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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

[문화유산 답사기] 이락사(李落祠) 를 아세요? 사적 제232호 '관음포 이충무공 전몰 유허지'

문화재방송 2018. 11. 18. 09:34






이순신 순국공원 종합안내도,


소재지; 경남 남해군 남해대로 3829  |  문의전화; 055) 860-3786 / 864-8023




남해대교에서 섬의 한가운데를 향해 4km들어오면 사적 제232호 관음포 이충무공전몰유허가 자리잡고 있다. 일명 '이락사'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끌고 전사한 이순신장군의 유해가 맨처음 육지에 오른곳이다. 이락사 앞 뜰에는 충무공 순국  4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유언비가 역사를 증명하듯 하늘을 향해 힘차게 솟아있다.



<이 충무공 유언비-"지금 싸움이 급하니 내 죽음을 알리지 마라">


이락사가 순국 성지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장군이 전사한지 234년이 지난 1832년이었다. 이순신장군의 8대손으로 통제사가 된 이항권이 이곳에 나라를 지켰던 장군을 기리는 유허비와 비각을 세웠다고 한다. 이곳에는 전국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사철 푸른 육송이 404년전의 그 날을 되살려내고 있었다. 많게는 10개에서 적게는 4개의 가지가 땅에서 바로 가지를 벌린채 4,50미터의 오솔길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충무공이 순국한지 234년이 지난 1832년, 이순신의 8대손인 통제사 이항권()이 충무공의 진충보국()의 뜻을 기리는 유허비(높이 187cm, 폭 75.5cm, 두께 22cm)를 세웠다. 1973년 6월 사적 제232호로 지정되어 '관음포 이충무공 전몰유허'라고 부르게 되었다.




불교의 성지 의미가 있는 觀音浦는 '이락포(李落浦)'로도 불림

관음포(觀音浦)】 경남 남해군의 북쪽 고현면 차면리 바닷가에 있는 포구. 일명 이락포()로 불리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현 북쪽 21리에 신우 때에 원수 정지가 수군을 거느리고 여기에서 왜적을 섬멸하였다. 왜적이 우리에게 패전하게 된 것은 이 전역()에서 처음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에는 "현에서 북으로 21리에 있다."라고 수록되어 있다. 『조선지지자료』에는 고현면 포상리()에 기재되어 있다. 『동여도』에 처음 수록되며 『1872년지방지도』에도 관음포가 나타난다. 고현면 차면리 소재 이순신장군이 전사한 곳으로 사당과 전시관이 있다. 『대동여지도』에는 읍치의 북쪽에 녹두산()의 동쪽에 진·포 지명으로 묘사되어 있다.

관음포라는 지명이 언제부터 붙여졌는지 알 수 없으나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 말 우왕 때 해도원수 정지장군이 관음포에서 왜선 17척을 격침한 대첩을 '남해관음포대첩'이라고 적고 있다. 지명유래는 불성지()의 의미가 담겨 있는 관음의 포구였기에 관음포라는 지명이 붙여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출처; 한국지명유래집 경상편 지명, 2011. 12., 국토지리정보원>





참배로 오른쪽에 세워져 있는 '리충무공전적비',

<북한도 아닌데 왜 리충무공으로 썼을까?>


<이락사 입구>


이충무공 유허비와 비각



 대성운해
조국을 향한 애타는 마음이 소나무에도 투영된 것일까? '이락사' 현판이 걸린 문을 들어서면 바로 '대성운해'라는 박정희 전대통령의 친필 현판이 걸린 비각이 있다. ''라. '큰별이 바다에 잠겼다'는 뜻이다. 비각에서 첨망대까지 연결된 솔밭길은 500m에 이른다. 길의 좌우에는 솔가지 사이로 보이는 바다가 정취를 더한다. 



대성운해 비각,



이락사에서 500m 떨어진 산 정상에 세워진 첨망대,

                                     이순신 장군이 순국한 곳을 볼 수 있는 곳에 1991년 건립한 정자



첨망대에서 바라 보이는 남해




이락사 입구의 소나무는 모두 뿌리에서 가지를 늘리고 있어 신비감을 준다


이상 사진 출처:https://mail.daum.net/#MINE/a0000000003kvV0


충렬사

충무공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노량 앞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해안 언덕배기에 세운 사당. 사당 뒤에 충무공의 가분묘가 보인다.


이순신 장군 전사후 84일만에 장례..16년후 이장
, ,
충무공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가는 길이 순국 412년만인 지난해 12월 16일 오후 경남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앞 바다에서 재현행사를 가진 뒤 뱃길로 전남 완도군을 향해 운구되고 있는 모습(자료사진)

홍순승 장학관 "당대 역사.정치적 평가따라 성역화"

(아산=연합뉴스) 정태진 기자 =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묘역은 당대의 역사적.정치적 평가에 따라 옮겨지고 성역화되는 과정을 밟았습니다"

충남의 한 교육공무원이 이 충무공의 장례과정 및 묘역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이같이 주장, 눈길을 끌었다.

