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의 千·年·古·木 / 2천5백년 고목도
- 이한수 기자
- 편집=뉴스콘텐츠팀
수령 1000년 이상 나무는 전국에 13그루가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주말매거진이 문화재청과 산림청 국립수목원에 문의해 전수(全數) 조사했다. 문화재청은 사찰이나 마을에 있는 노거수(老巨樹)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산림청은 국유 산림에 있는 나무 중 수령과 희귀성 등을 따져 '산림유존목'으로 관리한다. 나이 1000년 이상 나무는 산림유존목 중 2그루(울릉도 향나무, 홍천 계방산 주목), 천연기념물 노거수 170종 중 11그루로 나타났다.
전국에서 가장 나이 많은 나무는 울릉도 도동항 절벽 위에 뿌리 내린 향나무다. 추정 수령 2500년으로 지금까지 밝혀진 나무 중 국내 최고령이다. 높이 4m, 둘레 3.1m로 크지 않으나 항구를 내려다보는 험지에서 위태로운 모습으로 세 번째 밀레니엄을 살고 있다.
홍천 계방산 주목은 수령 1500년으로 추정된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주목 중에서 가슴 높이 둘레 5.7m로 가장 크다. 2년 전 정밀 조사 중 발견했다. 이전까지 주목 중 최대 나무는 둘레 4.38m로 1400년을 산 정선 두위봉 주목(천연기념물 433호)이었다.
높이 31m, 둘레 11m 충북 영동 영국사(寧國寺) 은행나무를 먼발치에서 보니 천년 은행나무가 더 웅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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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travel.chosun.com/site/data/html_dir/2016/11/02/2016110202191.html
블로그 대문/ 보물 제635호.신라황금보검. 한국7대불가사의
세계에서 가장 진귀한 황금보검
필자에게 신라의 고분 중에서 가장 중요한 출토품 두 가지를 추천하라고 하면 금관과 황금보검을 꼽는다. 그 중에서도 한 가지를 꼽으라면 국보도 아닌 황금보검(보물 제635호)을 이야기하곤 했다. 한국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금관보다 황금보검을 선정한 이유를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금관은 여러 개가 발굴되었다고 설명하면 다소 수긍하지만 어떤 이유로 황금보검을 제일 처음으로 꼽느냐고 다시금 질문한다. 이에 대한 답을 신라에 조예가 깊은 요시미츠 츠네오의 글로 대답한다.
“보로워에의 귀금속 상감검의 장식은 얼핏 보면 신라의 황금보검 장식과 전혀 무관해 보일 정도로 디자인이 다르다. 그러나 제작 기법은 모두 공통적으로 복스 세팅법에 의한 귀금속 상감법이고 상감한 귀금속 주위에 금알갱이를 장식하는 누금세공 기법도 동일하다. (중략) 그러나 신라의 황금보검에 비하면 보로워에 귀금속 상감검의 디자인이나 제작 기술은 훨씬 뒤떨어진 것이다.”
한 마디로 황금보검은 현존하는 보검 중에서 세계 최고의 디자인과 제작 기술을 갖고 만들었다는 뜻이다. 5~6세기 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황금보검이 출토된 곳은 미추왕릉지구 계림로 14호분이다. 도로 공사를 하면서 배수로를 파려 했을 때 우연히 적석(돌무지)이 발견되어 본격적으로 조사가 이루어진 것이다. 황금보검은 피장자의 가슴 위에 놓여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금관은 발견되지 않고 두 쌍의 금귀걸이와 비취곡옥 2점, 눈에 녹색 유리구슬을 상감한 금제 사자머리 형상의 띠고리 2점, 마구와 철제 대검 등이 출토되었다. 전체 길이 36센티미터, 최대 폭 9.3센티미터이다. 전체 모양은 칼자루 끝장식이 반타원형이고, 칼자루의 폭은 반타원형 장식의 지름보다 좁다. 칼집 입구는 역사다리꼴이며, 그 옆은 허리띠에 차도록 만든 고리를 붙였기 때문에 산모양이다. 칼집은 끝이 넓으며, 칼집 위에 반원형 장식 금구로 구성된 단검으로 표면에 석류석 등의 귀금속과 누금세공 투각으로 전체가 장식되었다. 칼 몸은 철제이지만 의례용 패도로 만들어진 것으로 뒤쪽에는 장식이 없다.
