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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

[문화유산 답사기]1500년 만에 후손들 앞에 나타난 백제 무령왕릉의 국보급 등 찬란한 문화재

문화재방송 2020. 1. 6. 00:20

무령왕릉은 무덤의 주인공이 정확하게 밝혀진 몇 안 되는 고대의 무덤이라는 점뿐만 아니라, 피장자가 백제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훌륭한 군주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된다. 무덤 안에서는 금으로 만든 관장식, 용과 봉황이 장식된 큰 칼, 글씨가 새겨진 팔찌 등 모두 4,600여 점에 이르는 다량의 유물이 발굴되었으며, 12종목 17건이 국보로 지정될 만큼 소중할 뿐만 아니라 절대연대가 확인된 유물로서 백제사는 물론 한국 미술사 연구에 있어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벽돌무덤이라는 중국 남조계통의 무덤 형식과 중국제 도자기, 일본산 금송(金松)을 사용한 관재 등의 존재를 통하여 당시 중국·일본과 활발한 교류를 전개한

백제사회의 국제성을 엿볼 수 있다.


무령왕릉은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산5-1번지에 위치하며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3호로 지정된 송산리고분군에 포함되어 있다. 송산리고분군은 백제의 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 주종을 이루는데, 이 고분군에는 당시 중국양(梁)나라 지배계층 무덤의 형식을 그대로 모방하여 축조한 벽돌무덤[塼築墳]으로서 무령왕릉과 함께 제6호 벽돌무덤이 있다. 무령왕릉은 발굴조사 결과, 무덤 안에서 무덤의 주인공을 알려주는 묘지석(墓誌石)이 발견됨으로써 백제 제25대 무령왕(재위 501∼523)의 무덤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충남 공주시 금성동에 있는 백제 무령왕과 왕비의 능으로 1971년 송산리 제5·6호 고분의 침수방지를 위한 배수로 공사를 하던 중 우연히 발견되었다. 이에 총 네 차례에 걸친 발굴이 이루어져 서서히 그 전모를 드러냈다. 이 능은 많은 다른 고분들과는 달리 도굴되거나 전혀 훼손되지 않은 채 처녀분으로 우리에게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내 백제역사에 한발 다가갈 수 있게 했다.

무령왕릉은 봉토가 마치 작은 봉우리 같은 형태의 원형으로 봉토의 직경은 약 20m이며, 높이는 현실 바닥에서 7.7m에 이르고 있으나 유실이 심했던 것으로 보여 원래는 현재의 상태보다 훨씬 큰 규모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국립공주박물관은 무령왕릉
충청남도 일원 출토유물 등의 백제 문화재를 중심으로 약 1만 1,000여 점
을 전시하고 있다. 대지면적 6만 9,514㎡(2만 1,065평),
건축면적
5,034㎡(1,525평)이다.

공주박물관은 무령왕릉(武寧王陵)과 연결통로로 10분 거리에 있다. 전시관은 크게 3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기획전시실이고 나머지는 상설전시관으로 무령왕릉실과 충청남도의 고대문화실이다.

무령왕릉에서 나온 유물들이 국립박물관은 전시관 한곳을 가득 메우고 있는데 ,모든 유물들 합치면 4700점에 이른다.




 

무령왕의 혼이 살아 숨쉬는 공간 - 무령왕릉실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문화재를 전시하는 공간이다.

 

왕과 왕비 모두 옻칠된 목관에 각기 안치되어 있었는데 목관 표면은 꽃 모양의 금·은제 장식으로 꾸몄다.
 

