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승 제31호부터는 2020년 새해 봄부터 업 로드하겠습니다.
■ 명승 제 21호 공주 고마나루 ■
소 재 지; | 충남 공주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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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성진 숲쟁이 전경
소 재 지; | 전남 영광군 법성면 법성리 821-1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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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 경북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 산 74번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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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승 제24호 부산 오륙도 ■
소 재 지; | 부산 남구 용호동 936번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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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승 제26호 안동 배군정 및 개호송 숲 일원 ■
백운정
백운정 현판
섬처럼 남아 있는 개호송
백운정 쑤 전경(송림)
개호송 숲
소 재 지; | 경북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93-1번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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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백운정(白雲亭) 및 개호송(開湖松) 숲 일원』은 한국의 대표적 씨족 촌락인 내앞마을과 개호송(開湖松), 강 건너편의 백운정(白雲亭) 등이 낙동강의 제1지류인 반변천(半邊川)과 어우러져 뛰어난 절경을 자아내는 경승지이다.
“백운정(白雲亭,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75호)”은 귀봉(龜峯) 김수일(金守一, 1528~1583)이 그의 아버지 청계(靑溪) 김진(金璡)으로부터 땅을 받아 조선 선조 1년(1568년)에 세운 정자로 반변천(半邊川) 강 언덕 위에서 내앞마을과 개호송(開湖松) 숲이 한폭의 경관으로 조망되는 지점에 위치하여 전통적 유교문화 경관을 체험할 수 있는 탁월한 조망점 역할을 하고 있는 정자이다.
“내앞마을”은 의성김씨(義城 金氏) 씨족 촌락 마을로 의성김씨(義城 金氏) 종택을 비롯하여 보물 2점과 고택이 잘 보전되어 있으며, <택리지>에 전통 씨족 촌락으로 소개되어 있고, 약300년 전에 제작된 이종악(李宗岳)의 <허주산부군수화첩 반변천십이경(虛舟山府君水畵帖 半邊川十二景)>에 ‘운정풍범(雲亭風帆)’이라는 제목으로 마을 풍광 그림이 남아 있는 등 500여년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마을이다. “
개호송(開湖松) 숲”은 통례공(通禮公) 김만근(金萬謹)이 조선 성종 무렵에 내앞마을 앞 수구(水口)가 허술함을 메우기 위해 조성한 것으로 임진왜란 직후인 선조 38년(1605년) 대홍수 때 유실된 것을 운천(雲川) 김용(金涌) 선생의 발의로 다시 조성한 숲이다.
의성김씨(義城 金氏) 문중에서는 개호금송완의(開湖禁松完議)라는 문중 규약을 만들어 이 숲을 보호해 왔다고 전한다.
이 숲은 내앞마을의 농경지를 보호하고 바람과 물의 장애요인을 제거하기 위한 수구막이 숲이며, 완만한 모래사장에 달빛이 비추는 ‘완사명월형(浣沙明月形)’ 혹은 소가 누워 풀을 되새김하는 ‘와우형(蝸牛形)’으로 알려져 있는 내앞마을 풍수형국의 모자람을 채우기 위한 비보림(裨補林) 역할을 위하여 인위적으로 조성되어 보호하여 온 오랜 역사의 마을 숲이다.『
안동 백운정(白雲亭) 및 개호송(開湖松) 숲 일원』은 강 건너편 백운정(白雲亭)과 반변천(半邊川) 수중에 조성되어 있는 반월형 섬 위의 소나무 숲인 개호송(開湖松) 숲, 강가를 따라 조성된 내앞마을, 반변천(半邊川)과 강가의 기암과 단애, 천변 숲이 한 눈에 펼쳐져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자아낼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대표적인 씨족 촌락의 모습을 보여주는 역사적 가치가 큰 명승지이다.
■ 명승 제27호 양양 낙산사 의상대와 홍련암 ■
관동십경의 낙산사
의상대에서 내려다 보는 동해안
의상대
홍련암
소 재 지; | 강원 양양군 강현면 전진리 산5-2번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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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 낙산사(洛山寺) 의상대(義湘臺)와 홍련암(紅蓮庵)」은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의 <관동별곡(關東別曲)>에 소개된 관동팔경 가운데 하나로 동해 일출경으로 매우 유명한 곳이다.
671년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하였다는 “낙산사(洛山寺)”와 낙산사(洛山寺) 창건 당시 의상대사(義湘大師)가 관음보살을 친견한 해안 암벽 위에 설치하였다는 “의상대(義湘臺)”, 의상대사(義湘大師)가 홍련(紅蓮) 속의 관음보살을 친견하여 설치한 “홍련암(紅蓮庵)” 등 낙산사(洛山寺)의 곳곳에 의상대사(義湘大師)와 관련한 전설이 전하는 곳이다.
