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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문화유산 답사기] 6천여 애국지사들이 온갖 고문에 시달린 호국의 현장 사적 제324호 舊 서울구치소

문화재방송 2020. 3. 1. 07:58

블로그 대문 / 중국 하얼빈 역의 안중근 의사 기념관

 

한국에서 하얼빈 여행을 가기 전

꼭 방문하고 싶은 장소 중 하나가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였습니다

(安重根义士纪念馆)

안중근 의사 기념관은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중국 하얼빈 남광장에 위치해 있습니다〰️



우리가 방문한 날은 눈이 펑펑 내리는 날이라

찾기 어려울꺼라 생각했지만

어렵지 않았어요!


하얼빈 남광장에서 오른쪽으로 가는 길에

위치해 있고, 오른쪽으로 가다가 잠깐 잠깐

뒷쪽을 봐주세요〰️가는길에 보이는 기념관이

아니라 뒷쪽으로 보이기 때문에 지나치기

쉬워요


                           

하얼빈 의사 기념관은

매주 월요일 휴관

점심시간은 11:30-13:00




입장시 여권검사가 있어

방문시 챙겨오셔야 입장가능합니다 〰️

입장료는 없으며 매우 작은 규모지만

기념관에는 안중근 생애를 담은 각종 사진과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어

하얼빈에 온다면 한번은 꼭 방문해야 할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중국내에서도 인정받는 인물이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방문하지 않을까 했지만

제가 방문했을때는 한국은 5분 정도만 계셨어요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하게 된 과정들을 보면서 기념관을

한바퀴 둘러볼 수 있었고

기억에 제일 남는 이토의 15가지 죄목을 보고 와서

유튜브 안중근 영웅을 많이 찾아 봤네요


많은 분들이 하얼빈에 방문할 일이 있다면

꼭 한번은 방문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안중근 의사께서, 이토 히로부미 일본 총리를 응징한 중국 하얼빈 역의 현장이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사적 제324호 舊 서울구치소(현 서대문형무소역사박물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일제와 싸운

6천여 애국지사들이

온갖 고문에 시달려야 했던 호국의 현장이다.


이곳에서 목슴을 잃은 400여 순국선열의

애국혼을 기리기 위한 추모비가 있다. 

 

<서대문 형무소 명칭의 역사>

1908년 경성감옥 신축

1912년 서대문감옥

1923년 서대문형무소

1945년 서울형무소

1961년 서울 교도소

1967년 서울구치소

1987 구치소 의왕시로 이전

1990년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개관

 

 

서울시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하기 위해 1907년 인왕산 기슭에 일본인이 설계하여 건립한 근대적인

감옥이다.

약 5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560여 평의 목조건물을 짓고 ‘경성감옥’이라 불렀다. 종로의 감옥에서 500여 명을 데려와 수용하고 광복을 맞이하는 1945년까지 독립운동가들을 가두고 고문과 박해를 하고 심지어 목숨을 빼앗은 곳이다. 애국인사들이 늘어나자 1912년 일제는 마포구 공덕동에 감옥을 또 지어 경성감옥이라 하고, 원래의 경성감옥은 서대문감옥이라 불렀다. 1923년 서대문감옥은 서대문형무소로 바뀌었고 1944년에는 2,890명이 수용되었다. 18세 미만의 소녀들과 10년 이상을 선고받은 자, 그리고 무기수까지 수용하였으며, 김구선생·강우규·유관순 열사 등이 이곳에 수감되었었다. 유관순 열사는 이 곳에서 목숨을 다하였다.

1946년 광복 직후에는 경성형무소·서울형무소로 바뀌고, 반민족행위자와 친일세력들이 수용되었다. 1961년에는 서울교도소로, 1967년에는 서울구치소로 바뀌었고, 4·19혁명과 5·16군사쿠데타와 같은 정치적 변동으로 인해 많은 시국사범들이 수감되었다. 1988년에 사적지로 지정되었다.

일제시대엔 민족독립의 역사를 지니며 그후로는 민주화와 정치적 변화의 모습을 간직한 곳으로서 후손들에게 민족의 자존과 자주정신을 일깨워주는 산 교육장으로 매우 뜻깊은 곳이다.