홍순승 충남도교육청 장학관은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가 펴낸 이순신연구논총에서 "이 충무공은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후 남해 고금도에 안치되었다가 고향인 아산으로 운구돼 다음 해 2월 11일 금성산에 안장됐다"고 말했다.

완도군에서재현된 상여행렬의 모습(자료사진)

이처럼 84일만에 장례가 치러진 것은 사후 선조로부터 우의정 벼슬을 받아 당상관에 오르면서 당시 법도(三月而葬)에 따라 3개월 후에 장례를 치렀기 때문이며 첫 묘자리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군 이여송의 참모로 왔다가 돌아가지 않고 귀화한 두사충(杜師忠)이 잡았다.

두사충은 박상의와 함께 조선 풍수지리의 양대산맥으로 불리는 인물로 당시 조선사회에 풍수지리가 널리 퍼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이 충무공은 사후 새롭게 평가받아 1604년 좌의정에 오르며 선무공신 칭호를 받자 후손들은 첫 장례가 전란 직후 예우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치러졌다고 조정에 이장을 상소, 첫 장례가 이뤄진지 16년후인 1614년 일등공신에 걸맞은 크기와 이장절차를 거쳐 지금의 묘역인 어라산으로 옮겨지게 된다"고 말했다.

이어 "정조(1793년)대에 이르러서는 영의정으로 또다시 오르면서 묘역에는 상석 및 향로석, 장명등을 비롯한 다양한 석물이 설치되고 정조가 친히 지은 글로 어제 신도비가 세워지면서 격이 한껏 높아졌다"고 덧붙였다.

특히 "근대에 이르러 이 충무공에 대한 재평가 작업은 더욱 활발해져 1908년 단재 신채호 선생에 의해 '성웅(聖雄)' 칭호가 붙여진데 이어 제3공화국 시절 역사상 최고조의 평가에 오르며 묘역에는 나지막한 담(곡장)이 처지고 홍살문이 세워지는 등 왕가의 무덤(園) 수준에 이르게 된다"고 지적했다.

충청남도아산시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의 묘(자료사진)

홍순승 장학관은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자료로 초장과 이장의 정확한 내용을 규명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며 "이장과 확장 등 모두가 당 시대의 이 충무공에 대한 평가 실상이 그대로 반영돼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jtj@yna.co.kr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5014901



       영국의 이순신, 넬슨제독  


넬슨 제독의 기함 빅토리(Victory)호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호레이쇼 넬슨 (1758-1805)


넬슨 제독과 불륜 관계에 빠진 유부녀 엠마



적탄에 맞아 운명 직전의 장면을 디오라마로 재현


 

  나일 해전에서 크게 승리한 넬슨은 그의  

함대의 근거지 중의 하나였던 나폴리로 1798년 9월 돌아간다.  

   당시 독립국가였던 나폴리 왕국에서 넬슨은 그곳 국왕과

함께 나폴리 주재 영국 대사 윌리암 해밀톤(Sir Willaim Hamilton; 1731-1803)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는다.

그런데 이곳에서 이후 두고두고 그의 명성에 악영향을 미치는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해밀튼의 젊고 예쁜 아내 엠마(Emma, Lady Hamilton; 1765-1815)와 불륜 관계에 빠진 것이었다.

   그들 간의 관계는 엠마와 34살이나 나이 차이가 나는 윌리암 해밀튼이 어느 정도 묵인하였다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이다.

   이 때문에 넬슨은 해밀튼의 집에서 엠마와 동거하다시피 지낼 정도였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도 그들 간의 염문은 떳떳한 평가를 받을 수는 없었다.

   이즈음 나폴리는 프랑스혁명 정부군에 반해 전투를 벌인다. 전투 초기에는 당시 프랑스의 지배하에 있던 로마를

일시적으로 탈환하는데 성공하기도 하나, 곧 프랑스군의 강력한 반격에 직면하여 오히려 나폴리까지 내준다.

   이때 넬슨은 왕과 지도부 그리고 영국시민들을 팔레르모로까지 후퇴시키는 작전을 수행한다. 그리고 그해 결국 재탈환하게 된 나폴리에서 넬슨은 그동안 정권을 잡고 있던 자코뱅 단원(Jacobin; 프랑스 혁명의 과격 공화주의자)들과 나폴리 내 배신자들을 관용 없이 처형할 것을 지시한다. 이때의 그의 가혹한 처사는 엠마와의 염문과 함께 훗날 두고두고 그의 문제점 중의 하나로 지적당하게  된다.   