널길에는 돌로 만든 석수(石獸) 1마리가 입구쪽을 향해 놓여 있었으며 그 앞에는 왕과 왕비의
 매지권(買地券)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장신구로서는 왕의 것으로 금제 관장식, 심엽형 귀걸이, 뒤꽂이, 은제 허리띠[帶],
금동 신발 등이 있으며 그밖에

각종 금·은제 장식이나 구슬이 발견되었다.
왕비의 것으로는 역시 금제 관장식과 귀걸이, 목걸이,
금·은제의 팔찌 외에도

많은 수의 장식이 발견되었다.
또한 단룡문환두대도(單龍紋環頭大刀)·철모·손칼 등의 무기류,
거울·용기(用器)·숟갈·다리미 등의 청동제품, 청자·백자 등의 자기류, 두침(頭枕)·
족좌(足座) 등의
목제품 등 다양한 유물들이 부장되어 있었다.

 


<무령왕(武寧王, 462~523)의 흉상>


석수 (국보 제162호) - 높이:30.0cm, 길이 47.0cm, 너비 22.0cm

석수는 기괴한 신수를 표현한 공상적인 동물을 무덤 안이나 앞에 놓아서 악귀(惡鬼)를 쫓아 사자(死者)를 수호한다는 중국의 묘장풍습(墓葬風習)에서 나온 것이다.
중국에서는 이미 전국시대 초나라 무덤에서 나무 조각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하여 한대에
이르러 무덤 앞에 기괴한 돌짐승을 세우거나
짐승모양을
무덤 안에 넣으면서부터 보편화되었습니다. 출토당시 무령왕릉 널길 중앙에 밖을 향하여 놓여 있었다.
석수는 뭉뚝한 입을 벌리고 있고

코는 크지만 콧구멍이 없습니다. 등에는 네 개의 융기(隆起)가 있고 머리 위 융기 상면의 패어진
홈에는 나뭇가지 모양의 철제 뿔이 꽂혀 있다.

몸통 좌우에는 앞뒤로 날개모양의 갈기가 도안처럼 부조되었다. 네 개의 짧은 다리가 있으며
 발톱이 표현되어 있는데 뚜렷하지는 않다. 
 



금제관장식(왕) (국보 제154호) -높이:30.7cm, 너비:14.0cm


 

왕의 머리 부분에서 거의 포개어진 채 발견되었다. 얇은 금판에 인동당초문과 화염문 장식을 투조하였는데 문양의 좌우가 비대칭이다.

줄기와 꽃에 지름이 5mm정도인 영락을 달았습니다. 영락은 둥글고 작은 원판이며 여기에 작은 구멍을 뚫어 금실로 꿰어 4~6회 꼬아 달았는데 모두 127개.
[구당서(舊唐書)]에‘(왕은) 검은 천으로 된 관에 금꽃을 장식하고…’라는 기록을 근거로 왕이 평소 사용했던 비단모자의 좌우 혹은
전후에 꽂았던 장식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금제뒤꽂이(왕) (국보 제159호) - 길이:18.4cm

 

왕의 머리 부분에 있는 청동거울 위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몸체부와 꽂이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날개를

펴고 나는 새의 모습을 닮았다.

몸체 윗부분에는 두개의 화문(花文)을 두드려 내고 아래쪽은 인동당초문(忍冬唐草文)을 새겼다.
뒤꽂이는 머리에 꽂아 머리모양을 흐트러지지 않게
해주는 실용적인 기능과 함께 뒤꽃이 자체의 장식으로 머리를 더욱 화려하게 꾸며주는 장식적인 용도를 함께 가진 장신구이다. 



금제귀걸이(왕) (국보 제156호) - 길이:8.3cm

왕의 귀걸이는 하나의 중심 고리에 작은 고리 2개를 연결고리로 하여 두 줄의 귀걸이를 매달았다.
큰 귀걸이의 중간 장식은 2개의 원통체를 대칭되게
연결하였고, 원통체의 끝에는 금실과 금 알갱이로 장식한 심엽형 장식이 달려있다.
끝 장식은 큰 심엽형 장식을 중심으로 작은 심엽형 장식 2개를
대칭되게 매달았다. 작은 귀걸이의 중간 장식은 금 알갱이를 붙여 만든 투작구체 5개를 '0-0'모양의 고리로 연결하였습니다.
끝장식은 담녹색 곡옥에
누금수법 장식이 가미된 금 모자를 씌운 것으로 금 모자에 좌우대칭으로 2개의 심엽형

장식이 달려 있다.


