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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의병의 날 특집]신출귀몰, 태백산 호랑이,일본군이 두려워 했던 신돌석 의병장을 친척이 암살

문화재방송 2020. 6. 1. 06:33

 

<신돌석 장군 기념관 충의사에 있는 초상화>

신돌석 申乭石 / 본명 신태호(申泰浩)1878~1908.
대한제국 시기 항일의병운동의 평민출신 의병장.

 

사람들은 신돌석하면 '신출귀몰, 축지법, 평민 의병장, 태백산 호랑이' 등의 단어를 떠올린다.

그는 '1906~1908년 사이 경상도 영덕을 중심으로 격렬한 의병 전투를 펼친 민족의 영웅이자

신화의 주인공'이었다.

(김희곤, '신돌석; 100년 만의 귀향').

영덕에서 태어난 그는 1906년 22세 때 고향의 주점 앞에서 거병하여 의병대장이 되었다.

자수성가한 아버지가 재산을 털어 군자금을 마련해 주었다.

('의병대장 신공유사', '신장군실기')

 

중학교 국사 교과서의 ‘항일의병 투쟁의 전개’ 부분을 펼치면 신돌석(1878~1908년)에 대해

이렇게 기술해 놓았다.

“을사조약 강요 이후에는 규모가 큰 의병부대가 여러 곳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하였다.

이때 의병장으로 활동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최익현 신돌석 등을 들 수 있다.

평민 출신인 신돌석은 평해·울진·영해 등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는데,

의병수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항일의병 투쟁과정에서 평민 출신인 신돌석이 의병장이 되었다는 사실은

의병운동이 신분을 초월한 국권수호운동으로 전개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영해버스터미널에서 농어촌 버스를 타고 조금만 가면 영덕 아산병원 정류장에 이른다.

이곳에서 400m 정도 걸어가면 신돌석 장군 유적지를 만날 수 있다.

 

<신돌석 장군이 태어난 생가>

<그 당시 평범한 농가였음을 보여 준다.

전북 정읍군에서 보았던 전봉준 장군의 생가와 비슷하다>

 

1, 신돌석 장군의 유년시절

신돌석 장군의 유년시절은 육이당 이중립 선생에게 글을 배우고, 밤이면 남모르게 홀로 병서를 읽었다.

열 살이 지나면서 장대한 청년의 체격으로 성장하여 역발산의 힘을 지니게 되었고, 

15세에는 큰 기와집과  큰 마무를 뛰어 넘을 정도로 날렵하였다고 전한다.

 

2, 김하락 유시연 의병장과 영덕 연합전

1896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으로 을미의병이 일어나자 장군도 만 18세의 나이로

100여명의 동지를 규합해 영해에서 봉기하였다.

이때 의성과 이천지방의 의병장 김하락과 유시연이 경주에서 영덕으로 밀려와

연합전을 요청하자 ,이를 받아들이고 일본군과 강구에서 격돌하였다. 

이 전투에서 승리하던 의병이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에 밀려 패하고 (김하락 의병장 자결)

남은 의병은 일월산으로 후퇴하여 유격전으로 맞섰다.

 

3, 월송정의 시(詩)

고종황제의 권유로 영해의병진을 해산한 신돌석 장군은 10여 년간 전국을 떠돌며

우국지사들과 애국충정을 토로하며 동지들을 규합했다.

어느 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월송정에 올라 낙목에 가로 놓인 단군의 터전을 한탄하며,

조국의 앞날을 걱정해 우국(憂國)이란 시(詩)를 지었다.

 

4, 영릉의병진 창군

1904년 중기의병이 일어나고, 일제의 강압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

1906년 4월 신장군은 부모님과 협의하여 가산을 정리하고

군자금을 확보한 뒤에 영릉의병진을 일으키니 동지가 300여명에 이르렀다.

 

5, 영해읍성 공격

신돌석장군은 전열을 정비한 후 영해읍성을 포위하였다.

성읍에 관군이 사력을 다해 방어했으나 끝내 당하지 못하고 달아났다.

이에 놀란 적은 대구와 경주의 진위대를 영해로 급파했다.

 

6, 일본선박 9척 격침

영릉의병진 창군 후 영해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을 격파한 뒤 그 해 4월,

삼척시 근덕면 장흥관으로 이동하여 정박중이던 일본선박 9척을 격침시켰다.

이 무렵 각지에 격문을 뛰워 의병을 모으니 모여든 의병이 수백명을 넘었다고 한다.

 

7, 이강년 부대와의 연합작전

1906년 11월 11일 신장군은 소백산맥 남쪽 산기슭을 따라 일월산과 예천 사이에서

이강년 의병부대와 연합적전을 폈다.

