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굽이마다 옛 사람들이 넘나들던 고갯길이 많이 있었을 테지만 이제 원래의 고갯길이 남아 있는 곳은 찾기 어렵다.
자동차를 위한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새로운 길로 만들어졌고 그 옛날의 고갯길은 대부분 잊혀지고 자연으로 돌아갔다.
구룡령은 그 드물게 남은 옛길 중 하나이고 온전히 옛길의 정취를 보존하고 있어 명승으로 지정되었으니 길도 오래 묵으면 문화재가 되는 시대다.
산이 험한 구룡령이니 주변으로 여름 피서하기 좋은 계곡들이 많아 자동차로 여러 번 오르내렸지만 이렇게 높은 고개에 옛길이 남아있다는 소식이 놀랍다.
구룡령 옛길은 양양의 갈촌리에서 홍천의 내면을 잇는다. 지금은 56번 국도가 포장되어 자동차로 넘는데 일제 때 자원 수탈을 위해 닦은 도로란다.
자동차로 넘는 것도 20여Km의 구절양장 길을 굽이굽이 돌아가는데 옛길은 어떨까 기대된다.
막상 걸어보려고 하니 교통편이 만만찮다.
시내버스 기사에게 물어보니 구룡령을 통과하는 버스는 몇 년 전부터 적자노선으로 폐지되었다고 한다.
양양에서 옛길 초입인 갈천까지 하루 4번 다니는게 고작인데 고개를 넘어 간 다음에 돌아오는 방편이 문제다.
반대쪽인 홍천은 교통편이 더 나쁘다.
버스 산악회나 차량 두 대가 아니라면 왔던 길을 다시 걸어오거나 히치하이킹밖에는 별 도리가 없다.
히치에 자신이 없어 우직하게 오대산 넘어가는 경로를 택했다.
산행의 들머리인 갈촌 분교에 버스로 내렸다. 갈전 분교는 겨우 교실 두 칸의 작은 학교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아직도 벽체는 옛날식의 판자를 두르고 있다.
나무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기름을 먹여 이런 학교는 어딜가나 시커먼 색이다.
학생 수도 많지 않은 산골의 작은 학교이고 언제 폐교될지 모르는 상황이니 굳이 새로 건물을 개축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1999년 폐교되었다니 꽤 늦게까지 학교를 유지했다. 50년간 222명을 배출하고 폐교되었으니 연 평균 4-5명 졸업시켰다는 계산인데 역시나 깊은 산중이라 예전에도 주민들은 많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나는 이런 옛 학교 건물을 너무 좋아한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와 비슷해서일 것이다.
여행 다니다 이렇게 나무 판자를 유지하고 있는 오래된 학교를 보면 어린 시절을 보는 것처럼 반갑다.
옛길 앞에 있는 옛 분교는 오래 묵어 서로 닮았다.
나는 버스로 왔지만 자동차로 온 부부는 차를 세우고 히치를 시작한다. 아마 고개까지 차로 올라서 이쪽으로 내려올 것이고 고갯길 중간 어디쯤에서 만나겠지. 실제로 중간에서 만나 얘기하는데 내가 내면까지 고개를 완전히 넘어간다니까 자기도 그렇게 할 걸 하고 후회한다. 대부분 산행객들은 고개 정상에서 갈전리로 내려오는 코스를 선택한다.
명승 코스도 정상에서 갈전리까지 양양 구간만 지정되어 있고 반대쪽의 홍천은 제외되어 있다.
같은 고갯길인데 왜 한쪽만 명승인지 모르겠다.
갈전에서 정상까지는 3Km가 채 안 된다.
찻길도 10Km가 넘고 해발 천미터가 넘는 큰 고개인데 걷는 길이 너무 짧아 의아하다.
고개는 높고 길이는 짧으니 경사가 심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처음부터 산행은 급한 오르막으로 시작한다.
