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전쟁 박물관]
아편전쟁박물관은 광주시 동쪽에서 약 79km, 동관시 호무진구촌 남쪽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아편전쟁 관련 문물을 전시、연구하는 박물관이다. 중심 전시를 담당하는 건물은 옛 포대건축를 사용하고 있다. 2층에는 원통 입체형의 거대한 그림이 있는데, 당시 아편전쟁 호문해전(虎门海战)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그림과 함께 현대화된 영상, 음성, 빛 등 과학적 장치를 이용하여 관람객들은 150여 년 전에 일어났던 중-영 전쟁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19세기 20년대에 영국은 중국에 대량의 아편을 들여왔다. 민족영웅 임측서는 이곳에서 국내외 악영향을 미치는 아편을 소각하고 영제국주의의 반침략 투쟁을 지휘하여 중국근대사의 서막을 열았다.
1839년 6월 3일부터 25일까지 임측서는 몰수한 영국상들의 2만여 상자의 아편을 태워 버렸는데 도합 118만여kg에 달했다. 이 사건은 영국의 분노를 일으켰고, 이듬해인 6월에 영국함대는 광주강면과 해구를 봉쇄하고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임측서와 등정정 등 애국관원들과 장령들은 호문천험을 빌어 11개의 포대를 구축하고 3도방선을 구성하였으며 길이 약 1000미터되는 쇠사슬로 항로를 봉쇄하고 영국군의 진공을 수차례 막아냈지요.
아편전쟁의 고전장인 사각포대와 위원포대、진원포대、수천미터나 되는 포도、영국군에 항격하던 고성벽 등은 지금도 여전히 훌륭한 상태로 남아있습니다.
임칙서 기념관에 위치한 아편전쟁박물관인데요~ 임구에는 임칙서 기념관과 박물관으로
소개가 되어 있는데~ 하나로 통합해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아편전쟁 박물관으로 진입하는 양 주변에 포대와 성곽이 총탄과 포탄 자국으로 얼룩이 져 있어
그때의 참상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 아편전쟁의 원인
시대 | 184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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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중국을 지배하던 청나라는 드넓은 영토와 많은 인구, 풍부한 자원을 가져 남부러울 게 없었지요.
청나라 황제가 "중국에는 무엇이든 다 있기 때문에 무역이 필요 없다.
필요하다면 교류하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오랑캐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다"고 말했을
정도였습니다..
서로 사고파는 무역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중국에 은을 주고 물건을 사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중국의 차(茶)를 마시는 것이 일상생활이 된 영국의 문제가 가장 심각했다고 합니다.
당시 어마어마한 양의 은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흘러들어 갔거든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식민지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중국에 팔기 시작했는데요.
중독성이 강한 마약의 일종인 아편이 중국에 들어가면서 무역의 흐름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중국에 아편 중독자가 점점 늘어나 19세기 중반 약 4만 상자의 아편이 수입되었습니다.
학자들은 당시 중국에 400만명가량의 아편 중독자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요.
곳곳에 아편을 피우는 아편굴이 생기고, 중독자들은 아편을 사기 위해 집과 땅, 심지어 아내와 자식까지
팔았어요.
▲아편에 중독된 중국인들
그동안 영국은 대중 무역에서 큰 손실을 입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수출품은 대부분 중국
남방인들에게는 필요없는 것들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중국인들에게 무엇이 인기가 있고 무엇을 소비하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중국인들이 쓸 일도 없는 나이프와 포크를 팔려고도 했습니다. 반면, 중국의 비단이나
차, 도자기는 영국 귀족들에게 큰 인기를 누렸습니다.
적어도 상술에서는 영국 상인들이 중국 상인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영국 상인들은 방법을 바꾸어
아편을 판매하기 시작. 광저우를 통해 수입되는 아편은 19세기 초 4천 상자에 불과했으나, 점점 급격히 늘
어나면서 아편 전쟁 직전인 1830년대 후반에는 연간 35,000상자에 달했을 정도였습니다.
아편 중독은 광저우만이 아니라 빠르게 중국 내륙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심지어 고위 관료들과 황실까지도
아편에 중독되었지요. 아편 밀수의 주요 거점은 홍콩이었습니다. 아편을 실은 수백여 척의 배가 오늘날
"빅토리아 항(Victoria Harbour)"이라고 불리는 항구를 들락거렸습니다.