 이와 비교할 수 있는 귀걸이가 경주의
금령총과 일본 구마모토 현의 에다후나야마 고분에서 출토된 바 있다. 


발받침(왕) (국보 제165호) - 길이:38.0cm

 


왕의 베개와 발받침은 모두 커다란 나무둥치를 역 사다리꼴 모양으로 다듬고 그 가운데 부분을 "U"와 "W"자 모양으로 파내어 각각 머리와 두 발이 올려질 수 있도록 만들었다.
표면에는 검은 칠을 두껍게 한 다음 6각형의 거북등무늬와

금꽃으로 장식하여 화려함을 더하였다.

왕·왕비의 베개·발받침은 각각 검은색과 붉은색을 띠어 대조를 이룬다. 


거울(왕, 왕비) (국보 제161호) 길이:23.2cm,18.1cm

 

이 거울은 거울과 똑같은 문양을 새긴 틀에 동을 녹여 부어서 만든 것으로 가죽 끈이 끼워져 있는 거울걸이 아래에 의자손이라는 글씨가 있고, 7마리의 동물문양으로 장식어 있다하여 의자손수대경이라 하며 테두리에 동물상의 문양대가

있는 수문연수대경에 포함된다.


거울(왕) (국보 제161호) - 길이:17.8cm


무령왕릉에서 나온 3개의 청동거울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뒷면의 거울걸이를 중심으로 4각의 구획이 있고 그 주위에 신수를 표현한 방격규구신수문경이다.
이 거울에 묘사된 사람은 신선을 표현하듯, 머리에는 상투를 틀고 반나체에 삼각하의만 입은 모습이며 손에는 창을 들고 4마리의 큼직한 짐승들을
사냥하고 있는 중이다.
손잡이 주위에는 4각형의 윤곽을 만들고 작은 돌기들을 배열한 다음 그 사이에 12간지의 글씨를 새겨 놓았다.

이와 같이 거울은 일상용구로서보다 오히려 지배자들의 권위의 상징물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금제관장식(왕비) (국보 제155호) - 길이:22.6cm

왕비의 머리 부분에서 거의 포개어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얇은 금판에 인동당초문과 화염문

장식을 투조하였다.

왕의 관식과는 달리 문양이 좌우대칭이며 영락을 달지 않았습니다. 중앙에는 7개의 연꽃잎이 바닥으로
늘어진 모습을, 그 위에는 막 피어오르는 꽃을 꽂은 꽃병을 투조하고 있어
불교적이 요소가 관식의 제작에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왕비의 머리부근에서는 사각형과 오각형 금판장식이 함께 출토되었다.

이 판 장식의 테두리에는 작은 구멍이 촘촘히 뚫려 있어 실을 이용, 관테에 장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금제귀걸이(왕비) (국보 제157호) - 길이:11.8cm

 

모두 4쌍이 출토되었다.
머리 쪽에서 출토된 2쌍은 중심 고리, 중간 장식, 끝장식 등을 갖추었고, 발치 쪽에서 출토된 2쌍은 중심고리와

끝장식만 갖춘 것이다.
귀걸이1 : 노는 고리에 2점의 귀걸이를 매달아 만들었다.
길쭉한 귀걸이는 영락을 붙인 사슬모양 연결 금구에 탄환 모양의 끝장식을
매달았다. 짧은 귀걸이는 중간 장식으로 투작 반 구체를 덮어씌운 담녹색 유리구슬을 사용하였고, 사슬형 금구에 사익형의 끝장식을 연결하였다.

