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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

[국가무형문화재 제4호 '갓일']갓을 쓰고 다니는 사람도 없는데 3대 째 갓을 만드는 정순자 갓일 장인

문화재방송 2018. 2. 7. 01:39
국가무형문화재 제4호 갓일 양태장 장순자 선생

갓일 장순자



1940. 9. 8. ~ | 보유자 인정: 2000년 7월 22일

水路로 千里 陸路로 千里 / 삼천리를 고중에 드러와서
저긔 안저 양대 트는 저 처자야 / 저 산 일흠 무엇이라드냐
나도 양태트러 부모공양하노라고 / 그 산 일흠 몰낫더니
옛적노인이 일너 전한 말이 / 제주 한라산이라 합듸다.
- 양태가 중, <조선민요연구> 고정옥, 수선사, 1949

갓이 지닌 풍채의 핵심 양태


갓을 제작하는 공정은 크게 3가지 기능으로 구분한다. 갓대우 부분을 말총으로 엮는 총모자장, 대올을 실낱처럼 떠서 차양부분을 얽어내는 양태장, 총모자와 양태를 조립하면서 명주를 입히고 옻칠해 완제품을 만들어 내는 입자장이 그것으로, 서로 분업을 거쳐서 비로소 갓이 만들어진다. 이 중 양태란 갓에 둥근 차양을 이루어 태양을 가리는 부분을 말한다.

보통 갓은 총모자를 말총으로 하고 양태는 죽사로 하는 것이 통념이나 옛날에는 양태와 총모자를 모두 죽사로 만들었다. 갓은 본시부터 피죽(皮竹) 쪼개기를 실같이 한 대올을 가지고 결어서 죽태(竹胎)의 기본형을 잡아 놓고 그 위에 깁을 바르면서 구멍이 메워지지 않을 만큼만 옻칠을 입힌 것이다. 모자 부분을 갓대우라고 일컫고 차양부분을 양태라 구별해 부르는데 갓대우와 양태는 제작 재료가 아주 다르게 발달되어 왔다. 본시 댓개비로 만들어 깁을 발랐던 갓대우가 자칫 망가지기를 잘하므로 아예 유연성 있는 말총이나 쇠꼬리털로 대체하게 되었다. 그러나 양태까지 말총으로 대용하기는 곤란하였다. 위풍 있게 폭넓은 양태를 말총으로 겯는다면 그 등판을 두둑하게 휘어잡을 수 없거니와 어느 한쪽이 축 쳐져 버려 단정치 못하게 된다. 그래서 양태는 대올을 극세화하는 기교에 한층 공력을 쏟아 왔다.

갓이 지니고 있는 풍채의 핵심은 양태의 느슨한 곡선에 있다. 그래서 각 시대마다 양태를 넓혔다가 줄이는 유행을 되풀이해 왔다. 단원의 풍속화에 나오는 갓보다는 혜원이 그린 갓이 훨씬 풍채가 있다. 그것은 그들 화가가 가진 필선에 차이가 없는 게 아니지만 시대차에 의한 유행의 반영도 배제될 수 없는 이유이다.

19세기초의 [순조실록]에 의하면 양태의 치레가 도를 지나쳐서 막대하게 낭비되고 있다는 폐단을 지적한 기록도 보인다. 그래서 19세기말 대원군 집권 시에는 대립(大笠)의 양태를 훨씬 좁혀서 소립(小笠)으로 개량하는 한편 양반 계층만이 쓴다는 종래의 통념을 깨뜨려 1896년 단발령과 동시에 백정과 같은 천민까지 갓 쓰는 것을 허락하였다.

한편, 조선시대 양태를 제작하는 장인들은 여자 장인들이 많았으며, 이것은 조선말기 김준근의 풍속화 [냥태 틀고]에서도 확인이 된다.이 그림에 의하면 여자 양태장 2명이 국수가락처럼 가는 대실[竹絲]를 옆에 두고 양태판이와 판걸이 및 바늘 등 간단한 도구만으로 양태를 제작하고 있다. 이와 같은 양태장의 제작 도구는 현재까지도 거의 그대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통영갓 , 갓일(입자장) 기능보유자 정춘모 선생 작품

