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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

[동영상으로 보는 108년 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 의거 장면] 러시아 장군은 네말로 기어 도망 가

문화재방송 2017. 10. 25. 11:49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직후 정황 묘사한 러시아 신문

발견(동영상도)


입력 : 2015.02.04 21:30 | 수정 : 2015.02.05 00:59

"러 장군, 네발로 기어 도망가"

안중근 의사 사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를 수행하던 인물들은 깜짝 놀라서 멀지 않은 곳으로 피했다. 러시아와 일본의 수행원들은 정신이 나가 도망쳤으며, 어느 러시아 장군은 네 발로 기어가면서 겁먹은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안중근(安重根·1879~1910·사진)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驛)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던 의거(義擧) 직후의 정황을 묘사한 러시아 신문이 발견됐다. 이태진 한국역사연구원장(서울대 명예교수)은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보도한 1911년 10월 24일자 러시아 페테르부르크 신문 기사를 러시아 기사 아카이브에서 찾았다"고 4일 밝혔다.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역에서 이토와 수행원 3명을 권총으로 저격하고 "코레아 우라(한국 만세)"를 외친 뒤, 러시아 헌병에게 체포됐다. 이 기사는 저격 직후의 정황을 상세하게 묘사한 것이 특징이다.

당시 블라디미르 코콥초프 러시아 재무장관은 안 의사의 의거 직후 "눈앞에서 일어난 사고에 당황하지 않고 쓰러진 이토 공작(公爵)을 부축했으며 공작은 그의 품에 쓰러졌다"고 이 신문은 보도했다. 코콥초프는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와 회담을 갖기로 했던 당사자다.

이 신문은 "이토 히로부미를 맞이하는 환영식을 필름에 담기 위해 하얼빈역에 갔던 러시아 촬영 기사가 카메라를 작동시킨 덕분에 총격 순간도 촬영할 수 있었다"고 보도했다. 이종현(서울대 노어노문학과 박사과정)씨가 번역한 러시아 연해주국립박물관의 연구 논문에 따르면, 이 영상은 '하얼빈 최초의 영화 촬영'이기도 했다.

당시 이 영상의 판권을 소유한 러시아 상영업자는 하얼빈 영화관에서 이 필름을 상영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러시아 당국이 상영 금지 처분을 내렸다는 사실도 이 기사를 통해 확인됐다. 이 때문에 러시아 상영업자는 프랑스 기업가에게 당시 1만5000프랑에 영상을 판매했다. 이 신문은 "이후 프랑스에서 오랫동안 이 필름을 상영했다"고 전했다. 현재 필름은 미국이나 프랑스 등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고, 2009년 영상 일부가 KBS TV '역사 스페셜'을 통해 공개되기도 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2/04/2015020404250.html

  



이등박문 저격 당시 동영상과 잘 알려지지 않은 진실<아래 클릭>
https://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embedded&v=ATj0AkToSVo<원본>


아래 영상을 보면 안 의사의 총을 맞고 쓰러지는 이토 총리의 얼굴이 아베 총리의 얼굴로 바뀐다고?


https://www.youtube.com/watch?v=pGn-NUYHnso



보훈처, 26일 안중근 의사 의거 108주년 기념식

(서울=뉴스1) 홍기삼 기자 | 2017-10-25 09:24 송고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안중근 의사 의거 108주년 기념식'이 26일 오전 10시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사)안중근의사숭모회(이사장 김황식) 주관으로 열린다고 25일 밝혔다.

지난 1909년 10월26일 안중근 의사가 중국 하얼빈역에서 대한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해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의지를 만천하에 알린 일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이날 기념식은 피우진 국가보훈처 처장, 박유철 광복회장을 비롯한 독립운동 관련 단체장과 회원, 시민 등 4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약전 봉독, 내빈 기념사 등의 순으로 진행된다.

이날 안중근공원이 있는 부천시에서도 기념식이 개최될 예정이다. 광복회 부천시지회 주관으로 오전 11시부터 시작하는 행사에는 장정교 인천보훈지청장, 김만수 부천시장 등을 비롯한 각계인사와 광복회원, 시민 등 300여 명이 참석한다.


argus@


다시 되돌아 보는 안중근 의사의 정의로운 전쟁




1909(31) 32일 안중근은 김기용, 강기순, 백남규 등 11인과 동의단지(同義斷指)동맹을 결성하였다. 35일에는 총기를 휴대한 약 300명의 의병을 이끌고 수청 방면으로부터 합십마 부근으로 이동하는 등 의병활동을 하다 이튿날 일진회 회원 박모를 응징하였다. 그해 410일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 병탄안을 찬성하였으며 710일에는 일본 정부 각의에서 의결되고 일본 국왕은 그날로 재가하였다.

그해 109일 이토는 일본 국왕을 만나 3, 4주간 예정으로 만주를 여행한다는 계획을 알리고 18일 중국 다렌에 도착한다. 블라디보스톡에 머물던 안중근은 이 소식을 듣고 우덕순을 만나 이치권의 집으로 함께 돌아와 이토 히로부미 처단 계획을 합의한다. 1022일 안중근, 우덕순, 류동하는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이때 이토는 아침 뤼순을 출발하였다.

드디어 역사적인 날. 1026일 아침 630분경, 안중근은 새 양복과 모자를 쓰고 묶고 있던 집을 나선다. 7시경에 하얼빈에 도착하여 이토가 오기를 기다린다. 9시경 이토를 실은 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하여 약 15분간 열차 안에서 코코프체프와 환담하였다. 915분에 이토 히로부미는 하차하였다.