보통 고갯길은 계곡을 중심으로 만들어지는데 구룡령길은 능선을 끼고 산 사면을 굽이굽이 돌아간다.
아홉 마리 용이 하늘로 치솟는 모양을 닮았다 해서 9룡령인데 걸어보니 왜 구룡령인지 알겠다.
천미터가 넘는 높은 고개를 넘자니 직석으로 오르지 못하고 지그재그로 오를 수밖에 없다.
정상까지 겨우 2.7km인데 수직으로 고도는 700여m를 올려야 한다.
오랜만에 오르는 급경사가 낯설고 부담스럽다. 아마 다들 그래서 정상에서 내려오는 코스를 선택하나보다.
급히 가면 옛길이 아니지. 주변을 둘러보며 천천히 한발 한발 고도를 올린다.
길 주변 여기저기에 야생 버섯이 즐비하다.
아마도 먹을 수 없는 버섯이겠지만 양양이 왜 송이 버섯의 고장인지 알만하다.
적당히 쉬어 갈만한 거리가 되면 어김없이 이야기보따리가 하나씩 풀어진다. 옛길의 묘미이기도 하다.
첫 번째 만나는 스토리텔링은 솔반쟁이. 반쟁이는 반정(半程)이니 여정의 절반이란 뜻이다.
소나무가 많아 솔반정이다. 올라갈수록 20여m 씩 하늘로 쭉쭉 뻗은 금강소나무가 맞이한다.
20여 년 전 경복궁 복원 때도 이곳 주변의 금강소나무를 잘라서 썼다고 할 정도로 뛰어난 품질의 소나무다.
군데군데 밑둥만 남은 소나무 등걸을 볼 수 있었는데 아마 그 때 잘라낸 흔적이 아닐까.
안아보니 혼자로는 어림도 없는 굵기다.
쉬었다 가고 싶을 때 쯤 또 나타나는 옛날 삭도의 현장. 일제 때 철광석을 캐내기 위해 케이블카를 설치했던 흔적이 남아있다.
아직도 두 줄의 강철 와이어 선이 계곡 아래로 길게 내려져 있다.
와이어 선이 끝나는 지점엔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지지만 그렇다고 굳이 내려가 볼 열정까지는 없다.
이 험한 산 속까지 일제의 손길이 미친걸 보면 참 촘촘한 놈들이다. 그러니 이런 첩첩산중에 새로운 도로를 냈겠지.
홍천과 양양의 군수가 각자 출발해 만나는 곳을 고을의 경계로 삼자고 하여 양양의 노비는 군수를 업고 빠르게 달려 더 넓은 곳을 차지하였으나 돌아오는 길에 지쳐서 이곳에서 죽었다는 전설이다.
진짜 묘가 있을까 주위를 찾아보니 안내판 위쪽에 실제로 무덤이 보인다.
봉분위에 꽤 두꺼운 소나무의 잘린 밑둥이 남아있어 이야기를 위해 급조된 무덤이 아니라 오래된 묘라는 것을 알게 한다.
땅따먹기도 아니고 겨우 수령 따위가 합의하여 고을의 경계를 정할 리는 없겠지만 실제로 묘를 보니 전설이 믿고 싶어진다. 그러나 지도를 보면 홍천과 양양의 경계는 역시나 백두대간의 능선이니 전설은 전설일 뿐.
아, 어쩌면 옛날의 경계는 지금과 달리 이야기처럼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야기의 마지막은 횟돌 반쟁이다. 장례할 때 횟가루로 땅을 다져 나무뿌리가 관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기위해 사용하던 횟돌이 나오는 곳이라는 이야기다.
조선 왕릉에서 회격으로 왕릉을 조성할 때 석회와 모래 황토를 3:1:1로 혼합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시멘트처럼 단단해진다고 했는데 민간에서도 이런 회를 사용했나보다. 주변에 석회돌이 있을까 둘러봤더니 진짜인지는 모르겠으나 흰색의 돌들이 여기 저기 널렸다. 잘 부서지는 것으로 봐서는 진짜 횟돌이라는 믿음이 생긴다.