그 소식을 듣고 대구로부터 일본군 지원대가 진격해 오자, 즉시 울진 방면으로 후퇴하는 등

신출귀몰한 무력투쟁을 전개하였다.

 

8, 경주 동북대산성 전투

1907년 가을에 영양 주곡에서 일본군 1중대를 격파한 뒤, 다시 진보 청송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격퇴하고 경주로 나아가 동북대산성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이때 엄지손가락에 총탄을 맞았으나 동요하지 않고 적을 크게 무찔렀다.

 

9, 장기현에서 일본군 섬멸

1907년 늦가을 연일 장기현에서 일본군이 주둔하여 백성을 괴롭힌다는 첩보를 접하고

신장군은 의병을 이끌고 급히 진격하여 

동해가 내려다 보이는 산상에서 기습공격을 가해 완전 섬멸하고

구룔포, 영일 등지에서 산발적으로 공격해 오는 적을 쳐부수었다.

 

10, 13 도창의군 교남창의대장 추대

1907년 전국의병연합인 13 도창의대진소가 결성되고 이인영이 총대장으로 추대굊고,

신장군은 경상남북도를 합친 교남창의대장에 천거되었으나 가지 않았다.

 

11, 일월산 유걱전

1908년 2월 상주 수비대장 야먀다 소좌는 일월산에 주둔한 신돌석의병부대를 진압하기 위해

영주 안동 예천 등지의 수비군에서 120명의 병력을 선발하여 공격을 했다.

장군은 의병을 소부대로 나누어 유격전으로 대결하였다.

진압에 실패한 일본군은 그가 출몰이 장자재하여 체포할 수 가 없다고 한탄하였다.

 

12, 장군의 최후

1908년 겨울 댁규모적인 일본군의 토벌작전에다 겨울이 다가오니 전력손실이 컸다.

이에 장군은 만주로 이동할 계획을 세우고 의병을 일시 해산한 후, 옛 동지를 만나러 다니다가 

영덕 지품면 눌곡에서 옛 부하이며 고종사촌인 김상력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현상금에 눈이 어두웠던 그의 삼형제는 장군에게 술을 권해 취하게 한 뒤

도끼와 떡매로 장군을 살해했다

그때 장군의 나이 만 30세였다.

<蛇足:웃기는 건 목을 베서 가져가니 정작 일본군은 살아있는 신돌석을 잡아오랬지 

 죽은 신돌석은  필요없다면서 보상 일체를 해주지 않았다는 거다.

배신자들에게 딱 걸맞는 대접이라고 볼 수 있겠다.>

.

의병들이 사용했던 각종 무기

 

여기 디오라마는 울진 우편취급소 공격을 만든것이다.

울진에 전초기지를 건설하려는 일본군의 의도를 파악한 신돌석장군은 이를 봉쇄하기 위해

여러 차례 울진 공략에 나섰다.

울진에 있는 일본인 거류민과 일본 선박을 공격하고, 

당시 화페를 담당하던 울진 우편취급소를 습격하여 의병활동에 필요한 군자금을 확보했다.

 

신돌석장군 일기

 

신돌석장군 건국공로훈장증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을 추서하였다.

 

  

 

신돌석장군

그는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의 후손입니다. 그러나 조선 후기 평민신분으로 전락했다.

1894년 동학 농민운동 발발. 일제의 침략야욕 목도., 확고해진 반일 민족의식.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 1896년 19세에 첫 의병봉기 고향 영해군에 주둔한 일보군 습격

1905년 을사늑약 체결, 1906년 고향에서 다시 거병, 가산을 처분해 의병활동을 지워한 부친.

신돌석의 명성을 듣고 몰려 온 청년들, 경북과 강원도 내륙에서 대활약

 

 

신돌석 장군 월송정 시

 

 

▶경상북도 기념물 제87호 지정 신돌석장군 생가.
시설개요: 면적:18,531m2(유적지 17,084m2, 생가 1,447m2)
사업비 : 4,398백만원
건물내역: 전체 13동(387m2)- 육관 1동, 관리사 1동, 화장실 2동, 사당 1동, 내.외삼문 2동 동.서재 2동, 안내소 1동, 초가 2동, 충의공원 1동
준공일자 : 1999년 11월 18일
찾아오는길 : 7번국도 이용 포항에서 1시간 10분 거리

정보제공자 : 영덕군청 문화관광과 (전화 054-730-6396 / 팩스 054-730-6399)

▶선조들의 숨결 어린 문화재

  "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은 애국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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