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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

[국가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宗廟祭禮樂)]...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무형유산

문화재방송 2018. 1. 20. 04:45


조선 역대 군왕(君王)의 신위(神位)를 모시는 종묘와 영녕전(永寧殿)의 제향(祭享)에 쓰이는 음악


1964년 12월 7일 중요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으며, 2001년 5월 18일 유네스코에 의해 종묘제례와 함께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선정되어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종묘의 향사(享祀)는 역대 음력으로 4맹삭(四孟朔) 즉, 1·4·7·10월과 납향일(臘享日) 등 모두 5회에 걸쳐 받들어 왔으나 근년에는 전주이씨(全州李氏) 대동종약원 주관으로 5월 첫 일요일에 한번 받들고 있다.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세종대왕의 업적, 한글 창제, 과학 기술의 발전, 북방영토 개척, 농업기술 발전 장려 등 수도 없지만 우리는 또 하나 종묘제례악의 완성을 대왕의 업적으로 반드시 들어야만 한다.





지금도 전해져 내려오는 조선조 역대왕들의 제사에 쓰이던 종묘제례악은 바로 세종대왕의 노력으로 중국에서도 사라져가던 아악이 아니라 우리 정서에 맞는 우리 가락을 가미하여 우리 멋을 담뿍담아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세종대왕은 종묘제례악의 아버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한글날, 한글날이 다시 휴일로 지정되기를 바라는 마음보다 우리는 우리 것을 좀더 폭넓고 깊게 이해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 아래 그럼 세종대왕이 중국식 아악만이 연주되던 아악에 우리 악기와 우리 가락 우리 정서왕 음율을 가미한 향악을 더해 완성시킨 종묘제례악을 만들고 이를 여민락, 즉 백성과 함께 즐기려 한 이유를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









종묘대제는 비단 조선시대에만 치러진 제사가 아니라 삼국시대부터 각국이 모두 종묘를 두고 제사를 지냈다. 삼국은 물론 통일신라 고려 조선 그리고 대한제국에 이르기까지 국가적 행사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것이 바로 종묘대제이다.





종묘에서 왕실의 조상들에게 지내는 제사로 종묘대제(宗廟大祭) 또는 대제(大祭)라 부르기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정시제와 임시제를 지냈다. 정시제는 매년 정기적으로 지내는 제사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첫 달인 1월, 4월, 7월, 10월에 한 번씩 그리고 섣달인 12월에 한 번을 지내 모두 다섯 번의 정시제를 지냈다. 임시제는 나라에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있을 때 부정기적으로 지내던 제사였다. 그러나 현재는 매년 5월 첫째 일요일 한 번만 지내고 있다.
대제의 절차는 신을 맞아들이는 영신(迎神)과 신에게 음식을 바쳐 신을 즐겁게 하는 진찬(進饌), 신에게 술을 올리고 축문을 읽는 헌례(獻禮) 그리고 신을 보내드리는 송신(送神)의 순서로 진행된다.,


대제를 진행하는 동안 대제를 장엄하게 꾸미기 위해 기악과 노래 그리고 춤이 펼쳐지는데 이를 종묘제례악이라 한다. 종묘제례악은 세종 때 완성되었으며 그후 약간의 추가가 이루어졌을 뿐 큰 변화가 없다고 한다. 거의 500년 전의 기악과 노래, 춤이 전해져 오는 것이다. 이렇듯 오래된 제례와 음악이 전해오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일로,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종묘 제사를 지낼 때 음악과 노래와 무용도 함께 하는데, 이를 종묘제례악이라고 한다. 종묘에 음악이 사용된 것은 고려 숙종대였으며, 그 뒤 송나라로부터 대성아악(大晟雅樂)이 들어와 1116년(예종 11)부터 아악으로 사용되다가 조선에 계승되었다. 태종대부터 종묘 제사에 사용하던 아악을 당악(唐樂)과 향악(鄕樂)을 참조하여 개정하려 하였으나 실현되지 않다가 세종대 고취악(鼓吹樂)과 향악에 바탕하여 회례악(會禮樂)으로 만든 보태평(保太平)과 정대업(定大業)이 세조대에 약간 수정하여 종묘제례악으로 정식 채택되었다. 즉, 조종의 문덕(文德)을 기리는 보태평 11곡과 무공(武功)을 칭송하는 정대업 15곡은 세종조 이래 연향악으로 연주되어 오다가 세조 10년(1464) 각각 11곡씩으로 줄이고 제례에 필요한 악곡을 첨가하여 제례악으로 채택되었다.





