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항거로 인하여 순국한 자로서 그 공로로 건국훈장, 건국포장 또는 대통령표창을 받은 자를 뜻하고
있습니다.
순국선열은 생존했던 애국지사와 더불어,
한국의 자주성과 독립성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들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순국선열의 날’은 숭고한 순국선열의 활동을 기억하고 추모하며
현재화한다는 의미에서 광복절만큼이나 뜻 깊은 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출처:http://goo.gl/KrDntf)
2. ‘순국선열의 날’의 유래
‘순국선열의 날’은 왜 11월 17일일까요?
바로 1905년 11월 17일에 체결된 을사조약(乙巳條約)의 치욕을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이날을 순국선열의 날로 정한 것은
1919년 중국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였습니다.
1939년 11월 21일에 열린 임시의정원 제31회 임시총회에서
지청천(池靑天)과 차이석(車利錫)을 비롯한 6인은
11월 17일을 ‘순국선열공동기념일(殉國先烈共同記念日)’로 제안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원안은 의결되어 순국선열의 날이 시작되게 된 것이죠.
순국선열공동기념일의 추모행사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거쳐
광복 초기에는 민간단체가, 1955년 이후에는 정부 주관으로,
또 1962년 이후부터는 국가보훈처에서 주관하였습니다.
1970년 이후에는 정부 행사 간소화 조치로 인해 현충일 추념식에 포함되어 거행되었지만,
독립유공자 유족들의 오랜 여망과 숙원에 따라 1997년에 순국선열의 날이
다시 정부기념일로 복원됨에 따라서 정부가 추모행사를 주관하게 되었습니다.
(출처:http://goo.gl/KrDntf)
3. ‘순국선열의 날’ 행사
일제의 국권침탈에 반대하고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항거하다가 순국한 선열들의
숭고한 독립정신과 희생정신을 기리며 추모하기 위한 국가적인 행사인
순국선열의 날 행사에 직접 참여해보세요.
2014년 11월 17일 제75회 순국선열의 날 정부 주관 공식 행사는
오전 11시 서울 용산구 효창동 효창공원 내에 있는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립니다.
이날 행사는 애국가 제창, 묵념, 국가유공자 포상 등의 식순으로 진행됩니다.
또한 안성시에서는 제75주년 순국선열의 날 기념식과 함께 제6회 나라사랑 한마음 축제를 진행합니다.
안성3·1운동 기념관에서 열리는 기념식에는
순국선열의 넋을 기리는 묵념, 추념시 읽기 등의 행사와 함께
독립운동가의 위패가 모셔진 광복사(사당)를 알리기 위한 나라사랑 한마음 축제가 진행됩니다.
대한민국에 살아가는 국민으로서
과거 일제에 의한 국권 침탈에 맞서 목숨을 다해 헌신하신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과 희생정신을 기억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도리입니다.
이들에 대한 선양과 의의를 되새기는 마음은 곧 우리 대한민국 전체를 드높이는 것이 될 것입니다.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을 잊지 않고 기억해주세요.
보훈처, '순국선열의 날' 독립유공자 43명 포상
KTV|입력2014.11.13 23:31
국가보훈처는 오는 17일 제75회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돼 순국한 이유홍 선생 등 43명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포상합니다.
이번에 포상되는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31명, 건국포장 3명, 대통령표창 9명입니다. .
훈.포장과 대통령표창은 순국선열의 날 중앙기념식장과 지방자치단체가 주관하는 기념식장에서 유족에게 수여됩니다 <끝>
민영환의 자결
충정공 민영환(忠正公 閔泳煥. 1861 ~ 1905),
1905년 11월 17일 을사보호조약으로 조선은 허울만 남은 나라가 되자
같은 달 30일 민영환은 왕조의 몰락에 책임을 지고 자결로 속죄했다.
나라가 망하자 자살로 속죄한 선비 황현 선생
역사적 소명의식을 향한 고뇌와 갈등 황현은 일찌감치 벼슬을 포기하고 지리산 자락으로 낙향하였다. 그는 시골에 있으면서도 항상 깨어 있는 정신으로 세상의 흐름에 눈을 부릅뜨고 주시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매천야록』과 『오하기문』을 저술하여 망국까지 무려 47년간의 시대의 흐름을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당대 역사를 향한 올곧은 황현의 시대정신은 벗에게 보낸 편지에 그대로 묻어나온다.
대체로 온 세상은 더욱 각박해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처럼 때때로 의논하고 한가롭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일을 과연 몇 사람과 함께 할 수 있겠으며, 또한 며칠이나 그렇게 해나갈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그저 각자가 애써 자중자애自重自愛하며 문을 닫아걸고, 그간 못다 읽은 책이나 읽으며 서로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그리워하며 자신의 지조를 대략 표하는 정도로 지내는 것이 옳은 일인 듯합니다. 말이 여기에 이르고 보니 저도 모르게 탄식을 하게 됩니다. ― 여정만기與鄭萬箕
1907년 정만기라는 벗에게 보낸 편지다. 을사조약 체결 이후 점점 각박해지는 현실과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는 시대조류에서 이를 어떻게 이겨내야 할 지 막막한 심정을 보여준다. 서로의 속내를 주고받는 것도, 세상사를 토론하는 일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질곡의 상황과 일상의 굴레 앞에서 어찌해야할 지 그저 암담하기만 하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깜깜한 나라의 운명 앞에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지조를 지키고 자중자애할 수밖에 없음을 고백할 뿐이다.