옛 서대문 형무소 최초 건축도면 발견

 

 
 

 

 

  

    

    이강연 의병장이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

              (승아에게 유언하며 보냄)

 

             네 아비의 평생에 품은 단층은

          왕가의 일에 죽고자 한 것인데,

          이제 뜻을 이루니 또 무엇을 한탄하랴.

          놀라고 두려워하기에 이르지 말고

          정신을 수습하여 네 아우를 데리고

          그날 옥문 밖에서 기다리도록 하라.  

 

 

 

 

 

 

              

        國恥民辱(국치민욕)/나라의 수치, 백성의 치욕

       乃至於此(내지어차)/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不死何爲(불사하위)/죽지 않고 어찌 하리오.  

       父葬未成(부장미성)/아버님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國權未後(국권미후)/나라의 주권도 회복하지 못하였어니

       不忠不孝(불충불효)/충성도 못하고 효도도 못한 몸이

        死何暝且(사하명차)/죽은들 어찌 눈을 감으랴.

             

 

 

 

 

                                                              벽에 새겨진 순국열사들

 

 

 

 

                                                              

 

 

지하 고문실에서는 악독하기로 이름난 일본경찰들이 애국지사들을

갖은 방법으로 고문했다.

전기고문/성고문/물고문/고춧가루물 고문 등 잔혹한 고문을 자행했다.

조선총독부는 1912년 12월30일에 태형집행심득(몽둥이로 때리는 형벌)준칙을 제정하고

합법적으로 극형을 가함으로써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사형직전 사형수가 앉아 있던 의자

 

사형수의 시신을 몰래 밖으로 내보낸 시구문

                                                 민족의 魂 그릇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순국하신 독립운동가들의 넋을 기리고 되새기기 위해

                    조성된 작품입니다. 내부에 순국하신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잔혹한 일본군의 만행을 증언하는 사진들



광복 독립군과 독립투사, 양민들이 잔학한 일본군에 붙잡혀 온 집결장이다.
일본인에 체포 되어 어디론가 이동하기 위해 대기 하고 있다.
손을 뒤로 묶인채 소리 없이 침묵하고 있다.
1928년 이때부터 일본군은 악랄하고 잔혹한 살육의 강도를 높인다.



독립투사 또는 양민을 학살 하기 위하여 일본도를 손질하는 일본군인 놈들.



독립군, 독립투사를 처형장소로 가기 위해 트럭에 싣고 있다.



일본군놈의 장칼에 목이 떨어지는 독립군-죽일 놈들



일본군 놈들에 끌려 가는 독립군 의병장



무기도 빈약하고 의복도 남루 했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군놈들을 해 치워야 겠다는 의기 투철한 의병대들 모습.



총검으로 처형하기 위해 담장 쪽으로 몰고가고 있다.
이미 총검에는 선혈이 묻어 있다



체포된 독립군은 결국 처형을 당했다.
칼로 목을 칠 때 넘어 가지 않도록 팔을묶고 뒤에서 당기고 있다.
일본인 칼에 목이 떨어지는 순간을 촬영한 것이다.



개를 풀어 인간 사냥을 하는 모습이다. 결국 총살로 생을 마친다.



독립군 간부의 처형 장면이다. 목을 치기전 뒷편 일본군이
웃는 모습을 볼 때 분노보다 일본의 양심과 목적을 혼돈하게 한다



독립군 병사를 작두로 목을 짤라 공중 높이 매달아 놓았다.
추운 겨울 날씨로 오랫동안 매달아 경각심을 주기위해 인간이 할수 없는
최악의 형벌을 자행 했었다.



죽은시신을 구분하지 못하도록 화장을 시켰다.
온 마을이 유해로 가득하고 일본의 원폭 피해처럼 보인다.



손을 뒤로 묶고 물에 수장하는 처형.
처형이라기 보다 학살이라고 하는게 맞을것 같다.



일본 토벌군인 들은 사정없이 민간인 까지 처형 했다.
떨어진 목을 손에 쥐고 미소까지 보이는 것은 사람 목숨을
장난삼아 학살하는 것을 증명 할수 있는 장면이다.