 

 

 

930분경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고 일본인 환영단으로 향하던 이토에게 당당하게 다가가 저자가 필시 이토일 것이다. 생각하고 권총 세발을 발사하여 명중시켰다. 이후 곧장 그를 수행하던 사람들에게도 부상을 입혔다. 안의사는 죄 없는 수행원들까지 부상을 입힌 것에는 비통한 일이라고 재판장에서 말하였다. 그러나 이토의 얼굴을 확실히 알지 못하여 혹시라도 잘못 쏘았다면 일이 낭패가 되기에 그 주변인들이 이토라 여겨서 총을 발사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냉혈한 테러리스트가 아니다. 그는 정의로운 선비였다.

러시아 헌병이 안중근을 덮치자 그는 쓰러지면서 권총을 땅바닥에 떨어뜨리고 만국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러시아 말로 코레아 우레를 외친 다음, 하늘을 향해 대한 만세를 목이 터져라 세 번 외쳤다. 10시에 이토는 하얼빈 역에서 절명하였다. 그는 뜻을 이루었다. 일을 도모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고, 완성하는 것은 하늘의 뜻에 달려있다(謀事在人, 成事在天)”이라 하였는데, 하늘의 뜻도 안의사와 함께 하였던 것이다. 본시 이 글은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이 사마의의 군대를 화공(火攻)으로 물리치려 했으나 소나기가 내려 뜻을 이루지 못하고 탄식하며 했던 말이다. 그러나 안중근은 자기의 의거는 하늘의 뜻이었음을 밝히고 정당성을 부여하며 뤼순 옥중에서 먹을 갈아 이 글을 썼다.

러시아 당국은 안중근을 일제에 인도하기로 결정하였다. 1155분에 거사를 함께 했던 우덕순 조도선도 피체되었다. 111일 뤼순으로 압송되고 113일 오전 10시에 연루 혐의자 9명과 함께 뤼순 감옥에 수감되었다.

안의사가 순국하기 1년전- 1909년 3월 5일경,
11명의 동지와 함께 왼손 무명지를 끊어 그 피로'대한독립'이라는 네 글자를 쓰고
'대한독립만세'를 세 번 외치며 하늘과 땅에 맹세하고 조국의 독립회복과 동양평화를
위해 몸바칠 것을 다짐했다.

<의거 직후 중국 뤼순 감옥의 안중근 의사(왼쪽).>

의거 다음날 1909년 10월27일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관에서 찍은 안 의사 부인 김아려 여사와 아들 분도, 준생(오른쪽 위).

안 의사의 둘째 아들 준생, 동생 정근, 정근의 아들 원생, 안의사의 딸 현생, 동생 공근의 아들 우생.

<안중근 의사 기념사업회 제공>



<안중근 의사 께서 갇히셨던 감옥의 창문>

         <죄수들을 사형시켰던 교수대> 

              ( 당시 안중근 의사 께서도 이곳에서 돌아가신듯 ....)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은 날부터 약 2개월 후-
3월 26일 오전 9시께  안중근 의사는 전날 고향으로부터 보내온 조선옷으로 갈아입고
형장으로 나아가기 전에 약 10분간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사형집행 직전 마지막 유언을 묻는 검찰관에게 "나의 거사는 동양 평화를 위해 결행한
것이므로 임형관리들도 한일간에 화합하여 동양평화에 이바지하기 바란다"고 한뒤
'동양평화만세'를 부르려 했으나 제지당했다.
오전 10시, 안중근 의사는 의연한 자세로 순국했다.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문명이 높던 성균진사 안태훈과 백천조씨의 장남으로
 태어난 안중근 의사는 32살에 순국했다.
 
비록 젊은 나이에 호국의 영령이 되었으나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기 위해 생명을 
바친 수많은 선열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민족정기의 발양자였다.

191027일부터 14일까지 중국 여순(뤼순)의 관동도독부 고등법원에서 안중근 의거에 대한 여섯 차례 공판이 열렸다. 271회 공판장에서 안중근은 “3년전부터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이등을 포살코자 했으며, 이 의거는 개인적인 원한이 아니라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서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결행한 것이다라고 진술하였다.

29일 오전 950분 제 3회 공판이 개정되었다. 여기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 15개조를 설명하였다. 그러나 재판장에 의하여 중지 당하였다.

 

1. 대한제국 민황후를 시해한 죄

2. 대한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

3. 을사 5조약과 정미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4. 무고한 대한인들을 학살한 죄

5.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한 죄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7. 제일 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하게 한 죄

8.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킨 죄

9. 한국인들 교육을 방해한 죄

10. 대한인들의 외국유학을 금지시킨 죄

11.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

12. 대한국인이 스스로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트린 죄

13. 대한제국과 일본 사이에 분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대한제국이 태평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

14. 동양평화를 깨뜨린 죄

15. 일본 천황폐하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210일 오전 940분 제4회 공판에서 검찰관으로부터 각자에 대한 형량이 구형되는데 안중근은 사형, 우덕순과 조도선은 징역 3, 유동하는 징역 16개월이 구형되었다. 212일 오전 930분 제 5회 공판이 개정되었다. 두 일본인 관선 변호사의 변론이 행해졌다. 변론이 끝난 후 피고인들의 최후 진술에서 안중근은 일제의 침략상을 규탄하면서 한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이토를 척결했다고 당당하게 진술하였다.