귀걸이2 : 왕비의 발치 북쪽에서 팔찌와 함께 출토되었다. 크기는 아주 작다.
중심 고리에 금실을 두 번 감은 다음 횡으로 두세 번 감아서 마무리
하였다.
끝장식은 작은 원형 영락이다. 


금제아홉마디목걸이(왕비) (국보 제158호) - 지름:16.0cm 

 



 

모두 아홉 마디로 되어 있는 이 목걸이는 한 마디의 길이가 6cm정도인데 가운데가 가장 넓으며 6면으로 각저 있고

 전체적으로 약간 휘었다.

 각 마디의 양끝은 끈처럼 가늘게 늘여서 걸기 위한 고리를 만들고 끝은 다시 몸체에 다섯 바퀴 정도 정교하게 감아서

 마무리하였다.
착용 고리는 금봉을 말아 만든 세환(細環)이며, 여기에 9절 중 양끝 마디의 고리를 걸어 연결하였다.



글자가 있는 은제팔찌(왕비) (국보 제160호) - 지름:8.0cm

 

팔찌의 안쪽에"경자년(庚子年, 520년) 2월에 다리라는 장인이 대부인(大夫人), 즉 왕비를 위하여
230주이를 들여 팔찌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경자년은 왕비가 죽은 병오년(丙午年, 526)보다 6년 전이며, 마지막의 230주이(二百主耳)는
 무게단위였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三國時代)에 부인(夫人)이라는 호칭은 왕비나 왕모(王母) 또는 상류층(上流層)의 혼인한
여자를 일컫는데,

여기서는 왕비이므로 특별히 대부인(大夫人)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듯 합니다. 팔찌의 바깥 면에는
머리를 뒤쪽으로 돌리고 발이 3개인 두 마리의 용이 표현되어 있다. 


베개(왕비) (국보 제164호) - 길이:40cm

나무토막을 역 사다리꼴 모양으로 다듬고 윗부분을 U자형으로 파낸 다음 전면에 붉은 칠을 하였다.
가장자리를 따라가며 금박으로 테두리선을 돌린
다음 그 안에 같은 금박으로 육각형의 거북등무늬를
연속적으로 표현하였다.
육각형 안에는 흰색, 붉은색, 검은색의 안료로 비천(飛天), 새 그림,
어룡(魚龍), 연꽃, 인동(忍冬),
네이파리꽃 등의 그림을 그렸다. 베개의 윗부분에는 나무로 조각하여 만든 두 마리의 봉황을 서로
마주보게 붙였다.
이 봉황의 부리와 귀의 일부분에 금박을 띠처럼 돌렸습니다. 입안에 는 청동막대를 박았으며,
봉황 밑에는 '甲·乙'자(字)가 붓글씨로 씌어 있다.
 


묘지석 (국보 제163호) - 세로:35.0cm, 가로:41.5cm, 두께:5.0cm

 

왕릉의 널길 입구에 2장의 지석이 놓여 있었는데, 비록 내용은 소략하지만 삼국사기 기록의 정확성을
입증해 주었고, 왕릉 출토유물과 관련된
유적·유물의 편년 연구에 기준이 되고 있다.
무령왕을 무덤에 안치할 때 묘지와 간지도, 매지권(買地券)을 만들어 넣었고, 그 후 529년 왕비를
안치할 때 매지권을 상하로 뒤집어 뒤편에 왕비의 묘지를 새겼다.
이 지석은 우리나라 지석 중 가장 오래 된 것이며, 지석이 출토됨으로써
삼국시대의 무덤 중 피장자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무덤이 되었다.
비록 내용은 소략하지만 『삼국사기』에 누락된 사실을 보충할 수 있었고,

 매지권에서 알 수 있듯이 백제인들의 사상연구에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허리띠장식(왕)  - 길이:95.7cm

왕의 허리부위에서 2벌의 금속제 허리띠장식이 출토되었다.
1벌은 띠고리와 띠끝장식, 과판, 드리개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또 한 벌은 띠고리와
과판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두 금과 은을 사용하여 만들었다.
드리개를 갖춘 허리띠: 띠고리는 버섯모양을 띠며 띠 연결부에는 7엽장식과
하트형 장식이 투조되어 있다. 과판은 표면이 오목하게 패인 타원형금구로 크기에 따라 대, 소의 두 종류가 있는데 교대로 배열하였다.
 

