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문화재방송.한국 www.tntv.kr

문화유산 답사기

[문화유산 답사기]조선 3대 누정(樓亭), 평양 국보 유적 부벽루, 진주 촉석루와 밀양 영남루

문화재방송 2018. 7. 6. 04:39



영명사의 부속 건물로 건축
부벽루는 평양시 중구역 금수산 모란봉 동쪽의 깎아지른 청류벽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원래 이름은 영명루로

393년 고구려 광개토대왕 때 세운 사찰인 영명사의 부속 건물로 지어졌다.

이후 12세기 초 고려 예종이 군신과 더불어 잔치를 베푸 는 자리에서 이안(李顔)에게 명해 영명루의 이름을

다시 짓게 했다. ‘거울 같이 맑고 푸른 물이 감돌아 흐르는 청류벽 위에 떠있는 누정’이라는 뜻에서 부벽루라고

고쳐 부르게 됐다.


예로부터 해 질 무렵 영명사를 찾아드는 승려들의 풍경(永明尋僧)과 부벽루에서의 달구경(浮壁玩月)은

평양팔경으로 꼽힌다. 모란봉과 조화를 이루는 부벽루는 낮의 경치만큼 밤의 풍광도 손색이 없다.
“저녁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쟁반 같은 둥근달이 두둥실 떠오르면서 누리를 은빛으로 단장할 때 이 근방의

야경은 참으로 황홀하다”고 전해지는데 여기서 부벽완월이란 말이 생긴 모양이다.


고려시대에는 선종·숙종·예종·인종·의종등이 대동강에 용선(龍船)을 띄우고 노닐다가 영명사에서 휴식을

취하며 헌향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특히 예종은 1109년(예종 4) 4월 문두루도량(文豆婁道場)*을 개설했고,

5월에는 이 절의 중창을 명하기도 했다.
* 문두루도량: 5방신을 모시고 주문을 외면서 외적의 침입을 막고 국가의 안태(安泰)를 빌기 위하여 행한 법회.

 
수많은 전쟁으로 소실된 부벽루 복원


평양팔경 중의 하나였던 부벽루는 전쟁 시 평양성 북성의 장대(將臺)로서, 전투 지휘처의 역할을 하게 됐다.

군사적 요충지에 세워진 만큼 영명사는 1592년 임진왜란, 1894년 청일전쟁, 1950년 6·25전쟁 등

큰 전란 때마다 격전지가 돼, 전화(戰火)를 피할 수 없었다.


임진왜란으로 영명사 일부와 부벽루가 불에 탔고, 청일전쟁을 겪으며 몇 칸의 당우(堂宇)만을 남긴 채 영명사는
불타버렸다. 일제강점기에는 대웅전이 중건됐으나 6·25전쟁으로 영명사와 부벽루, 모두가 다시금 파괴됐다.

영명사 터에는 현재 5층 석탑과 불감(불상을 모셔 두기 위한 작은 건축적 공간)만 남아 있고, 부벽루는

1950년대에 복원돼 평양 시민의 휴식터 역할을 하고 있다.


복원된 부벽루는 정면 5칸(14.5m), 측면 3칸(7.68m)으로 날씬한 흘림기둥에 합각지붕이 떠받들려 있으며

아담하고 균형이 잘 잡혀있는 단층 목조건물이다. 기단은 낮은 편이고 그 위의 기둥 간격은 가운데 칸이 가장

 넓고 그에 비해 좌우 칸은 좁다.
기둥과 초석 모두 원형인데, 초석 중 정면 2개와 후면 1개는 고구려의 주춧돌로 보고 있다. 전금문에서

부벽루로 오르는 좌우 2곳의 돌계단도 고구려 때의 것으로 추정된다.