세종대왕은 음악적 조예가 깊은 왕이었다. 미세한 음높이도 다르다는 것을 간파해 낼 정도로 귀도 좋아 소위 말해 절대 음감을 갖고 있었다고도 전해진다. 그리고 음악적 감수성이 풍부해 중국의 정서가 아닌 우리 정서를 담아낸 우리 음악을 작곡하는데 노력을 기울였고 대청에서 쉬는 시간에는 막대기로 박자를 맞추며 노래를 부르는 일을 자주 하였다고 한다.



한글을 만든 위대한 임금 세종대왕은 장악원을 통해 음악에도 큰 업적을 남겼는데, 건국의 사적을 노래한 용비어천가, 용비어천가의 일부 악장을 타악기와 관악기 연주곡으로 옮긴 여민락, 회례연에 사용하는 보태평과 정대업, 그리고 1447년경에 간행한 '속악보'의 편찬 등이다. 또한 중국 것을 빌어다 쓰던 기보법을 버리고 정간보라는 동양 최초의 유량악보를 개발한 것도 세종의 업적 중 하나다.


또 성종임금은 그 때까지 이어져온 고려속악에 대한 대폭적인 개작을 단행했다. 그리고 음률에 밝은 성현을 예조판서로 기용하여 '악학궤범'이라는 음악전문서적을 편찬했다. 성종 24년에 편찬된 이 악서는 음악이론에서부터 악기편성법과 춤, 그리고 여러 가지 의례에 사용하는 기물에 이르기까지 빠짐없이 다루고 있어 역대 어느 악서보다 귀중하게 평가받고 있다.


궁중음악의 전통은 이렇게 조선 말기까지 계속되다가 일제강점기 때 장악원이 이왕직아악부로 개편되면서 전통음악의 일부가 이어졌고, 광복 후에는 구왕궁아악부로 바뀌었다가 1951년 국립국악원이 설립되면서 계승되고 있다. 요즘 TV나 종묘제례 행사 때 연주되는 장엄한 궁중음악은 거의 대부분 장악원에서 만들어진 음악이다. 우리 음악을 잘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종묘제례악을 지루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면 지금부터라도 관심을 기울여 들어보자. 어진 임금과 조상들의 노력을 떠올리면서.






왕은 종묘대제를 지내기 위해 종묘로 행차를 하게 된다.


『국조오례의』에 의하면 제사 8일 전에 제사가 있음을 알리면 왕은 4일 동안 별전에서 산재(散齋)하고 3일 동안 치재(致齋)하는데, 치재 마지막 날은 재궁에서 행하고 다른 제관들도 산재와 치재를 한다. 재계 때는 음식을 간소히하고 죄를 다스리거나 불길한 일은 일절 금한다. 왕이 재궁에 들기 위해 궁을 나설 때는 문무시신(文武侍臣)이 앞뒤에 서고 여러 관원이 거가를 호가(扈駕)하는데 이때는 나팔은 불지 않고 조용히 진행한다. 도착하면 왕은 종묘에 네 번 절하고 나서 재궁에 든다.






