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대문 사진;전북 진안의 삼의당 부부 시비
삼의당 김씨.<일러스트=오성수>
▶진짜 내조의 여왕 '삼의당'…"세상의 사내들아, 나는 우리 마누라 눈썹에도 못미친다"
18세기 말을 살아간 삼의당(三宜堂) 김씨(1769~1823)는 재기발랄한 시인이었다. 하지만 이 여인의 인생은 밝지 못했다. '남편 과거 급제시키기'라는 조선시대 절체절명의 성공 코스를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시험을 치는 일이라면 어떻게라도 해볼 수 있겠지만, 오직 남편이라는 대상이 과거에 붙도록 내조(內助)하는 일만이 가능한 시대였기에 사내를 한양으로 보내놓고 애만 끓였다. 그야말로 나비를 통해야만 다른 꽃에 다가갈 수 있는 꽃의 신세 그대로였다. 제 아무리 훌륭한 꽃이라도 나비의 역할이 시원찮으면 만사 풀릴 길이 없다.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 같은 시에 같은 마을에서 태어난, 운명의 남녀
삼의당은 전라도 남원 사람이다. 춘향이 이야기가 감도는 광한루 부근에서 그녀는 한 남자와 눈길을 맞추고 살았다. 혼인을 하지 않은 남녀가 연애를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던 시절이었지만 시골에서는 그렇지만도 않았다. 기생의 딸이긴 하지만 춘향이 이몽룡을 만나는 것은 매파를 넣은 혼담이 오간 이후의 정식 소개팅이 아니지 않았던가.
삼의당에게 하립은 운명의 남자였다. 남자와 여자는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 같은 시에 같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이를테면 사주가 같은 사람이었다. 두 사람이 혼인하기 전 18년 동안 살면서 동네에서는 두 사람이 천생배필이라는 소리가 나왔을 것이다. 지나가는 모습을 엿보기도 했을까. 남녀칠세부동석의 시대에 혼전 연애라니 어림없는 소리 같지만 이쯤 되면 삼의당도 소문을 들어서 기남자(奇男子)를 알고 있었을 것이며 자라면서 그리움과 환상을 키워왔을 것이다.
두 사람에게 결혼은 갑작스럽게 정해지는 강제결합이 아니라, 당시로선 보기 드물게도, 서서히 익어간 마음들의 흐뭇한 귀결이었다. 삼의당과 하립은 부부 시인(詩人)이었다. 내가 보기엔, 재능도 그렇지만 시격(詩格)도 삼의당이 훨씬 뛰어나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 격차와 상관없이 서로의 시를 차운(次韻)하며 즐겼다.
삼의당 김씨.<일러스트=오성수>
▶ 삼의당이 남긴 첫날밤 스토리
우린 '첫날밤'이라는 표현을 대하면, 괜히 야한 장면부터 떠올리기 쉽다. 삼의당은 '첫날밤 스토리(禮成夜記話)’라는 글을 남겼다. 조선시대의 수줍은 신부가 첫날밤에 일어난 일을 기록했다는 것도 놀랍지만 내용은 더 놀랍다. 물론 야동은 아니다.
달 밝은 봄밤, 배꽃 지는 저녁에 남원의 교룡방 기슭 서봉방 김씨 댁에 신방이 차려졌다. 술상을 사이에 둔 신랑신부 앞에는 지필묵이 놓여 있었다. 그들은 시를 주고받고 있었다. 하립이 시를 써서 상 너머로 건네준다.
서로 만난 둘은 필시 광한전의 신선일 겁니다
오늘밤 달이 밝으니 옛 인연을 잇는 거지요
상봉구시광한선(相逢俱是廣寒仙)
금야분명속구연(今夜分明續舊緣)
생년월일시가 같은 두 남녀가 광한루 부근에서 태어나 백년가약을 맺었으니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지 않았을까. 혹시 춘향과 이도령이 환생한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그들도 했을 것이다. 하립은 그걸 모티프로 삼아 시를 썼다.
광한전은 광한루를 말하기도 하지만 원래는 달을 의미하는 비유다. 광한전의 신선은 달에서 놀던 이들을 말한다. 두 번째 행의 '분명'은 '확실히'라는 의미도 되지만 달이 밝은 상황에 대한 중의도 되어 맛이 있다. 달에서 함께 놀다가 내려와 달 밝은 밤에 이렇게 신방에 함께 앉아 있으니 '판타스틱'하지 않은가.
배필은 원래 하늘이 정해놓은 것인데
세상에서 중매쟁이들만 괜히 바빴던 거예요
배합원래천소정(配合元來天所定)
세간매파총분연(世間媒婆摠紛然)
하립의 시는 '범생이'처럼 참 평이하다. 말하는 것과 거의 다르지 않다. 그것이 뜻하는 것도 담담하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라는 노사연의 노래에 필적할 만한 직설이다. 신랑은 이렇게 쓴 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신부에게 술상 너머로 전했다. 가만히 읽어 내려가던 삼의당이 붓을 들었다.