홍콩 섬과 주룽 반도 사이에 위치한 빅토리아 항은 수심이 깊고 대형 선박의 운항이 용이하여 "세계 3대 천연항"
이라고 불릴 만큼 천연의 자연항이기도 했습니다.
(위성 사진으로 본 빅토리아 항. 야경이 무척 아름다워 홍콩 최대 관광지입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1837년 도광제는 아편 금지령을 선포하고 홍콩 수역을 철저히 단속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광둥성과 광시성을 총괄하는 양광 총독 등정정(鄧廷楨)은 영국 상무 감독 찰스 윌리엄 엘리엇(Charles William Eliot)에게 모든 아편 상선을 중국 해역에서 철수시키라고 요구했습니다. 엘리엇은 묵살, 양측의 갈등은 점차 고조되었고 도광제는 호광 총독(湖廣總督, 후베이성과 후난성을 총괄하는 관료) 임칙서를 광저우로 파견했습니다. 1839년 3월 10일 광저우에 도착한 임칙서는
모든 아편을 몰수, 총 24,000여 상자, 2만 근(약 12톤)에 달하는 양이었습니다. 임칙서는 몰수한 아편을 바닷물로 희석시켜 못 쓰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광저우 주변의 방비를 강화하고 군함을 배치했지요.
▲호문시 중심의 태평광장(太平廣場)에 아편을 피우지 않겠다는 의지로 <아편곰방대>를 부러뜨린 형상의
조형물 세워
▲아편과 외세에 홀로 맞섰던 중국의 청백리 <임칙서>
막대한 손실을 입은 영국 상인들은 청나라의 조치는 무역 자유를 침해하고 사유 재산을 몰수하는 행동이라고 비난하며, 영국 정부와 의회에 압력을 가했습니다. 영국 의회에서는 아편 밀수출을 주장하는 휘그 당과 아편 밀수출 중단을 주장하는 토리 당이 맞섰으나, 근소한 차이로 휘그 당이 승리했습니다. 결국 영국 의회는 청나라로의 군대 파병을 승인했고, 영국 정부는 1839년 10월에 청나라에 원정군 4천여 명을 파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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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전쟁이 끝나고 난징조약 체결한 현장의 사진
난징조약 체결될 때, 우리나라에도 최초로 왔었던 귀츨라프가 통역관으로 참여했다.
1842년 8월 29일 난징에서 흠차대신(欽差大臣, 지방에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황제에게 임시로 전권을 부여받은 후 현지로 파견되는 고위 관료) 기영(耆英)과 포팅어 사이에 난징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중국은 광저우와 푸저우, 샤먼, 닝보, 상하이를 개항하고 1,200만 달러의 전쟁 배상금 외에도 별도로 아편 몰수 대금으로 600만 달러를 지불해야 했습니다. 또한 영사 재판권과 최혜국 대우, 관세권도 빼앗겼고 홍콩은 영국에게 영구적으로 할양되었습니다. 도광제는 홍콩 같은 조그만 섬의 할양 따위는 관심거리도 되지 않았으나, 중국 영토가 외세의 압박에 굴복해 식민지로 빼앗긴 첫 번째 사례였습니다.
영국은 홍콩을 할양받아 중국 침공의 발판을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홍콩은 면적이 작고 거주에 적합하지 않았고 또한 식량을 자급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맞은 편에 있는 주룽반도를 넘보았습니다. 주룽반도는 영국의 횡포에 반발한 중국인들의 주요 항전 거점이 되어 영국은 주룽반도를 점령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습니다.
홍콩의 할양은 기울어져 가는 중국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하나의 선례가 되어 영국만이 아니라 다른 열강들 또한 중국 나눠먹기 경쟁을 시작했습니다.
홍콩 섬과 주룽반도를 장악한 영국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홍콩 식민지를 더욱 확대할 욕심을 가졌습니다. 청일 전쟁과 '의화단의 난'으로 중국이 사실상 무정부 상태로 전락한 가운데, 러시아가 뤼순을 조차하고 독일이 산둥성의 자오저우만(膠州灣)을 조차하자 영국 역시 주룽반도 북부에 신계의 조차를 요구했습니다. 양광 총독 담종린(譚鍾麟)은 홍콩 주변의 일부 토지를 조차해 줄 수 있다고 제안했지만, 영국은 그 정도로는 성이 차지 않았습니다. 영국은 주룽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신계의 조차를 요구, 면적은
953km²에 달하여 홍콩의 10배가 넘었습니다. 리훙장이 경악하자 영국 공사 맥도널드는 독일과 러시아가 차지한 지역이 훨씬 넓지 않냐면서 협박했다.