태극무늬를 사용한 장인이 제작
황금보검의 표면에 보이는 무늬들은 나선무늬(그리스 소용돌이무늬), 로만로렐, 파무늬(파문巴文), 메달무늬(비잔틴 기법), 테두리선(금으로 된 가는 선)이다.
나선무늬를 이루는 각 부분의 전체 바깥둘레에 금알갱이를 장식하고 메달의 틀과 공백 부분에 금알갱이를 장식했는데 이들은 모두 그리스로마 기법이다. 그런데 신라 고분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누금세공 기법의 금제 장신구와 드리개가 출토되는데 그것들은 모두 황금보검에 사용된 것과 동일한 누금세공기법으로 만들어졌다.
황금보검 중에서 가장 놀라운 부분은 세 개의 파무늬 즉 태극무늬이다. 일반적으로 태극무늬 안에는 다른 무늬를 새겨 넣지 않는다. 그런데 이 황금보검에 들어 있는 세 갈래의 태극무늬 안에는 꽃봉오리 모양의 장식이 들어있다. 특히 각 공간에 매우 균형 있게 능숙한 방법으로 배치되었다는 점에서 이를 제작한 사람은 태극무늬를 매우 자주 사용하였고 이 칼에 의도적으로 삽입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 개의 태극무늬 안에 꽃봉오리와 세 잎 무늬, 때로는 사람의 머리나 동물머리 형상을 박아 넣는 것은 켈트인들이 즐겨 사용한 무늬로 일반적으로 ‘켈트파’라고 한다. 켈트인은 도나우 강 중류 지역의 본거지에서 동서남북으로 확장하여 일부는 바다 건너 아일랜드에 정착했다.
켈트인의 본거지는 중부 유럽의 지금의 오스트리아,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지방이다. 이들 중 일부는 이베리아 반도와 이탈리아 북부로, 일부는 잉글랜드의 북부 즉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로, 그리고 트라키아와 소아시아로 이주하여 각각의 지방에 정착했다. 특히 그리스 시대부터 로마시대에 걸쳐 트라키아 지방에 정착한 켈트인은 한발 앞서 그리스로마 문화를 받아들인 로마화된 켈트인으로 볼 수 있다. 멜 깁슨 주연의 「브레이브 하트(Brave Hart)」는 바로 스코틀랜드의 켈트와 잉글랜드와의 알력을 주제로 삼은 것으로 아직도 스코틀랜드인들은 자신들이 영국인이라는 것은 거부한다고 한다.
불가사의한 황금보검의 유입경로
요시미츠 츠네오 교수는 켈트식 태극무늬와 석류석을 상감한 보석 장식, 황금보검과 동일한 기법으로 만들어진 허리띠 금구 등이 우크라이나의 헤르손주 바시리에프카촌 고분 등에서 출토된 것을 감안하여 황금보검이 어떤 식으로든 켈트족의 지배자와 관련 있다고 주장했다. 즉 그리스 소용돌이무늬와 로만로렐이 사용된 것으로 보아 황금보검을 제작한 금세공 기술자는 로마문화에 정통한 사람이며 황금보검을 주문한 사람은 켈트파(태극무늬)를 잘 알고 있는 켈트족의 왕(트라키아 왕)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 트라키아 왕이 최고의 의례적 영예로 여기는 황금보검을 아시아의 최동단이라고 볼 수 있는 신라 계림로 14호분의 피장자가 어떻게 갖고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요시미츠 츠네오 교수는 그 해답을 비잔틴 귀금속 상감팔찌, 황금보검과 함께 출토된 사자머리 형상의 버클에서 찾았다. 특히 황금으로 만든 사자머리 버클은 계림로 14호분에서 출토된 유물 중 황금보검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로마의 단조금 기법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기원전 4세기경부터 서기 5세기경에 걸쳐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유행하던 형식이다. 발굴 당시 두 개의 사자머리 버클만 있고 허리띠는 소실된 채 출토되어 전체 모습을 알 수 없지만 이것은 황금보검을 패용하기 위한 허리띠에 단 것으로 추정한다. 즉 황금보검과 사자머리 형상의 버클은 본래 한 세트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학자들이 주목하는 것은 이들 유물들이 하나같이 신라 유적지에서만 출토되었다는 점이다. 고구려나 백제, 중국에는 그와 비슷한 유물들이 출토되지 않았다. 당시에는 고구려와 백제, 가야, 신라로 나뉘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신라에서만 발견된다는 것은 이들 유물들의 목적지가 오직 신라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보물이 동유럽에서 신라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트라키아 왕의 사절이 직접 신라로 가져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라의 사절이 트라키아 국에 가서 왕을 알현한 후 하사받은 보물들을 갖고 오는 것이다. 