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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

[문화유산 답사기]천연기념물 이야기...대한민국의 절경 '명승'을 찾아서 <6 >

문화재방송 2017. 3. 19. 00:09





■ 공주 고마나루 ■


지정번호 명승 제21호
소 재 지 충청남도 공주시 웅진동 산22-1 외
지정면적 889,306㎡
지 정 일 2006년 12월 4일
공주 고마나루는 무령왕릉 서쪽으로 펼쳐진 낮은 구릉상의 산록인 금강변 일대와 금강수면, 그리고 연미산 지역에 걸쳐 명승으로 지정되어 있다. 공주시 북쪽에 위치하여 동쪽에서 서쪽 방향으로 흐르는 금강이 연미산에 부딪쳐 깊은 소를 이루면서 방향을 남쪽으로 바꿔 흐르는데, 이렇게 금강이 꺾여 흐르는 곳을 고마나루라고 한다. 고마나루의 금강변 백사장이 있는 강 언덕에 수령 약 60여 년이 되는 소나무 약 400여 주가 아름다운 송림을 이루고 있으며, 현재 송림 안에는 웅진단熊津壇터가 남아있다. 송림의 아래에는 하천의 퇴적작용에 의해 고운 모래가 길게 퇴적되어 강변의 수제부를 빼어난 경관으로 만들고 있고, 이 백사장은 금강의 푸른 물과 어울려 고마나루 경관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 고마나루 강 건너에는 연미산이 우뚝 솟아 있으며, 이 연미산에는 고마나루의 설화와 관련된 곰굴이 있다. 연미산은 고마나루를 내려다 볼 수 있는 다수의 조망지점이 있는 곳이다. 현재 폐도가 된 도로의 앞 산 기슭과 연미산 정상을 향하는 등산로의 중간중간에서 바라 보이는 고마나루의 경관이 매우 아름다워서, 이곳의 조망지점들은 고마나루의 활용에 적극 이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고마나루는 백제 역사의 중심에 있던 곳으로 역사적 가치가 클 뿐 아니라 금강 변에 넓게 펼쳐진 백사장과 솔밭이 금강 및 연미산과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자아내고 있는 곳으로, 역사문화적·경관적 가치가 뛰어난 경승지로 평가되고 있다.


공주 고마나루는 공주의 금강변에 위치한 아름다운 자연경승이기도 하지만, 공주의 태동지이자 곰과 인간에 얽힌 전설이 내려오는 역사·문화경관으로서의 의미가 더욱 큰 명승이라 할 수 있다. 고마나루는 공주의 옛 지명으로서‘고마固麻’는 곰의 옛말이며 한자로는‘웅진熊津’이라 한다. 고마나루를 신라 신문왕(?~692) 때는 웅천주熊川州, 경덕왕 때는‘웅주熊州’라 하였으며, 940년(태조 23)에 공주公州로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곰은 백제의 토템으로 백제 초기 한강시대부터 유래되고 있고, 특히 공주 주변에는 고마나루·웅진·웅천주·웅주·공주 등 여러 지명에서 나타나고 있다.
고마나루는 백제 문주왕(?~477)이 웅진 천도 시 이용하였던 교통로였고, 660년 나당연합군의 당나라 장군인 소정방이 백제 공격을 위해 금강을 거슬러 와 주둔했던 곳이다. 또 백제 멸망 후에는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였던 곳으로서, 백제 역사의 중심무대이자 국제적 교통의 관문이었다. 고마나루는 금강의 수신水神에게 제사를 올리던 웅진단터가 남아 있는 등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공식적인 국가의 제사 공간이었으며, 일반 서민들의 주요 생활터전이자 수상교통로로 민중의 정서와 애환이 짙게 서려있는 역사적 가치가 큰 곳이다. 이곳에는 처녀곰과 나무꾼 총각에 얽힌 아름답고도 슬픈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현재 고마나루 북쪽에 솟은 연미산 중턱에는 전설 속 곰이 살았다는 곰굴이 고마나루를 내려다보고 있으며, 마을에서는 곰의 원한을 풀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하여 나루터 인근에 곰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왔다고 한다. 곰사당 안에는 석조로 곰을 제작해서 안치하고 있는데, 이 석조 곰은 송산리 고분군의 왕릉에서 200m 남쪽에서 출토된 웅진 석조 곰상을 바탕으로 제작했다고 한다.


