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명사의 부속 건물로 건축 부벽루는 평양시 중구역 금수산 모란봉 동쪽의 깎아지른 청류벽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원래 이름은 영명루로 393년 고구려 광개토대왕 때 세운 사찰인 영명사의 부속 건물로 지어졌다. 이후 12세기 초 고려 예종이 군신과 더불어 잔치를 베푸 는 자리에서 이안(李顔)에게 명해 영명루의 이름을 다시 짓게 했다. ‘거울 같이 맑고 푸른 물이 감돌아 흐르는 청류벽 위에 떠있는 누정’이라는 뜻에서 부벽루라고 고쳐 부르게 됐다. 예로부터 해 질 무렵 영명사를 찾아드는 승려들의 풍경(永明尋僧)과 부벽루에서의 달구경(浮壁玩月)은
평양팔경으로 꼽힌다. 모란봉과 조화를 이루는 부벽루는 낮의 경치만큼 밤의 풍광도 손색이 없다. “저녁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쟁반 같은 둥근달이 두둥실 떠오르면서 누리를 은빛으로 단장할 때 이 근방의 야경은 참으로 황홀하다”고 전해지는데 여기서 부벽완월이란 말이 생긴 모양이다. 고려시대에는 선종·숙종·예종·인종·의종등이 대동강에 용선(龍船)을 띄우고 노닐다가 영명사에서 휴식을
취하며 헌향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특히 예종은 1109년(예종 4) 4월 문두루도량(文豆婁道場)*을 개설했고, 5월에는 이 절의 중창을 명하기도 했다. * 문두루도량: 5방신을 모시고 주문을 외면서 외적의 침입을 막고 국가의 안태(安泰)를 빌기 위하여 행한 법회. 수많은 전쟁으로 소실된 부벽루 복원 평양팔경 중의 하나였던 부벽루는 전쟁 시 평양성 북성의 장대(將臺)로서, 전투 지휘처의 역할을 하게 됐다.
군사적 요충지에 세워진 만큼 영명사는 1592년 임진왜란, 1894년 청일전쟁, 1950년 6·25전쟁 등 큰 전란 때마다 격전지가 돼, 전화(戰火)를 피할 수 없었다. 임진왜란으로 영명사 일부와 부벽루가 불에 탔고, 청일전쟁을 겪으며 몇 칸의 당우(堂宇)만을 남긴 채 영명사는 불타버렸다. 일제강점기에는 대웅전이 중건됐으나 6·25전쟁으로 영명사와 부벽루, 모두가 다시금 파괴됐다.
영명사 터에는 현재 5층 석탑과 불감(불상을 모셔 두기 위한 작은 건축적 공간)만 남아 있고, 부벽루는 1950년대에 복원돼 평양 시민의 휴식터 역할을 하고 있다. 복원된 부벽루는 정면 5칸(14.5m), 측면 3칸(7.68m)으로 날씬한 흘림기둥에 합각지붕이 떠받들려 있으며
아담하고 균형이 잘 잡혀있는 단층 목조건물이다. 기단은 낮은 편이고 그 위의 기둥 간격은 가운데 칸이 가장 넓고 그에 비해 좌우 칸은 좁다. 기둥과 초석 모두 원형인데, 초석 중 정면 2개와 후면 1개는 고구려의 주춧돌로 보고 있다. 전금문에서 부벽루로 오르는 좌우 2곳의 돌계단도 고구려 때의 것으로 추정된다.
시를 완성하지 못한 김황원의 일화로 유명 ‘부벽루’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고려시대 문신이자 시인, 김황원(1045~1117)이다. 부벽루에서 못다 쓴 시와
관련된 일화가 있기 때문이다. 김황원은 어느 여름 부벽루에 올라 청류벽과 평양성을 감돌아치는 대동강, 그리고 연한 안개 속에 펼쳐진 강 건너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평양에 왔다는 소식을 들은 평양 관리들과 선비들은 김황원을 만나기 위해 부벽루로 몰려들었으며, 시를 지어 달라 요청했다. 김황원은 부벽루 기둥과 천장에 걸려있는 글들을 보고 못마땅해하며 자신이 평양의 절경에 대한 시를 남길 테니 다른 글은 모두 떼어버리라고 말했다. 그리고 시구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는 두 구절을 쓰고 더 이상 시를 이어가지 못했다. 부벽루 아래를 한참 내려다보고 다시 쓰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저녁이 다 되어서도 시 구절이 떠오르지 않자 김황원은 부벽루 마룻바닥을 치며 “아, 평양의 절경을 그려내기에는 내 재능이 모자라누나!”라고 통곡했다고 한다. 이에 훗날 사람들은 김황원이 쓰다만 시를 부벽루 기둥에 걸어뒀다. 두 구의 시가 잘 지어진 것도 있지만, 이름난 시인도 시어가 모자라 못다 노래한 절경이 평양이란 의미가 담겨 있다. 평양의 아름다움을 길이길이 자랑하기 위한 염원인 것이다. 현재 이 시가 새겨진 현판은 부벽루가 아닌 대동강변의 연광정에 옮겨 걸려 있다.
글+사진‧정창현(서울대 대학원 강사) 출처:월간 문화재사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