조선시대 종묘대제 때 왕은 구장면복(九章冕服)을 착용하였다. 면복은 면류관과 구장복을 뜻하는데, 면류관은 모자 위에 장방형 판이 있고 판 양끝에 여러 가지 색깔의 주옥을 아홉 줄 늘어뜨렸다. 구장복의 겉은 흑색, 안은 청색인 대례복으로 상의 두 어깨에는 용을 수놓았고 뒤에는 산을, 그리고 양 소매에는 화(火)·화충(華蟲)·종이(宗彛) 문장을 그려 넣었다. 하의에도 조(藻)·분미(粉米)·보(黼)·불(黻) 문장을 수놓았다. 왕과 왕세자는 청옥으로 된 홀을 잡았다. 대한제국기에는 황제의 예에 따라 열두 줄의 면류관에 일월과 성신 문장을 더하여 열두 구장복을 입었다.

종친과 백관들은 금관조복(金冠朝服)을 입었다. 양관(梁冠)의 일종인 금관은 품계에 따라 양의 숫자를 다르게 하여 1품은 5량, 2품은 4량, 3품은 3량, 4~6품은 2량, 7품 이하는 1량을 썼다. 대한제국기에는 1품관이 7량, 2품관이 6량, 3품관이 6량, 4~6품은 4량, 7품 이하는 3량으로 하였다. 현재 종묘대제의 제복은 대체로 대한제국기의 제도를 따르고 있다.






종묘제례악은 궁중 오케스트라





서양음악의 제례악이 바로크시대에나 시작된 것에 비하여 우리나라 종묘제례악은 그보다 200년이나 앞서 그 정형을 이루고 조금씩 조금씩 좀더 가다듬어지며 완성도를 더 높여온 음악이란 점은 무척 자랑스러운 일이다.





종묘제례악은 시공간의 엄숙함을 최대한 완벽하게 만들어낸 음악의 정점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종묘제례 때 연주되는 음악은 조선시대 궁중음악의 일종인 정대업과 보태평이라는 곡인데 바로 장악원에서 만들어진 순수 전통음악이다. 초기에는 아악으로만 이루어졌으나 세종임금 대에 향악이 추가되었다.


1392년에 건국된 조선왕조의 궁중음악활동은 대부분 고려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담당관서는 전악서, 아악서, 관습도감과 새로 설치된 악학에서 담당했다. 건국초기 대표적인 궁중음악인 종묘제례악을 완성시킨 사람은 개국공신 정도전. 음악 담당관서는 1457년(세조 3)에 전악서와 아악서가 장악서로, 악학과 관습도감이 악학도감으로 개편되었다. 이후 1466년에는 장악서가 악학도감의 업무를 흡수하면서 궁중음악 및 무용에 대한 행정과 연주활동이 한 곳으로 통합되었다.


종묘제례는 왕실에서 거행되는 장엄한 국가제사이며, 임금이 친히 받드는 존엄한 길례였다. 유교사회에서는 길례(吉禮)·흉례(凶禮)·군례(軍禮)·빈례(賓禮)·가례(家禮)의 다섯 의례(五禮) 중 길례인 제사를 으뜸으로 여겼으며, 이를 '효' 실천의 근본으로 삼았다. 유교가 국가의 근본이념이었던 조선시대에도 조상에 대한 숭배를 인간의 도리이자 나라를 다스리는 가장 중요한 법도로 여겨 제사를 특히 중시하였으며, 예로부터 종묘와 사직을 세우고 나라를 건국하고 번영시킨 왕과 왕실의 조상과 국가 발전에 공헌한 문무대신들에게 제사를 드렸다.






종묘제례는 최고의 품격을 갖추고 유교절차에 따라 거행되는 왕실의례이며, 이를 통해 동양의 기본이념인 '효'를 국가차원에서 실천함으로써 민족공동체의 유대감과 질서를 형성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와 함께 종묘라는 조형적인 건축공간에서 진행되는 종묘제례의 장엄하고 정제된 아름다움은 자연과 어우러진 동양적 종합예술의 정수이며, 500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우리의 소중한 정신적 문화유산이다.





