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민 시장© News1 |
[이달의 블로그 대문]이상학 화백의 처인성 전투 기록화]
1232년(고종 19) 6월 고려는 몽골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천도(江華遷都)를 단행하였다.
그러자 그 해 몽골의 장수 사르타이가 고려의 북계(北界: 지금의 평안도 지방)에 침입하여 서경의 반적(叛賊) 홍복원(洪福源)과 합세하여 고려를 위협하였다. 사르타이는 고려가 해도(海島)인 강화로 도읍을 옮긴 것을 꾸짖고, 국왕이 육지로 나올 것을 요구하였으나 고려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에 사르타이는 북계에서 남쪽으로 개경을 거쳐 한양산성을 함락하고, 수주(水州: 지금의 경기도 수원)에 예속되었던 처인부곡(處仁部曲: 지금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아곡리)의 소성(小城), 즉 처인성에 도달하였다.
몽골의 제2차 침입 때 난을 피하여 처인성에 와 있던 백현원(白峴院)의 승려 김윤후가 활을 쏘아 사르타이를 죽였다. 그래서 장수를 잃은 몽골군은 전의를 상실하여 부장 철가(鐵哥)의 인솔로 곧 북으로 철수하였다. 처인성전투는 치열하게 전개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승려 한 사람의 영도에 의하여 몽골군을 삽시간에 무너뜨려 물러가게 한 것은 큰 승리였다.
처인성전투의 승리로 몽골군은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고, 남쪽지방은 전쟁의 피해를 줄이게 되었다. 처인성승첩의 결과, 처인부곡은 처인현(處仁縣)으로 승격되었고, 김윤후는 상장군(上將軍)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사양하여 섭랑장(攝郎將)이 되었다.
민족전란사(5) 대몽항쟁사(對蒙抗爭史)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발행-
(개황)
고려 때 몽고의 침입으로 1231년부터 1259년까지 30년에 걸친 여몽전쟁(麗蒙戰爭)이 있었는데
1차 대몽항쟁은 고종18년(1231) 8월부터 19년(1232) 12월까지 1년여이고, 2차는 고종(1235)
윤7월부터 (1259) 3월까지 24년 간의 장기전이다.
1차 대몽한쟁 때는 몽고군이 침공을 개시하여 40일 만에 개경250리(100Km) 인 황주까지 진격하였으나
고려는 긴급히 3군(三軍)을 편성하여 남진을 저지하는 한편 서북계북로(西北界北路)의 귀주(龜州)에서
고려 군민이 일치단결하여 남진을 저지하는데 성공하자 점차 몽고군이 불리한 상황이었으나 몽고군은
일부병력을 개경으로 진격시켜 도성을 포위하려 하자 고려 조정에서는 사신을 보내 강화교섭을 추진하고
몽고측도 수락하여 서북계(西北界) 요지에 감독관인 다루치기(達魯花赤, 달노화적) 지휘하에 72명의
군사 잔류하고 1232년 1월에 철수하였다.
그러나 고려에는 몽고인에 대한 적개심이 고조되어 조야에 강경론이 팽배하여 결국 잔류시킨
다루치기와 군사들을 살해하거나 밖으로 축출하고 장기전에 대비하여 수도를 강화도로 옮겼다.
이에 1232년 8월 몽고 태종 오고타이는 원수 살리타이(撒禮塔,살례탑)로 하여금 고려 침공을
재개토록 하였는데 9월 국경 진입 후 3개월 만인 11월에 남경(한양)을 함락시키고, 한강을 건너
광주로 진출하였으나 광주 군민의 완강한 저항으로 광주성을 제대로 공략하지도 못한 채 용인
방면으로 남진하였다가 주력을 강화쪽으로 돌리면서 살리타이가 직접 지휘하는 일부병력으로
처인성을 공격하므로서 처인성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처인성전투)
몽고군 원수 살리타이가 지휘하는 제4군은 광주성공격작전에 실패한 후, 그 주력을 용인으로
전진시켰으나 이미 소식을 전해듣고 일대 수령들은 군사와 백성, 무기와 양곡들을 처인성으로
대피시킨 뒤였으므로 몽고군은 텅 빈 용인현성(龍仁縣城)을 무혈로 입성하였다.