외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딸들까지로 이어지는 모계 가업


국가무형문화재 제4호 갓일(양태장) 기능보유자인 장순자 선생은 외할머니 강군일 여사와 어머니 고정생 여사를 이어 3대째 양태인생을 걷고 있다. 장순자 선생이 기억하는 어머니는 남편의 구박을 받을 때에도 양태판이와 구덕만 들고 다른 집에 피해 가서 양태를 짤 정도로 평생 양태 짜는 일만 했다고 한다. 어머니의 양태 제작기술은 워낙 뛰어나서 주변의 사람들이 “너랑 죽거들랑 손이랑 내놔 죽으라”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제주시 도련2동 면촌에서 태어난 선생은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대를 이으면서 양태를 짰기 때문에 어깨 너머로 자연스럽게 기능을 익히게 되었고 마을에 있는 공동 작업장인 양태청에 수시로 드나들면서 양태와 자연스런 인연을 맺게 되었다. 어머니의 권유로 장순자 선생은 23살부터 10여 년 간 대장사를 하여 제주의 양태장들에게 대나무를 공급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10여 년 동안 120명의 할머니들에게 대를 공급했다. 그 후 양태를 제작하던 할머니들이 다 돌아가시고 대가 끊겼다. 그러다 선생의 나이 43살에 어머니가 국가 지정 국가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로 인정되면서부터 양태를 제작하는 일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하였다.

김준근, [초립 겻는 모양], 19세기 후반, [기산풍속도첩] 중, <프랑스기메박물관 소장>

어느 날 “대 긁어 안내카마씸?(대를 긁어드릴까요?)”하고 어머니께 여쭸더니 “걸목해봐라(대나무를 대칼로 훑어봐라)”고 한 이후부터 3대에 걸친 양태 인생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늦은 나이에 어머니의 대를 잇는 갓일을 시작한 만큼 그 과정 또한 혹독했다. 양태의 재료인 대오리를 만드는 과정 자체가 어려운데다 손은 수도 없이 대칼에 베였다. 하나의 갓에 10개월 이상의 노력을 쏟아 부어야 했다. 30년이 넘는 세월, 7살 때부터 어머니께 조금씩 갓일을 배웠던 것을 합하면 배가 되는 세월이다.

갓 만드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후회를 한 적도 많다. 그러나 누군가는 해야 하는데 할 사람이 본인밖에 없다는 사실이 원망스러웠던 적도 많다. 하지만 한편으론 본인이 할 수 있어 고맙고 그 역사를 지켰냈다는 자부심 또한 컸다. 1992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2000년 7월에 기능보유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2009년 개관한 갓 전시관은 국가의 지원과 더불어 사비를 털어 지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갓을 보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자 땅을 국가에 헌납하고 작품을 만들어 기부했다. 생계는 과수원에서 감귤 농사로 유지하며 국가에서 나오는 기능보유자에 대한 지원금 등을 모아 전시관에 놓을 갓 등을 사들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 선생의 딸들이 전수과정을 거치며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 외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딸들까지 4대에 걸쳐 양태의 기술이 전승되고 있다.

주요작품


양태, 46×46cm양태는 대나무의 표피 부분만을 가지고 죽사를 만들어 제작하는 갓의 차양 부분을 가리키는데 본시 양(凉)을 대나무로 제작한다는 뜻에서 비롯되었다.

제작과정


양태는 가느다란 대오리를 엮어서 만든다. 제작과정은 대오리 제조공정과 양태 제조공정으로 나뉜다. 대오리는 2~3년 된 대나무로 만드는데, 대나무를 먼저 알맞게 쪼갠 후에 대오리는 안쪽의 연한 부분을 깎아내고 가마솥에 넣어 5시간쯤 쪄서 말려야 한다. 그리고 20시간 정도 물에 담갔다가 양잿물에 나무 재를 깔고 이틀을 가마솥에 삶는다.

걸목한 대나무를 0.1㎝ 가량으로 잘게 쪼개 대실(대오리)을 만든 후, 넓적한 가죽으로 만든 무릎 장을 무릎 위에 놓고, 말린 대오리를 무릎 위에서 칼로 긁어 얇은 종이처럼 만든 다음 섬유같이 가늘게 쪼갠다. 그렇게 대오리 제조공정이 끝나면 양태의 날이 되는 살의 한 끝을 2가닥의 실로 새끼 꼬듯 돌리면서 엮는데, 살의 수는 300∼500가닥이나 된다고 한다. 대마디를 양태칼로 잘 다듬고 머리카락보다 잘게 쪼갠 대오리(죽사, 竹絲)를 양태판 위에서 날대와 절대로 엮어 나가는 세공에 속하는 작업이며 양태 한 장을 만드는 데에는 1년 가까이 소요된다.

