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께서 갇히셨던 감옥의 창문>
<죄수들을 사형시켰던 교수대>
( 당시 안중근 의사 께서도 이곳에서 돌아가신듯 ....)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까지 중국 여순(뤼순)의 관동도독부 고등법원에서 안중근 의거에 대한 여섯 차례 공판이 열렸다. 2월 7일 1회 공판장에서 안중근은 “3년전부터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이등을 포살코자 했으며, 이 의거는 개인적인 원한이 아니라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서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결행한 것이다”라고 진술하였다.
2월 9일 오전 9시 50분 제 3회 공판이 개정되었다. 여기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 15개조를 설명하였다. 그러나 재판장에 의하여 중지 당하였다.
1. 대한제국 민황후를 시해한 죄
2. 대한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
3. 을사 5조약과 정미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4. 무고한 대한인들을 학살한 죄
5.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한 죄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7. 제일 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하게 한 죄
8.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킨 죄
9. 한국인들 교육을 방해한 죄
10. 대한인들의 외국유학을 금지시킨 죄
11.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
12. 대한국인이 스스로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트린 죄
13. 대한제국과 일본 사이에 분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대한제국이 태평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
14. 동양평화를 깨뜨린 죄
15. 일본 천황폐하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2월 10일 오전 9시 40분 제4회 공판에서 검찰관으로부터 각자에 대한 형량이 구형되는데 안중근은 사형, 우덕순과 조도선은 징역 3년, 유동하는 징역 1년 6개월이 구형되었다. 2월 12일 오전 9시 30분 제 5회 공판이 개정되었다. 두 일본인 관선 변호사의 변론이 행해졌다. 변론이 끝난 후 피고인들의 최후 진술에서 안중근은 일제의 침략상을 규탄하면서 한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이토를 척결했다고 당당하게 진술하였다.
“이토의 죄상은 천지신명과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일인데 무슨 오해란 말인가. 더구나 나는 개인 원한으로 남을 죽인 죄인이 아니다. 나는 대한국 의병 참모중장의 직무로 전쟁을 수행하다 포로가 되어 이곳에 온 것이다 .지방재판소와는 전연 관계가 없는 일인 즉, 만국 형법과 국제 공법으로서 재판하는 것이 옳다.”
중국, 뤼순(여순) 감옥소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의 의거 후, 일제의 뤼순(지금의 중국 여순) 감옥소로 압송된 때가 11월 3일이다. 투옥 143일 동안 늘 그러하지는 않았지만, 일제는 국제적인 관심이 된 안중근 의사를 특별히 대우하였다. 의사는 붓글씨를 써서 일본인들에게 주었다. 의사의 글을 얻고자 일부러 찾아오는 일본인들도 있었다. 사형선고일 이후부터 순국되기 전까지 짧은 기간에 이곳에서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을 집필하였다. 곧 죽을 이에게 베푸는 마지막 은전인가? 아무튼 일제는 이런 특별 대우와 은전(?) 덕분에 안중근 의사의 유묵과 저서가 남아서 전해 질 수 있었고, 우리는 안중근 의사의 넋과 정신을 숭고하게 계승할 수 있게 되었다. 최소한의 인도주의적 체면을 유지하고 양심을 가진 일본인들에게 감사해 한다. 뤼순 감옥소에서의 생활을 안의사는 그의 《안응칠 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감옥에 갇힌 뒤로 여러 사람과 차츰 가까이 지내는 중에 전옥(典獄, 교도대장)과 간수계장 그리고 일반관리들도 나를 후대하므로 나는 마음 속으로 이것이 꿈인가 참인가 의심했었다. ‘같은 일본인인데 어째서 이같이 서로 다른가. 대한에 있는 일본인들은 횡포하기가 말할 수 없는데 뤼순에 있는 일본인은 어째서 이같이 후한가. 종자가 달라서 그런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 까닭을 알지 못했다. (중략) 매주 목욕을 시켜주고 오전 오후 두 차례씩 사무실로 데리고 나와 고급 담배, 서양과자와 차를 주기에 배불리 먹기도 했다. .... 이같이 특별히 대우해 준 것에 대해 다 적지 못한다.”