묘반정, 솔반정, 회반정 등 반쟁이가 많은데 엄밀하게 말하면 길에 중간은 딱 한지점인데 어찌 오를 때마다 반쟁이인지 궁금했었다. 구룡령 고갯길만으로 따지면 고갯마루만이 반정이겠지만 옛날로 돌아가 내면쯤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하면 거리가 길어져 고갯길의 여기 저기 모두 반절이 될 것이다. 고개에서 내면까지는 또 20Km가 넘는 거리이니 그에 비하면 고갯길 어디에서고 절반쯤 되었을 것이다.
내면의 산골에서 재배한 농작물을 이고 지고 구룡령을 넘어 양양의 바닷가까지 내려가 소금이나 생선을 사 가지고 다시 돌아올 여정을 생각하니 그 거리가 아득해진다.
퍼뜩 정신 차리고 그 힘으로 다시 고개를 오른다.
나무 사이로 계곡 건너 자동차도로가 멀리 내려 보이는데 날씨가 계속 흐리더니 안개를 만들어 냈고 구룡령 고개 정상은 안개에 가려 신비감을 자아낸다.
정상은 사거리다. 마치 십자로처럼 4개의 길이 여기서 만난다.
옛길과 함께 백두대간의 능선길이 또 한축을 이루고 있다.
백두대간 고갯길은 차로만 올라가도 잠시 쉬어가며 감상에 젖는데 이렇게 걸어 오르니 감개무량, 가슴이 벅차오른다. 대학때 이 길을 분명 왔을텐데 기억은 없다. 그 때를 함께 했던 그 친구들은 다들 잘 있는가.
내면의 명개리로 내려가는 길은 올라오는 길과 판이하다. 이쪽 길이 좀 더 길기 때문인지 경사도 완만하다.
갈천에서는 해발 350m에서 시작하는데 명개리쪽은 400m이다. 고도를 봐도 거리를 봐도 명개리 쪽에서 올라가는 편이 수월하다.
무엇보다 재미없는 능선길이 아니고 계곡을 끼고 좌우로 번갈아 물을 넘나들기 때문에 물에 발 담그고 쉬는 재미도 좋다.
고개마루에서 내려서자마자 바로 계곡과 만나는데 길이 끝날 때까지 계곡과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함께 내려가서 지루할 틈이 없다.
맨땅이 드러나는 갈천쪽과 달리 수풀이 제법 우거진 것을 보면 사람들이 이쪽 길로는 잘 안 다녔다는 것을 알겠다.
갈천이 금강소나무처럼 침엽수가 쭉쭉 뻗은 길이라면 이쪽은 활엽수도 함께 한다.
고개를 사이에 두고 양쪽길이 전혀 다른 맛을 보여준다.
비록 이쪽이 명승은 아니더라도 구룡령길에서 이 코스를 생략하기엔 아쉬운 길이다.
갈천쪽과 달리 이곳은 이야기 거리가 적은데 같은 고갯길에서 왜 이쪽만 이야기 거리가 없겠는가.
아마 갈천쪽만 명승으로 지정하면서 이야기 거리를 찾은 것이고 이쪽은 그런 노력이 없는 차이일 것이다.
유일한 스토리텔링은 ‘서서물나들’이다. 몸을 굽히지 않고 서서 물을 마실 수 있을 만큼 높은 계곡이라는 뜻인데 실제로 먹어보니 서서 먹기엔 무리다.
좀 더 내려오니 영골약수가 보인다. 안내판만 있고 막상 약수는 안 보여 자세히 찾아봐야 했는데 아주 조그맣게 계곡 바닥에 구멍이 뚫려 있다. 다른 약수와 마찬가지로 철 성분이 녹아 주변은 벌겋게 녹슬어 있다.