학자들은 이 당시의 상인들이 신라로 황금보검을 갖고 왔을 것으로는 생각지 않는다. 이러한 보물 중의 보물을 상인을 통해서 트라키아에서 신라로 전달했다고는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더욱이 신라고분에서 어김없이 금귀걸이, 목걸이, 팔찌나 반지 등 금은제품들이 출토된다는 것도 이들 지역과 신라의 연관성을 제기한다.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장신구 등의 디자인, 기법, 기술은 로마 세계에서 비롯된 누금세공 기법이다. 그런데 로마 세계에서 출토된 장신구와 비교하면 세부 의장에 약간의 변화가 있으면서도 기술적으로는 그리스로마의 누금세공에 비해 다소 거칠게 마무리되었다. 이러한 차이는 시간의 경과로 나타난 변화이기도 하지만 그것들을 신라에서 만들 때 로마의 기술이 완전하게 접목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디자인과 기술이 어떤 방법으로든 로마 세계로부터 도입되어 신라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중부 유럽의 오스트리아,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지방 등에 근거지를 갖고 있던 켈트 왕(트라키아 왕)이 왜 신라로 보물 중의 보물을 보냈는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질문에 대한 정확한 대답은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들을 연결할 수 있는 실마리는 많이 있다. 이들 지역이 게르만민족의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의 근거지라는 것이다. 훈족의 지도자인 아틸라(Attila, 395~453)는 세계에서 가장 큰 영토를 가진 3대 제국 중 하나를 만든 왕으로(나머지 두 왕은 칭기즈칸, 알렉산더이다) 현재의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의 거의 대부분을 정복한 정복자이다.
근래 학자들은 흉노匈奴(여기에서 흉노는 오랑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보다 3배 정도의 거대한 영토를 갖고 있던 북방기마민족의 제국을 뜻함)가 중국과의 부단한 전쟁으로 일진일퇴하다가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 후 한 일파는 서천西遷하여 훈족이 되었고 한 일파는 동천東遷하여 신라와 가야의 지배민족이 되었다고 추정한다. 그런데 트라키아 왕이 있었던 지역은 게르만민족 대이동을 촉발시켜 로마제국의 붕괴를 유발시킨 훈(Hun)족의 아틸라(Attila, 395~453)의 근거지이다. 훈족은 로마의 밀라노를 점령한 후 로마제국을 정복했다고 공식적으로 천명할 정도로 위명을 떨쳤는데 추후 로마에 패배한 이후에도 일부 훈족이 남아있던 곳이므로 트라키아 왕 자체가 훈족과 긴밀한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트라키아의 어느 지역에서 세력을 갖고 있던 훈족 또는 이와 연계되는 사신이 직접 신라를 방문하거나 역으로 신라의 사신이 트라키아를 방문하는 것이 결코 우연한 일이거나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근래 매우 놀라운 사실이 발견되었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의 연구에 의하면 황금보검이 생산되던 시기의 트라키아에서 발견되는 장식류를 장식하는 석류석(garnet)의 생산지가 놀랍게도 스리랑카와 인도라는 것이다. 로마에서 스리랑카 또는 인도에서만 발견되는 석류석을 사용했다는 것은 이 당시에 로마와 이들 국가와는 어떠한 경로로든 무역로가 개통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황금보검이 트라키아에서 신라까지 전달되는 과정은 북방 초원지대만이 아니라 트라키아, 스리랑카(인도), 신라를 연결하는 해상로를 거쳤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을 보다 명확히 밝히기 위해 현재 한국과학기술연구원에서 연구 기획 중이다.
글·사진 | 이종호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장기(長期)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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