중국 다렌의 뤼순감옥소(정식 한자명>여순일아 감옥구지((旅順日俄監獄舊址), 일아(日俄)란 ‘일본과 러시아’의 준말이며, 구지(舊地)란 ‘옛 터’이다.)는 본시 러시아의 감옥이었으나 러일전쟁 이후에 일제가 1907년부터 차지하여 주로 한국인ㆍ중국인ㆍ러시아인 등을 수감하였다. 1906부터 1936년 사이 수감자는 연간 약 2만여 명에 달했다. 1942년에서 1945년 8월 사이에 약 700여 명의 수감자가 이곳에서 처형당했다.
이곳이 특별한 것은 바로 우리의 영웅, 안중근 의사가 구금되고 사형으로 옥사한 곳이기 때문이다. 1909년 11월 3일 안중근 의사는 일제의 국사범으로 분류되어 이곳의 간수부장 당직실 옆에 있는 감방에 단독 구금되었다. 애국지사 단재 신채호와 우당 이회영도 이곳에 구금되어 고문 받고 또한 옥사하였다. 1988년 현재 중국정부는 일제의 침략을 기록하고 전하기 위해 국가중점역사문화재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필자는 2010년 겨레의 영산 백두산을 등정하고 장군총, 광개토대왕릉, 국내성 등 고구려 역사문화 유적지를 탐방하고 돌아오는 길에 안중근 의사가 투옥되고 순국한 이곳을 방문하였다. 이 사진들로 그 때의 기억과 감개를 반추해본다.
과연, 그 어머니에 그 아들
사형 선고를 받은 옥중의 아들에게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보낸 편지를 보면 과연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요, 그 아들에 그 어머니를 알 수 있다.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아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
“네가 만일 늙은 이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 즉,
딴 맘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선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안중근 의사가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께 드린 유서>
어머니 전상서
예수를 찬미합니다.
불초한 자식은 감히 한 말씀을 어머님 전에 올리려 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자식의 막심한 불효와
아침저녁 문안인사 못 드림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감정에 이기지 못하시고
이 불초자를 너무나 생각해 주시니
훗날 영원의 천당에서 만나 뵈올 것을 바라오며
또 기도하옵니다.
이 현세(現世)의 일이야말로
모두 주님의 명령에 달려 있으니
마음을 편안히 하옵기를 천만번 바라올 뿐입니다.
분도(안 의사의 장남)는 장차 신부가 되게 하여 주시길 희망하오며,
후일에도 잊지 마시옵고
천주께 바치도록 키워주십시오.
이상이 대요이며, 그밖에도 드릴 말씀은 허다하오나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 뵈온 뒤 누누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위아래 여러분께 문안도 드리지 못하오니,
반드시 꼭 주교님을 전심으로 신앙하시어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 뵈옵겠다고
전해 주시기 바라옵니다.
이 세상의 여러 가지 일은 정근과 공근에게 들어 주시옵고,
배려를 거두시고 마음 편안히 지내시옵소서.
아들 도마 올림
안중근 의거 후 모친 조 마리아 여사는 자부 김아려, 손자 분도와 준생 그리고 두 아들 정근과 공근 등 일가를 거느리고 연해주에 망명하였으며, 안중근 일가를 조국독립운동의 명문으로 이끌었다.
1910년 3월 9일, 10일 두 아우인 정근과 공근 그리고 홍석구(프랑스 신부)가 마지막으로 안의사를 면회하였다. 그 자리에서 안의사는 두 동생들에게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는 것이니 두려움이 없다. 나는 천주님의 품 안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너희들은 오히려 기뻐해다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고.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라고 최후의 유언을 남겼다.
영웅의 숭고한 죽음
[순국 5분전 안중근 의사의 모습, 어머님이 보내온 수의를 입었다. 우리 겨레의 옷이다.]