시를 완성하지 못한 김황원의 일화로 유명


‘부벽루’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고려시대 문신이자 시인, 김황원(1045~1117)이다. 부벽루에서 못다 쓴 시와

관련된 일화가 있기 때문이다.
김황원은 어느 여름 부벽루에 올라 청류벽과 평양성을 감돌아치는 대동강, 그리고 연한 안개 속에 펼쳐진

 강 건너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평양에 왔다는 소식을 들은 평양 관리들과 선비들은 김황원을 만나기 위해

부벽루로 몰려들었으며, 시를 지어 달라 요청했다.
김황원은 부벽루 기둥과 천장에 걸려있는 글들을 보고 못마땅해하며 자신이 평양의 절경에 대한 시를 남길

테니 다른 글은 모두 떼어버리라고 말했다. 그리고 시구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는 두 구절을 쓰고 더 이상 시를 이어가지 못했다. 부벽루 아래를 한참 내려다보고 다시 쓰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저녁이 다 되어서도 시 구절이 떠오르지 않자 김황원은 부벽루 마룻바닥을 치며

 “아, 평양의 절경을 그려내기에는 내 재능이 모자라누나!”라고 통곡했다고 한다.
이에 훗날 사람들은 김황원이 쓰다만 시를 부벽루 기둥에 걸어뒀다. 두 구의 시가 잘 지어진 것도 있지만,

이름난 시인도 시어가 모자라 못다 노래한 절경이 평양이란 의미가 담겨 있다. 평양의 아름다움을 길이길이

자랑하기 위한 염원인 것이다. 현재 이 시가 새겨진 현판은 부벽루가 아닌 대동강변의 연광정에 옮겨

 걸려 있다.


글+사진‧정창현(서울대 대학원 강사)
출처:월간 문화재사랑



한국의 누각, 진주 촉석루와 밀양 영남루


글·사진 |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석양이 사라질 때쯤 진주성 주변의 야경(夜景)이 시작된다. 경상남도 진주 촉석루 바로 앞에 있는 바위가 논개가 왜장을 안고 남강으로 투신했다는 의암(義巖)이다.

우리 전통 건축의 백미(白眉)가 누(樓)와 정(亭)과 대(臺)다. 누정(樓亭)은 사방을 바라볼 수 있도록 툭 트인 건물을 말하는데 층수에 따라 구분된다. 정은 1층이며 누는 2층이다. 누를 누각(樓閣)이라고 하는 것은 1층의 각이 2층의 누를 지탱하기 때문이다. 누정과 비슷한데 다른 게 대(臺)다.
 
  대는 건물을 이르기 이전에 높은 지대의 평평한 땅을 말한다. 강릉 경포대나 남한산성의 수어장대를 보면 그 말뜻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땅에 남아 있는 누 가운데 구분하기 좋아하는 이들이 ‘한국의 3대 누각’이라는 말을 만들었다. 남쪽의 경남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와 평양의 부벽루다.
 

촉석루는 임진왜란 때 3대 대첩 가운데 하나인 진주성 전투의 현장이기도 하다.


  촉석루는 진주의 상징이자, 영남 제일의 명승(名勝)이다. 전쟁 때에는 장졸을 지휘하던 지휘소로, 평시에는 선비들이 풍류를 즐겼다. 고려 고종28년(1241년) 창건된 이래 중건과 중수를 거듭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10년(1618년)에 전보다 웅장한 건물로 중건했다.
 
  1948년 국보로 지정된 바 있으나 1950년 6·25 동란으로 다시 불탔으며, 지금의 건물은 1960년 진주 고적보존회가 시민의 성금으로 중건했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의 누대이다. 촉석루란 이름은 강 가운데 돌이 우뚝 솟아 있다 하여 붙인 이름이며 남장대 또는 장원루라 부르기도 했다.
 
진주 촉석루에서 의암으로 내려가는 길이 가파르다.
  촉석루가 유명해진 것은 임진왜란 때 충무공 김시민 장군이 절대 열세인 병력을 이끌고 거둔 진주성 대첩과, 의기(義妓) 논개가 적장(敵將)을 끌어안고 남강으로 뛰어내린 일 때문이다. 어둑어둑해질 무렵 진주성 건너편에 서면 바람에 일렁이는 물결 속 촉석루가 그림같이 빛을 밝힌다.

밀양 영남루는 최근 복원공사를 마쳤다.

  밀양의 영남루에는 명사들이 써 놓은 현판이 가득하다.

