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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

[문화유산 답사기]대동여지도와 김정호, 시대의 풍랑 속 끝까지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집념

문화재방송 2017. 5. 13.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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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자 김정호의 초상화. 고산자의 뜻은 옛고, 메 산, 아들 자자를 사용하고 있다.


대동여지도 등 조선말 실학에 큰 공헌을 하였다.







김정호에 대한 상식
김정호라 하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들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산과 물의 모양에 관심이 많았던 소년이 어렵게 구한 지도를 들고 실제 모양과 비교해 보았는데 그 내용이 실제와 너무 달라 실망한 뒤, 직접 자신의 손으로 지도를 만들기로 결심했다는 것, 그 뒤 평생을 바쳐 조선팔도를 세번 돌아다니고 백두산을 여덟 번 오른 뒤에 완성한 것이 《대동여지도》라는 것, 그러나 그 지도를 본 대원군이 나라의 비밀이 다른 나라에 누설될까 우려하여 지도판을 압수하고 김정호를 옥에 가두었으며 결국 김정호는 옥중에서 죽었다는 내용들이다. 이 이야기는 수십 년 동안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많은 사람들의 상식이 되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들은 이 내용들에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 김정호에 대해 알려진 이야기들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김정호는 불과 150여 년 전 인물인데도, 생몰년대조차 정확히 알려져있지 않다. 그가 살았던 당시의 기록들 서너 군데에서 김정호에 대한 언급을 찾을 수 있는데, 그나마 가장 길게 전하는 것이, 하층 계급 출신으로 각 방면에 뛰어난 인물들의 행적은 모은 『이향견문록』이다. “ 김정호는 자기 호를 고산자라 하였다. 그는 본디 공교한 재주가 많았고 특히 지도학에 깊은 취미가 있었다. 그는 두루 찾아보고 널리 수집하여 일찍이 《지구도》를 제작하고, 또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는데 자신이 그림을 그리고 새겨 인쇄해 세상에 펴냈다. 그 상세하고 정밀한 것은 고금에 그 짝을 찾을 수가 없다. 내가 한질을 구해 보았더니 진실로 보배로 삼을 만한 것이었다. 그는 또 『동국여지고(대동지지)』10권을 편집했는데 탈고하기 전에 세상을 떴으니, 정말 애석한 일이다.” 『이향견문록』김정호편의 전문이다.




과장되고 왜곡된 이야기들
이후 한동안 세상 사람들에게 잊혀졌던 《대동여지도》와 김정호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꺼낸 사람은 최남선이다. 최남선은 1925년 《동아일보》에「고산자를 회懷함」이라는 글을 써서 김정호를 소개했는데, 이 글에서 《대동여지도》를 만들기 위해 김정호가 전국을 답사했으며 백두산을 일곱 번이나 올랐고 수십 년을 떠돌아다녔다고 적었다. 근거를 밝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바로 3년 뒤에 『별건곤』에 「고산자의 대동여지도」라는 글을 쓰면서는 백두산을 세 번인지 네 번인지 올라갔었다고 하여 한 발 뒤로 물러선다. 당시만 해도 백두산을 일곱 번 올랐다는 말이 사람들에게 신뢰받지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실 조선 팔도를 세번 돌아다니고 백두산을 일곱 번 오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김정호의 신분에 대해서 아직까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족보가 전하지 않고 『이향견문록』에 실려 있는 것 등을 보면 중인 이하로 추측된다. 당시의 교통상황이나 중인의 재력 등을 고려했을 때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옳다. 또 굳이 백두산을 일곱번이나 오르는 것이 지도를 만드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지도 의문이다.
아마도 최남선은 김정호 개인의 노력을 부각시키려고 작가적 상상력을 발휘했던 듯한데, 이후 이 이야기는 일제강점기 어린이잡지를 통해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더 극적인 내용으로 각색되었고, 이것이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어독본』에 이어 초등학교교과서에 실리면서, 김정호에 대한 상식으로 굳어졌다. 그 과정에서 백두산을 여덟차례나 올랐다고 과장되고, 《대동여지도》를 본 대원군이 나라의 비밀을 누설한다며 지도판을 압수하고 김정호 부녀를 옥에 가둬 죽게 했다는 비극적인 이야기가 덧붙여졌다. 그렇게 김정호의 이야기는 만들어졌다.