의상대(義湘臺)와 홍련암(紅蓮庵)은 바닷가 절벽 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변에 노송(老松)들이 자리하고 있어 동해안의 아름다운 해안 절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으며, 떠오르는 일출 경관으로 유명하여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곳이다.
낙산사(洛山寺) 주요 경관 요소이던 낙락장송이 2005년 강원지역의 큰 산불로 소실되어 경관이 크게 훼손되었으나, 의상대(義湘臺) 및 홍련암(紅蓮庵) 주변 해안에는 시스택(sea stack)이 발달하여 독특하고 아름다운 해안 경관을 보유하고 있다.
낙산사(洛山寺)는 <관동십경(關東十境)>에 옛 모습이 잘 남아있고, <삼국유사>, <동문선>, <동문여지승람> 등의 고문헌에 많은 시인묵객 등의 낙산사(洛山寺) 창건 및 중수 기록과 유람기, 경관을 노래한 시문이 다수 전하는 등 역사적 가치가 큰 명승지이다.
■ 명승 제28호 삼척 죽서루와 오십천 ■
관동십경의 죽서루와 오십천
오십천 위의 죽서루
죽서루
죽서루에서 내려다보는 오십천과 삼척시내
소 재 지; | 강원 삼척시 성내동 28번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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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 죽서루(竹西樓)와 오십천(五十川)」은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의 <관동별곡(關東別曲)>에 소개된 관동팔경(關東八景) 가운데 하나로 삼척시를 가로질러 흐르는 오십천(五十川)에서 가장 절경지로 알려진 곳으로 죽서루(竹西樓)에서 내려다보는 오십천(五十川) 경관과 강 건너에서 바라보는 죽서루(竹西樓)와 절벽부의 경관이 매우 뛰어나다.
죽서루(竹西樓) 누각은 <동안거사집(動安居士集)>에 의하면, 1266년(고려 원종 7년)에 이승휴(李承休)가 안집사(按集使) 진자후(陣子侯)와 같이 서루에 올라 시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266년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정면 7칸, 북쪽 측면 2칸, 남쪽 측면 3칸의 특이한 형태의 누 건물이며 현재 보물 제213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오십천(五十川)은 삼척시 도계읍 백병산(白屛山)에서 발원하여 삼척시를 가로질러 동해로 흘러가는 동해안에서 가장 긴 감입곡류하천으로 오십천(五十川) 협곡의 암벽들은 중생대 백악기에 생성되어 오랜 기간 하천작용으로 퇴적 변형되어 현재의 다양한 석회암지대 지형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오십천(五十川)이란 이름은 발원지에서부터 동해에 이르기까지 50여번 돌아 흐른다고 하여 붙은 것이라 전한다.
죽서루(竹西樓)가 위치하는 곳은 오십천(五十川)의 협곡이 끝나려 하는 부위로 오십천(五十川)과 주변 협곡, 죽서루(竹西樓) 절벽 배후의 카르스트 지형과 길게 늘어진 송림 등이 태백산지와 함께 어우러져 절경을 자아내고 있는 곳이다.
■ 명승 제29호 구룡령 옛길 ■
소 재 지; | 강원 양양군 서면 갈천리 산1-1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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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령(九龍嶺) 옛길』은 양양과 홍천을 연결하는 옛길로 산세가 험한 진부령(陳富嶺), 미시령(彌矢嶺), 한계령(寒溪嶺)보다 산세가 평탄하여 양양, 고성 지방 사람들이 한양을 갈 때 주로 이길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강원도의 영동과 영서를 잇는 중요한 상품 교역로였고, 양양, 고성 지방 선비들이 과거를 치르러 한양으로 갈 때 명칭에서 유래하듯 용의 영험함을 빗대어 과거 급제를 기원하며 넘나들던 길이라 하며, 구룡령(九龍嶺)이라는 이름은 ‘아홉 마리 용이 고개를 넘어가다가 지쳐서 갈천리 마을 약수터에서 목을 축이고 고갯길을 넘어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전하고 있다.
옛길 입구에는 굽이져 흐르는 계곡이 있고, 길의 중간중간에 길의 위치를 표시하는 횟돌반쟁이, 묘반쟁이, 솔반쟁이 등이 자리하여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보여 줄 뿐 아니라 옛길 걷기의 흥미를 더해주고 있다.
또한 구룡령(九龍嶺) 옛길에는 일제시대 일본인들에 의해 개발되어 일대 주민들이 강제 징집되었던 애환의 역사가 서린 철광소와 케이블카가 남아 있고, 옛길 길가에는 1989년 경복궁 복원 당시 사용되어 밑둥만 남아 있는 소나무 거목 흔적이 남아 있는 등 조선시대와 근현대사의 역사가 함께 잔존하여 역사적 가치가 큰 소중한 명승지이다.