  밀양 영남루는 신라 경덕왕 때 ‘영남사’라는 절이 폐사되자 고려 공민왕 때 당시 밀양군수 김주가 신축한 뒤 영남루라 불렀다. 조선 세조 5년(1459년) 밀양부사 강숙경이 규모를 늘렸으나 임진왜란 때 불탔다. 인조 때 중건했고 순조 때 다시 불탔으나 현종 10년(1844년) 개창한 것이 지금 남아 있다.
 
경상북도 안동에 있는 병산서원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만대루(晩對樓)는 누각의 백미로 꼽힌다.
  전국에는 3대 누각에 버금갈 만한 누들이 많이 남아 있다. 전북 남원의 광한루는 인조 16년(1638년) 재건한 조선을 대표하는 누각이다. 원래 조선 초에 지어진 이 건물은 1419년 남원으로 유배 온 명재상 황희가 세워 광통루라 불리던 것을 1434년 정인지가 중건하며 광한루라 이름을 바꿨다.
 
  정인지는 광한루를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라 칭했는데, 광한청허부는 달나라의 옥황상제가 사는 궁전을 뜻한다. 밀양 영남루,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4대 누각으로 칭하는 사람들이 있을 만큼 만듦새가 빼어나다. 이 밖에도 전국의 서원·사찰에 유명한 누각들이 많다.⊙
 


전라북도 남원의 광한루는 조선초 명재상 황희가 지은 것이다.

광한루 앞의 오작교다. 이몽룡과 성춘향이 나눈 로맨스의 무대다.

         출처 | 월간조선 2017년 6월호


블로그 대문/ 국보 제147호 울주천전리각석(蔚州川前里刻石)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에 있는 선사·역사시대의 조각·바위그림 및 여러 종류의 명문 유적.
1970년 12월 동국대학교박물관 학술조사단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1971년 2차례에 걸쳐 정식 조사되었다.

 

각석은 태화강의 지류인 대곡천(大谷川) 중류 강안 암벽지대에서 있다.

이 지역은 울산과 경주를 잇는 길목지에 해당되어 울산·언양 일대의 풍부한 물산이

경주로 운반되는 교통로로 많이 이용되었다.

 

또한 경관이 빼어나 예로부터 명승지로 이름난 곳이기도 하다. 이 각석은 발견 후 암반 하부에

새겨진 다량의 명문 때문에 서석(書石)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암질은 적색 셰일이고 크기는 너비 9.5m, 높이 2.7m이다.

상부의 문양은 주로 쪼기〔彫琢〕기법을 썼으며 하부는 긋기〔線刻〕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것은 제작시대 및 제작집단이 달랐음을 뜻한다


〔명문〕명문 중 확인된 글자는 800자가 넘는다. 상부 오른편의 원명(原銘)과 그 왼편의 추명(追銘)이 내용의 중심을 이루고 있고 그 밖에 제명(題銘)이 다량 보인다. 원명이 새겨진 기사년은 신라 법흥왕 12년(525), 추명에 새겨진 기미년은 법흥왕 26년(539)으로 추정된다.

뒤의 추명은 왕과 왕비가 이 곳을 찾은 것을 기념해 기록했음을 밝히고 있어 6세기경의 신라사회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명문 중에는 사탁부(沙啄部)라는 부명이 여러 번 언급되어 있다. 이것은 이 곳이 신라 6부의 하나인 사탁부인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장소임을 뜻한다. 이 곳은 사탁부의 고유 종교의식이 행해지던 성지(聖地)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 밖에도 제명에는 여러 화랑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당시 많은 화랑이 이 곳을 찾아 도량(道場)으로 삼았음을 전해준다.

이들 각석 하부의 명문과 각종 선각화는 신라 6부체제의 발전·변화과정과 내용을 규명해나가는데 주요한 실마리를 제시해주고 있으며, 앞으로 이에 대한 보다 종합적이고 면밀한 검토가 요구된다.






[문화재방송 캠페인]
문화재에는 우리 민족의 얼과 혼이 숨 쉬고 있습니다.
"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은 애국심입니다."
휴일이면 가족과 더불어 각종 문화재와 함께 하여 민족의 숨결을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