 

이토의 죄상은 천지신명과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일인데 무슨 오해란 말인가. 더구나 나는 개인 원한으로 남을 죽인 죄인이 아니다. 나는 대한국 의병 참모중장의 직무로 전쟁을 수행하다 포로가 되어 이곳에 온 것이다 .지방재판소와는 전연 관계가 없는 일인 즉, 만국 형법과 국제 공법으로서 재판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일제 법정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상된 일임을 안의사는 알고 있었다. 1910214일 오전 10시 중국 여순의 관동도독부 일제의 고등법원 제6회 법정. 안의사에 대한 최종 판결일이다. 안중근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우덕순 징역 3, 유동하와 조도선에게는 징역 16개월이 판결되었다. 그리고 항소기간을 5일 내로 정하였다. 선고를 받고도 안중근은 이보다 더 극심한 형은 없느냐고 말하면서 시종일관 의연한 자세를 취하였다. 이튿날부터 그는 동양평화론을 설파하며 법원장에게 동양평화론한권을 저술하고 싶으니, 사형집행일을 한 달 남짓 늦추어 줄 수 있겠는가라고 부탁하였다. 법원장이 어찌 한 달 뿐이겠는가? 설사 몇 달이 걸리더라도 특별히 허가하겠으니 걱정하지 말라하므로 19일에는 사형선고에 대한 항소 포기를 한다. 그 진짜 이유는 어머니의 편지를 받아서 때문인지, 스스로 죽기를 각오하고 행한 정당한 의거임을 증명하고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 구차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인지 그 분명한 뜻을 알 수 없다. 그렇지만 그는 분명 살신성인(殺身成仁)하는 군자이며 지대지강(至大至剛)한 대장부이다.

 


중국, 뤼순(여순) 감옥소


19091026일 하얼빈 역에서의 의거 후, 일제의 뤼순(지금의 중국 여순) 감옥소로 압송된 때가 113일이다. 투옥 143일 동안 늘 그러하지는 않았지만, 일제는 국제적인 관심이 된 안중근 의사를 특별히 대우하였다. 의사는 붓글씨를 써서 일본인들에게 주었다. 의사의 글을 얻고자 일부러 찾아오는 일본인들도 있었다. 사형선고일 이후부터 순국되기 전까지 짧은 기간에 이곳에서 안응칠 역사<동양평화론>을 집필하였다. 곧 죽을 이에게 베푸는 마지막 은전인가? 아무튼 일제는 이런 특별 대우와 은전(?) 덕분에 안중근 의사의 유묵과 저서가 남아서 전해 질 수 있었고, 우리는 안중근 의사의 넋과 정신을 숭고하게 계승할 수 있게 되었다. 최소한의 인도주의적 체면을 유지하고 양심을 가진 일본인들에게 감사해 한다. 뤼순 감옥소에서의 생활을 안의사는 그의 안응칠 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감옥에 갇힌 뒤로 여러 사람과 차츰 가까이 지내는 중에 전옥(典獄, 교도대장)과 간수계장 그리고 일반관리들도 나를 후대하므로 나는 마음 속으로 이것이 꿈인가 참인가 의심했었다. ‘같은 일본인인데 어째서 이같이 서로 다른가. 대한에 있는 일본인들은 횡포하기가 말할 수 없는데 뤼순에 있는 일본인은 어째서 이같이 후한가. 종자가 달라서 그런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 까닭을 알지 못했다. (중략) 매주 목욕을 시켜주고 오전 오후 두 차례씩 사무실로 데리고 나와 고급 담배, 서양과자와 차를 주기에 배불리 먹기도 했다. .... 이같이 특별히 대우해 준 것에 대해 다 적지 못한다.”



 

 

중국 다렌의 뤼순감옥소(정식 한자명>여순일아 감옥구지((旅順日俄監獄舊址), 일아(日俄)일본과 러시아의 준말이며, 구지(舊地)옛 터이다.)는 본시 러시아의 감옥이었으나 러일전쟁 이후에 일제가 1907년부터 차지하여 주로 한국인중국인러시아인 등을 수감하였다. 1906부터 1936년 사이 수감자는 연간 약 2만여 명에 달했다. 1942년에서 19458월 사이에 약 700여 명의 수감자가 이곳에서 처형당했다.

이곳이 특별한 것은 바로 우리의 영웅, 안중근 의사가 구금되고 사형으로 옥사한 곳이기 때문이다. 1909113일 안중근 의사는 일제의 국사범으로 분류되어 이곳의 간수부장 당직실 옆에 있는 감방에 단독 구금되었다. 애국지사 단재 신채호와 우당 이회영도 이곳에 구금되어 고문 받고 또한 옥사하였다. 1988년 현재 중국정부는 일제의 침략을 기록하고 전하기 위해 국가중점역사문화재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필자는 2010년 겨레의 영산 백두산을 등정하고 장군총, 광개토대왕릉, 국내성 등 고구려 역사문화 유적지를 탐방하고 돌아오는 길에 안중근 의사가 투옥되고 순국한 이곳을 방문하였다. 이 사진들로 그 때의 기억과 감개를 반추해본다.

 

 

 

과연, 그 어머니에 그 아들


사형 선고를 받은 옥중의 아들에게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보낸 편지를 보면 과연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요, 그 아들에 그 어머니를 알 수 있다.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아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

네가 만일 늙은 이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 즉,

딴 맘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선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안중근 의사가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께 드린 유서>

어머니 전상서

예수를 찬미합니다.