마지막으로 살을 양태판 위에 햇살처럼 펼쳐 놓고, 직조의 씨줄에 해당하는 4가닥의 돌림 줄을 가지고 나선형으로 엮어나간다. 이 과정이 끝나면 빗대를 사선으로 꽂아 가로 세로를 안정시키고 묽은 아교로 풀을 먹여 완성한다.



   1) 겉목하기

   2) 대오리 제작

   3) 조를대 넣어 엮기

   4) 빗대꽂기

   5) 어교칠하기

 

1) 겉목하기- 무럽장 위에 삶은 대나무를 얹어 놓고 대칼로 얇게 훝어낸다.
2) 대오리 제작- 다 밀은 대나무를 무릎장 위에 올려 놓고 치댄다.
3) 조를대 넣어 엮기-양태판 위에 쌀날을 펼쳐 놓고 무쇠제역을 올려 놓은 후 절어간다.
4) 빗대꽂기- 태극선 모양의 곡선을 이루며 머럭을 꽂고 고칫대로 정리하는 모습
5) 어교칠하기- 완성된 양태 전체에 골고루 어교칠을 한다.

제작 도구

약력
  • 1940년               출생
  • 1962년               모친 고정생 여사로부터 양태제작 기능 전수받음
  • 1982년               전승공예대전 양태부분 입선
  • 1983년               전승공예대전 양태부분 입선
  • 1984년               전승공예대전 양태부분 입선
  • 1985년               전승공예대전 양태부분 장려상
  • 1985년               제주도지사 감사장 수상
  • 1986년               전승공예대전 양태부분 입선
  • 1992년               제주도지사 공로패 수상
  • 2000년               북제주군 1등 국민, 제주도 신지식인 선정
  • 200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갓일(양태장) 기능보유자 인정
  • 2008년               제주자연사박물관 특별기획전, 시연
  • 2009년               제주갓 전시관 공개행사
  • 2010년               특별기획전 ‘촉’ 손끝으로 이어지는 우리 갓
  • 2010년               찾아가는 무형문화재(섬려한 우리 유산 갓-선비체험)
  • 제주 갓전시관에서 만난 장인의 예술혼

    국가무형문화재 공개행사, 양태(갓일) 장순자 장인

    [한국문화신문 = 이한영 기자]  “대나무실을 뽑을 때 한 번에 쭉 칼로 밀어야 하지 도중에 멈추면 마디가 생기고, 울퉁불퉁해져 버리기 때문에 실로 쓰지 못해요. 한꺼번에 쭉 실을 빼내되, 얇아야하고 또 끊어지지 않게 그리고 단단하게 해야 태를 만들 수 있습니다. 한 올 한 올 자신과의 싸움을 이겨내지 못하면 갓일은 하기 어렵습니다.” 이는 국가무형문화재 갓일 제4호인 제주의 장순자 장인의 말이다.

     

     
     
    한올 한올 대나무실을 엮어가는 장순자 장인


     

     
     
    수십년 예술혼을 불태운 장인의 거친 손



    이제는 텔레비전 사극 드라마에서나 갓 쓴 선비의 모습을 볼 수 있지만 갓은 일찍이 조선시대 성인 남자들이 외출할 때 반드시 갖추어야 할 예복 가운데 하나로 원래는 햇볕, 비, 바람을 가리기 위한 실용적인 머리쓰개였으나 주로 양반의 사회적인 신분을 반영하는 쓰임새로 바뀌었다.  

    영정조 때의 갓은 양태가 비교적 넓었고 호박(장식물을 만드는 광물) 따위로 만든 갓끈을 가슴 밑으로 길게 늘어 뜨려 그 멋을 한층 더했다. 그러던 것이 순조 말기에는 양태가 더욱 넓어져서 종전의 어깨를 덮을 정도에서 앉은 사람을 완전히 덮을 정도가 되었는데 흥선대원군 집정 이후에는 갓의 폭이 좁아졌다.