결국 1898년 6월 9일 베이징에서 전탁홍콩계지전조(展拓香港界址專條)가 체결되었습니다. 신계에 대해 99년간 조차한다는 내용이었지요. 이로써 홍콩 식민지의 면적은 11배로 늘어났고 관할 수역은 50배나 확장되었습니다. 영국이 강제로 신계를 빼앗자 현지 주민들은 격렬하게 반발하여 무기를 사 모으고 무장 조직을 결성하여 항영 봉기를 했습니다. 수천여 명이 12개의 포를 동원하여 영국군을 공격했지만, 압도적인 화력 앞에 막대한 사상자만 낸 채 격퇴당했습니다. 또한 무력한 청나라 조정은 영국을 자극할까 봐 이들을 지원할 수도 없는 처지였습니다. 영국군은 이를 빌미로 군함 6척과 병력 2천을 동원해 주륭성을 점령한 다음, 선전(深圳)까지 점령하여 홍콩 식민지에 포함시켰습니다. 하지만 홍콩 총독 블레이크(Henry Arthur Blake)는 선전까지 점령하는 것은 역량 밖이라고 판단하고 중국 측과의 협상 끝에 병력을 철수시켰습니다. 이렇듯, 1841년에는 홍콩이, 1860년에는 주룽반도 남단, 그리고 1898년에는 신계가 99년을 기한으로 조차되어 영국령 홍콩 식민지를 구성하게 되었습니다.
(20세기 초의 홍콩 거리. 영국의 지배 아래 홍콩은 극심한 빈부 격차로 인해 1970년대까지도
부패와 범죄의 온상이었습니다. 또한 홍콩에 거주하는 사람의 95% 이상이 중국인이었지만, 영국인들은
지배자로서 중국인들을 철저하게 차별했고 중국인들은 참정권도 없을 뿐더러 호텔이나 식당에도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홍콩에 대한 영국의 지배 방식은 고도의 자치권을 부여했던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와
달리 철저하게 백인 우월주의 아래 영국에 순응하도록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어촌 마을에 불과했습니다.
약 3천여 명 정도였던 홍콩 섬 주민의 대부분은 농업과 어업에 종사했고 일부는 돌을 캐는 광부였습니다.
명-청기에 왜구의 공격에 시달렸던 홍콩섬은 17세기가 되자 서구의 무역선들이 점차 나타나기 시작, 1760년 청
조정은 홍콩과 마주보고 있던 광저우를 국제 무역 도시로 개방했습니다. 아편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중국에서
유일하게 외부에 개방된 도시였습니다. 영국과 네덜란드, 프랑스, 포르투갈 등 많은 상인들이 광저우에 상관을
오늘날 홍콩은 홍콩 섬과 주룽 반도(九龍半島) 일부, 신계(新界), 란타우 섬(爛頭島)과 부근의 234개의 대소 섬을
포함하며 서울의 약 두 배 정도 크기인 1,104㎢의 면적에 인구 720만 명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중국 남방 최대
도시인 광저우와는 서북쪽으로 140km 거리에 있으며, 주장강을 사이에 두고 마카오와 61km 떨어져 있습니다.
홍콩(香港)이란 이름은 과거 향나무(香木)가 많이 생산된 것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명나라 시대에 광저우와
사이에서 향나무를 운송하는 항구라 하여 홍콩이라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발달된 금융 인프라를 갖추어 글로벌 중계 무역의 거점이자, 상업과 무역, 제조업이 발달한 거대한 도시지요.
또한 관광 쇼핑이 발달하여 작년 한 해 동안 홍콩을 방문한 중국인만도 4천만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1997년 7월 1일 0시, 홍콩 컨벤션 센터 신관 그랜드 홀에서 열린 주권 이양식.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
찰스 영국 왕세자 등 전 세계 귀빈 4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영국의 유니언잭이 내려감과 동시에 중국
오성홍기가 올라갔다. 이로써 홍콩은 중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임칙서가 아편을 불태운 연못유적지>라는 아편전쟁박물관의 입구인데. 여기가 19세기말
세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아편전쟁(Opium war)의 시발점이 된 곳이고, 비록 청국이
영국에게 패했지만 홀로 전쟁도 불사하며 정의(正義)를 위해 마약(아편)을 몰아내려고 한
임칙서는 중국의 진정한 영웅으로 칭송받을만합니다
▲임칙서의 동상
▲아편전쟁에 사용되었던 대포들
홍콩의 이미지는 사람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홍콩을 쇼핑과 연관시킨다고 해요.
