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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나의 이야기]문화재사랑으로 독립운동을 한 십만석지기 조선 갑부 간송 전형필 선생의 일대기

문화재방송 2018. 10. 5. 04:29


<간송 전형필 선생>



<간송미술관>




1. '10만석지기 조선부자' 간송 전형필은 누구? 


 

 

서울 종로4가.

그 일대가 전형필(澗松 全鎣弼, 1906~1962)의 생가터이다.

 

 

 

그는 99칸 대가에서 태어나

작은 아버지에게 입양되고

집안 어른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성장한다.

 

집에서 한학을 하다가

12세에 어의동 공립보통학교(현 효제초등학교)를 입학했고,

 

1921년 휘문고보에 들어가서는

학업 이외에 예체능에도 관심을 보이며 

휘문고 4학년 때에는 야구부 주장을 맡아

일본 원정 경기에 오사카고를 대파하기도 했다.

 

학창시절 전형필의 다양한 활동 중 가장 큰 즐거움은 도서 수집이었다.

전형필의 육필 원고인 <수서만록>에는 도서 수집의 열정이 엿보인다.

 

 

"도서 수집의 큰 힘이 된 것은 오로지 가족의 이해 덕분이다.

돌아가신 아버님과 어머님은 내가 책을 끼고 들어오는 것을 좋아하셨을 뿐

싫은 낯을 하신 적이 없으셨다."                

                                                         - <수서만록> 중에서

 

 

 

1915년 친조부상

1916 양조모상

1917년 양조부상

1918 친조모상

1919 양부상

1919 형님상

 .............

 

전형필은 의관 집 2남 2녀의 차남이었지만

집안 어른들의 줄초상이 이어지면서

남자라고는 집안에 아버지 전명기씨와 전형필만 남게 되고

결국 모든 재산이 스물 다섯의 전형필에게 상속되어

그는 '10만석지기 조선 갑부'가 된다.

 

슬픔이 사람을 성숙시킨다고 했다.

 

1926~1930년.

전형필은 일본 와세다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고민하기 시작했고

일본에서도 <마루젠>이라는 서점을 이용해 도서 수집에 열중했다.

 

"자네 그 목록을 다 채울 수 있겠는가?"

 

한 일본 학생은 노골적으로 전형필을 비웃기도 했지만

전형필은 도서수집의 열정을 놓지 않았다.

 

"목록을 다 채워봐야 조선인이 별 수 있겠느냐는 뜻으로 들렸다.

'오랫동안 책을 모으다보면 이런 목록을 몇 권이라도 채울 수 있지 않겠는가'

라고 댓구해줬다..."                                - <수서만록> 중에서

 

 

2. 위창 오세창 선생과 전형필의 만남!~

 

        '암울했던 시기 민족의 복' 

 

                                                         

위창 오세창 선생, 

1943 <근묵(槿墨)>. 

(고려 정몽주~ 대한제국 말기 민영식까지, 600년에 걸친 명사 1,136명의 친필 수록)

 

전형필의 인생에 결정적 영향을 주신 분은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이시고,

근대를 대표하는 서예가 · 전각가이자 서화 감식가인

위창 오세창 선생(葦滄 吳世昌, 1864∼1953)이시다.

 

고고 시절부터 전형필의 예술적 감각을 눈여겨본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등학교 은사, 

춘곡 고희동(1886∼1965)선생님에 의해 소개되어,

 

당시 스무살의 전형필과 60의 오세창 선생은

40년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세월을 뛰어넘은 우정을 나누며 서로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가운데 부채 든 사람 전형필, 그 왼쪽 오세창 선생님>

 

전형필은 수시로 오세창 선생의 집을 드나들며

많은 작품을 감상하는 법을 배우며

문화유산에 대한 안목을 기르게 되고,

 

우리 문화의 소중함과 가치,

나아가 자신이 조선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닫는다.