   그러던 차에 저비스의 후임으로 그의 상관이 된 키스(Lord Keith; 1746-1823) 제독에 대한 명령 불복종 사건이 문제가 되었다. 사실 넬슨은 오래 전부터 상관에게 잘 복종하지 않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일뿐만 아니라 엠마와의 염문 관계가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들었다. 넬슨에 대한 키스의 부정적인 보고서와 엠마 사건에 대한 소문을 접한 영국 정부는 1980년 어쩔 수 없이 그를 본국으로 소환하게 된다.

   넬슨은 엠마와 해밀튼경과 함께 영국으로 돌아온다. 영국에서도 해밀튼 부부와 넬슨은 같은 집에서 생활하다시피 하였는데, 그들 사이의 관계는 각종 소문과 함께 당시 영국 사회의 비상한 관심을 끌지 않을 수 없었다. 넬슨은 결국 1800년 본처 패니의 마지막 간청도 무시한 채 그녀와 관계를 청산하기로 한다. 엠마는 넬슨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해밀튼경과 이혼은 하지 않은 채, 1801년 넬슨과의 사이에 딸을 낳는다.     

   1801년 4월 넬슨은 코펜하겐 해전에 참전하게 된다. 당시 덴마크와 스웨덴, 러시아, 프러시아 등은 프랑스에 대한 오랜 영국의 봉쇄 작전으로 자국의 무역에 큰 타격을 입게 되자 이를 해결할 목적으로 연합군을 형성하여 영국 해군의 봉쇄를 풀려고 시도하였다. 이에 넬슨은 덴마크 해안을 차단하여 발틱해의 움직임을 통제하자는 총사령관 파커(Sir Hyde Parker; 1739-1807)경의 의견에 반해 직접 코펜하겐을 기습공격하자는 전략을 내고 파커를 설득하여 실천에 옮긴다. 전투 중에 덴마크의 반격이 예상보다 너무 강하여 파커는 넬슨함대에게 철수할 것을 함상 깃발로 지시하였다. 그러나 넬슨은 그의 기선을 지휘하는 폴리(Thomas Foley) 함장을 돌아보며, “폴리 자네도 알겠지만 나는 눈이 하나밖에 없어서 오른쪽 일들을 종종 놓치곤 한다네.” 라고 말하고는 망원경을 보이지 않는 오른쪽 눈에 대고 “아무 신호도 보지 못했어!”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이후 공격을 지속했으며 결국 전투를 승리에 가까운 협상으로 이끄는데 성공한다. 그해 5월 그는 발트해를 담당하는 총사령관이 되었으며, 영국 왕실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다.

   그러는 동안 유럽 대륙의 주도권을 장악한 나폴레옹은 영국 침공을 위한 대규모 군대를 조직하고 있었다. 이를 대비하기 위해 영국 정부는 넬슨에게 영국 해협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의 긴장 관계는 1801년 10월 22일 체결된 아미앵 휴전협정(Peace of Amiens)으로 일시적 소강상태로 들어가고, 넬슨도 당시 악화된 건강상의 문제를 이유로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 휴식 시간을 가진다. 

   그러나 양국 간의 휴전은 오래 가지 않고, 1803년 마침내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나폴레옹 전쟁; 1803-1815). 넬슨은 곧 전선으로 복귀하였다. 그가 전쟁터로 갈 때 엠마는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는데 이 아이는 이듬해 출산 도중 사망하고 만다.

   넬슨은 전함 빅토리호를 기함으로 하여 프랑스의 툴롱 항구 봉쇄에 참가하였다. 봉쇄 작전 중인 1804년 5월에는 해군 서열 5위인 백색 부제독(Vice Admiral of the White)의 직위로 승진하였다. 1805년 1월 빌뇌브(Pierre-Charles Villeneuve; 1763-1806) 제독이 지휘하는 프랑스 함대가 툴롱 항구를 출발하여 서인도 제도로 향하자 넬슨 함대는 그들의 추격 작전에 나섰다. 그러나 수개월간에 걸친 추적이 사실상 실패하고 넬슨은 의기소침하여 1805년 7월말 지브랄타를 거쳐 영국으로 돌아간다. 넬슨은 국내에서 어느 정도 비난을 감수하였으나 영국 국민은 오히려 그를 프랑스군으로부터 서인도제도를 지켜낸 영웅으로 또 다시 열렬히 환영해 주었다.