약수는 말랐는지 물이 더러운 편이어서 먹기엔 꺼려진다. 수량이 매우 적어 쫄쫄 겨우 흐르는 정도다.
주변에 몇 개의 구멍에서 뽀글뽀글 거품이 샘물처럼 솟아오르는데 바위틈을 뚫고 나오는 모습이 신기했다.
거의 내려올 쯤에 빈 터에 돌무더기가 쌓여 있는 장소가 보인다. 고갯길 초입이니 아마 옛날엔 주막이라도 있었던 흔적일 것이다. 나중에 이쪽도 개발되면 이곳에 그럴듯한 주막이라도 세워져 있을지도 모르겠다.
명개리 마을로 내려오니 명지다리가 나온다. 이곳이 바로 그 3둔 4가리의 명지가리란 소개가 있다.
명지가리가‘명개’로 바뀌었나보다. 산 쪽으로 올라가는 좁은 길이 보이는데 이 길로 가면 무엇이 나올까.
오지로 유명한 명지가리라니 길의 끝이 궁금해지고 못 가본 길에 대한 욕심이 생긴다.
다 내려왔지만 차가 있는 오대산 입구까지 아스팔트로 5.5Km 걸어야 한다.
구간외 거리는 재미없지만 요 며칠 느린 속도에 익숙해져 씩씩하게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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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daum.net/mt0047/608
블로그 대문/ 국보 제249호 동궐도(東闕圖) .
문화재청 창경궁관리소는 동궐도로 보는 창경궁이란 주제로 「동궐도와 함께하는 창경궁 특별관람」 해설 행사를 오는 9월과 10월 매주 금요일 오후 2시 30분에 운영합니다.
창경궁은 고종 재위 당시인 1860년대까지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며 2,000여 칸이 넘는 건물이 있었으나, 1908년부터 일제에 의해 많은 건물이 소실되며 옛 모습을 잃어갔습니다. 현재는 일부 복원 등을 통해 명정전 등 450여 칸(‘대온실’과 ‘과학의 문’은 별도) 가량이 남아있습니다.
창경궁에서 진행되는 이번 특별관람 행사는 현재 창경궁 내 빈터로 남아있는 관원들의 업무 공간인 궐내각사(闕內各司) 지역의 군무를 담당하는 도총부(都摠府), 궁궐의 말과 가마 등 탈것들을 관리하는 내사복시(內司僕寺)와 왕세자의 공간인 동궁지역, 정조가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헌경왕후)를 위해 지었다는 자경전, 효종 때 공주와 사위들을 위해 지어진 건물 등에 대하여 동궐도를 보며 전문 해설사의 상세한 설명을 통해 알아볼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합니다.
또한, 현재 창경궁에 남아있는 주요 전각인 명정전, 환경전, 경춘전, 통명전, 양화당과 일제강점기에 변형된 춘당지 일대 지역을 동궐도상의 모습과 비교하면서 19세기 창경궁의 옛 모습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행사는 9~10월 8주 동안 매주 금요일 1일 1회 오후 2시 30분부터 약 1시간 동안 진행되며 누구나 무료(입장료 별도)로 참여할 수 있습니다. 단, 해설 규모를 고려하여 매회 30명으로 인원을 제한합니다.
참가방법은 오는 17일 오후 2시부터 행사 전날까지 창경궁관리소 누리집(http://cgg.cha.go.kr)에서 선착순으로 신청하면 됩니다.
국보 제249호인 동궐도(東闕圖)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궁궐 그림으로, 1826~30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약 3,000 여 그루의 나무 그림과 수많은 건물은 물론, 다양한 과학 문화재 등이 부감법(위에서 밑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그리는 방법)으로 그려져 옛 동궐(창경궁과 창덕궁)의 모습을 포괄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문화재청은 이번 행사를 통해 동궐도 상에 존재했던 많은 궁궐 건물들을 소개하며 국민의 궁궐문화유산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궁궐이 지닌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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