■ 영광 법성진 숲쟁이 ■


지정번호 명승 제22호
소 재 지 전라남도 영광군 법성면 법성리 821-1 외
지 정 일 2007년 2월 1일
영광 법성진 숲쟁이는 법성포法聖浦마을에서 흥농방향으로 연결된 842번 지방도로의 고갯마루 부분에 좌우측으로 산 능선을 따라 법성리와 진내리에 걸쳐 조성되어 있다. 법성포의 후면을 둘러 싸고 있는 산세는 인의산(157m)부터 좌측 능선은 남측의 대덕산(240m) 방향으로 이어지고, 우측 능선은 진내리 방향으로 뻗어 내린다. 서쪽의 진내리 방향으로 인의산의 자연림이 끝나는 남쪽부분에서 시작되는 숲쟁이는 842번 지방도로가 가로 지르는 부분까지 완만한 하향 경사면에 조성되어 있으며, 다시 도로 건너편으로 연결되어 오르막 경사로 이루어진 산 능선을 따라 길게 선형으로 마치 두 개의 산을 연결한듯이 숲이 조성되어 있다. 이 숲은 본래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인데, 지방도로가 개설되면서 2개로 나누어 졌으며, 현재는 도로 위에 두 개의 숲을 연결하는 다리(부용교)가 놓여 있다. 숲쟁이는 진내리의 산 능선을 따라 축성된 법성진성의 윗부분에 줄을 지어 심어져 성이 끝나는 산 아래까지 조성되어 있고, 전체 길이가 300m에 이른다. 이 숲에는 와우정과 부용교가 조성되어 있으며, 진내리 숲에는 야외무대·그네·씨름장 등이 조성되어 있었으나, 시설설치를 위해 행해진 복토와 변경된 숲 지반을 원상 복원하는 공사와 함께 현재는 복토를 제거하고 시설들은 철거된 상태이다.
영광 법성진 숲쟁이는 고려시대 이래 전라도에서 가장 번창한 포구였던 법성포와 마을을 보호하기 위한 법성진성法聖鎭城과 성 위에 조성된 숲을 이르는 것이다. 법성포는 삼국시대부터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중국, 일본과의 해상 교통로 상에 위치하는 우리나라 서해안의 대표적인 항구였을 뿐 아니라, 서해에서 가장 품질 좋은 조기가 잡히는 칠산 앞바다에서 들어오는 조기 배로 파시를 이루었기 때문에“영광 법성으로 돈 실러 가세”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많은 보부상들이 모여들어 매우 번창했던포구였다.‘법성진法聖鎭’이란 법성지역에 구축된 수군의 행정구역으로 조선 1398년(태조 7)부터 조창을 방비하기 위하여 수군 만호의 지휘 아래 수군의 상비 병력이 배치된 이후 1485년(성종 16)에『경국대전』에 보이는 수군편제상 법성진의 모습을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법성진성은 1514년(중종 9)에 돌로 쌓은 석성으로 성의 전체 둘레는 약 462m이며 현재는 북벽만 전구간이 남아 있고 나머지는 서쪽과 동쪽 일부만이 남아 있으나, 그 성벽의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성벽에 새겨진 글 등은 조선시대 진성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숲쟁이의 ‘쟁이’ 란 ‘재’, 즉 ‘성城’의 뜻으로 ‘숲쟁이’란 숲으로 된 성을 의미하며, 또 다른 의미로는 인위적으로 조성한 마을 숲에 대한 명칭인 숲정이의 방언으로 보기도 한다. 법성진 숲쟁이는 법성포구와 마을을 보호하는 방풍림의 역할을 해 왔으며, 예로부터 파시로 몰려드는 보부상들이 이 숲에서 단오행사를 개최하였는데, 이것을 시작으로 용왕제와 단오날 선유놀이 등 지금 의‘영광 단오제’와 지역의 각종 민속행사가 이 숲에서 열려오고 있다. 영광 법성진 숲쟁이는 법성진성과 숲이 포구와 어우러져 특이하고 아름다운 경관을 자아내고 있을 뿐 아니라 각종 민속행사가 행해지고 있는 장소이며, 조선시대 수군 진의 모습과 파시로 번창했던 법성진의 영광을 현재까지 전해주는 등 역사적·문화사적 가치가 매우 뛰어난 명승이다.

