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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북한의 라이언일병들은 어떻게?]사명대사는 왜국으로 건너가 3천 5백명의 조선 포로를 데려왔건만

문화재방송 2018. 9. 15. 17:26
사명대사 진영<br>조선,1796년경<br>삼베에 색,보물 제1505호, 동화사 성보박물관


 

서산대사의 제자였던 유정(惟政, 1544-1610)은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어 전공(戰功)을 세우고,
「임진록(壬辰錄)」이라는 고전소설에 영웅으로 등장할 만큼 민족의식을 발현하는 데 이바지한 인물이다.
사명당(四溟堂)으로 유명한 그는 임진왜란 때 스승인 서산대사의 지휘 아래 활약하다가,
스승이 은퇴하자 그 직책을 물려받아 승군(僧軍)을 통솔하여 유성룡(柳成龍), 명나라 장수들과 협력하여
평양을 탈환하였다. 그가 1604년(선조 37)에 국서를 받들고 일본에 가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강화를 맺고 조선인 포로 3,500명을 데리고 돌아온 이야기는 지금도 유명하다.


 蛇足:사명대사는 일개 승려의 몸으로 조선인 포로 3천 5백명을 데리고 왔건만,

       그동안 북한을 방문하여 많은 도움을 준 대한민국 대통령들은 왜 단 한 명의
        납북인사나 국군 포로를 데려 오지 못 했을까?
뒤늦은 귀대신고 1994년 10월 25일


국립묘지 전사자 명단에 올라와 있던 조창호 소위가 포로로서는

최초로 북한을 탈출하여 한국에 들어왔다.

25일 통합병원에서

문병 온 후배 이병태 국방부장관에게 43년만의

귀대신고를 하고 있다.




2018. 6. 9 조선일보 WHY에 게재된 [思父曲 어느듯 50년]

"文대통령님, 金위원장님… 제발 우리 아버지 돌려보내주세요"
1969년 납북된 대한항공 YS-11기… 당시 두 살이던 황인철씨의 외로운 투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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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철씨가 납북되기 전의 부친과 함께 찍은 사진을 들어 보이고 있다. 사진 속 왼쪽이 황씨, 오른쪽은 그의 여사촌이다. 그의 아버지 황원씨는 1969년 납북됐다. 황씨는 “얼굴도 목소리도 기억나지 않고, 남은 것은 사진 두어 장뿐”이라고 했다.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며 지난 20여 년을 아버지 송환 운동에 바쳤다. 그는 “북한이 납북자들을 돌려보내 남북 화해에 대한 진정성을 보여달라”고 호소했다./사진=이태경, 그래픽=이철원 기자


1969년 12월 11일. 강릉에서 서울로 가는 대한항공 YS-11 항공기 안에는 승무원 4명과 승객 47명이 타고 있었다. 영동방송(현 MBC 강원영동)의 3년차 PD였던 황원(당시 32세)씨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보도부장을 대신해 떠난 서울 출장길. 전날 부부싸움을 하고 나온 터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비행기는 이륙한 지 10분 만인 낮 12시 25분쯤 대관령 상공에서 승객을 가장한 간첩 조창희에 의해 북으로 납치됐다. 그는 돌을 막 넘은 아들, 백일이 갓 지난 딸이 있었다.

그때의 핏덩이 아들이 쉰 넘은 중년이 됐다. 황인철(51)씨는 아버지 송환 운동에 20년을 바쳤다. 통일부와 외교부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지만, 우리 정부는 '고도의 정치·외교적 사안'이라며 회피했다. 북 정권은 아예 대꾸도 없었다. 오기가 생겼다. 국제법 책을 펼쳐놓고 난생처음 듣는 조약과 국제 협약을 공부했다. 100만인 서명을 받고자 팔도를 누볐고, 제네바와 뉴욕에서 '눈물의 증언'도 했다. 그렇게 부친의 납북 문제를 국제 사회에 공론화했다.<이하 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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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에 남겨진 '라이언 일병(생존 국군포로)' 500명…

아무도 찾지 않는다

조선일보
  • 김은중 기자

  •     
    입력 2018.08.25 03:00

    [김은중 기자의 쇼타임] 강제노동에 시달리다 2000년 스스로 탈북·귀환한 '일병 유영복'

    [김은중 기자의 쇼타임]
    46년 만에 주인 찾은 화랑무공훈장 유영복씨가 훈장이 새겨진 국가유공자 모자를 들어 보이고 있다.
    국군은 1953년 강원도 금화지구 전투에서 실종된 그를 전사자 처리했고, 이듬해 화랑무공훈장을
    수여했다.
    북한에 포로로 억류됐던 유씨는 탈북 후인 2000년 10월 육군 제5사단에서 전역식을 가졌다.
    훈장도 46년 만에 주인을 찾았다. 유씨는 “북에서 함께 고생한 국군 포로 동료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했다. / 박상훈 기자

    "우리 아들들이 집으로 돌아왔다."