 

전형필이 수집하는 문화재는

오세창 선생의 조언과 안목이 보태어지고

선생은 그 문화재의 가치를 글로 기록해두기도 하셨다.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은

선생이 수십 년간 모은 풍부한 서적과 고서화 · 금석 탁본을 정리한 것으로 
우리나라 서화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한밤중 자다가 눈을 떴을 때 

두분이 마주앉아 말씀을 나누고 계셨는데

우리나라 서화에 대한 말씀이셨다."

 

"(아버지께서) 뭘 이렇게 쓰고 계시면서,

요전에 너도 봤던 전형필씨가 이걸 샀다는데,

이건 세상에 기가 막힌 보물이다,

그래서 내가(오세창) 이 그림이 기가 막힌 보물이란 것을 칭찬하는 뜻을 쓰는 거야."

                                             

"내가 기억나는 게 겸재그림, 현재 심사정 그림이 있었고,

<소상팔경도>라 그래가지고 크기가 아주 크고 긴 두루마리가 있었어요."

                                          - 오일용(86세, 오세창 막내 아들)

 

훗날 세간에서는

두사람의 만남을

'암울했던 시기 우리 민족에게 내린 복()'이라고 했다.

               

 

3. "우리나라엔 이런 거 없소."

                           - 일제의 문화재 도굴, 수탈!~ 

 

 

 

           <일본에 빼앗겼다 다시 찾은, 경천사지 10층 석탑(국보 86호)>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경천사지 10층 석탑(국보 86호)>은

원래 경기도 개풍군 경천사에 있던 것인데

1907년 일본에 나타난다.

 

"십층석탑이 이미 동경에 와 있다.

머지않아 우에노 공원 박물관 안에 영원히 보존된다."

                                        - 1907 아사히 신문 기사

 

<경천사지 10층 석탑(국보 86호)>이 일본으로 유출된 경위는

1906년 한국에 방문했던 당시 일본 궁내대신 다나까 미쓰아끼에 의해

개풍 주민들을 강제로 제압하고 석탑을 해체, 빼돌려진 것이었다.

 

"무기를 가진 일본인 130~200명이

지역 관리와 주민들의 항의에도 탑을 해체하여 운반했다.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는 바람에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 대한 매일 신보 1907. 3. 7 사설

 

국내외 비난이 계속 되자

일본은 심하게 훼손된 상태로 10년만에 되돌려준다.

 

이렇게 반환된 우리 문화재는

일본이 약탈해간 것의 빙산의 일각일뿐이다.

 

도쿄 오쿠라 슈코칸.

일제 강점기 빼앗긴 우리 문화재가 가장 많은 곳이다.

 

출처조차 파악 안된 수천 점의 우리 문화재가

일본 거리 곳곳을 장식하고 있다.

 

 

 

<평양 율리사지 팔각 오층 석탑>은

고려시대의 아름다운 석조 미술을 엿볼 수 있는 것으로 

고려 석탑을 대표하는 것인데

일본의 한 정원을 장식하고 있다.

 

고려 시조 왕건 사당의 제기(祭器)였던

'순화4년명 청자항아리(보물 237호)'는

용도, 제작년도, 제작자가 모두 남아있어 매우 사료적 가치가 높은 것인데

일제시대 경성미술구락부 경매 도록에 '꽃병'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오사카 동양 도자 박물관>에는

걸작중에 걸작인 우리 도자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 아름다운 고려청자가 어떻게 일본에 보관되고 있을까?

 

 

 

 

 

 

 

 

1909년 일본서 발간된 조선도자기 경매도록인 <고려소>를 보면

당시 이미 대규모의 경매가 열릴 정도로

엄청난 양의 자기가 일본으로 빠져 나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이 고려자기(高麗磁器)들이 

모두 조선의 무덤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조선백자 탄생후

고려청자는 무덤속에서만 존재했던 유물이었다.

 

일본인들이 도굴하기전까지

조선인들에게조차

고려청자는 낯선 물건이었다.

 

아사가와 하구오시가 지은 <조선의 회고(1945)>에는

이왕가 박물관에서 고려청자를 본 고종황제와 이토 히로부미의 대화가 남아 있다.

 

고종 : "이게 어디서 난거요?"