■ 봉화 청량산 ■


지정번호 명승 제23호
소 재 지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 산74 외
지정면적 4,090,322㎡
지 정 일 2007년 3월 13일
경상북도 봉화군에 위치하고 있는 청량산은 봉화에서 안동으로 흐르는 낙동강 상류에 우뚝하게 자리 잡고 있으며, 자연경관이 수려하여 예로부터 소금강이라고 전하여 왔다. 해발고도 800m 내외에 해당하는 12개 암봉(육육봉六六峰: 장인봉·선학봉·자란봉·자소봉·탁필봉·연적봉·연화봉·향로봉·경일봉·탁립봉·금탑봉·축융봉)과 청량산 12대(어풍대·밀성대·풍혈대·학소대·금강대·원효대·반야대·만월대·자비대·청풍대·송풍대·의상대), 청량산 8굴(김생굴·금강굴·원효굴·의상굴·반야굴·방장굴·고운굴·감생굴) 및 청량산 4우물(총명수·청량약수·감로수·김생폭)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보여준다. 청량산 일대의 지질은 크게 변성암류와 퇴적암류로 구분되며, 이 중 퇴적암류가 절대적으로 우세하다. 청량산에는 중생대 백악기에 퇴적된 역암·사암·이암층이 융기·풍화·차별침식 등의 작용으로 다양한 지형이 나타나고 있는데, 봉우리들은 모두 역암으로 이루어져 저각도의 수평층리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V자형 계곡이 발달된 계곡 주변엔 소규모의 수직·수평절리에 의한 풍화혈이 발달하여 특별한 경관을 보여줄 뿐 아니라 학술적 가치도 뛰어나다. 청량산 일대의 집수유역은 광역적으로 합류하지 않고 독립된 계류로 구성되어 있으며, 청량산의 수계는 북측 계곡을 흐르는 북곡천과 남측 계곡으로 흐르는 청량천이 명호천으로 유입되는 수계를 형성하고 있다. 청량산은 생태환경이 우수하여 다양한 동식물이 살고 있다.
식물은 95과 328속 618종이 발견되었고, 동물은 40과 89종이 서식하고 있다. 어류는 8과 14속 16종으로서 한국특산어류의 43%가 서식하고 있고, 양서류 5과 3종, 파충류 3과 6종, 포유류 10과 12종이 서식하고 있어 청량산은 매우 다양한 종으로 구성된 건강한 생태계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청량산은 옛날에‘수산水山’으로 불리어지다가 조선시대에 와서 금탑봉에 자리 잡은 상청량암上淸凉庵과 하청량암下淸凉庵이 널리 알려지면서 산 이름이 청량산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청량산은 주세붕이 명명한 12봉우리(육육봉)가 주축을 이루고 있으며, 태백산에서 시작되는 낙동강이 청량산의 웅장한 절벽을 끼고 흘러가며 곳곳에 많은 신화와 전설을 남기고 있다. 청량산은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의『택리지』에 보면 백두대간의 8개 명산 외에 대간을 벗어난 4대 명산 중 하나로 평가되어 온 한국의 대표적 명산이다.
봉화 청량산에는 고려 말 공민왕(1330~1374)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 몽진 때에 머무르며 축조하였다는 청량산성과 마을 주민들이 공민왕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사당이 남아 있다. 원효·의상·김생·최치원·이황 등 역사적 인물과 관련된 장소와 설화들이 많이 남아있는 등 이곳은 불교의 도량으로, 그리고 16세기 사림파의 등장 이후 산수경치를 사랑하고 유교와 퇴계 이황을 숭상하는 선비들의 유교적 순례지가 되어 왔다. 청량산에는 청량사 유리보전·응진전 등을 비롯한 20여 개의 절터와 이황이 공부한 장소에 후학들이 세운 청량정사와 김생이 글씨 공부를 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 김생굴, 최치원이 수도한 풍혈대 등 선현들의 자취가 잘남아 있다.