종묘제례악종묘에서 제사를 드릴 때 의식을 장엄하게 치르기 위하여 연주하는 기악(樂)과 노래(歌)·춤(舞)을 말한다. 이는 조선 세종때 궁중희례연에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보태평(保太平)과 정대업(定大業)에 연원을 두고 있으며, 세조10년(1464) 제례에 필요한 악곡이 첨가되면서 종묘제례악으로 정식 채택되었다. 종묘제례악은 이후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일시적으로 약화되었으나 광해군때 점차 복구되어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다.



팔일무를 추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무무단들(문묘제례악)


팔일무는 공자의 제사인 문묘제례악 때 진행된다.





조선시대의 일무는 36명이 열을 지어 춤을 추는 육일무(六佾舞)로 1464년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는데, 문덕을 찬양하는 문무(文舞)와 무덕을 찬양하는 무무(武舞)로 나누어진다. 문무를 추는 무인들은 왼손에는 구멍이 셋 뚫린 관악기 약(蘥)을 들고 오른손에는 긴 막대에 꿩 깃털로 장식한 적(翟)을 들고 보태평지무(保太平之舞)를 추었다. 무무를 추는 무인들은 맨 앞 줄부터 두 줄씩 각각 나무로 만든 칼과 창, 활과 화살을 쥐고 정대업지무(定大業之舞)를 추었다. 무무에는 이들 무원 외에 각(角), 둑(纛), 북, 징, 소라, 대각, 대고, 대징과 청·황·흑·백·적색의 깃발, 홍색의 대둑(大纛), 청룡·주작·황룡·백호·현무를 그린 깃발 등 여러 의물을 든 의장대가 함께 도열하여 춤의 움직임에 따라 발디딤을 같이 하였다.


종묘제례악은 우리 고유의 음율로 왕조의 창업과 기상을 노래하고 있으며 모든 행사의 순서에 맞추어 춤과 음악이 조화를 이룬다. 엄숙한 제사 의례 만큼이나 장엄미가 돋보이는 음악으로 역사적·예술적 가치가 크며 동양에서도 드물게 남아 있는 고전음악이다. 국립국악원이 전수하였으며 중요무형문화재 1호로 지정되어 있다.






① 재계(齋戒) 및 선행 절차 : 제관은 모두 제복을 입고 대기한 다음 정전 내외를 숙계(肅啓)한다. 그 뒤 정전의 문을 열고 명화(明火)에 불을 붙이면 집사가 정전에 올라가 주독(主櫝)을 열고 나서 신주를 신탑에 모신다. 이때 헌관이 향·축·폐백을 모시고 정전 앞에 당도하면 헌관과 집례관인 묘사가 그것을 받는다. 그 다음 향과 축은 묘사가 나누어 올리고 폐백은 묘사가 각 실의 준소 폐비에 나누어 올린다.

③ 신관례(晨祼禮): 신관례는 일반 사대부가의 강신례와 같은 것이다. 절차는 각 실에서 상향(上香), 관창(祼鬯), 전폐(奠幣)하는 순서로 이루어진다. 먼저 영신을 위한 음악을 연주하며 그 사이 초헌관 이하 모두 4배를 한 뒤 각실 외봉관이 용찬을 받들어 술을 받고 초헌관은 신위 앞으로 나가 향을 올리고 대축관은 폐백을 올린다. 이어 제수를 진설하는 진찬을 행하는데 축사·대축·재량 등이 거드는 가운데 천조관과 봉조관이 행례하고, 제수 가운데 모혈반(毛血槃), 간료, 우숙(牛熟), 양숙(羊熟), 돈숙(豚熟)을 올린다.















정간보


정간보법은 시가(時價)만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음의 높이를 나타내기 위하여 율자보 혹은 오음약보·육보 등을 섞어 쓴다. 정간(井間)이라고 부르는 네모진 칸의 수효 및 차지하는 공간의 넒이로 음의 길이(시가)를 나타낸다. 1박인 음은 1정간으로, 2박인 음은 2정간으로 나타내되 차지하는 정간들의 첫 정간에만 음표를 한다. 쉼표는 세모꼴로 나타내고 쉼표의 길이만큼 정간을 차지한다. 한 박보다 짧은 길이를 갖는 음은 전간을 나누어 음표를 한다. 한국음악에는 3분박자가 많으므로 정간은 3등분 혹은 6등분으로 나누어 음표를 하는 경우가 많다. 1/3박은 3등분, 1/6박은 6등분하여 음표를 한다. 음에 꾸밈음이 붙을 때는 종류에 따라 음표에 여러 가지 기호를 덧붙인다. 이 정간보라는 기보법의 창안은 결국 우리만의 종묘제례악을 완성하는 가장 큰 기초가 되었으므로 매우 중요한 것이라 볼 수 있다.