이토 : "고려시대 것입니다."

고종 : "우리나라엔 이런 물건 없소."

이토 : "......."

 

이토는 차마 도굴한 것이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 박탈 이후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

우리 문화의 도굴, 약탈의 선봉에 섰다.

 

그는 대량으로 약탈 및 도굴한 자기를 사들여

일본 왕가와 정치인들에게 수십 점씩 선물했다고 한다.

 

일본내에 청자의 인기가 높아지자 도굴은 더욱 극성을 부렸고

일본 도굴꾼에 의해 조선은 황금알을 낳는 보고로 여겨지며

개성에서 강화, 평양, 부여, 공주 등 고도(古都)들이 마구 파헤져진다.

 

1917년 <고적조사보고서>에서

고적조사위원이자 경성제국대학 교수이며

단군조선을 신화로 왜곡한 이마니시 류(1875~1935)조차 

그때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군집해 있는 고분이 도굴로 인해 파잔 황폐하는 참상은

차마 볼 수가 없을 정도로 실로 잔인혹심의 극치이다.

이는 현대인의 죄악이며,

땅에 떨어진 도의를 보려거든 고분 군집지로 가 보라."

 

 

4. 전 재산을 바쳐 민족의 혼 - 문화재를 지키다!

 

민족의 문화 유산이 낱낱이 사라져 가는 절박한 상황속에서

전형필은 일생을 건 싸움을 시작한다.

 

현재 서울시 인사동에 있는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고서전문점 <통문관(通文館)>

1932년 전형필이 세운 <한남서림>의 후신이다.

 

당시 25세였던 전형필은

일제에 빼앗기고 불태워지던 고서들을 본격 수집에 나서서

우리 문고를 만들겠다던 대학시절의 꿈을 실천한다.

 

전형필의 뜻이 알려지면서

훌륭한 고서들을 가진 사람들이 <한남서림>으로 몰려들었다.

 

금보(琴譜, 보물 283호, 선조 5년(1572), 안상, 거문고 악보)

동래선생교정 북사상절(東萊先生校正北史詳節, 국보 149호),

동국정운(東國正韻, 국보 71호, 세종때, '우리나라의 바른 음')는 이렇게 하여 수집된다.

 

일제시대 한성 경성구락부.

지금의 프린스호텔 자리로

당시 그곳은 합법적인 문화재 약탈장이었다.

 

1936년. 11월. 22일

'청화백자 양각진사철재 난국초충문병(국보 294호)'의 경매가 있었다.

 

      

청화백자 양각진사철재 난국초충문병(국보 294호).

 


경매가는 500원에서부터 시작해 가파르게 뛰어올라

마침내 국제적 거상 일본의 야마나까를 누르고

조선의 무명 청년 전형필이 사게 된다.

 

경매가 만 4천 5백 8십원!

'난국초충문병' 하나의 경매가는

그해 회당 총경매 매출가를 넘어선

경성구락부 설립 이래 최고의 낙찰가였다.

 

'청화백자 양각진사철재 난국초충문병(국보 294호)'

마치 향기를 뿜어내는 듯한 국화와 난초, 풀벌레를 양각으로 새겨넣은 회화미.

청화, 철화, 진사의 3색의 화려한 채색이 돋보이는

조선 백자의 진수, 제작 기술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건 자연이야 자연!

우선 아름답잖아요!

넓은 면에 문양 가득 채우지 않고 국화에

그리고 난을 곁들이고

거기에다 풀벌레가 있고

이건 가만히 보면 자연이야 자연!"

                                            -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당시 식민지 조선의 현실은 절망적이었다.

일제의 가혹한 민족말살정책 아래 조선의 역사, 제도, 문화 등 모든 것이 사라지고

우리 문화 유산의 처지 또한 암담했다.

 

 

전형필은 오세창 선생의 도움을 받으며 문화재를 수집하기 시작한다.

서화, 청자, 백자, 불상 등 그에 의해 수집되고 보관된 문화재는

국보 14점, 보물 12점과 더불어 5천 여점이 넘는다고 한다.