그러자 살리타이는 제4군 주력을 용인-수원-군포-부평-김포를 연하는 방향으로 강화도 대안의
통진으로 진출시켜 강화도를 압박하는 한편 자신은 일부병력만으로 처인성으로 남하하여 처인성
공략에 나섰다.
한편 처인성에는 용인을 비롯한 인근 각 고을에서 피난 온 군민1,00여 명과 승장(僧將) 김윤후(金允侯)를
비롯한 승병 100여 명이 방어에 임하고 있었다.
살리타이가 직접 인솔한 500여 기(騎)가 처인성 동북방의 완장리, 매룡리 일대에 포진하여 처인성을
포위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고려 고종19년(1232) 12월 16일 용인으로부터 처인성 동북방 50리 지점에 도착한 몽고군 원수 살리타이는
처인성 동북방 인근 완장리, 매룡이, 화동 등지에 병력을 3개 대로 분산 배치하여 처인성에 대한
공격준비태세를 갖추고, 처인성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하여 몸소 5,6기의 정찰기병만 거느리고 경장(輕裝)으로
처인성 동문을 향하여 접근하였다.
한편 승장 김윤후는 처인성 동문 밖 300m 지점의 언덕(속칭 살장터, 殺將址)에 저격병 수십 명을 미리
매복시켜 유사시에 대비하고 있었다. 살리타이 일행이 이 지점에 이르자 매복하고 있던 고려군 저격병들은
몽고군의 주장 살리타이와 수행 기병들을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사살하고, 그 목을 베었다.
몽고군 진영에서는 이 광경을 목격하고 주장 살리타이를 구출하기 위하여 일제히 처인성 동문으로
돌진하였으나 성을 방어하던 승병들이 성 밖으로 달려나와 역공하므로서 몽고군과 고려군은 처절한
혼전이 벌어졌는데 몽고군은 주장을 구하기는커녕 한차례의 격전 끝에 태반이 사상되고, 마필과
병기를 빼앗기고 그들의 본진으로 후퇴하였다.
이에 고려군은 승세를 틈타서 몽고군 본진으로 반격을 가하여 몽고군을 대파시켰다.
주장 살리타이가 고려군에게 사살되자 몽고군 전열은 걷잡을 수 없이 와해되고 말았다. 그 결과
몽고군은 더 이상 고려군의 공세를 막아내지 못하고 용인방면으로 패주하였다.
처인성전투 결과 주장을 잃은 몽고군 부원수 테케는 서둘러 고려와 강화를 체결하고 철군함으로서
제1차 대몽항쟁은 종료되었다.
(처인성 승첩의 의의)
승장 김윤후의 기계(奇計)에 의하여 살리타이를 사살한 처인성 승첩은 여-몽항쟁이 발발한 이래
고려군측에서 거둔 일방적인 최대의 승리였다. 따라서 고려군의 처인성 승첩은 전쟁 발발 이래 시종
고려군이 열세로 몰리던 전세를 일거에 역전시키는 전환점이 되었다.
한편, 살리타이가 전사한 처인성전투는 몽고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전의(戰意) 를
상실하게 하여 고려로부터 서둘러 철수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몽고군은 고려군의 반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다수가 사로잡히고, 나머지는 대소 규모로 무리 지어 서북변
국경으로 분산 도주하였다. 몽고군은 이미 지휘체계가 완전히 붕괴되어 조직적인 퇴각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고려 조정에서는 사리타이를 사살하는데 큰 공로를 세운 승장 김윤후를 표창하여 상장군의 직위를
내렸으나 김윤후는 다음과 같이 완곡히 사양하였다.
“저는 전시를 당해서도 무기를 잡고 일어서지 못했던 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잘 것 없는 공으로
후한 상을 받겠습니까?” 「고려사」 권103, 김윤후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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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인성 전투(민족기록화-중학교 국사 교과서)
유라시안의 대제국 몽고와의 처인성전투는 유일하게 몽고가 패한 전투로서 의미를
갖는 대신 고려로서는 유일하게 승전한 전투다.