④ 삼헌례(三獻禮): 삼헌례는 초헌례·아헌례·종헌례를 말한다. 먼저 초헌례는 초헌관이 술잔을 올리는 것으로 먼저 왕이 제주를 차리는 곳에 가서 술잔을 살피고 나서 제1태조 고황제실에 들어가 술 석 잔을 바친 뒤에 굽어 엎드렸다가 뒤로 물러나 꿇어앉으면 대축이 축문을 읽는다. 같은 순서로 모든 신실에서 예를 행한다. 아헌례는 아헌관이 각 신실에 술을 바치는 것으로 축독은 없으며 종헌례는 아헌례와 마찬가지로 종헌관이 각 신실에 술을 바치는 것으로 끝난다. 초헌의 술은 예제(醴齊), 아헌의 술은 앙제(盎齊), 종헌의 술은 청주(淸酒)이다.

⑤ 음복례(飮福禮): 헌작을 마친 뒤 초헌관이 음복하는 예로 집례관이 잔에 음복주를 붓고 고기를 덜어 놓으면 왕이 음복하는 자리에 나아가 서향하여 기다렸다가 꿇어 앉아 마신다.

⑥ 망료례(望燎禮): 음복례가 끝나면 집례관은 철변두(徹籩豆)를 행하고 이어 축과 폐를 망료 위에서 불사른다. 철변두는 음복례가 끝난 뒤 대축들이 각 실에 들어가 변두를 거두는 것인데, 실제로는 다 거두지 않고 ‘변’과 ‘두’ 한 개씩을 자리만 조금씩 옮겨 놓는다. 모든 헌관과 천조관·봉조관·공신헌관이 국궁 4배를 하고 일어나면 대축관이 독을 덮고 신주를 모셔 들인다. 이어 초헌관이 망료 자리에 나아가 축문과 폐를 불사른 뒤 제자리로 돌아가고 모든 집사가 배위(拜位)로 내려가서 국궁 4배하면 집례관이 예가 끝났음을 알린다. 왕은 재궁으로 돌아가며, 이어 다른 제관과 집례관들이 모두 나간다. 왕은 대궐로 돌아가며, 다음날 궁전에서 종친과 대신들을 불러 모아 음복연을 거행한다.



육일무를 추고 있는 문관들의 춤


일무의 일은 춤을 추기 위해 늘어선 모습을 말하며 일무는 아악(=제례악)에 쓰이는 무용을 말하는 것인데 현재 종묘제례악에서는 황제에 대한 예우를 뜻하는 8일무(8행, 8열로 64인이 추는 형태)를 사용하고 있고 문무와 무무로 나뉩니다. 종묘제례악은 육일무를 추다가 최근에는 팔일무를 추고 있다.














육밀무를 추고 있는 무관복장의 모습


종묘제례악에서 춤은 문무와 무무로 나누어지는데 문무는 조선의 문화를 찬양하며 문화를 일으킨 선왕들의 업적을 기리며 약과 적을 들고 추죠. 무무는 조선의 무업을 찬양하며 활, 칼, 창을 들고 추는 춤이다.






종묘제례의식의 각 절차마다 보태평과 정대업이라는 음악을 중심으로 조상의 공덕을 찬양하는 내용의 종묘악장이라는 노래를 부른다. 종묘제례악이 연주되는 동안, 문무인 보태평지무(선왕들의 문덕을 칭송)와 무무인 정대업지무(선왕들의 무공을 찬양)가 곁들여진다.