    지난 1일(현지 시각) 미국 하와이주(州) 펄하버-히컴 합동기지에서 미군의 유해봉환식이 있었다.

    한국전쟁에 참여했다 전사해 65년 만에 고국 땅을 밟는 유해 55구를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최고

    예우를 갖춰 맞이했다. 지난 6월 싱가포르에서 미·북 정상이 미군 유해 송환에 합의한 지 두 달 만이다.

    펜스 부통령은 이날 "모두가 6·25를 잊힌 전쟁이라고 했지만, 오늘 우리는 이 영웅들이 절대 잊히지

    않았음을 증명했다"고 했다.


    국가를 위해 싸우다 북으로 끌려갔고, 돌아오지 못해 그곳에 잠든 아들들이 우리에게도 있다.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는 2014년 "8만2000명의 한국군이 한국전쟁 이후 실종됐고,

    5만~7만명이 북한과 그 동맹 국가(중국)에 억류됐다"고 추정했다. 이들 중 대부분은 탄광 등에

    배치돼 평생 고된 노동을 했고, 고향을 그리다 눈을 감았다. 지난 20일 금강산에서 열린 제21차

    이산가족 상봉에서도 남쪽의 이달영(82)씨는 국군 포로로 북에 간 아버지가 이미 숨진 바람에 그

    이복동생들과 만나 그리움을 달랬다.
    2014년 기준 북한에 생존해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국군 포로 숫자는 500여 명 정도. 그마저도 북한은

    6·25전쟁 포로에 대한 상호 교환이 이루어진 1954년 이후 "강제 억류 중인 국군 포로는 공화국에

    한 명도 없다"는 주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북한에 억류됐던 국군 포로들 중 일부는 목숨을 걸고 탈북을 했다. 1994년 고(故) 조창호(1932~ 2006)

    중위를 시작으로 2010년까지 81명이 고향 땅을 밟았다. 이들 중 현재 29명이 생존해 있다.

    평균 연령이 90세 안팎으로, 절반 가까이가 병상 신세다.

    유영복(88)씨도 우리가 잊고 있던 '라이언 일병' 중 한 사람이다. 47년을 북한에서 살다 2000년 한국에

    들어온 그는 '덤'으로 주어진 남한 생활의 상당 부분을 국군 포로 송환 운동에 바쳤다.

    그랬던 그에게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20일 경기도 이천의 자택에서 만난 그는

    "이제 내가 할 일은 더 이상 없다"고 선언했다.


    "아무도 국군 포로를 찾지 않았다"


    육군 제5사단 27연대 소속 소총수(일병)였던 유씨는 1953년 6월 10일 강원도 금화지구 전투에서

    중공군에 포로로 붙잡혔다. 휴전협정이 조인되기 불과 50여일 전이었다. 북한이 포로들을 상대로

    공민증을 발급하기 시작한 1950년대 후반부터 30년이 넘는 시간을 함경남도 단천의 검덕광산에서 일했다.

    2000년 탈북해서는 10년 넘게 국군 포로 송환 운동 현장을 누볐다. '귀환국군용사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회장을 지냈고, 2011년엔 자신의 증언록 '운명의 두 날'도 펴냈다. 2015년에는 시민단체들과

    함께 김정은을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제소하겠다고 밝혔다.


    ―여든이 다 된 나이에 국군 포로 송환 활동을 했다.


    "혈혈단신으로 한국에 왔다. 귀환한 국군 포로들을 위한 단체나 자리는 없더라. 2014년 이들을 모아

    귀환국군용사회를 결성했다. 북한이 우리를 탄압한 사실, 국군 포로가 얼마나 많았으며 어떤 대우를 받고

    살아왔는지 알리고 싶었다. 포로가 된 것이 자랑은 아니다. 부끄러운 일인 것 안다. 하지만 유혈(流血)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에게 '대한민국 국군 중에서는 자기 본분을 지키려 애쓴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알려주려 했다. 또, 국군 포로가 없다고 억지 주장을 하는 북한을 향해 '여기 80명이나 있다'고

    전 세계에 당당하게 보여주고 싶었다. 처음엔 가명을 써가며 활동했다."


    ―목표로 하는 바는 이루었나.
    "우리 능력이 부족해서일까. 귀환 용사들을 모아 국가와 사회에 이런저런 호소를 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정부 관료나 국회의원 등 고관대작 중에선 우리를 만나려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이제는 '마음을 접었다'고 했다.
    "지금 문재인 대통령의 관심사는 비핵화와 종전 선언이지 않냐. 국군 포로는 부차적인 문제가 됐다.

    회담에서 우리 얘기를 꺼내지도 않을 것이고, 북한이 받아주지도 않을 것 같다.