띠 끝장식은 전체형태가 5각형에 가깝다. 드리개는 금제 오각형판과 금제와 은제 타원형금구, 금구
사각형판, 두꺼비무늬를 투조하였고 장방형
은판에는 백호, 주작도를 끌로 새겼다.
귀면은 벽사의 의미를 지니고 있고, 두꺼비무늬는 달의 상징이며, 백호와 주작의 표현은 사신도의
일부분으로
여겨진다. 드리개와 띠 끝장식이 없는 허리띠: 금과 은을 사용하여 만들었는데, 띠고리의 띠 연결부에 남아 있는 자색
가죽으로 보아 전체를 가죽으로
만들고 그 위에 금속제 띠고리와 과판을 연결하였던 것 같다.
띠고리는 버섯모양이며 과판은 역 심엽형 장식에 물건을 매달 수 있는 둥근 고리를
붙였다.
역 심엽형 장식은 금판을 두드려 만들었는데, 네 개의 금 못을 끼워 혁대에 고정되게 하였다.

 

 



금동제신발(왕) - 길이:35.0cm

왕의 신발은 내측판, 외측판과 바닥판의 3판을 서로 붙여 만들었다.
각 판은 다시 안에 은판이 있고 그 밖에 금동판을 덧댄 것이다. 신발 속에는
3중의 포가 붙어 있고,
얇은 나무껍질이 함께 나왔는데 바닥에 깔았던 것으로 보인다.
바닥은 앞부분이 조금 들려 있고, 10개의 철못이 박혀 있는데
단면은 정사각형에 가까운 사각추모양이다. 내측판의 표면에는 전면에 거북등무늬가 구획되었는데, 그 안에는 꽃잎무늬를 장식하였다.

외측판 역시 거북등무늬가 타출되었는데, 내부에 꽃잎무늬와 더불어 봉황이 표현되어 있다.

 
 

고리자루칼(왕)

고리자루칼(왕)은 주로 삼국시대 무덤에서 출토되는 것으로 최고의 신분을 나타내는 위세품이며
그 형태나 장식정도, 재질에 따라서 무덤에 묻힌 사람의
신분이나 지위의 차이를 나타낸다.
무령왕릉 출토 고리자루칼(왕)은 왕의 좌측에서 발견되었는데, 둥근 고리를 이루는 손잡이
끝장식 안에 하나의
용을 표현한 단룡문 고리자루칼(왕)이다.
환두부는

외부 원과 용 모양을 동시에 주조하여 도금한 금동제이다.

 

 


발받침(왕비) - 길이:40.0cm

크기와 바탕색은 베개와 비슷하다. 전면에 붉은 칠을 하고 가장자리를 따라가며 금박으로
테두리를 돌린 다음 그 안에 검은색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림은 앞뒷면에 모두 그려져 있는데, 연꽃무늬와 구름무늬 등이 표현되어 있다.
윗부분의 좌우에는 철막대가 박혀 있고 이를 중심으로 연꽃무늬가
그려져 있다.
철막대에는 금제릉형장식이 붙어 있는데, 대나무를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금동제신발(왕비) - 길이:35.0cm

왕비의 신발은 그 형태나 제작방법, 기본적인 문양구성 등에 있어서 왕의 신발과 같지만 구갑문에
타출점열문이 표현되어 있지 않고, 그 안에 표현된
인동당 초문(忍冬唐草文)과 꽃,
그리고 서조문의 세부적인 표현이 왕의 신발과 약간 다르다.
또 바닥판에 박힌 못이 각각 사각형과 원형으로 되어
있는 것이나, 왕비의 신발 안쪽 판에 달개를 달지 않은 점에서도 서로 차이가 있다.  