동북아시아를 하나의 생활권으로 생각하면 홍콩은 거대한 쇼핑몰 또는 아케이드 정도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홍콩은 아시아의 쇼핑센타일뿐만이 아니라 월가입니다.
세계의 금융인이 몰려 있고 150년 전통의 자유항이며 자유 무역을 설립 목적으로 하는 WTO의 리딩 멤버랍니다.
이와 같이 홍콩은 다양하게 발전(many-splendoured)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남단 구룡반도 앞에 흩어져 있는 하나의 쓸모 없는 바위 덩어리(barren rock)섬에서 어떻게 지금의 홍콩으로 탄생되고
주강을 광주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갑자기 좁아지는 곳이 바로 호문(虎門)인데요 범의 아가리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곳은 외국상선이 당시 중국의 유일한 개항지인 광주(CANTON)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입니다.
이곳은 인근 농어촌의 상업 중심지이고 육로 및 수로 교통의 중심지라 시내가 활기에 차 보이지요. 홍콩에서 구하기 어려운 중국 토속 농산물도 많습니다.
“纪念战争,是为了更加珍爱和平!”
-- 전쟁을 기억하는 것은 평화를 더 소중하게 여기게 하기 위함이다!
세계 열강은 전쟁의 기억을 어떻게 하고 있을까? 아울러 대한민국은 ?
▲ 미국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2,403명의 미군 병사가 전사했다.
당시 애리조나함 전체 승조원은 1400명, 이 가운데 1177명이 한순간에 목숨을 잃었다.
900명은 배 안에 갇혀 나오지 못한 채 수장되었다. 이것이 9분 만에 두 동강이 나 최후를 맞게 된 USS 애리조나함의 최후다.
정부는 당초 선체를 인양하려고 했지만, 여론을 수렴해 침몰한 배 위에 기념관을 세우기로 방침을 바꿨다. 전국적으로 건립을 위한 기금 모금 운동이 펼쳐졌고 1962년 침몰한 배 위에 기념관이 건립됐다. 세계에서 유일한 해상 기념관이자, 국립묘지인 셈이다.
<바다 속에서 그 날의 비극을 증언하는 애리조나호>
지금도 애리조나호에선 기름이 떠오르고 있다. 사람들은 '검은 눈물'이라고 부른다.
투명한 녹색 바다 밑에 누워 있는 애리조나호의 모습이 환히 보인다.
연간 150만명이 찾는다는 하와이 최대 관광지이고 미국인들은 이곳에 들리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전쟁의 참혹함과 함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한 일본을 다시 바라 본다.
▲ 일본
희생자 수는 7만3000명.
나가사키 역시 원폭 피해 현장을 그대로 본존 중이다.
▲ 중국
앞에 있던 포로들의 몸통을 강물에 던져 넣어야 했다”며 살육의 참상을 기록했다.
발굴 현장 그대로 모습이 보존되어 있고 유골들이 누워있다. |
▲ 대한민국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6.25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까지 전쟁으로 인한 사상자는 남북한
전체 인구의 1/6인 500만 명에 이르렀다.
수많은 피란민, 전쟁고아, 이산가족들이 생겨났다. 전쟁으로 인해 대부분의 건물과 산업 기반 시설이 파괴되고,
전 국토가 황폐화되었다.
남북한 인구가 총 3000만이 되지 않았던 시기라는 점을 상상하면 엄청난 희생이 아닐 수 없다.
서울 용산의 전쟁기념관은 임진왜란 등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을 되새길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어 6.25 전쟁
의 참상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없다.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 중심가의 3,300 평방미터(약 천평)라도 원형이 보존됐다면 오늘날과 같은
국론 분열을 잠재울 수도 있으련만.....
아래 그림을 클릭하시면 아편전쟁박물관 홈페이지로 연결됩니다.
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은 애국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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