■ 명승 제30호 죽령 옛길 ■
희방폭포
단양쪽 계곡
소 재 지; | 경북 영주시 풍기읍 수철리 산86-2번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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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대문 / 국보 제226호 창경궁의 문정전에서 사도세자 숨지다.
사도세자가 숨진 뒤주
문정전이 영조의 비(妃)인 정성왕후의 혼전으로 사용되었을 때, 이곳 앞마당에서는 역사적으로 큰 사건이 일어났다. 아버지가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8일만에 죽게 만든 비극적인 사건. 바로 1762년의 임오화변(壬午禍變)이 일어났던 곳. 당시 문정전은 혼전이 되면서, ‘휘령전(徽寧殿)’으로 잠시 명칭이 바뀌었다. 영조는 휘령전을 지날 때, 죽은 왕비 정성왕후의 혼령이 사도세자를 제거해야 한다고 했다며 정당화 시키려 애썼다.
이 사건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추정된다.
첫 번째 원인은 영조의 금주령에 의한 부자(父子)간의 갈등이다.
영조 32년(1756) 1월부터 금주령이 발효됨과 동시에 한양 술집의 주등(酒燈)을 금지하는 것으로 했다. 또한 금주령 위반자는 엄형(嚴刑) 후에 섬으로 유배하는 것으로 했다.
영조가 갑자기 낙선당에 들이닥쳐 사도세자를 불렀을 때 세자는 얼굴도 씻지 않고 옷차림도 단정치 않았다. 영조는 혹시 사도세자가 밤새 술을 마시고 지금껏 자다 온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 자신은 백성들을 상대로 엄격한 금주령을 시행하는 중인데 세자가 밤새 술을 마시다니…. 격노한 영조는 세자가 술을 마셨는지 또 누가 술을 들였는지 책망하듯 물었다. 그때 사도세자는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밧소주방 큰 나인 희정이가 주어 마셨다고 대답했다. 영조는 가슴을 두드리시며 ‘네가 이 금주하는 때 술을 먹어 광패(狂悖)하게 구느냐?’라고 엄히 책망하고는 술을 들인 책임을 물어 환관 신치하와 궁녀 해정을 유배하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날 한밤중에 낙선당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사도세자의 방에 있던 촛대가 넘어져 일어난 화재였지만 영조는 세자가 홧김에 방화한 것이라 의심했다. 사도세자를 부른 영조는 ‘네가 불한당이냐? 불은 어이 지르나?’ 하며 전후 사정을 묻지도 않고 호되게 꾸짖었다. 사도세자 역시 변명하지 않고 자신이 방화했다고 대꾸했다. 이런 일은 근본적으로 불신과 불통에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영조와 사도세자는 명색이 부자간인데도 불구하고 서로 믿지도 않았고 소통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이 때의 사건으로 사도세자는 크게 변했다. 이후 사도세자는 술이 약한데도 불구하고 정말로 과음하기 시작했다. 과음은 술주정과 폭력 그리고 살인으로 이어졌다. 이러면서 사도세자는 아예 영조와 상종도 하지 않으려 했다.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 그래서 솟아나는 반항심을 그렇게 풀었지만 그 결과는 불신과 불통의 심화였다.
두 번째 원인은 사도세자의 과격한 탕평책이라고 본다.
타협적인 영·정조에 비해 사도세자는 매우 원칙적으로 탕평의 이념을 고수했다. 그는 1749~1762년의 13년 동안 영조를 대신해서 대리청정(권한대행)을 수행했다. 따라서 탕평정치가 시행된 76년 중에서 13년 동안은 실질적으로 사도세자의 시대였다. 그러므로 탕평정치의 계보는 영조-정조가 아니라 영조-사도세자-정조였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사도세자는 '100% 조선'을 이루려면 특권층인 노론당과 외척세력을 눌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노론당을 얼마나 경계했는지는 나이 열 살 때부터 노론당을 비판했을 뿐만 아니라 노론당을 비호한 영조의 태도까지 비판한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처가인 홍씨 가문이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앞장선 사실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그는 외척세력이 국정에 개입하는 것을 견제했다. 노론당과 외척으로 이루어진 '1%'를 견제했던 셈이다. 한마디로, 그는 '100% 조선'에 목숨을 건 용감한 사나이였다.
사도세자가 대리청정 13년 만에 스물여덟 살의 나이로 뒤주에 갇혀 목숨을 잃은 것은, 그가 교과서적인 탕평을 추구했고 그것이 특권층에게 공포심을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화병을 앓았고 그로 인해 어느 정도 문제가 생긴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뒤주에 갇힌 본질적 요인은 '1%'와의 갈등, 즉 특권층과의 싸움에서 비롯됐다.
▒▒♡♡♡웃어야 건강, 건강해야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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