 

동제다리미 - 길이:49.0cm

동제다리미는 둥그런 몸통에 긴 자루가 달렸고 접합부에 단이 져 있다.
유사한 예가 중국 강소성(江蘇省) 진강(鎭江)과 강도(江都)에서 발견되었는데
모두
양나라 때의 것이다.
몸체에 모시와 같은 천조각이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특별히 직물로 감싸서 무덤 안에
넣었던 것 같다.

이 다리미와 직물은 백제 상류계층의 의생활(衣生活)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금은장식칼 - 길이:16.5cm,25.5cm,23.7cm

왕릉 안에서는 모두 4점의 장식도자가 출토되었다.
왕의 허리춤에서 1점, 왕비 쪽에서 3점이 출토되었다.
목조 부근의 청동발 안에서 출토된
도자는 은판으로 만들어졌고 손잡이 끝과 칼끝 장식에
 인동당초문을 투각한 점이 특이하다.
손잡이 밑의 측면에는 패용할 수 있도록 작은 고리가
달려 있다.

나머지 3점은 나무칼집에 금과 은장식을 하였다. 금
판 장식의 한쪽 측면에는 고리를 달 수 있는 돌기를 만들었고 손잡이와 중간부는
은선을 빽빽하게
돌렸다.

 







금제 사엽형장식 - 길이:7.6 X 8.4cm

왕비의 허리부에서, 2점 모두 표면을 위로 향한 채 서로 겹쳐 출토되었다.
중앙의 반구형 원좌 주위에 4개의 꽃잎이 서로 대칭되게 붙어 있는 모습이다.
꽃잎의 형태는 4단의 인동당초문이니다. 
 



 

받침있는 은잔 - 전체높이:15.0cm

동탁은잔은 청동제 받침(동탁)과 은으로 만든 잔(은잔)을 합친 것이다.
받침은 낮은 대각이 달린 접시 모양인데 정 중앙에는 은잔을 받치기 위한 속이
빈 원통형의
받침이 솟아 있다.
여기에 은잔의 굽이 안으로 들어가면서 걸치게 고안되어 있다.
마치 단아한 산봉우리와 같이 만든 잔 뚜껑에는
산과 산사이의 골짜기에 짐승이 노닐고 있으며,
위로 올라가며 나무가 새겨져 있고 꼭대기에는 연꽃잎이 빈틈없이 채워져 있다.

뚜껑 덮힌 잔의 윗부분에는 구름무늬가 부드럽게 표현되었고, 그 밑으로 3 마리의 용이
유유히 날고 있으며, 이 모두를 연꽃과 고사리 같은 꽃들이
포근하게 감싸고 있다.  






동제수저 - 길이 18.2cm~21.2cm

무령왕릉 출토 수저 가운데 숟가락은 몸체가 은행알 모양이고 손잡이가 끝으로 가면서 넓어져서
기다란 삼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젓가락의 경우는 지름면이
각(角)져 있다.
무령왕릉의 숟가락은 여러 줄의 돋을선과 가는선을 새겨서 화려하게 장식하여 그
 품격을 더해주고 있으며 젓가락 가운데에는 손잡이
부분에 둥근 고리를 만들어 고려시대의
젓가락처럼 끈으로 묶는 고리를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무령왕릉의 숟가락과 꼭같은 숟가락이 이와 비슷한
시기의 일본의 무덤에서 출토된 바 있어
백제와 일본과의 문물교류의 한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동전(오수전) -지름:2.4cm

오수전은 지석 위에 꾸러미로 놓여 있었으며 그 숫자는 90여개에 달한다. 매지권(買地券)에는
이 돈으로 토지신(土地神)에게서 무덤 터를 산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 철제오수전은 양(梁)나라 무제(武帝)때 만든 것으로 523년 무령왕(武寧王)의 사망(死亡)에
즈음하여 양나라로부터 백제에
전해진 것이다.
오수전은 백제 초기 왕궁 터로 추정되는 풍납토성에서도 출토된 바 있어 백제 초기부터 유통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블로그 대문/조선 최초의 왕릉 병풍석이 청계천 다리 밑에서 600여 년 

                    

조선의 첫 국모 신덕왕후가 묻힌 정릉 [사진/임귀주 기자]
조선의 첫 국모 신덕왕후가 묻힌 정릉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아들들 사이에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벌어졌다.