불초한 자식은 감히 한 말씀을 어머님 전에 올리려 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자식의 막심한 불효와

아침저녁 문안인사 못 드림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감정에 이기지 못하시고

이 불초자를 너무나 생각해 주시니

훗날 영원의 천당에서 만나 뵈올 것을 바라오며

또 기도하옵니다.

이 현세(現世)의 일이야말로

모두 주님의 명령에 달려 있으니

마음을 편안히 하옵기를 천만번 바라올 뿐입니다.

분도(안 의사의 장남)는 장차 신부가 되게 하여 주시길 희망하오며,

후일에도 잊지 마시옵고

천주께 바치도록 키워주십시오.

이상이 대요이며, 그밖에도 드릴 말씀은 허다하오나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 뵈온 뒤 누누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위아래 여러분께 문안도 드리지 못하오니,

반드시 꼭 주교님을 전심으로 신앙하시어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 뵈옵겠다고

전해 주시기 바라옵니다.

이 세상의 여러 가지 일은 정근과 공근에게 들어 주시옵고,

배려를 거두시고 마음 편안히 지내시옵소서.

아들 도마 올림

 

안중근 의거 후 모친 조 마리아 여사는 자부 김아려, 손자 분도와 준생 그리고 두 아들 정근과 공근 등 일가를 거느리고 연해주에 망명하였으며, 안중근 일가를 조국독립운동의 명문으로 이끌었다.

 

191039, 10일 두 아우인 정근과 공근 그리고 홍석구(프랑스 신부)가 마지막으로 안의사를 면회하였다. 그 자리에서 안의사는 두 동생들에게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는 것이니 두려움이 없다. 나는 천주님의 품 안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너희들은 오히려 기뻐해다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고.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라고 최후의 유언을 남겼다.

 


영웅의 숭고한 죽음

 

[순국 5분전 안중근 의사의 모습, 어머님이 보내온 수의를 입었다. 우리 겨레의 옷이다.]

 

안중근은 전날 고향으로부터 보내온 조선옷으로 갈아입고 사형집행장으로 나아간다. 전옥은 사형집행문을 읽고 유언할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안중근은 다른 유언은 없으나 나의 의거는 오로지 동양평화(東洋平和)를 도모하려는 성심(誠心)에서 한 것이니 바라건대 오늘 임검한 일본 관헌들도 다행히 나의 미충(微衷)을 양해하여 피아 구별 없이 합심 협력해 동양평화를 기필코 도모할 것을 간절히 바란다.”고 말하였다. 이어 안의사는 마지막으로 “‘동양평화만세를 삼창하고자한다고 하였으나 전옥은 그럴 수 없다고 하면서 사형집행을 명하였다.

다음 글은 안의사의 통역 역할을 한 일본인 소노키 스에키(圓木末喜)가 만주일일신문에 안중근의 최후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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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최후 - 소노키 스에키(圓木末喜)

 

부슬비가 내리는 1910326일 오전 10, 안중근의 사형은 뤼순(旅順)감옥에서 행해졌다. 안은 전날 밤 고향에서 보내온 옷을 입고 예정된 시간보다 먼저 간수 4명의 경호를 받으며 형장으로 불려나와 교수대 옆에 있는 대기실로 갔다. 당일 입은 옷은 상하의 모두 조선에서 만든 명주옷이었다. 저고리는 흰색이고 바지는 검은색이어서 흑백의 분명한 대조가 아무래도 수 분 후면 밝은데서 어두운 곳으로 갈 수밖에 없는 수인의 운명과 같아 보는 이로 하여금 일종의 감개를 느끼게 했다.

집행을 언도하고 드디어 미조부치(溝淵)검찰관, 구리하라(栗原)전옥(형무소장), 소노키통역, 기시다(岸田)서기가 교수대 앞에 있는 검시실(檢屍室)에 착석하자 안이 대기실에서 끌려 나왔다. 구리하라 전옥은 안에게 금년 224일 뤼순지방법원의 언도와 확정명령에 따라 사형을 집행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소노키의 통역이 끝나자 안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으나 구리하라 전옥은 다시 한번 안에게 뭔가 남길 말이 없느냐고 물었다. 안은 아무 것도 남길 유언은 없으나 다만 내가 한 일(이토 히로부미 사살)은 동양평화를 위해 한 것이므로 일한 양국인이 서로 일치협력해서 동양평화의 유지를 도모할 것을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자 간수가 반장짜리 종이 두 장을 접어 안의 눈을 가리고 그 위에 흰 천을 씌웠다. 안의 최후가 일각일각 다가왔다.

재판 당초부터 언도 이후까지 안을 정중하고 친절하게 대했던 관헌은 안이 최후의 순간을 맞을 때는 마음껏 최후의 기도를 하도록 허락했다. 안은 전옥의 말에 따라 수분 간 묵도(黙禱)를 했고 기도가 끝나자 수명의 간수에 둘러싸여 교수대로 향했다. 교수대의 구조는 마치 2층 집 같아서 작은 계단 7개를 올라가면 화로방 같은 것이 있는데 안은 조용히 걸어서 한 계단 한 계단 죽음의 길로 다가갔다. 그때의 감정이나 얼굴색은 흰옷과 어우러져 더욱 창백했다. 드디어 안이 교수대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자 옥리 한명이 그의 목에 밧줄을 감고 교수대 한쪽을 밟으니 바닥이 꽈당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1015분 안은 완전히 절명했다. 거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11분이었다.

보통 사형수의 유해는 좌관(座棺)에 넣은 것이 관례였으나 특별히 안(의사)을 위해서는 새롭게 송판으로 침관(寢棺)을 만들어 시체를 넣고 그 위를 흰 천으로 씌워 매우 정중하게 취급했다. 일단 이 관을 교회실에 넣고 안이 형장에 갈 때 품고 있던 예수의 상은 관 양쪽에 걸었다.

