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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중계] 인천무형문화재 서곶들노래 가운데 '방아 방아야'의 해학

문화재방송 2017. 12. 1. 05:43

취재. 촬영. 편집:문화재사랑



[문화재방송 캠페인]
문화재에는 우리 민족의 얼과 혼이 숨 쉬고 있습니다.
"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은 애국심입니다."
휴일이면 가족과 더불어 각종 문화재와 함께 하여 민족의 숨결을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달의 블로그 대문>
국보 제180호 추사 김정희 선생의 ‘세한도’(歲寒圖)

조선 후기 실학자이자 예술가였던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작품 중 최고 걸작을 꼽으라면 1844년 제주도 귀양살이 때 그린 ‘세한도’(歲寒圖·국보 180호)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가로 69.2㎝, 세로 23㎝ 크기인 이 작품은 사제 간의 의리를 잊지 않고 청나라에서 귀한 책들을 구해준 제자 이상적의 인품을 겨울에도 꿋꿋한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 답례로 그려준 것이지요.


한 채의 집을 중심으로 좌우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주위를 텅 빈 여백으로 처리함으로써 극도의 절제미를 보여주고 있답니다. 오른쪽 위에는 세한도라는 제목과 함께 완당(阮堂)이라는 호를 적고 도장을 찍어 놓았습니다. 거칠고 메마른 붓질을 통해 추운 겨울의 분위기를 맑고 청절하게 표현한 것이 조선시대 대표적인 문인화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상적은 세한도를 청나라에 가져가 학자 16명의 제영(題詠·제목을 붙여 쓴 시)을 받았답니다. 이후 이상적의 제자인 역관 김병선이 가지고 있던 세한도는 1930년쯤 일본인 후지쓰가가 구입해 44년 도쿄로 가져간 것을 서예가인 소전 손재형(1903∼81)이 설득해 그해에 다시 환수했다는군요. 후지쓰가는 48년에 숨지고

그의 집은 폭격을 맞았다니 세한도는 하마터면 재가 될 뻔했지요.

<蛇足>

추사 김정희 선생은  제주도에서 8년 3개월(1840~1848년)동안 유배 생활을 했습니다.

세한도를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귀양간 사람과 가까히 하면 모함을 받을 우려가 있어 모두가 멀리했으니 얼마나 외로웠으랴 !

제주도로 유배온지 3년째인

1842년 11월 13일, 그의 뒷바라지를 하던 아내 예안 이씨가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추사는 언제나 부인에게 한글로 편지를 썼는데 지금도 13편이 전해오지요.


"월하노인 통해 저승에 하소연해

다음 세상에는 우리 바꾸어 태어 나리

나는 죽고 그대만은 천 리 밖에 살아 남아

그대에게 이 슬픔을 알게 하리"


마치 어린 아이가 어머니에게 의자하듯, 부인에게 먹기  좋은 음식 등을 보내달라든 그가 얼마나 슬폈으랴 !

이렇게 외로운 가운데에도 추사 선생에게 중국의 귀한 책을 가져다 준 제자 이상적이 얼마나 고마웠으랴 !

나 역시 척추 수술이후 걷기 어려워 거의 누워 지내는 심정을 세한도가 잘 나타낸 것 같아서..더 .더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