이 무렵 황현은 이런 암울한 세상에서 지식인으로 어떻게 살아야할 지를 두고 항상 성찰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참다운 삶을 위한 고뇌와 그 속내를 벗에게 자주 드러내었다. 황현은 1906년에 선배학자 조창준(趙昌駿, 1834~1910)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내 “세상사가 지금에 와서는 희망조차 없습니다만 충절을 다해야하는 책임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곧장 목숨을 바치는 것이 옳은 지 여부는 어찌 쉽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르신께서 식견이 고명하시니, 이에 혹 저의 미욱함을 깨우쳐 주실 것이 있으신지요? ― 여조자곡與趙紫谷” 라 하여 난세의 상황에서 자신은 어떠한 삶을 살아야하는가를 질문한 바 있다. 이처럼 황현은 나라의 존망이 목전에 닥친 상황을 내면 깊숙하게 끌어안고 참다운 지식인의 사명을 위해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되돌아보았던 것이다.
자결로 보여준 지식인의 길 황현은 나라가 망해 가는 것을 보고, ‘붓’을 가진 선비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별로 없다고 생각하였다. 더욱이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 없는 한 선비로서 그저 자괴감만 들 뿐이었다. 그는 이후 한 편지에서 경술국치가 있기 직전의 상황을 직감이나 한 듯, 자신의 고뇌와 감정을 벗에게 적어 보낸다. 세상이 갈수록 더욱 혼란스러워지고 있어 어떤 때는 완전히 잠들어 깨어나고 싶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병 아닌 마음의 병을 앓고 있으니, 누가 다시 이런 제 심정을 알아주기나 하겠습니까? 소문을 들으면, 북쪽에 큰 소요가 있고 또 청성의 변이 있다고 합니다만, 각 신문들은 검열을 받고 구속을 당하는 상황이라 사실을 보도할 수 없다고 합니다. 지금 온 세상이 귀가 멀고 눈마저 멀어 마치 개벽이 되는 와중의 혼돈 상태와 같으니, 가슴을 치며 미친 듯이 울부짖을 뿐입니다. ― 여이난곡건방與李蘭谷建芳
1910년 7월 28일에 심교心交를 나누었던 이건방(李建芳, 1861~1939)에게 보낸 편지다. 황현은 나라의 운명과 이를 마주 대하는 자신의 느낌을 솔직하게 끄집어낸다. 여기서 갈수록 세상이 혼란스러워져 나라마저 망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을 말하는 한편, 차라리 이러한 예감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을 보지 않고 외면하고 싶다는 심정도 함께 드러낸다. 더욱이 황현은 망국의 광경을 차마 보고 싶지 않다는 간절한 심정을 마음의 병에 빗대고 있거니와, 이는 망국을 원하지 않는다는 역설적 표현일 터이다. 이어서 그는 일제는 자신의 이러한 간절한 심정과 바람에 아랑곳 않고 만행을 일삼고 있음도 드러낸다. 이를테면 일제는 강제병합의 만행에 맞선 민족의 저항과 분노에 언론의 검열과 구속이라는 폭력적 방법을 동원하여 양국의 병합을 추진하고 있다고 폭로하고, 그는 어찌할 수 없는 이러한 현실에 절규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현의 예견대로 조선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병합되고 만다. 황현은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절명시絶命詩 네 수를 남기고, 아편을 먹고 자결한다. 1910년 음력 8월 6일 새벽녘이었다. 그는 절명시 한 수에서 “새도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마저 찡그리니/무궁화 세상 이미 빼앗겨 버렸도다./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 역사 생각하니/인간 세상에 지식인 노릇하기 어렵기만 하구나.” 라 하여 망국을 맞은 지식인으로서의 의식과 자세를 강렬하게 표출하였다.
그러면 망국을 맞은 자신은 어찌해야 하는가? 현실적으로는 그저 무력할 따름이다. 이에 황현은 한 유교지식인의 양심을 지키기 위하여 자결을 택하겠노라 다짐한다. 마침내 그는 지식인으로 자각하고 나라를 위하여 기꺼이 죽음을 택하였다. 황현은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유서에서 “나는 이씨 조정을 위해 벼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씨 조선의 종묘사직을 위해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단지 500여 년 동안 선비를 양성했던 나라에 목숨을 바친 선비가 없다면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는가? 내 위로는 하늘에 떳떳한 양심을 저버리지 않고, 아래로는 평소에 독서한 바를 저버리지 않으려면, 죽음을 택하는 것이 옳다.”고 하며 유학을 배운 선비로 한 지식인으로 소명의식을 다하고자 하였다.
이 점에서 황현은 결코 유학을 기치로 한 중세사회의 이념을 위하여 죽음을 택한 것이 아니다. 오직 글 아는 선비로서의 떳떳한 한 지식인의 양심을 지키고 지식인으로서의 역사적 소명의식을 위해 선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요컨대 그의 자결은 숭고한 것임에 틀림없다. 비록 이러한 자결이 나라와 민족을 위한 최선의 길은 아닐 테지만, 유학을 배웠던 한 선비로서 또한 양심을 지닌 참다운 지식인으로서 역사적 소명을 다하기 위한 선택이었노라고 변명해 줄 수 있지 않을까?
글ㆍ진재교 성균관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
자신보다 대한민국을 소중히 여긴 사람들, 순국선열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
11월 17일(토)은 ‘순국선열의 날’입니다. ‘순국선열’이란 일제의 국권 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 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항거하다가, 그 하거로 인해 순국한 사람들로서 그 공로로 건국훈장, 건국포장 또는 대통령표창을 받은 자를 지칭합니다. 자신의 목숨보다 우리나라 영토, 백성, 글, 정신을 소중히 여긴 많은 사람들. 국권회복을 위해 헌신했던 순국선열의 독립정신과 희생정신, 그들의 얼과 위훈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법정기념일이 바로 ‘순국선열의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