이 골육지쟁(骨肉之爭)의 배경에는 조선 최초의 왕비가 된 신덕왕후가 있었다. 그녀의 사후에 왕권을

거머쥔 태종은 신덕왕후 능을 사대문 밖으로 옮기고 능의 병풍석을 청계천 다리를 놓는 데 쓰는 등 응징에 나섰다.


신덕왕후는 1392년 둘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며 권력의 중심에 섰지만 태조 5년(1396) 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녀의 나이 40세 전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2년 후 왕자의 난 때는 첫째 부인의 아들 방원(태종)에게 방석도 죽임을 당한다. 신덕왕후를 극진히 사랑한 태조는 통곡하며 상복을 입은 채 직접 능 자리를 보러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신덕왕후의 능은 한성 황화방 북쪽 언덕(현 중구 정동 영국대사관저로 추정)에 조성됐다. 조선 최초의 왕릉이었다.


태조 사후에 드디어 태종의 앙갚음이 시작됐다. 정릉의 능역 100보 근처까지 집을 짓는 것을 허락하더니 1409년에는 도성 안에 능이 있는 것이 옳지 않다며 능을 아예 양주 남사아리(현 정릉)로 옮겨버린다. 정릉동이었던 곳이 지금 정동(貞洞)으로 불리게 된 이유다. 태종은 종묘에 신주를 모실 때 태조와 자신의 친어머니 신의왕후만 함께 모셨고, 신덕왕후는 후궁으로 격하시켰다. 태종은 신덕왕후가 세상을 뜬지 20년이 지나서도 "강 씨는 내게 조금도 은의(恩義)가 없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고 한다.


1409년 태종은 신덕왕후의 능을 옮기면서 봉분을 깎고 정자각을 헐었다. 석물은 모두 땅에 묻도록 했다. 도성에서 가장 큰 다리인 청계천의 광통교가 흙으로 만들어져 홍수 때면 곧잘 무너지자 이듬해 여름에는 정릉의 병풍석으로 돌다리를 만들게 했다. 공사 중 일부 병풍석이 거꾸로 놓였지만 고치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무덤에까지 모욕을 주는 처절한 복수였다.


도성 최초의 석교인 광통교는 어가(御駕)와 사신(使臣)이 지나가는 도성의 중요한 통로였다. 백성들은 이곳에서 한 해의 액운을 없애준다는 다리밟기를 하고 연을 날렸다. 그야말로 모든 백성이 신덕왕후가 남긴 것을 밟고 지나도록 한 것이다.


광통교는 1910년 다리 위로 전차가 다니면서 훼손됐고, 1959년에는 청계천이 복개되며 도로 아래 묻혔다. 광통교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청계천복원사업 때였다. 청계천을 정비하면서 보호하기 위해 현재 광교 위치에 있던 광통교를 상류 쪽으로 155m 옮겨 복원했다.

광통교 교각 아래로 들어서면 벽면에서 그 옛날 정릉을 두르던 병풍석과 우석(隅石·병풍석 사이를 잇는 돌)이 촘촘히 박혀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돌에는 당대 최고의 석공이 새긴 정교한 조각과 아름다운 문양이 남아 있다. 신장(神將)이 거꾸로 서 있는 병풍석도 볼 수 있다. 세련된 조각에서는 신덕왕후를 향한 태조의 깊은 마음이 묻어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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