이 전투는 고려의 관군이 연전연패함에 왕이 강화도로 도피하고 몽고군은 국토 곳곳을 분탕질하다가
드디어 처인성에 이르러 징기스칸의 차남 총사령관인
살리타이-察羅台가 우리의 승장 김윤후의 화살에 맞아 살장터에서 죽었다.
할 수 없이 철수한 몽고군은 다시 재침하면서 이 지역에 대해 철저한 보복으로
돌한 개 조차도 포개어두지 못하게 할 정도로 여지없이 초토화했다.
지금 흔적조차 히미해진 이 성터가 말해주고 있는 모습으로도 그 당시의 상황을
역력히 짐작하게 한다. 지금의 성터는 훗날 임진왜란 당시에 이 성터를 다시 쌓고
승전한 곳이여서 그나마 작은 성터로서의 모습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경기도 기념물 제44호
위치:경기 용인시 남사면 아곡리 산 43 마곡마을 입구
김윤휴는 누구인가?
김윤후. 그는 원래 무인이 아니었다.
천민부락인 부곡(部曲)에서 주민들을 대상으로 불법(佛法)을 전하던 승려였다. 그는 전혀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다.
`고려사' 기록을 전부 훑어보아도 몽고군 침입시 처인성 전투에서 처음 등장하는 인물이다.
처인성 전투에 참여할 당시에도 그는 승려의 신분이었다.
고려 시대만 하더라도 아무나 승려가 될 수는 없었다. 광종 때부터 시행된 불교 분야의 과거제인
승과(僧科)제도를 통해 승려로 발탁되든지, 아니면 왕족이나 특권 귀족 출신만이 승려가 될 수 있었다.
예컨대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은 문종(文宗)의 넷째아들이자 선종의 동생이었으며,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은 명종(明宗)대에 승과를 통해 승려가 된 당대 최고의 승려이자
선각자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는 면세·면역의 특전이 부여됐기에 승려의 세속적 권위 또한 적지
않았다.
당시 2800간이나 되는 대규모의 흥왕사(興旺寺)를 비롯해 수많은 사찰이 즐비한 왕도 개경을 떠나
자진해 천민 부락인 처인부곡(處仁部曲:오늘날의 경기도 용인)의 성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생활하며
불법을 전한 김윤후는 분명 깨어 있는 사람이었다.
1232년(고종 19년) 몽고의 제2차 침입 때 김윤후는 처인성 부곡민들과 함께 몽고군과 맞서 싸웠고
끝내 적장 살리타이(撒禮塔)를 사살하는 전과를 세우고 그들을 격퇴했다. 이처럼 국가가 위난에 처했을
때 비록 부곡민들이지만 이들을 결집시켜 적과 싸운 호국의 의지로 충만한 인물이었다.
이 전투에서 적장 살리타이를 사살하고 몽고군을 물리친 공로로 국가는 그를 상장군으로 임명했으나
그렇게 큰 직책을 받을 수 없다며 끝내 사양하면서 섭랑장(攝郞將) 정도의 미관말직만을 자청했으니
그 겸손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보통사람 같으면 조그마한 공적을 세우고도 이를 침소봉대해
자랑하고 과도한 국가포상을 요구할 터인데 김윤후는 그와 정반대였다.
이와 같이 김윤후는 처인성 전투를 계기로 승려에서 무인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그 후 21년의 세월이
흐른 1253년(고종 40년) 몽고군의 제5차 침입 때에도 김윤후는 방호별감랑장(防護別監郞將)이 돼
충주성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다. 충주성 전투의 주역 또한 천민들이었고 이들의 지휘자 또한
김윤후 장군이었다.
처인성 전투에서 부곡에 사는 천민들의 애국심과 과감한 전투력을 직접 체험한 바 있는 김윤후는 인간의
기본적인 심성을 꿰뚫어 보는 지장이자 덕장이었다.