    당국자들도 남북 회담에 이 문제를 꼭 올려야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도층 인사들 중 한 명이라도

    이 문제를 제기하면 내가 '얼굴마담'이라도 하며 보조를 맞추겠는데, 민주당이든 한국당이든 말 한마디

    하는 국회의원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나 혼자 무슨 힘이 있다고 나서겠는가."

    [김은중 기자의 쇼타임]
    유영복씨가 2015년 6월 김태훈(왼쪽) 변호사와 함께 기자회견을 열고 국제형사재판소(ICC)에
    김정은 제소 계획을 밝히는 모습. 그는 탈북 후 10여 년을 국군 포로 송환 운동에 매달렸다. / 성형주 기자

    ―국군 포로들을 찾는 곳은 없었나 .


    "몇 년 전 오산 미군 공군기지에서 내 체험담을 나눌 기회가 있었다. 우리 집을 다녀간

    워싱턴포스트(WP) 기자가 시민단체를 통해 나를 주한 미군에 소개해준 것이다. 기력이 달리는 노인이지만,

    우리 군부대에서 강연 요청이 오면 기꺼이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한국에 오고 나서 처음 몇 차례 강연을 했지만, 이후엔 내가 조용히 지내기를 바라는 것 같더라. 내가 나서면

    자연스레 '국가는 무엇을 했느냐'는 얘기로 이어지니 불편한 것이다."


    ―미군의 유해 송환을 본 소감은.


    "살아있는 국군 포로들도 못 데리고 오는데 우리가 유해 송환을 생각할 처지가 되나. 2002년에

    고이즈미 전 일본 총리가 평양으로 날아가 일본인 납북자 가족 5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2번이나 북한에 가서 김정일의 사과를 받고, 자국민을 데려오는 그 모습이 정말 부러웠다."


    -北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포로는 전시(戰時)에 상대국의 권력에 들어간 적군이다. 자유를 박탈당하고, 때로는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다. 6만여 명의 국군 포로들도 그랬다. 북한은 내무성 산하에 건설대를 세워 이들을

    집중 수용했다.

    가슴팍에 '괴뢰군 포로' 딱지를 단 이들은 불발탄 처리와 탄광 내 발파(發破) 등 위험하고 고된

    작업을 강요당했다고 귀환 용사들은 증언한다. 유씨는 "휴전 후 폐허를 복구할 노동력이 부족했던

    북한은 국군 포로들을 복구 사업 곳곳에 강제 동원했다. 검덕광산에만 1000여 명이 있었다"고 했다.


    ―북한에서 어떤 일을 했나.


    "납과 아연을 생산하는 함경도 검덕광산에서 30년 넘게 측량사로 일했다. 지하 1㎞ 밑으로 내려가

    10㎞에 달하는 갱도를 따라가야 작업장이 나온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돼 피부가 아렸고, 팔과 다리가

    부러지는 일도 다반사였다.

    한번 사고가 발생하면 스무 명이 넘는 광부가 죽었다. 일과표는 하루 8시간 일을 하라고 했지만,

    할당량을 채우지 않으면 절대 쉴 수가 없으니 광산에서 먹고 자는 날도 많았다. 하루 종일 유독가스를

    마시며 일했으니, 지금도 만성 폐·기관지 질환을 앓고 있다."


    ―북에서 국군 포로는 어떤 대우를 받나.


    "'성분'을 중시하는 북한 사회에서 국군 포로는 최하위 계층이다. 포로라는 이유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고가 발생하면 책임도 져야 한다. 북한은 당원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사회인데 가입

    자체가 불가능했다. 대다수는 젊어서 노동력을 착취당했고, 늙어서 쓸모가 없어지면 버림받았다.

    차별은 대(代)를 이어 계속된다.

    포로의 자식들은 군대나 대학에 가지 못했다. 2세들이 물었다. '대체 우리는 왜 태어난 거예요?'"


    ―'고난의 행군'도 직접 겪었는데.


    "저축과 연금이라는 개념이 없는 북한이다. 정년 후에도 먹고는 살아야 하니 농사밖에 할 일이 없었다.

    배급을 준다고 하지만 턱없이 부족하다. 그마저도 90년대 들어서는 끊겼다. 산에 옥수수를 심었다.

    비료도 없고, 노인이니 힘도 달리더라. 또 서로가 어려운 때라 도둑들도 많았다. 그때 몇 번이나

    굶어 죽을 뻔했다.

    농촌으로 시집간 동생들에게 강냉이죽이라도 얻어먹었으니 겨우 살았지. 동네 사람들이 '저 노인도

    며칠 못 가서 죽을 거다'고 했는데…."


    -좌절의 연속이었던 국군 포로들


    1972년 7·4 남북 공동성명,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 등 남북 관계의 변곡점마다 국군 포로들은

    마음을 졸였다고 한다.

    "고향에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번번이 헛된 기대라는 걸 알게 됐지만."<이하 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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