일본놈 들은 포로가 된 민간인 과 독립군을 사정없이 목을 잘라서
담장 밑에 상품처럼 진열하여 두고 있다.
독립군 용사들은 죽어서도 한결같이 한을 품고 눈을 감고 있다.



생매장 되어지고 있는 양민들. 일본놈들의 잔혹함을 엿볼수 있다.
이렇게 돌아가신 분들은 숨이 끊어질때 까지 대한독립을 원했다.



일본군 의사 간부가 세균 생체 실험을 하고 있는 장면이다.
마취도 없이 손을 묶고 해부하고 있다, 복부에 창자와 내용물이 나오고
일본인들은 입 마스크하여 지켜 보고 있다.



일본군들이 처형하기전 목에 수건을 감아놓은 것은
칼이 목을 치기전 잘린 몸통에서
품어 나오는 피를 막기 위해 수건을 얹어 놓은 것입니다.



손을 뒤로 묶고 칼로 살육하는 장면.



지독한 고문.
하의가 벗겨지고 혹독한 고문뒤 결국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우리 한국인들은 나무 벌목 과 혹독한 노역을
시키고 난뒤 결국 모두 처형되었다.



총검으로 처형당하는 모습이다.
일본인의 입가에 미소가 무엇을 의미 하는 것일까?



총검으로 심장을 찌르는 장면. 천벌을 받을 놈들이다.



일본도로 목을 자를려고 고개를 새우고 있다.



잔학의 극치를 보여주는 장면. 처형하는 순간.



칼이 지나가 목이 잘린상태.



독립군의 목은 이미 칼이 지나가 목이 잘린 순간.



처형후 두병사의 자랑스런 자세로 기념찰영.



죽음을 기다리는 양민들 일본인 감시아래 손이 뒤로 묶여져 있다.



생매장된 양민들 가족들에 의해 파헤쳐지고 있는 장면이다.
죽은사람의 표정에서 일본인의 잔혹한 흔적을 엿볼수 있다.



처형을 기다리는 소년투사. 긴장된 표정으로 주위를 살피고 있다.



잔악 무도한 일본군들이 대량 학살 하고난 뒤 처참한 광경. 교랑에
즐비한 시체들 중에 뒤에 흰색 두루마기를 입은 노인과 애국지사의
가족들이 시신을 찾기 위해 살펴 보고 있다.



잔혹한 살육 장면(1942)
옷이 벗겨진 여인은 온몸이 상처 투성이다.
목은 짤라져 있고 얼굴 모습은 등뒤로 돌려 져있다.



강간후 총으로 치부에 발포한 장면.엉덩이에 총상
구멍이 선명하게 보인다 여성의 음부를 일본군이 가려
좔영 하였다.더 이상 해설이 필요 없는 사진이다.



한국 여인들을 찾으러 다니는 일본군들. 눈에 띄는 여성은 모두
끌고가 강간후 살해했다.이런 여성보급을 당담하는 일본군을 항상
여러명의 한국여성을 데리고 다녔다.



수장된 시신들. 손을 뒤로 묶고 저수지에 수장시켰다. 살기 위해
허덕이는 사람 에게는 긴막대기로 물속으로 밀어 넣었다.



한곳으로 몰아 넣어 집단으로 무차별 학살 한 후 불 태웠다.



(1937년)허탈한 아버지 죽은 어린 자식 시신을 물건
처럼 들고 있을 만큼 어이가 없는 학살 이였다.



여성의 옷을 벗기고 마구 살육당 했던 참혹한 현장.
모래사장에 뒹굴고 있는 시신들.
일본군이 1943년 후퇴하면서 최후 발악을 자행한 흔적들이다.



(1938년)죽이는 방법 시범 실습 현장 장면이다.강변에서 총검으로 살육하는 실습을 자행하고 있다.
이런 현장을 지켜보기 위해 동원된 일본군인들은 관심 깊게 보고 있다.



살이 떨리는 공포.두사람의 양민이 포로가 되어
일본인에게 두손 모아 애원하는 모습이 보이고
일본군은 무엇인가 소리 치고 있다.