   1805년 9월 넬슨은 영국으로 돌아간 지 2개월도 안 되어 다시 출정에 나선다. 이번에는 스페인의 카디스에 정박하고 있는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함대를 그곳에서 봉쇄하는 임무를 맡았다. 당시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는 빌뇌브 제독의 지휘 아래 모두 33척의 전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나폴레옹의 목적은 이 연합함대를 이용하여 영국 침공시 제해권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영국군과의 교전을 머뭇거리는 빌뇌브 제독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지휘관 교체를 결심하는데, 이 와중에 드디어 10월 20일 넬슨의 척후선에 의해 연합함대가 항구로부터 출항하는 것이 포착된다. 그리고 다음날인 1805년 10월 21일 넬슨은 그의 마지막 전투가 되는 유명한 트라팔가르 해전에 참가하게 된다. 넬슨의 함대는 상대방의 33척 보다 적은 27척이었다. 

   교전에 앞서 넬슨은 유서를 미리 쓴 뒤 부하들을 격려하며 비장한 각오로 전투에 임한다. 양측 함대간의 전투는 참으로 치열하게 진행되었다. 넬슨이 탄 빅토리호는 프랑스군의 기함 뷔상토르호와 교전하다 옆에 있던 프랑스군 르두타블호 등 두척의 적함으로부터 공격 대상이 되고 만다.

   바로 이때 르두타블호의 프랑스 저격수가 불과 150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넬슨을 겨냥하였다. 결국 저격수의 총알은 넬슨의 왼쪽 어깨에 적중하여 폐를 관통하고 척추에 박혔다.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넬슨은 갑판 아래로 실려가 치료를 받는 도중에도 전투 상황에 대해 지휘를 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 또한 곧 죽음을 예감하고 부하들에게 엠마와 딸

그리고 친구들에게 안부를

부탁하였다. 그리고 그의 소지품들을 엠마에게

전달할 것도 아울러 부탁하였다.

  


   넬슨은 많은 적의 전함이 항복하는 등 전투 승리가 확실시 된다는 보고를 받고 힘들게 낮은 목소리로 ‘내 임무를 다 할 수 있게 해준 신께 감사드린다(Thank God I have done my duty)'. 라고 말한다. 그리고 얼마 후 오후 4시 30분, 총상을 입은 후 3시간 만에 사망하고 만다.


   넬슨의 유해는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술로 채워진 관에 보존되어 런던으로 옮겨졌다. 국왕 조지 3세는 그의 사망 소식을 듣고 ‘우리가 얻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잃었다.’라고 애도하였고, 타임즈(The Times)는 이번 전투의 결과를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논평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넬슨이 그토록 사랑하던 여인 엠마는 그의 사망 소식을 듣고 혼절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정작 성대하게 거행된 넬슨의 장례식에 초대조차 받지 못하는 슬픔을 겪는다. 이는 넬슨의 혼외정사 상대였던 그녀에 대한 당시 사회의 시각을 반영한 것이었으며 그녀는 그 후에도 내내 영국 정부의 차가운 대접을 받게 된다. 엠마는 결국 재정난으로 빚더미에 허덕이다 1815년 쓸쓸히 숨을 거둔다. 넬슨에게 수여된 보상금과 명예 작위 모두가 그의 법적인 가족인 동생에게 대신 내려졌다.

   넬슨은 사후 지금까지 영국 국민들의 가슴에 영웅으로 남아있다. 비록 일부 비판가들에 비해 엠마와의 불미스러운 관계와 나폴리에서의 반정부파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 그리고 그의 성격 등이 간혹 구설수에 오르기도 하지만 그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에는 큰 영향을 주지는 못하고 있다.




블로그 대문/ 유네스코 인류 무형유산. 국가무형문화재 '줄타기'


줄타기는 널리 알려져 있는 놀음의 하나로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단지 곡예기술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전통 공연예술인 줄타기는 음악 반주에 맞추어 줄타기 곡예사와 바닥에 있는 어릿광대가 서로 재담을 주고받는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줄타기 연행()은 야외에서 한다. 줄타기 곡예사가 재담과 동작을 하며 노래와 춤을 곁들이는데, 곡예사가 줄 위에서 다양한 묘기를 부리는 동안, 어릿광대는 줄타기 곡예사와 재담을 주고받고, 악사들은 그 놀음에 반주를 한다. 줄타기 곡예사는 간단한 동작으로 시작하여 점점 더 어려운 묘기를 부리는데 무려 40가지나 되는 줄타기 기술을 몇 시간 동안이나 공연한다.


줄타기에 관한 기록은 고려시대(918~1392)에 처음 등장하며 그 이후로 현재까지 꾸준히 그 기예가 전수되고 있다. 줄타기는 많은 사람들이 널리 즐기던 활력 넘치는 전통 공연예술이었다. 1976년에 대한민국 정부는 줄타기를 중요무형문화재 제58호로 지정하여 더욱 체계적으로 보존·전수하고 있다.

현재 줄타기보존회와, 정부로부터 국가무형문화재 제58호 예능보유자로 지정된 김대균()은 한국의 고유한 줄타기를 전승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




[문화재방송 캠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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