그는 관노의 문서를 모두 불태워 그들의 신분 해방을 입증했고 몽고군으로부터 빼앗은 소·말 등의 노획품을
골고루 나눠 주자 관노들은 감격, 용전분투했고 끝내 몽고군을 격퇴한 것이다. 이처럼 자유란 실로
놀랍고도 무서운 인간 능력을 발휘케 하는 요소다.
김윤후 장군의 승전 배후에는 전투 주역인 천민들의 자유를 향한 갈망, 이를 꿰뚫어 보고 적절히 활용한
그의 지략과 뜨거운 호국의지가 결합해 있었던 것이다.
즉 신분 해방을 통한 자유에의 갈망이 대몽항전의 큰 원동력이 됐다. 그리하여 김윤후 장군이 지휘하는
천민들의 항전태세는 우유부단하고 소극적인 왕공·귀족·관료 등 특권계급의 임전태세에 비해 몇 배나
견고하고 의연했다.
백성을 버리고 강화도로 도피한 특권층이 환락과 안일에 빠져 있는 동안 목숨을 걸고 굶주려 가면서
몽고군과 결사적으로 싸운 사람들이 바로 김윤후 장군과 그 휘하의 천민 출신 군사들이었다. 그들이
갖춘 무기·장비는 보잘것 없었다.
그러나 나라를 지켜야겠다는 김윤후 장군의 뜨거운 호국의지와 천민들의 자유를 향한 갈망이 결합,
혁혁한 전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김윤후 장군이 특권층인 승려의 신분을
내던지고 천민들과 생사고락을 함께하면서 그들을 군사조직의 일원으로 재편, 조직화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 결과 아시아·유럽 대륙을 석권한 대제국을 상대로 40년 간이나 버틸 수 있었다. 이는 바로
김윤후 장군과 그 휘하의 군사들이 발휘한 불굴의 저항정신과 자주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말발굽이 닿는 곳에 승리만이 있다고 자부하던 몽고군에 처인성·충주성 전투를 통해 참담한 패배를
안긴 김윤후 장군의 승첩이야말로 우리 역사 속에 길이 빛날 것이다.<펌>
▶처인성에서 출토된 고려도검 김윤후의 첫 승전지인 처인성. 이곳에서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많은 유물이 출토됐다. 특히 대몽항쟁의 치열함을 증명하듯 화살촉과 칼이 발견되었는데, 고려시대 칼로는 두 번째에 해당하는 매우 드문 발견이다. 처인성에서 출토된 고려도검은 현재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에 보존되어 있다. 한국사 傳 제작진이 고려도검을 통해 처인성 전투의 흔적을 취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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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항쟁의 격전지, 처인성을 가다.
마지막 답사지가 용인 방면이다.
그 곳으로 답사지로 선정한 가장 큰이유는 바로 대몽항쟁의 성지 "처인성" 때문이였다.
처인성과 충주는 대몽항쟁의 격전지였다.그리고 승전을 하여 고장을 승격 시킨 것과
그 배후에는 다같이 김윤휴장군이 있었기 때문이였다.
대몽항쟁을 하여 승전을 하여 승격된 곳이 4곳이 있는데, 고종 18년(1231) 3개월에
걸친 몽고군의 파상적인 공세를 끝까지 막아내었던 여몽 1차전쟁 최대의 격전지였던
귀주를 정원대도호부로 승격시킨 것, 고종 40년(1253) 70여일의 사력을 다한 항전으로
몽고의 5차 침략군을 저지, 철퇴케 하였던 충주를 국원경으로 승격시키였고 이듬해에
충주에 속한 다인철소를 익안현으로 ,여기에 특수행정구역인 부곡이 현으로 승격된
사례로서 고종19년(1232) 적장 살례탑을 사살, 2차 침략군을 철퇴케 하였던
오늘 우리가 답사하는 처인부곡을 들 수 있다.
우리들은 충주에 살면서 늘 임진왜란 패전에 멍에를 쓴 신립장군의 이야기는 잘알고 있으면서
징기스칸의 대몽고제국을 맞이하여 노비와 천민, 평민과 관군이 함께 이루어낸 역사적인
충주성전투의 승전에 대하여서는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충주성이 그 당시에 위치에 대한 논고에만 치우지보니 본래 충주시민이 이루어낸 대몽항쟁
정신을 계승하는 것에 대하여서는 소홀한 점이 없지않았었다.