안의 공범자인 조도선(曺道先) 우덕순(禹德淳) 유동하(柳東夏) 3명은 교회실로 불려와 안의 유해를 향한 최후의 고별을 허가받았다. 세 사람은 모두 천주교인이 아니어서 조선식으로 두 번 절을 하며 안의 최후를 조문했다. 그들은 모두 감격한 듯 했고 그 중에서 우덕순은 하얼빈 이후 안중근의 소식이 끊겼는데 최후의 고별을 하게 돼 안도 만족할 것이라며 당국의 취급에 감사했다.

이리하여 시체는 매우 정중한 취급을 받으며 오후 보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공동묘지에 묻혔다. 두 동생은 안중근의 죽음을 듣고 아이고라고 외치며 통곡했다. 그들은 시신을 돌려달라고 했으나 안된다는 말에 서둘러 떠날 채비를 해서 26일 오후 5시 뤼순발 열차로 안동현을 거쳐 귀국길에 올랐다.

<출전 : 만주일일신문 191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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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이 전하기에 안의사의 최후 장면을 그대로 믿을 수 있을까 의심할 수도 있지만 달리 그 순간에 가까이에서 목도(目睹)한 조선인은 아무도 없다.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 최후의 순간을 상상해본다. 사형집행의 순간이지만 가슴 뭉클한 감격과 경외심이 일어난다. 다만 소노키의 말대로 침관으로 모시고 정중하게 장례와 발인의 예를 거쳐서 공동묘지에 묻었다면 의사의 유해를 찾을 길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루라도 속히 그의 유언대로 조국의 땅으로 모셔 와야 할 것이다.


안중근 의사의 논어유묵에서 얻은 삶의 교훈



안중근의 유묵(遺墨)은 현재 실물이나 사진으로 50여점이 확인된다. 이중 국내 소재는 26점으로 모두 국가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한 개인의 작품으로 놓고 볼 때 국가보물로 가장 많이 지정되어 있고, 미술 시장에서 거래되는 작품가격으로도 가장 높다.

안중근의 유묵은 모두 사형 선고일(1910. 2. 14)에서 순국(1910. 3. 26)까지 라는 점, 수신자가 모두 일본인이라는 점은 역사상 어떤 다른 사람의 경우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사례다. 특히 내용이 동양고전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현실고발이나 감계와 같이 자기 체험이나 자각으로 걸러낸 것이라는 점에서 안중근의 유서이자 또 다른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옆의 견리사의 견위수명’ - 이익을 보거든 의로움을 생각하고, 나라의 위기를 보거든 목숨을 바치라 - 유묵새김돌 사진은 안중근 의사기념관 앞에 전시되어 있는 논어명구의 안중근 유묵글이다.

안중근 의사로부터 유묵을 건네받은 사람은 모두 일본인이다. 이들은 여순 옥중 취조 검찰관, 대련세관 세무관, 뤼순 감옥 간수, 경관, 전의(典醫), 경시, 경호책임 헌병, 경수계장, 뤼순초등학교 교사, 일본 교토 정심사 사형수 교화승 및 여타 일본인들이다.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일본인 입장에서는 그들의 최고 지도자를 사살한 사람을 글씨를 받는다는 것이다. 또한 안의사의 입장에서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당시 이런 정황에 대해 그는 안응칠 역사에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동양평화론을 저술하고 있을 그 때 법원과 감옥의 일반관리들이 내 손으로 쓴 글로써 필적(筆跡)을 기념하고자 비단과 종이 수백 장을 사 넣으며 청구하였다. 나는 부득이 자신의 필법이 능하지도 못하고, 또 남의 웃음거리가 될 것도 생각지도 못하고서 매일 몇 시간씩 글씨를 썼다.”

 

그렇다면 안중근은 어떤 마음에서 무슨 까닭으로 이들에게 글을 써서 주었을까?

원수까지 반하지 않을 수 없었던 안중근 의사의 인품과 정신세계의 위대성을 읽을 수 있다. 여기서는 그의 유묵 중에서 논어의 글을 모두 모아서 그의 인생관과 세계관 등 그의 정신세계를 조망하며, 그로부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마땅한가라는 교훈을 얻고자 한다. 글씨는 그 사람의 인격이다. 그는 가히 군자 중의 군자이며 대인 중의 대인임을 알 수 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현장인 하얼빈역에 있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 입구(좌)와 전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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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교정에서 '안중근 장군' 동상 제막식


입력 : 2015.05.01 17:21 | 수정 : 2015.05.01 17:22

박승춘(오른쪽 다섯 번째) 국가보훈처장과 양종수(왼쪽 다섯 번째) 육군사관학교장 등 내빈이 1일 오전 서울 노원구 화랑로 육군사관학교에서 열린 광복 70주년 기념 ‘안중근 장군 동상 제막식’을 기념하고 있다./뉴시스


육군사관학교(육사) 교정에 안중근 의사의 동상이 섰다.

육사는 1일 안중근 의사의 증손녀 안기수씨, 안중근 평화재단 청년아카데미, 안중근 의사 숭모회 등 관계자를 비롯한 육사 생도 및 장병 16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안중근 장군 동상 제막식’을 열었다.

청동브론즈로 만든 동상은 안중근 장군이 하얼빈 의거 당시 입었던 전투복을 재현한 모습으로, 높이는 3m 무게는 2t이다. 사각 대리석 기단에는 ‘안중근 장군’이라고 한자로 새겨져 있다.