산더미 같은 시체. 여성의 하의가 벗겨져 있고
하체에선 선혈이 흘러 나오고 있다.



집단 학살. 가슴에는 죄명아닌 죄명을 달아놓고 사살했다.
얼굴의 선혈을 보아 총살이다.



이성 잃은 일본군. 일본군은 여성의 음부를 손가락으로 장난하고 있다.
전쟁과 관계 없는 일이다. 일본의 숨은 근성을 엿볼 수가 있다.



부녀자 강간. 일본 병사의 손을잡고 애원하는 모습입니다.
이미 젖가슴이 드러나고 반항을 하지만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수난이다.



수장된 시신. 손을 뒤로 묶고 못에 수장을 시켰다.
막대기는 위에서 누르고 있다. 살기 위해 얼마나 바둥 거렸는지 짐작이 간다.



갓난 아기의 죽음. 인형처럼 뒹굴고 있는 아이들의 시체.
일본 놈들은 전쟁으로 이성을 상실 했었다.



너무나도 억울한 죽음. 잡아온 양민들을 표적 삼아 사격 연습을 하고 있다.



부녀자 집단사살. 엄마와 함께 도피 하다가 참변을 당했다.
흐르는 선혈이 계단을 적시고 있다.



집단 사살 현장. 오른쪽 일본군이 죽은 시체를 확인하고 있다.



부녀자 절규. 하체를 강압에 의해.(차마 설명 할수 없음)
손에 실반지가 보인다. 단란했던 가정을 등지고 결국
정신대로 갈것이다. 여성이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은 한숨 뿐이다.



작두로 처형 직전. 작두로 목이 곧 짤러 질것이다.



작두로 목을 짜르고 있다. 작두 앞에 잘려진 목이 하나 보인다.



작두로 수없이 잘려간 양민들의 모습.일본군이 장난 삼아
목이 잘린 시체의 손을 자신의 잘린 목부분을 가르키게 해놨다.
저런 끔직한 일은 일본군에겐 단지 장난에 불과했다.



일본 관동대학살 (1923년)
1923년 일본 관동일원에 대지진이 발생하여 10여만명이 사망 했다
민심이 극에 달하자 일본 정부는 한국인 폭동설을 조작 유포시켜
한국교포 약 5천명을 피살 하였다. (몽둥이,죽창 으로 학살)



창고에서 독살. 엄청난 시체가 당시 혹독한 진실을 보여 주고 있다.



노역자가 운송을 마치면 죽음 이다.
부릴때로 부리고 쓸모가 없어지면 장소와 때를 불문하고 이렇게 죽였다.



3명의 의병 총살 현장.영국여행가 비숍 씨가 촬영한 것이다.
영국왕립 박물관에 소장된 자료.서대문 형무소뒤 야산 공동
묘지에서 독립 의병 3사람이 총살 당하는 모습이다.



일본군들은 지구상에 있는 모든 생명을 말살하기로 한것인다.
어린아이들 까지 죽여 불태워 졌다.
온갖 수단으로 자행한 행위는 사진속에는 피할수가 없다.



독립 투쟁을 벌이다가 집단학살된 유해들.
잔혹한 행위로 소리없이 죽은 영혼은 무엇으로 위로할 것인가?



선량한 양민을 단 칼에 처형하는 지구상에는
하나 밖에 없는 족속들이다.



<죽음 앞에서도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며 당당한 독립투사.



참아 볼수 없는 사진이다.



길거리에서 일본군인놈에게 강간을 당하고 맞어서 내장이 나온 상태.



일본군 종궁 위안부(정신대)의 거실 내부-이곳에서
일본군은 성욕을 채웠다.



근심이 가득한 한국여성. 일본군 위문품을 강제로
하는수 없이 만들고 있다. 이곳에서 강제 노동을
하면서 일본군의 노리게로 끌려 갔다.



종군 위안부에 들어 가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는 일본 병사들.



종군 위안부의 음부를 노출하게 하여 찍은 사진.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는 막사로 실려가는 위안부.



위안부의 휴식시간.



일본병사 근무지에도 불려간 종군 위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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