종묘제례악은 본래 세종 29년(1447) 궁중회례연에 사용하기 위해 창작하였으며 세조 10년(1464) 제사에 적합하게 고친 후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다.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봉행하는 종묘대제에서 보태평 11곡과 정대업 11곡이 연주되고 있다.





종묘제례악은 조선시대의 기악연주와 노래·춤이 어우러진 궁중음악의 정수로서 우리의 문화적 전통과 특성이 잘 나타나 있으면서도 외국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멋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등가와 헌가는 두 가지 종류의 악대로서 댓돌 위에서 연주하는 악대가 등가, 댓돌 아래에서 연주하는 악대가 헌가다.





악기는 , 대금, 해금, 당피리, 악장, , , 방향, 편경, 편종, 아쟁, 장고, 절고, 진고, 태평소, 징이 있고 휘라고 불리는 깃발도 편성되어 있다.









② 취위(就位): 제례를 거향하기 직전에 제관들은 정해진 자리에 가서 선다. 왕의 자리는 판 위인데 상월대 아래 계단 동쪽에 전돌을 깔았다. 묘사와 대축이 각 신실의 신주를 받들고 나오면 제관은 동쪽 계단 아래 서쪽을 향해 서고 유사가 정시가 되었음을 고하고 제사 지내기를 청한다.







상향 - 신위 앞에 향을 피움



삼헌 - 신위 앞에 술을 세번 올림 초헌, 아헌, 종헌이 바로 삼헌이다.





종묘제례의 영신례(迎神禮)와 전폐례(奠幣禮)에서 악사들은 희문이라는 보태평 제1곡을 아뢰고, 초헌례(初獻禮)에는 보태평을 아뢰며 도창(導唱)은 조종의 문덕(文德)을 기리는 악장을 노래부르며 무원(舞員)들은 손에 약(籥)과 적(翟)을 갈라쥐고 문무(文舞)를 팔일무(八佾舞)로 춘다. 아헌례(亞獻禮)와 종헌례(終獻禮)에서 악사들은 정대업 전곡(全曲)을 아뢰고 도창은 조종의 무공(武功)을 찬양하는 악장을 부르고 무원들은 앞두줄은 목검(木劍, 나무칼)을 들고 중간 두줄은 목창(木槍,나무창), 뒤로 두 줄은 활과 화살을 들고 무무(武舞)를 팔일무로 춘다. 진찬(進饌)ㆍ 철변두(徹邊豆)ㆍ송신례(送神禮)에는 아악곡(雅樂曲)을 아뢰고 악장과 일무(佾舞)는 없다.










제수는 곡식인 반(飯)이 도(稻)·양(梁)·서(黍)·직(稷) 4종, 고기를 저린 해(醢)가 녹해(鹿醢), 담해(醓醢)·치해(雉醢)·어해(魚醢) 4종, 떡인 병(餠)이 백편[白餠]· 흑편[黑餠]·구이[糗栮]·분자(紛餈)·양식(饟食)·이식(酏食) 6종, 과일인 과(果)가 건율(乾栗)·대조(大棗)·호도(胡桃)·송자(松子)·비자(榧子) 5종, 절인 채소가 구저(韭菹)·근저(芹菹)·청저(菁菹)·길경(桔梗) 4종이다. 또한 화갱(和羹)·대갱(大羹)·포(脯)·어숙(魚鱐)·형염(形鹽)·돈박(豚拍)·비절(脾切)·우성(牛腥)·양성(羊腥)·돈성(豚腥)·천조(薦俎)가 각각 1종이고 그 밖에 변료(燔膋) 1종, 촉(燭) 2본, 폐(幣)는 백저(白苧) 15척이며, 술은 울창(鬱鬯)·예제(醴齊)·앙제(盎齊)·청주(淸酒)·명수(明水)·현주(玄酒) 6종이다.