양종수 육군사관학교장(중장)은 기념사에서 “호국의 간성이 되기 위해 정진하는 사관생도들이 군인정신의 사표(師表)인 안중근 장군 동상을 통해 대한군인의 기상을 배우는 산 교육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안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대한의군(大韓義軍) 참모중장' 신분으로 '일본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고 이듬해 순국했다. 이 동상은 안 의사 순국 105주년과 광복 70주년을 기리는 취지에서 안중근 평화재단 청년아카데미가 기증했다. 안중근 평화재단 청년아카데미 정광일 대표는 “위국헌신의 정예장교를 양성하는 육군사관학교에 안중근 장군 동상이 건립된 것은 매우 뜻 깊은 일이다”며 “광복 70주년과 육사 개교기념일을 맞아 군부대에 최초로 안 장군 동상을 세우게 됐다”고 밝혔다.

앞서 육사는 1976년 안중근 장군 충의비를 세우고, 2014년에 안중근 장군실을 개관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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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70주년, 순국105주년-돌아오지 못한 안중근 의사
[창간 12주년 인터뷰]보덕사 삼중 스님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 위해 국가가 나서야”
 
임국정 기자   기사입력 2015/03/26 [11:09]

 

▲ 안중근 의사, 일본 엽서     ©브레이크뉴스

 

 

브레이크뉴스 임국정 기자=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아침 10시 중국 여순(뤼순) 형무소에서 32세의 나이에 순국했다.

   

오늘(26일)은 안중근 의사 순국 105주년이다. 이에 앞서 보덕사 삼중 스님은 지난 3월 14일~15일 직접 중국 여순을 방문했다. 스님은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발굴해 한국으로 모셔오는 일이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할 일 이며, 그 일을 하다가 가고 싶다고 말했다.

 

▲ 대림사 안중근 의사 비문, 삼중 스님     ©브레이크뉴스

 

지바 도시치 

   

삼중스님은 25년 전 일본 센다이에 있는 대림사라는 전통사찰을 방문했다. 거기서 스님은 놀라운 모습을 발견한다. 안중근 의사가 남긴 글귀 중 하나인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이란 비문이 새겨진 집채만 한 비가 절 내에 서 있었던 것이다. 비석에는 대한국인 안중근 ‘의사’라고 쓰여 있었다. 

   

이러한 비가 서게 된 사연은 안 의사와 한 일본인과의 인연에서부터 시작된다.

 

안 의사는 수감 중 일본인들에게 조차 존경 받았다. 당시 안 의사의 글을 받으려는 일본의 검사, 변호사, 황족 등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 안중근 의사, 여순 형무소     ©브레이크뉴스

 

당시 형무소장 구리하라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도 바로 안 의사였다. 구리하라는 안 의사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붓글씨를 쓸 수 있게 묵인해 줬다. 

 

아울러 영하 40도에 달하는 여순 형무소에서 일반 죄수는 밑바닥에서 잠을 잤지만 안 의사는 다 떨어진 침대라도 제공받을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안중근을 따랐던 사람 중 하나는 죽음 직전의 안중근을 끝까지 지켜 본 일본인 헌병 지바 도시치이다. 기록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그는 안중근에게 권총을 빼서 겨누기도 했다. 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근대화 최고의 영웅으로 추앙받았으며, 지바는 일본 중에서도 애국심이 강한 센다이 지역 출신이었다. 


그러자 안중근은 “너는 오해하고 있다. 나는 암살범이 아니다. 나는 동양평화를 위해 전쟁광을 사살했다. 일본도 전쟁이 말려들 수 있다”라며 동양평화론을 들이댄다. 지바가 거기서 무릎을 꿇는다.

 

안중근 의사의 사촌이자 광복군 지대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안춘생 씨는 대림사에 온 당시 “안중근 의사가 수감됐던 곳은 탈옥 가능성이 가장 좋은 곳이었다”라고 밝혔다.


한 번은 안 의사 구출 특공 작전을 펴기 위해 내복 안에 밀서를 담아 보낸적이 있다고 한다. 당시 그러한 물품을 검열하는 사람이 바로 지바였다. 그러나 지바는 밀서를 발견하고도 묵살했다. 목숨을 걸고 안중근 의사를 지켜준 것이다. 

 

▲ 지바 도시치, 안중근 의사     ©브레이크뉴스

 

모국이 기억하지 않는 영웅 

   

형무소 수감 중 안 의사는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내 “조석으로 문안을 못 드리는 불효를 용서해 주세요. 어머니보다 앞서 가는 이 자식을 잊어버리세요. 저를 원수같이 생각하세요. 천당에서 만나시죠”라고 전한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 중 하나는 신부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답장을 보내 “그래,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 나는 너의 비범함을 봤다. 장하다. 대한의 아들 안중근. 외국인에게 목숨을 구걸하지 마라(항소하지 마라)”라고 말했다.

   

이러한 모자 간의 굳건한 의지처럼 안 의사는 항소하지 않는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는 고등법원장에 항소하지 않을 테니 ‘동양 평화론’을 저술할 때까지만 사형 집행을 미뤄달라고 말했다.

 

그렇게 안 의사는 수감돼 있는 동안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을 저술했다. 그러나 ‘동양평화론’이 완성되기 전 법원장이 약속을 깨고 사형을 집행한다.  