1940년대 일제는 조선어 사용 금지와


1942년 조선어학회 탄압 사건 등

우리 민족 말살 정책을 가속화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943년 6월. 

<훈민정음 원본>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은 전형필은

상대가 천원이라고 했지만

'귀한 물건은 제 값을 치워야 한다'며

당시 집 열 채 값인 만원을 주고 

천원은 수고비로 주며 사들여

비밀리 보관하다가 해방후 공개한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간송에겐 지켜야할 목표로서 6‧25 전쟁 당시에도

오직 이 책 한권을 오동상자에 넣고  피란을 떠났으며,

잘 때도 베게삼아 잤다고 한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국보 제70호 훈민정음 해례본>








훈민정음 원본은 국보 70호로 현재 우리나라에 단 한권뿐이며 


숭례문 소실후 국보 1호로 지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로

대단히 귀중한 문화재이다.

 

훈민정음 원본이 발견됨으로 해서 

자음은 발음 기관의 모양을 땄고,

모음은 천지인의 철학을 담았다는

한글의 제작 원리를 실증할 수 있게 되었다.

 

훈민정음은 제작 원리가 밝혀진 세계 유일한 문자로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연소답청                                 단오풍정(端午風情) (1805)]

 

  

 

               월하정인(1805)                                      야금모행


 

간송은

<혜원 전신첩(蕙園傳神帖, 국보 135호)>

일본으로부터 사들인다.

 

당시 풍속화는 낮게 책정되고 있었으나

전형필은 진가를 알아본다.

 

<혜원전신첩>에는

'기방무사'부터 '월하정인' '연소답청' '야금모행' '단오풍정' 등

30여 점이 실려 있는데

 

당시 금기시 되던 남녀의 애정을

신윤복은 당당히 자신의 이름까지 밝히며 그리고 있어,

 

양반들의 풍류 생활은 물론

조선 후기 뒷골목 풍경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오늘날 조선시대 다양한 복식 연구에까지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간송 전군이

일본인 부전씨의 손에 들어간 이 풍속화첩을 찾고자 벼른 것이 몇 년이더니

많은 돈을 아끼지 않고 그것을 사들여 진귀한 비장품으로 삼았다."

                                                                - 위창 오세창 발문

 

"우리 문화를 지킨다는 생각으로 수장하셨다고 봅니다.

우리 미술의 우수성, 독자성을 중심으로

걸작을 중심으로 작품을 수장하셨지요.

 

정선의 진경산수화,

단원, 혜원의 풍속화,

추사 김정희의 추사체, 난초 그림 등

간송의 수장품을 통하지 않으면

조선 후기 의미있는 회화사 연구가 불가능하지요."

                                              - 강관식 교수(한성대 회화사) 

 

간송은 그냥 보기좋은 예술품을 지켜낸 것이 아니다.

예술적 가치를 넘어선 

그 안에 담긴 우리 민족혼을 지켜낸 것이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보는

상감청자 운학문매병(국보 68호)

간송이 수집했다.

 

 

 

수천 마리의 학이 구름 사이를 날고 있는 모습에

흐르는 듯한 원만한 곡선은

고려의 독창적인 상감기법의 절정을 보여주는

현존 고려 청자의 백미, 최고의 걸작이라 평가받는다.

 

전형필은 상감청자 운학문매병을

당시 군수 월급이 70원이던 시절

2만원이라는 파격적인 가격을 주고 구입한다.

 

한 일본인은 전형필을 찾아와

구입한 가격의 2배를 줄테니 파라고 간청하지만

전형필은 정중하고 단호히 거절한다.

 

"이 고려청자 매병보다 더 좋은 걸 가져온다면

이 매병을 구입한 원금에 드리겠소."

 

이 일을 계기로 사람들은

전형필이 이익을 쫓는 단순한 수집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운학문매병의 가치는

1970년 <동양도자전> 도록을 통해서도 상기할 수 있다.

 

이 도자전에는 한중일 340점의 도자기가 출품되었는데

그중 대표작 9점에 운학문매병이 있었다.