종묘 제수진설 체험 행사 장면


종묘관리소에서는 전례의 기록 및 고증으로 토대로 제수의 원형을 찾아 조리하여 사진과 기록으로 남겼으며 이를 바탕으로 종묘대제 제수진설을 직접 제험할 수 있는 체험교육을 2010년부터 매년 5월에 실시하고 있다. 이러한 체험 현장에도 참여해 보는 것도 좋을 듯






사진은 종묘에 있는 정전의 회랑이다. 왕실의 사당답게 근엄하고 우아한 회랑을 갖추고 있다.


종묘의 정전은 무려 19칸이다. 이 정도 되면 사람들은 그 규모에 압도당하지 않을 수 없다. 무한 반복을 통해 장엄함을 연출하는 것이다. 그래서 동양에 있는 목조 건물 가운데 이 정전이 가장 긴 건물이 된다.





정전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정전에 갔을 때 반드시 가서 보아야 할 장소가 있다. 우선 정전의 뒷벽을 보아야 한다.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아무 구획도 없이 하나로 처리다. 중간에 벽을 나누는 장치가 없다. 이것 역시 장엄함을 보여준다. 단순과 반복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것도 가장 비싼 재료 중에 하나인 벽돌로 처리했다. 그런가 하면 옆에서 보면 건물이 아주 깊게 보여진다.









쉽게 말해 두껍다. 이렇게 두꺼운 건물은 잘 없다. 이것은 아마도 이 종묘가 죽은 혼을 모시는 공간이라 혼을 깊숙한 곳에 모시려다 그렇게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보고 나면 그 다음에는 계단으로 올라가 기둥들이 무한히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는 장엄한 광경을 보아야 한다. 여러분들은 사진만 봐도 그 무한반복에 압도당하게 된다. 종묘를 동양의 파르테논 신전이라 부르는 이유도 바로 이런 것에서 찾을 수 있겠다.










종묘는 사직과 함께 전근대에서는 국가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것이었으며, 종묘에 지내는 제사인 종묘대제는 모든 제사 가운데 제일 격이 높은 제사였다. 따라서 참가 인원이나 순서, 제복·제기와 제수 등에서 종묘대제는 다른 어떤 제사보다도 높은 격식을 갖추고 정성스럽게 지냈다.





종묘대제에는 음악과 노래와 무용도 함께 행해졌는데, 가·악·무의 종합 연출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종묘제례악은 동양의 고전인 『악기(樂記)』에서 “가·악·무를 모두 갖춘 것을 악이라 한다.”는 고전적 개념에 부합하는 보기 드문 음악유산이다.
유교사상이 지배하는 동양사회에서는 예와 악이 수신과 치국의 방법으로 중요시되었는데 이 예악은 종묘대제와 종묘제례악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종묘대제와 종묘제례악은 중국의 영향을 받았으나, 이에 그치지 않고 우리만의 독특한 형식으로 발전하여 왔고 현재까지도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어 어느 의례에서도 느끼기 어려운 도도한 기상과 중후함, 화려함을 맛볼 수 있다.





지금까지 종묘제례악은 종묘의 뛰어난 건축미와 엄숙한 제사의례만큼이나 장엄미가 돋보이는 음악으로 역사적, 예술적 가치가 크며 동양에서도 드물게 남아있는 고전음악이다.
우리 고유의 음률을 통해 왕조의 창업과 기상을 노래하고 있으며 모든 행사의 순서에 맞추어 춤과 음악이 조화를 이루는 절정의 음악임을 살펴 보았다. 이제 우리 곁에 있어 왔던 고요한 신전인 종묘를 그냥 지나치지 않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달의 블로그 대문 설명]국보 제22호 경주 불국사 연화교 및 칠보교(慶州 佛國寺 蓮華橋 및 七寶橋)


불국사의 예배공간인 대웅전과 극락전에 오르는 길은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의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다. 연화교와 칠보교는 극락전으로 향하는 안양문과 연결된 다리로, 세속 사람들이 밟는 다리가 아니라, 서방 극락세계의 깨달은 사람만이 오르내리던 다리라고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