이런 차에 문화회에서 충주와 연계하여 처인성지 가는 길은 어느 답사보다 또 다른 감화로
다가온다. 처인성 가는 길은 겨우 차 한 대가 빠져 나갈 수 있는 농로 길이다.
포장 공사을 잘하였다고 길가에 세워둔 공덕비가 무색하였다. 처인성의 위치는 경기도
용인시 남사면 아곡리의 입구 왼쪽에 있는 자그마한 야산이다.
가까히 가서 올라서야 토성이란 느낌이 든다 .처인성을 찾는 사람들은 커다란 기대감을 갖고 찾지만
막상 둘러본 이후에는 실망하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안내표지판과 승첩기념비가 없으면 그곳이
대몽항쟁의 격전지라고 생각할 이렇다할 것이 없이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 이 곳에서 13세기 초 동북아시아의 평원을 누비며 일으킨 정복전쟁으로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확장했던 몽골에게 뼈아픈 일패를 안긴 역사가 숨쉬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펌>
.처인성은 규모가 425m의 사다리꼴의 토성이다. 주변이 평지라 비교적 멀리서도 잘 보인다.
성 입구에 경기도 기념물 제44호라는 비석과 함께 처인성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으며
성의 남쪽에 '처인성 승첩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잔존하는 성의 길이는 약 250m 정도이다. 주변보다 높은 지형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평면은
사다리꼴에 가까우며, 성을 쌓은 방법을 보면 높은 곳은 깎고 낮은 곳은 다졌다.
지형의 높이를 고려하였기 때문에 성벽의 높이는 4.8∼6.3m로 차이가 난다.
이 성에서 북쪽으로 마주 보이는 곳에 말안장 같은 야산이 있는데, 여기서
살리타이가 화살을 맞고 전사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사장(死將)터'라고 부른다.
토성 안쪽
13세기 초, 칭기즈칸에 의해 통합된 몽고 제국이 전 세계를 휩쓰는 과정에서 고려가 예외일 수는 없었다.
당시 고려의 조정은 몽고군이 수전에 약하다는 생각에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몽고에 대항하기로
결심했다. 장기전을 통해서 몽고군을 물리친다는 작전이었지만 그 결과는 참담하기 그지 없었다.
1231년 몽고의 살리타이가 압록강을 넘어 침입한 이후 거의 40년의 세월 동안 몽고의 부대는
고려의 국토를 사정없이 유린했다. 1차(1231년), 2차(1232년), 3차(1235~39년), 4차(1247년),
5차(1253년), 6차(1254~59년)에 걸친 몽고의 침략에 고려의 전 국토는 그야말로 초토화되었다.
잔학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몽고의 침략에 대항한 고려의 자존심은 지도층이 아니었다.
고려의 지도층이 자신들만의 안위를 위해서 강화도에 피신한 결과, 육지에 남아있는
고려의 백성들이 몽고군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1차 침략과 마찬가지로, 1232년 몽고의 2차 침략의 지휘를 맡은 살리타이는 강화도로 천도(피난)한
고려의 조정을 고립시키기 위해서 고려의 본토를 초토화하는 작전을 구사했다.
살리타이는 몽고의 주력부대를 이끌고 개경을 거쳐 한양을 공략한 후, 수원을 지나 남쪽으로
진격하다가 처인성을 공격하게 되었다(1232년 9월).
왜 살리타이가 처인성을 공격했을까? 그것은 아마도 처인이 수원-오산-안성으로 통하는 동서로의
교차로였기에 남쪽으로 진격하기 위해서는 처인을 지나야 했으며, 당시에 처인이 군창으로
사용되던 곳이라 몽고군의 군량 보급을 위해 점령해야 할 곳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고 있다.
처인성을 지키던 승려 김윤후는 처인의 지역민들과 하나가 되어 몽고의 대군과 맞서 싸웠으며
이 싸움을 통해서 적장 살리타이가 전사하여 장수를 잃은 몽고군은 패하고 후퇴하게 된다.