     

     
     
    실을 만들기 위해 대나무를 자르는 장인


     
     
    장인의 예술혼을 불태우는 갓전시관 내부


     
     
    공개행사를 둘러보고 있는 관람객들


    장순자 장인의 외할머니(강군일)는 당시 제주 갓일(양태)의 손꼽히는 명인이었고 어머니(고정생) 역시 6살 때부터 갓일을 배워 솜씨가 빼어나기로 소문나 있었다. 오죽했으면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죽더라도 손은 두고 가라”고 할 정도인 집안에서 자연스레 갓일과 친해졌다. 어머니 고정생 장인은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제1대 양태장’으로 지정을 받았다. 갓일로 한 평생을 바친 어머니에 이어 장순자 장인이 중요무형문화재가 된 것은 2000년 7월의 일로 60살 때의 일이니 장인의 길이 얼마나 멀고 험한지 알 수 있다. 

    갓일은 총모자, 양태, 입자로 나뉜다. 총모자는 컵을 뒤집어 놓은 듯한 우뚝 솟은 원통 모양 부분을 말꼬리털 또는 목덜미털을 사용해 만드는 것이고, 양태는 대나무를 머리카락보다 잘게 쪼개서 레코드판처럼 얽어내 챙을 만드는 과정을 말하며, 입자는 이들 총모자와 양태를 결합하여 명주를 입히고 옻칠을 해서 제품을 완성시키는 일을 일컫는다. 이 세 가지 과정은 서로 재료가 다르고 솜씨의 격차가 심하기 때문에 생산지를 달리하고 무형문화재 보유자도 분명히 구분이 되어 있다.  

    이 가운데 장순자 장인은 국가무형문화재 갓일(양태) 보유자로 일흔다섯이라는 나이도 잊은 채 오늘도 쉬지 않고 한 올 한 올 갓일에 매진하고 있다. 상설 <갓전시관>에서는 장순자 장인이 걸어온 갓일의 세계를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다. 장순자 장인은 전시관을 나서는 기자의 손을 꼭 잡으며 ‘우리의 전통 문화를 알리기 위해 먼 곳에서 와 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억척스런 장인의 거친 손이 국가무형문화재의 험난했던 지난 세월을 말해주는 듯 하여 뭉클했다.

     

      


    원문보기

    http://www.koya-culture.com/news/article.html?no=99891


  • 이달의 블로그 대문 보물 제281호 남원 광한루 (南原廣寒樓)



    조선시대의 재상 황희가 남원에 유배가서 1418년 현재보다 규모가 작은 누를 지어 광통루(廣通樓)라 했는데, 1434년 남원부사 민여공(閔汝恭)이 증축했고, 1444년(세종 26) 전라관찰사 정인지(鄭麟趾)에 의해서 광한루라 불리게 되었다.

    오작교

    하늘에 사는 옥황상제의 딸 베짜는 직녀와 미천한 소몰이 견우가 신분을 초월한 사랑을 하여

    결혼을 하게 되었다던 그 전설속의 다리랄까~

    하늘나라 견우와 직녀의 사랑은 신분의 벽을 뚜어 넘은 이도령과 성춘향의 사랑과 흡사한데

    이러한 전설을 지상에 펼쳐놓은 것이 광한루원의 호수와 오작교인것 이다

    그래서 오작교는 까마귀 오(烏), 까치 작(鵲), 다리 교(橋)자를 쓴다


    시인묵객들은 궁궐에는 경회루가 있고, 지방에는 광한루와 더불어 평양의 부벽루,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를 우리나라 4대 누각이라 불려지는데 그 중 으뜸은 광한루라 했다.

    경회루는 궁궐의 건물로 황실에서 지은 곳이며 지방의 누각 중 평양의 부벽루는 애석하게도 아직은 가볼 수 없는 곳이고, 진주 촉석루는 625 때 불에 타 지금의 건물은 19605월경 복원한 것으로 복원 역사가 짧으며, 밀양의 영남루 역시 1844년에 지어 복원 역사가 길지 않다.

    그러나 광한루는 1419년에 지어 1597년 정유재란 때 불탔으나 1626년에 복원한 건물로 복원 역사 면에서도 단연 으뜸이다.

    광한루가 더욱 유명하게 된 것은 이몽룡과 성춘향의 로맨스가 익어진 곳이기에 서민의 가슴에는 더욱 애틋하고 정감어린 곳으로 뇌리에 각인 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춘향 사당의 춘향 영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