■ 부산 오륙도 ■


지정번호 명승 제24호
소 재 지 부산광역시 남구 용호동 936 외
지정면적 28,189㎡
지 정 일 2007년 10월 1일
부산 오륙도는 부산시 남구 용호동의 승두말로부터 남동쪽으로 뻗어 있는 6개의 바위섬이다. 승두말에서 가까운 섬부터 방패섬(2,166㎡), 솔섬(5,505㎡), 수리섬(5,313㎡), 송곳섬(2,073㎡), 굴섬(9,716㎡) 등대섬(3,416㎡) 등이 순서대로 나란히 서 있다. 부산 오륙도는 부산 북안 육지부인 승두말로부터 남남동 방향으로 가지런하게 늘어서 있는 바위섬들로 오륙도란 이름은 1740년에 편찬된『동래부지東萊府誌』「산천조山川條」에“오륙도는 절영도 동쪽에 있다. 봉우리와 뫼의 모양이 기이하고 바다 가운데 나란히 서 있으니 동쪽에서 보면 여섯 봉우리가 되고 서쪽에서 보면 다섯 봉우리가 되어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라 기록된 바와 같이 보는 사람의 위치와 방향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데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일설에는 방패섬과 솔섬의 아래 부분이 거의 붙어 있어 썰물 때는 우삭도라 불리우는 하나의 섬으로 보이지만 밀물 때는 두 개의 섬으로 보인다는 데서 온 것이라고도 하나 이는 19세기 일본인이 잘못 기록한 내용에 의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승두말에서 가까운 섬부터 우삭도(밀물 때에는 방패섬과 솔섬으로 나눠짐)·수리섬·송곳섬·굴섬·등대섬의 순서로 늘어서 있으며, 각 섬마다 수직에 가까운 해안절벽과 파도의 침식작용에 의해 만들어진 파식대와 각양 각색의 해식동 등 기이하고 다양한 해양지형과 오랜 세월동안 사람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라온 동식물들, 그리고 짙푸른 바다가 한데 어우러져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보여주고 있다. 송곳섬은 작고 모양이 뾰족하며, 굴섬은 규모가 가장 크고 커다란 굴이 자라고 있다. 육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등대섬은 평탄하여 밭섬이라고도 하였으나, 등대가 세워진 뒤로 등대섬이라고 하며, 이 등대섬을 제외하고는 모두 무인도이다.
오륙도는 12만 년 전까지는 육지에 이어진 하나의 소반도였는데, 오랜 세월동안 거친 파도의 침식작용으로 육지에서 분리되어 섬이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오륙도의 식물로는 총 38과 61속 70종이 조사되었으며, 목본식물로는 곰솔·느릅나무·까마귀머루·개머루·계요등·다정큼나무·담쟁이덩굴·돈나무·댕댕이덩굴·보리밥나무·보리수나무·사스레피나무·사철나무·섬뽕나무·섬향나무·송악 등이 자생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오륙도는 섬의 수가 5개 또는 6개로 보인다는 신비감과 함께 오륙도 앞의 항로는 신라시대 해상왕 장보고가 무역을 하기 위해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지금도 대한민국을 들어서는 주요 해상 관문의 하나이다. 오륙도의 명칭에 관한 유래를 살펴보면, 육지에서 가장 가까운 방패섬은 세찬 비바람을 방패처럼 막아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솔섬은 소나무가 자생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며, 수리섬은 예전에 수리가 갈매기를 포획하기 위해 모여 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굴섬은 큰 굴이 자란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며, 등대섬은 밭섬이라 불리다가 등대가 세워진 후에 붙여진 이름이다. 오륙도의 주변에는 조류가 빨라 뱃길이 위험하였기 때문에 옛날 이곳을 지나는 뱃사람들은 항해의 무사함을 기원하기 위해 해신에게 공양미를 바쳤다고 전해진다.


오륙도는 우리나라 최대 항만인 부산항의 상징적인 섬으로서, 오륙도 등대는 부산항을 지키는 중요한 역할을 해오고 있다. 오륙도 밭섬에 등대가 처음으로 개설된 것은 1937년 11월이다. 1876년 부산항이 개항된 이후 부산항을 드나드는 선박의 무사한 항해를 위해 세워진 등대이다. 오륙도 등대는 당초 6.2m 높이로 건립되었는데 오랜 세월이 흘러 등대가 낡아져, 1998년 12월 27.5m 높이의 새로운 등대가 다시 건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륙도는 예로부터 시인·묵객·가수들에 의해 오륙도를 주제로 한 많은 시와 그림이 전해지고 있고, 또한 노래로 불러지기도 한다. 이처럼 오륙도는 오랜 기간 동안 부산 시민의 정서상 부산의 표징 역할을 해 오고 있으며, 부산을 대표하는 섬으로서의 상징성이 매우 큰 아름다운 명승이다.



*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문화재대관-천연기념물]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


[문화재방송 캠페인]문화재에는 우리 민족의 얼과 혼이 숨 쉬고 있습니다.
"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은 애국심입니다."
휴일이면 가족과 더불어 각종 문화재와 함께 하여 민족의 숨결을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