김윤후는 이 싸움의 승리를 자신의 공으로만 여기지 않았다. 조정에서 내리는 상장군의 벼슬을
사양하고 섭랑장을 제수받은 그는 이후 몽고의 5차 침략 때(1953년) 충주성의 노비들과 합세하여
몽고군을 막는 전공을 세운다.
처인성전투에서 시작되어 충주성 전투로 이어지는 김윤휴장군의 탁월한 지휘력과 일반 백성들의
항쟁이 고려가 몽고군의 침략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유지 할 수 있었던 가장 근본적인 요인이였다.
오늘 그 시발점에 오른 역사의 현장 답사길에서 그 정신이 스며있는 중원에 살면서
그리고 중원문화를 알리는 일을 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써 이 땅을 지킨 선인들의 정신을
어떻게 참답게 전달하여야 할지 무거운 숙제를 안고 처인성을 내려온다.<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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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뒤돌아본 처인성....
용인시는 남사면 아곡리 처인성지에서 지역인사와 승려, 시민 등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처인성 고유제를 지냈다.
이번 고유제는 처인성 문화제의 사전 행사로 고려시대 대몽항쟁에서 역사적 대승을 거둔 처인대첩의 779주년 추모제례로 열렸다. 당시 처인대첩에서 희생된 많은 병사들의 원혼을 달래고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소망하는 뜻을 담았다.
이날 고유제는 용인불교연합회, 용인문화연구소, 남사면이 주관해 기념식과 추모제례로 진행됐으며 제례 후에 용인불교연합회 회원들이 승무와 바라춤 등을 선보였다. 용인문화원 무용단은 식전공연으로 살풀이 춤, 남사면 주민자치센터 풍물단은 식전공연과 식후 타악공연과 뒷풀이 등을 선보였다.
처인승첩은 779년 전 몽고의 2차 침입 시 승장 김윤후가 처인부곡민을 이끌고 처인성을 거점으로 필사적인 항전을 펼쳐 대승을 거둔 역사적 전투이다.
용인시는 처인승첩의 기상을 용인의 정신으로 승화하기 위해 1986년부터 열어온 ‘용구문화예술제’를 올해 처인대첩을 주제로 하는 역사문화축제인 ‘처인성 문화제’로 개편 확대해 기념식, 국제학술대회, 한몽친선행사, 각종 경연대회, 공연 등을 개최했다. 용인문화원(원장 이종민)과 처인성문화제추진위원회(위원장 김장호) 주최로 용인시, 용인예총 등의 협력으로 진행됐으며 한몽수교 20주년을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가 치러졌다.
정찬민 용인시장 "처인성문화제 남북공동개최하자"
“남·북 모두에 의미 커…개최지는 용인·개성”
정찬민 시장은 이날 SNS를 통해 “이번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용인시에서 매년 열리고 있는 처인성문화제에 대한 남북공동개최를 제안하려한다”고 말했다.
이어 “(정상회담에서) 남북간 문화·예술·체육교류를 활성화한다고 했고 처인성문화제가 남북교류의 좋은 전통 역사행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정 시장은 “처인성문화제는 고려시대 승장 김윤후가 몽골군을 무찌른 것을 기념하는 역사적인 행사로 남북한 모두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며 “당시 몽골군은 개성을 지나 경기도 일대에서 닥치는 대로 노략질을 했는데, 처인성 전투에서 패하면서 물러났다”고 강조했다.
또 “남북한 모두에게 우리 민족의 저항정신과 역사의식을 갖도록 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고 우리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고 문화교류를 활성화해 남북 간 평화를 강화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며 “공동 개최지는 용인과 개성이 적합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처인성문화제의 한 장면(정찬민 시장 SNS)© News1 |
용인시는 국난극복의 성지인 이곳에 오는 2021년 개관을 목표로 한옥역사교육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부지 4054㎡에 들어서는 교육관은 국내 최초로 순수 목재만 사용한 기둥간 거리 10m의 대공간 한옥으로 설계됐다.
다목적 문화시설, 교육시설 등을 갖출 예정이며 시는 이곳에서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역사교육, 체험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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