 

"옛날에 나는 매스컴에서 일할 때 (직접 보고)

대단한, 정말로 대단해서 한 시간이든 두 시간이든 계속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일본에서의 평가는 물론 아시아

넓게는 동아시아 전체의 청자 중 가장 훌륭한 물건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나까야마 (前 아사히 신문 문화부 기자, 도자기 전문가)

 


"우선 입이 잘 생겼어요.

과장되고 풍만한 어깨와 잘록한 허리에 

잘 생긴 입모양을 가진 완벽한 균형미입니다. "

                                              - 정양모(前 국립중앙박물관장) 

 

"얼마전 영국 크리스티 경매에서 원나라 청화백자가 288억에 팔렸고

우리나라 17세기 청화백자가 64억에 팔렸습니다.

 

상감청자 운학문매병은

원나라 도자기보다 시대나 작품성으로 볼 때 훨씬 고가일 것입니다." 

                                            - 이상문(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문화재 수집의 최고의 사건은

영국 변호사 존 게스비(J. Gadsby)의 소장품을 인수한 것이다.

 

존 게스비는 영국 출신의 국제변호사로

일본에 30년 거주하면서

일본 고위 관리로부터 

값 비싸고 진귀한 고려청자를 구입해 소장하고 있었다.

 

전형필은

일본 정세가 불안해지면

존 게스비가 소장품을 처분할거라 예측하고

주시하고 있었다.

 

1937년 중일전쟁터지고

전형필의 예측이 적중하자

그는 5천석의 땅을 팔아 일본으로 향한다.

 

"어찌 사기그릇을 사기 위해

조상 대대로의 땅을 파느냐."

 

"염려마세요 어머니."

   

"맑은 햇살이 따뜻하게 비치는 응접실에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고려자기들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었다.

 

연적, 향로, 매병, 향합 등 진열된 자기들을 정신없이 보고 있을 때

주인 게스비씨가 나오셨다."

 

"이 도자기들은 조선의 도자기입니다.

조선인이 가져가시게 되어 대단히 기쁩니다."

                                                - 전형필 <수서만록>

 

전형필은 존 게스비에게서 국보 3점과 수십 점의 명품 청자를 구입했다.

 

 

5. 우리 문화 유산 - 후손들이 마음껏 즐기고 빛낼 것!~~

 

 

 

전형필의 나이 33세.

1938년 보화각(保華閣, 현 간송미술관)을 건립하여

1929년부터 그가 모은

우리나라 전적· 서화· 도자기· 불상 등의 미술품 및 국학 자료를 전시한다.


 

보화각(保華閣)


'빛나는 보석을 모아두다'

 

오세창 선생은 다음과 같은 글을 새긴다.

  

"여기에 모인 것이 천추의 정화로다.

조선의 유물로서 살피고 연구할 수 있게 되었네

세상 함께 보배하고 자손 길이 보존하세."

 

해방이 되고 간송은 수집을 중단한다.

이 땅에 존재함으로 충분하고

이제 누구의 손에 있어도 된다는 것이었다.

 

간송은 수집가를 넘어

자신이 모은 문화유산으로

단절되고 왜곡된 문화재 복원을 계획한다.

보성학교를 설립하고 문화활동을 후원한다.

 

1954년 문화재 보존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1966년 한국민족미술연구소를 설립하여 '간송문화'를 연 2회 발간하며

 

김원용, 최순우, 황수영, 진홍섭과 교류하는 등

한국 미술계의 1세대를 이끌며

1968년 미술사 연구도 시작하여 동인지 <고고미술(考古美術)>를 펴낸다.

 

민족문화 수호에 일생을 바친 전형필.

그는 아깝게도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1906~1962)

오래 살았다면 문화재사랑에 더욱 헌신했을 것이다.

 



"조선 팔도에 돈 많은 사람이 간송 한 사람뿐이었겠습니까.

문화재를 수집할 때 골동 가치로 하지 않았습니다.

우선 첫째로 목적이 원대했지요.