   

간수 지바는 “집행장에 가셔야 겠습니다”라며 통곡을 한다. “의인을 죽이는 것이 아닌데”

   

그의 말에 안 의사는 “나는 이 삶을 끝내고 천국으로 간다. 죽음의 준비가 끝났다”라고 말했다. 그때 안 의사가 지바에게 주기 위해 최후로 쓴 글귀가 “위국헌신 군인본분”이다.

   

안 의사가 순국한 후 지바는 그 길로 전역한다. 바로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대림사에서 안중근 의사의 영정을 모셔 놓고 추모를 시작했다. 그렇게 20년 후 지바가 죽고 지바의 아내가 그를 이어 20년을 추모한다. 

   

아내에 이어 딸이, 딸에 이어 손자로 이어져 4대째 추모는 이어지고 있다. 그러한 모습을 지켜 본 삼중 스님은 마치 안 의사가 일본 사람인 듯한 착각을 불러올 정도였다고 말했다.

 

헌병 간수장 지바의 조카 중 한 명은 동경에서 유명한 변호사였다. 그는 미우라 여사(지바의 딸)를 모시고 일년에 한 번 씩 수십 년 동안 일본 전국을 순회하면서 동양평화론을 주제로 강연을 했다. “안 의사는 동양 평화를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쏜 것이다”라는 내용이다. 또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안 의사의 무죄 재심청구를 하기도 했다. 

   

▲ 삼중 스님, 오른쪽이 지바의 조카     © 브레이크뉴스

 

삼중 스님은 이렇게 일본인 중 4대째 추모를 이어오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한국 사람으로서 부끄럽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안 의사에 대해 관심 없는 분이 너무 많아 마음이 아픕니다” 

   

안중근은 중국에서도 영웅시 되고 있다. 당시 중국 4억 인구가 하지 못했던 일을 안 의사는 해냈다는 것이다. 이미 지난해 하얼빈역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도 건립했다.

   

중국 정부는 그동안 일본이 지배했고 안 의사가 갇혀 있었던 형무소와 재판소 등을 일본이 물러나고 난 후부터 “역사를 잊지 말자”라는 의식으로 계속해서 보존해 왔다.

   

삼중 스님은 “현재 우리나라는 안 의사에 대한 의식이 없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안 의사의 혼을 다시 부활시켜야 한다”라고 말했다. 

 

▲ 안중근 의사, 천당지복 영원지락     ©브레이크뉴스

 

“천당지복 영원지락(天堂之福 永遠之樂)” 

   

안중근 의사가 쓴 글귀 중에 “천당지복 영원지락”이라는 글귀가 있다. “천당의 복은 영원한 즐거움이다”라는 뜻이다. 천주교 신자였던 안 의사의 신앙심이 잘 드러난다.

   

안 의사는 사형을 선고 받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너희 나라에는 사형보다 더한 형벌은 없는가?”

   

안 의사가 천국을 준비하는 모습은 의연했다. 삼중 스님은 “보통은 이승의 삶만 생각하지만 32세로 사형장에서 떠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의 신앙심 때문이었다”라고 말했다.

   

안 의사는 “그 누가 이렇게 살다 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만큼 많은 교도관들의 존경을 받았다. “죽음이 끝이 아니다”라는 그가 천주교인으로서 가진 ‘영생 사상’이 일본인들로 하여금 “안 의사는 성인이다”라는 생각을 갖게 할 만 했던 것이다. 

 

보통 형무소에서 수감자가 죽으면 통나무에 넣어 묻었지만 당시 교도소장 등은 안 의사만큼은 한국식 소나무 관을 잘 짜서 안장했다. 삼중스님은 “그들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일로 안 의사를 존경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만큼 그의 행동과 사상을 존경했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 안중근 의사, 순국 현장, 재판장, 형무소 내 흉상     ©브레이크뉴스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 

   

안 의사는 의병 참모 중장을 지냈다. 3년 동안의 의병 활동 중에 일본군 10명을 포로로 잡은 적이 있다. 안중근 의사가 포로를 심문하니 포로들은 “우리는 이 전선에 나오고 싶지 않았다. 이토 히로부미가 우리를 내몰았다. 생명을 던지거나 죽일 생각이 없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안 의사는 “너희들이 무슨 죄가 있느냐”라며 그들을 다 풀어줬다. 

   

일본군에 의해 의병들의 피해가 컸던 상황에서 겨우 잡은 10명을 풀어주자 안 의사를 추종하던 의병들이 “우리는 처참하게 당했는데”라며 등을 돌렸다.  

   

그러던 와중 남은 의병도 일본군에 의해 지리멸렬하게 됐다. 

   

“사나이 뜻을 품고 나라 밖에 나왔다가 큰일을 못 이루니 몸 두기 어려워라. 바라건대 동포들아, 피 흐려 죽기를 맹세하고 세상에 의리없는 귀신은 되지 말지어다.”

-안중근 의사 의병시 중 

   

이후 안 의사는 동의단지회를 결성하고 단신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다.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가 전쟁광이므로 처단해야 평화가 유지된다라고 말했다. 전쟁광 이토 히로부미를 죽임으로써 수천, 수만의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큰 뜻을 품고 거사를 행했다.