발로 쓴 지도가 아니라 자료로 쓴 지도
그렇다면 실제의 김정호는 어떻게 《대동여지도》를 만들었을까? 앞에서 살펴본 『이향견문록』에 “두루 찾아보고 널리 수집하여”라는 부분, 그리고 김정호의 벗이며 지원자이기도 했던 철학자 최한기가 남긴 “나의 벗 김정호는 소년 시절부터 지리학에 뜻을 두고 오랫동안 자료를 찾아서 지도 만드는 모든 방법의 장단을 자세히 살피며, 매양 한가한 때에 연구 토론하여”라는 글에서 그 힌트를 찾을 수 있다.
잘못 전해진 김정호의 이야기에 소년 김정호가 어렵게 구한 지도를 살펴보니 실제와 너무 달라 실망했다는 내용이 있지만, 사실 조선은 지리학이 발달한 나라였고 앞선 연구들도 있었다.
세종 때 만들어진 천문관측 기구들은 조선의 지도학 발달에 영향을 주었고 세조 때에도 지형을 측량하는 기구들이 개발되었다. 또한 김정호 이전에도 나흥유, 양성지, 윤영 같은 지도제작자가 있었고, 정상기, 홍대용, 신경준 같은 지리학자들이 있었다.
김정호는 이런 연구들과 함께 중국 자료들까지 두루 연구하고 그 장점들을 집대성하여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분이 높지 않았던 김정호가 이런 정보들에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은 주변 사람들의 도움 덕분이었다. 당시 유명한 장서가였던 최한기와 흥선대원군 집권 당시 훈련대장을 역임했던 신헌 등이 김정호의 지인들로, 두 사람 모두 지도와 지리학에 관심이 많았고 김정호의 재주를 아꼈던 인물들이다.
또한 김정호가 《지구전후도》, 《수전전도》를 비롯해 《대동여지도》도직접 판각한 뛰어난 각수였다는 기록을 통해, 교서관 소속의 목각기술자였을 거라 추측하기도 한다. 인쇄를 관장하는 교서관 소속이었다면, 정보에 접근하기 용이했을 것이다.




평생을 지리학에 바치다
소년시절부터 지리학에 뜻을 두었던 김정호의 첫 작업은 지도가 아니라 지리책이었다. 1834년 『동국여지승람』에서 지리정보를 정리한 뒤 처음 만들어진 때와 달라진 정보들을 보완하여 『동여도지』22책을 썼고, 이를 근거로 《청구도》(보물 제1594호)라는 전국 지도를 그렸다. 《청구도》는 현존하는 고지도 중 가장 크기가 크며, 중국에서 수입한 『기하원본』을 통해 서양의 확대축소법을 받아들여 앞서 제작된 어떤 고지도보다 과학적이고 정확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동여도지』를 보완하여 『여도비지』(20책)라는 지리지를 완성한 김정호는 이것을 근거로 1857년 《동여도》(보물 제1358호)를 그렸다. 김정호가 그린 지도 중에서 가장 자세하다는 이 지도를 대량 생산하기 위해 보다 간략하게 표현하고 목판으로 판각한 것이 《대동여지도》이다.
《대동여지도》의 목판을 완성한 것은 1861년. 처음 지리지를 완성했을 때부터 계산하더라도 28년이나 걸렸으니, 그 작업시간까지 염두에 둔다면 30년이 넘는 동안 김정호는 보다 정확하고, 보다 편리한 지도를 만들기 위해 애써온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대동여지도》를 완성한 이후에도 이를 보완하기 위해 『대동지지』15책을 썼는데, 이 책을 쓰기 위해 중국 책 22종과 조선책 43종을 인용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에게 지리지와 지도는 한쌍의 작업이었다. 지리지를 연구하여 축약된 정보로 지도를 그렸고, 지도를 그린 뒤 지도에 다 표시하지 못하는 지리적 정보들을 지리지에 담았다.
조선팔도를 세 번 돌고 백두산을 여덟 번 올랐다고 과장하지 않아도, 소년 시절부터 수십 년 동안 지리학에 대한 공부를 해나가며 차근차근 그 성과를 정리하고, 점차 완성도를 높여나간 그의 끈기와 노력은 충분히 기억하고 칭찬할 만하다. 더구나 당시는 지리학이라는 것이 개인의 부와 명예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던 사회였다.


국가와 사회가 그 어떤 도움도 보상도 해주지 않았던 일을 평생동안 끈기 있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정확하고 실용적인 지도가 국가와 민생에 어떤 도움을 주는지 김정호는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여도》에 부록으로 실려 있는「지도유설」에서 김정호는 이런 글을 남겼다. “ 지도에 정통함은 군사 행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므로 국방을 위하여 정확한 지도는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산천의 상황, 물길의 유무, 경작하는 땅의 위치를 확인하면 생산을 늘리고 삶을 안정시키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글.윤희진 (역사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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