안중근은 전날 고향으로부터 보내온 조선옷으로 갈아입고 사형집행장으로 나아간다. 전옥은 사형집행문을 읽고 유언할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안중근은 다른 유언은 없으나 “나의 의거는 오로지 동양평화(東洋平和)를 도모하려는 성심(誠心)에서 한 것이니 바라건대 오늘 임검한 일본 관헌들도 다행히 나의 미충(微衷)을 양해하여 피아 구별 없이 합심 협력해 동양평화를 기필코 도모할 것을 간절히 바란다.”고 말하였다. 이어 안의사는 마지막으로 “‘동양평화만세’를 삼창하고자한다”고 하였으나 전옥은 그럴 수 없다고 하면서 사형집행을 명하였다.
다음 글은 안의사의 통역 역할을 한 일본인 소노키 스에키(圓木末喜)가 만주일일신문에 ‘안중근의 최후’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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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최후 - 소노키 스에키(圓木末喜)
부슬비가 내리는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안중근의 사형은 뤼순(旅順)감옥에서 행해졌다. 안은 전날 밤 고향에서 보내온 옷을 입고 예정된 시간보다 먼저 간수 4명의 경호를 받으며 형장으로 불려나와 교수대 옆에 있는 대기실로 갔다. 당일 입은 옷은 상하의 모두 조선에서 만든 명주옷이었다. 저고리는 흰색이고 바지는 검은색이어서 흑백의 분명한 대조가 아무래도 수 분 후면 밝은데서 어두운 곳으로 갈 수밖에 없는 수인의 운명과 같아 보는 이로 하여금 일종의 감개를 느끼게 했다.
집행을 언도하고 드디어 미조부치(溝淵)검찰관, 구리하라(栗原)전옥(형무소장), 소노키통역, 기시다(岸田)서기가 교수대 앞에 있는 검시실(檢屍室)에 착석하자 안이 대기실에서 끌려 나왔다. 구리하라 전옥은 안에게 “금년 2월24일 뤼순지방법원의 언도와 확정명령에 따라 사형을 집행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소노키의 통역이 끝나자 안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으나 구리하라 전옥은 다시 한번 안에게 “뭔가 남길 말이 없느냐”고 물었다. 안은 “아무 것도 남길 유언은 없으나 다만 내가 한 일(이토 히로부미 사살)은 동양평화를 위해 한 것이므로 일한 양국인이 서로 일치협력해서 동양평화의 유지를 도모할 것을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자 간수가 반장짜리 종이 두 장을 접어 안의 눈을 가리고 그 위에 흰 천을 씌웠다. 안의 최후가 일각일각 다가왔다.
재판 당초부터 언도 이후까지 안을 정중하고 친절하게 대했던 관헌은 안이 최후의 순간을 맞을 때는 마음껏 최후의 기도를 하도록 허락했다. 안은 전옥의 말에 따라 수분 간 묵도(黙禱)를 했고 기도가 끝나자 수명의 간수에 둘러싸여 교수대로 향했다. 교수대의 구조는 마치 2층 집 같아서 작은 계단 7개를 올라가면 화로방 같은 것이 있는데 안은 조용히 걸어서 한 계단 한 계단 죽음의 길로 다가갔다. 그때의 감정이나 얼굴색은 흰옷과 어우러져 더욱 창백했다. 드디어 안이 교수대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자 옥리 한명이 그의 목에 밧줄을 감고 교수대 한쪽을 밟으니 바닥이 ‘꽈당’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10시15분 안은 완전히 절명했다. 거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11분이었다.
보통 사형수의 유해는 좌관(座棺)에 넣은 것이 관례였으나 특별히 안(의사)을 위해서는 새롭게 송판으로 침관(寢棺)을 만들어 시체를 넣고 그 위를 흰 천으로 씌워 매우 정중하게 취급했다. 일단 이 관을 교회실에 넣고 안이 형장에 갈 때 품고 있던 예수의 상은 관 양쪽에 걸었다.
안의 공범자인 조도선(曺道先) 우덕순(禹德淳) 유동하(柳東夏) 등 3명은 교회실로 불려와 안의 유해를 향한 최후의 고별을 허가받았다. 세 사람은 모두 천주교인이 아니어서 조선식으로 두 번 절을 하며 안의 최후를 조문했다. 그들은 모두 감격한 듯 했고 그 중에서 우덕순은 하얼빈 이후 안중근의 소식이 끊겼는데 최후의 고별을 하게 돼 안도 만족할 것이라며 당국의 취급에 감사했다.