 

삼중스님은 말했다. “안 의사가 개인적 감정을 가지고 자기 목적을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안 의사는 명성황후 시해, 한국 황제 폐위 등 이토를 처단한 분명한 15가지 이유를 일본인들 앞에서 당당히 밝힌다. 국제법 상으로도 군인이 적을 죽이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

   

안 의사가 순국하기 전 일본 경찰관이 마지막 유언을 묻는다. 일본인들로 가득한 재판정에서 안 의사는 “동양평화를 위해 죽는다. 동양평화를 위해 만세를 부르자!” 라고 외친다. “동양평화 만세!” 3창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어 안 의사는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말하며 내 시신을 왜놈이 지배하고 있는 지금 내 조국으로 반장하지 말고, 하얼빈에 묻어뒀다가 광복된 조국에 자신의 시신을 반장해 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광복 70주년, 순국 105주년... 돌아오지 못한 안중근 의사

   

유해를 여순에서 먼 거리에 있는 하얼빈까지 보내달라는 안중근 의사의 유언이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던 것은 당연했다. 일본은 한국인들이 안 의사가 묻힌 곳을 독립운동의 기지로 삼을 수 있다는 생각에 일종의 암장을 했다. 

   

그렇게 우리나라는 올해로 광복 70주년, 순국 105주년을 맞이했지만 아직까지도 안 의사의 유해는 돌아오지 못했다. 

   

이미 국가보훈처는 지난 2005년, 2008년 안 의사의 유해 발굴 사업을 진행했지만 유해를 찾지 못했다. 그동안은 여순 감옥 건물 뒤편에서만 유해 발굴 작업이 진행됐다. 그런데 여순 형무소 뒷공동묘지에 안 의사의 유해가 묻혀있다는 주장이 중국에서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중국은 지금 안 의사의 유해가 안장된 곳으로 추정되는 형무소 공동묘지를 사적지로 지정해 놓았다. 발굴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 안중근 의사 유해가 안장돼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형무소 공동묘지     ©브레이크뉴스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을 위해 국가가 나서야” 

   

삼중 스님은 2년 3개월째 투석을 받고 있다. 2일을 넘는 시간을 내지 못한다. 중국 측은 몸이 불편한 스님이 7번째로 찾아 왔다고 해 안 의사가 144일 동안 갖혀 있던 방을 특별히 공개했다.

   

삼중 스님은 “나도 7번을 다녀왔지만 이건 개인이 할 일이 아니다고 생각했다”라고 밝혔다.

   

발굴을 해봐야 안 의사의 유해가 묻혀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데 사적지로 지정돼 발굴을 할 수 없으니 문제가 되는 것이다. 

 

또한, 삼중 스님은 우리나라 효창공원에 안중근 의사의 가묘가 있다며, 가묘에다 참배 할 것이 아니라 안 의사의 유해를 찾아내 남산 등에 제대로 모시고 참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제 국가가 현장에도 가보고 중국 정부와 협의를 해서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반드시 있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가장 가능성이 높은 곳입니다. 우리와 중국 간의 합의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지난 1월 국가보훈처는 “2013년 옛 여순 감옥 묘지에 (안 의사의 유해가) 매장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증언을 확인하기 위해 이 지역에 지표투과레이더 조사를 할 수 있도록 중국 측에 요청했다. 매장지로 추정되는 중국지역에 대해 올해 지하탐지 작업을 벌일 계획”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아직까지 중국 측의 발굴 허가조차 받지 못한 상황으로 전해졌다. 

 

▲ 삼중 스님 저, 영웅 안중근의 마지막 이야기, 코레아 우라     © 브레이크뉴스

 

삼중 스님은 한국 내에서의 의식 변화를 위해 이번 안 의사 순국일에 맞춰 안 의사가 의거 이후 투옥돼 살다간 마지막 144일 간의 기록을 ‘영웅 안중근의 마지막 이야기’, ‘코레아 우라’라는 두 책으로 냈다. 

   

스님이 말했다. “여전히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고 심지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어디에 묻혀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국가가 안 의사의 유해를 옮겨오기 위해 직접 나서야 하며, 안 의사의 정신을 살리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3의사 묘역과 안중근 의사 가묘(맨 왼쪽) / 효창공원>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유언은 자신의 시신을 고국에 묻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형된 그날 밤 한 일본 간수가 그의 시신을 뤼순 감옥 터 뒤에 황급히 매장했다고 한다. 이후 1945년 11월 중국에서 돌아온 백범 김구는 순국한 독립운동가의 유골을 찾아 국내에 봉환하기로 한다. 이듬해 6월,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세 분의 독립운동가의 유골을 일본에서 찾아온 후 효창공원에 안장하지만 안중근 의사를 위해서는 네 번째 '허묘'를 만든다. 이것은 안중근 의사의 시신을 꼭 찾겠다는 김구의 결심을 보여준다. 하지만 1949년 김구 역시 안두희의 암살로 사망하고 2008년 남북 정부는 광복이후 처음으로 안중근 의사 유해 공동 발굴에 나섰지만 유해는

찾지 못하고 위치 또한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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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블로그 대문>
국보 제135호 혜원 전신첩 중 '월야밀회'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 화첩의 대표작입니다.

보름달이 훤하게 뜬 밤, 인적이 없는 담벼락 아래서 젊은 연인이 만났습니다. 어찌나 애절했던지 얼굴을 맞대고 꼬옥 달라붙어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남의 눈에 띌까, 안절부절 하는 듯도 합니다. 그 모습을 조금은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는 여인의 표정도 묘합니다. 이들을 안타까워 하는 건지, 부러워하는 건지, 질투를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은은하고도 야릇한 분위기에 눈길이 절로 가는 작품입니다. ‘남녀상열지사’였던 조선 시대라 할지라도, 남녀 사이에 불꽃 튀는 사랑은 어쩔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좀 더 자유로워진 시대 분위기를 반영한 그림이기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