家養士五百年 國亡之日 無一人死難者 寧不痛哉)”라고 말했다. 국록 한 톨 먹지 않은 황현이 나라가 망했다고 목숨을 버려야 할 의무는 없었다.

인조반정 이래 300년 가까이 집권당이었던 노론의 당수 이완용이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에게 비서 이인직을 보내 망국 조건을 흥정하는 나라, 자신이 모셨던 황제의 지위를 국왕이 아니라 대공(大公)으로 해 달라고 흥정하던 나라에서 국록 한 톨 먹지 않은 황현에게 죽어야 할 의리는 없었다.

그러나 황현은 “내가 위로는 황천이 준 떳떳한 도리도 저버리지 않고 아래로 평일 읽었던 책도 저버리지 않고서 고요히 죽으면 진실로 통쾌하리니 너희는 크게 슬퍼하지 마라”고 덧붙였다. ‘나라에서 선비를 기른 지 오백 년’이기에 선비는 망국 앞에서 목숨을 끊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달려온 아우 황원(黃瑗)에게 황현은 웃으면서 “죽기가 이리 쉽지 않은가. 독약을 마실 때 입에서 세 번이나 떼었으니 내가 이토록 어리석은가?”라고 토로했다.

세 번이나 약사발을 뗄 정도로 생에 애착도 있었다. 국록 한 톨 먹지 않은 내가 왜 죽어야 하는가? 망국에 사대부가 무한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성현의 글을 읽은 선비의 처신이었다.

1910년 8월 그렇게 황현은 세상을 떠났다. 약간 사시(斜視)이기에 그릇된 세상을 똑바로 볼 수 있었던 그는 매천야록(梅泉野錄)을 남겼다. 해방 한 해 전인 1944년 2월에는 절망에 빠진 황현의 동생 황원이 구례 월곡마을 뒤 월곡저수지(방광저수지)에 몸을 던졌다. 황현뿐 아니었다.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권의 ‘순국의사(殉國義士)’조에는 순국의사 29인의 명단을 싣고 있다.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많다.

“금산(錦山) 군수 홍범식(洪範植), 주러공사 이범진(李範晋), 승지 이만도(李晩燾), 진사 황현, 환관 반학영(潘學榮), 승지 이재윤(李載允)·송종규(宋鍾奎), 참판 송도순(宋道淳), 판서 김석진(金奭鎭), 정언 정재건(鄭在楗), 감역(監役) 김지수(金智洙), 의관(議官) 송익면(宋益勉), 영양(英陽) 유생 김도현(金道賢)…태인(泰仁) 유생 김천술(金天述)…연산(連山) 이학순(李學純)…(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권, ‘순국의사(殉國義士)’)”

소설 임꺽정의 저자 벽초 홍명희의 부친인 홍범식은 후손들에게 “잃어버린 나라를 기어이 찾아야 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사기(史記) 채택열전(蔡澤列傳)은 “이래서 군자는 난리에 의로써 죽는 것을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여긴다(是以君子以義死難 視死如歸)”고 적고 있다. 이런 죽음에서부터 새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