우리 미술품을 통해,

우리 문화재를 되찾아,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복원하겠다,

후학들속에서 반드시 그것을 밝힐 사람들이 나올거다 하는 확신말입니다."

                                                      - 최완수 (간송미술관 학예실장) 

 

 

 

"좀 어렵게 이야기하면 문화재하고 전형필은 한 몸이예요.

문화재하고 떨어져 있는 게 아니고 일체예요.

그러니까 그분이 가지고 있는 문화재는

그분의 정신이 베어 있는 것이지요."  

                                     - 진홍섭('고고미술' 동인, 前 이대 박물관장)

 

고서화에서 그 의미를 읽지 못한다면

그것은 한낱 퀴퀴한 종이조각이다.

 

도자기나 석물에서 그 정신을 찾지 못한다면

그것은 돌덩이나 사금파리에 지나지 않는다.

 

간송 전형필.

그는 우리의 골동 서화에서

우리 민족의 삶과 정신을 찾아내고

그 예술과 역사를 지켜냈다.

                            

우린 2008년

600년 역사의 국보1호 숭례문을 불태웠다.

 

 

 

우리 문화의 상징과도 같은 유물을 한순간에 잿더미로 만들었다.

그동안 역사와 전통 지키는 데 얼마나 소홀했나 되돌아보게 한다.

 

일제 강점기 우리 문화을 약탈 당하던 때

전형필,

그는 사라져 가는 우리 문화에 일생을 받친 분이다.

 

문화 수호에 인생을 바치신 분,

그의 생은 짧았지만

그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수많은 걸작들이 있다.

 

간송 전형필.

우리가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문화유산을 마음껏 즐기고 빛내는 것.

 

이것이 간송 전형필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 일 것이다.

그가 남겨놓은 우리 문화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참고>

 

해외에 유출된 문화재는.. 
일본이 3만 4157점(45%)으로 가장 많고

미국 1만6812점, 영국 6610점, 독일 5289점, 러시아 3554점, 프랑스 1960점, 중국 1434점,

덴마크 1240점, 캐나다 1080 점 네덜란드 820점, 스웨덴 804점, 오스트리아 679점, 바티 칸 500점 등입니다. 

이들 문화재는 대부분 임진왜란과 병인양요와 일제시대 및 한국전쟁 등

사회적 혼란기에 유출된 것들로 국보급과 보물급 문화재가 상당수 포함,

 

그러나 유출 경위가 불확실한 데다

국가간 및 소장자 개인의 사유재산 문제 등이 얽혀 있어

외국에 소재하는 문화재에 대한 환수조치가 현실적으로 어려운 실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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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대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불국사(佛國寺)


불국사는 경상 북도 경주시 동쪽 토함산에 있는 절이다. 고려 시대에 만든 역사책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 절은 신라 경덕왕 때인 751년에 김대성이 세웠다.

그러나 불국사의 내력을 적은 《불국사 역대 고금 창기》에 따르면 이 절은 528년에

세웠다고 전한다. 또, 574년에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 부인이 절의 규모를 크게

늘렸고, 문무왕 때인 670년에 무설전을 새로 지었으며, 751년에 낡고 규모가 작았던

이 절을 당시의 재상 김대성이 크게 다시 지었다고 전한다. 이러한 자료를 참고로

할 때, 불국사는 처음에 작은 규모로 세워졌던 것을 김대성이 크게 늘려 지은 것으로

짐작된다.


불국사 경내 면적은 38만 8,570㎢이며, 사적 및 명승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내에 국보급을 비롯한 많은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 그 중 잘 알려진 문화재로는

국보 제20호인 '불국사 다보탑'을 비롯해 국보 제21호인 '불국사 삼층 석탑',

국보 제22호인 '불국사 연화교 칠보교’, 국보 제23호인 '불국사 청운교 백운교',

국보 제26호인 '불국사 금동 비로자나불 좌상', 국보 제27호인 '불국사 금동

아미타여래 좌상', 보물 제61호인 '불국사 사리탑' 등이 있다.

<대문용 사진은 '산나라 산악회'에서 모셔왔습니다>






[문화재방송 캠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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