이리하여 시체는 매우 정중한 취급을 받으며 오후 보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공동묘지에 묻혔다. 두 동생은 안중근의 죽음을 듣고 “아이고”라고 외치며 통곡했다. 그들은 시신을 돌려달라고 했으나 안된다는 말에 서둘러 떠날 채비를 해서 26일 오후 5시 뤼순발 열차로 안동현을 거쳐 귀국길에 올랐다.
<출전 : 만주일일신문 1910ㆍ3ㆍ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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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이 전하기에 안의사의 최후 장면을 그대로 믿을 수 있을까 의심할 수도 있지만 달리 그 순간에 가까이에서 목도(目睹)한 조선인은 아무도 없다.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 최후의 순간을 상상해본다. 사형집행의 순간이지만 가슴 뭉클한 감격과 경외심이 일어난다. 다만 소노키의 말대로 침관으로 모시고 정중하게 장례와 발인의 예를 거쳐서 공동묘지에 묻었다면 의사의 유해를 찾을 길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루라도 속히 그의 유언대로 조국의 땅으로 모셔 와야 할 것이다.
안중근 의사의 《논어》 유묵에서 얻은 삶의 교훈
안중근의 유묵(遺墨)은 현재 실물이나 사진으로 50여점이 확인된다. 이중 국내 소재는 26점으로 모두 국가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한 개인의 작품으로 놓고 볼 때 국가보물로 가장 많이 지정되어 있고, 미술 시장에서 거래되는 작품가격으로도 가장 높다.
안중근의 유묵은 모두 사형 선고일(1910. 2. 14)에서 순국(1910. 3. 26)까지 라는 점, 수신자가 모두 일본인이라는 점은 역사상 어떤 다른 사람의 경우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사례다. 특히 내용이 동양고전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현실고발이나 감계와 같이 자기 체험이나 자각으로 걸러낸 것이라는 점에서 안중근의 유서이자 또 다른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옆의 ‘견리사의 견위수명’ - 이익을 보거든 의로움을 생각하고, 나라의 위기를 보거든 목숨을 바치라 - 유묵새김돌 사진은 안중근 의사기념관 앞에 전시되어 있는 《논어》명구의 안중근 유묵글이다.
안중근 의사로부터 유묵을 건네받은 사람은 모두 일본인이다. 이들은 여순 옥중 취조 검찰관, 대련세관 세무관, 뤼순 감옥 간수, 경관, 전의(典醫), 경시, 경호책임 헌병, 경수계장, 뤼순초등학교 교사, 일본 교토 정심사 사형수 교화승 및 여타 일본인들이다.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일본인 입장에서는 그들의 최고 지도자를 사살한 사람을 글씨를 받는다는 것이다. 또한 안의사의 입장에서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당시 이런 정황에 대해 그는 《안응칠 역사》에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동양평화론》을 저술하고 있을 그 때 법원과 감옥의 일반관리들이 내 손으로 쓴 글로써 필적(筆跡)을 기념하고자 비단과 종이 수백 장을 사 넣으며 청구하였다. 나는 부득이 자신의 필법이 능하지도 못하고, 또 남의 웃음거리가 될 것도 생각지도 못하고서 매일 몇 시간씩 글씨를 썼다.”
그렇다면 안중근은 어떤 마음에서 무슨 까닭으로 이들에게 글을 써서 주었을까?
원수까지 반하지 않을 수 없었던 안중근 의사의 인품과 정신세계의 위대성을 읽을 수 있다. 여기서는 그의 유묵 중에서 《논어》의 글을 모두 모아서 그의 인생관과 세계관 등 그의 정신세계를 조망하며, 그로부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마땅한가라는 교훈을 얻고자 한다. 글씨는 그 사람의 인격이다. 그는 가히 군자 중의 군자이며 대인 중의 대인임을 알 수 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현장인 하얼빈역에 있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 입구(좌)와 전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