열여덟 청년과 열여덟 처녀가
결혼하여 촛불 밝히는 좋은 인연이 되었습니다
태어난 때가 같고 살아온 마을이 같으니
오늘 밤 만남이 어찌 우연이리까
십팔선랑십팔선(十八仙郞十八仙)
동방화촉호인연(洞房火燭好因緣)
생동연월거동한(生同年月居同한(門+干))
차야상봉기우연(此夜相逢豈偶然)
그야말로 부창부수(夫唱婦隨)다. 차운(次韻)을 해서 답시를 써야 하는 신부로서는 고민할 시간이 필요하겠으나 삼의당은 시원시원하게 써서 넘겼다.
▶ 삼의당이란 호의 뜻은
그녀의 당호 삼의당은 남편이 지어준 것이다. 삼의(三宜)는 '세 가지 마땅함'이라는 뜻으로 충성, 효도, 절개를 지키는 여인이 되라는 하립의 당부였다. 이 당호를 지어주며 남편은 시를 건넸다.
삼의당이 온 뒤 우리 집 온 뜨락이 봄이구나
삼의당외만정춘(三宜堂外滿庭春)
아내가 온 뒤 집안이 화평함을 칭찬한 것이다.
그러자 아내는 이렇게 읊었다.
마음에는 그저 충의만 있을 뿐인데도 집안이 온통 봄으로 가득하구나.
일심충의만가춘(一心忠義滿家春).
묘한 대답이다. 남편은 내조를 잘하는 사람으로 칭찬했는데, 아내는 마음속에 조선 남자의 스케일을 표현하는 충의(忠義)를 드러낸 것이다.
▶ 우리 마누라 맞설 수 있는 사내 있으면 나와봐
첫날밤 두 사람 사이에는 의미 있는 설전이 있었다. 남편이 아내에게 좋아하는 시를 말해 보라고 하자, 삼의당은 두목(杜牧)이 지은 <평생오색선 고보순의상(平生五色線 顧補舜衣裳)>을 들었다.
"평생 오색실로 바느질하여, 순임금의 옷을 돌아보며 깁고 싶구나."
이게 만만치 않은 시다. 순임금은 당시의 정치철학인 주자학의 대표적 성군으로 순임금의 옷을 깁는다는 것은 남성적이고 정치적인 야심을 드러낸 표현이다. 신랑이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이 되어 물었다.
"부인은 어찌하여 이런 시를 고르시오? 남자라면 그럴듯하지만 부인에게는 불가능한 게 아니오?"
그러자 삼의당이 대답했다.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일이 어찌 남자만의 일이겠습니까. 국가로 말하자면 부인이 불충하여 망하지 않은 곳이 거의 드물지요. 달기와 주희가 하와 은을 망하게 했고, 서시와 양귀비가 오와 당을 경국하게 한 것이 모두 여인의 불충 때문이 아니더이까."
약간 고지식한 하립은 이렇게 못을 박았다.
"사람의 도 가운데서 효보다 앞서는 것은 없소. 효도하는 방법을 외우지 않고 어찌 임금에게 충성하는 일만 앞세우는 겁니까?"
"부자 사이는 천륜이니 어버이를 섬기는 도는 사람들이 쉽게 알 수 있지요. 하지만 임금과 신하 사이는 의로써 합하는 것이니 임금 섬기는 충성의 도는 사람들이 지니기 어렵습니다. 쉽게 알 수 있는 것에는 노력을 더하지 않아도 되지만 하기 어려운 일에는 더욱 힘을 쏟아야 합니다. 게다가 임금을 섬겨서 부모를 드러내는 것이 가장 큰 효입니다. 옛날 공자께서 증자에게 이르기를 '입신양명하여 부모를 드러내는 것이 효의 맺음이다'라고 하였으니 효친의 도가 어찌 충군의 도를 앞서겠습니까."
이렇게 세게 나오자 신랑은 손을 들었다. 그러고는 이렇게 시를 읊었다.
"세상의 사내들아 나와보아라/ 우리 마누라 한 명의 충효에 맞설 자 있거든//…….
평생 충효를 떠벌려온 나이지만/ 마누라 눈썹에도 못 미치니 부끄러워라"
(世間幾男兒/忠孝一婦子...平生忠孝意/愧不及娥眉)
▶ 쓰러진 두 집안을 일으키려면 남편 출세 뿐
결혼한 뒤 두 사람에게는 공동목표가 있었다. 하립은 문효공 하연(1376~1453)의 후손이다. 세종과 문종대에 영의정을 지냈던 분으로 가문이 자랑으로 삼는 조상이었다. 또 삼의당은 '조의제문'을 지어 무오사화의 불씨를 지핀 탁영 김일손(1464~1498)의 후손이다.
두 사람의 집안은 400년 전 혹은 300년 전 멋진 조상을 두고 있긴 했지만 그간에 별 볼일이 없었다. 이렇다 할 벼슬을 한 사람이 없었기에 가세도 기울 대로 기울었다. 하립의 아버지 하경천, 삼의당의 아버지 김인혁은 그런 점에서 동병상련이었다. 진양 하씨와 김해 김씨 두 집안의 결혼은 그런 오래된 비원(悲願)의 뜻이 뭉쳐진 의미도 있었다.
삼의당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남편을 출세시키는 것이었다. 당시의 출세길은 요즘으로 말하면 '고시(考試)'밖에 없었다. 이 여인은 남편과 오랜 토론을 한 끝에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철저히 별거하기로 했다. 얼마나 떨어져 살았는가? 16년간 따로 살았다. 그간에 남편 하립이 부지런히 과거에 응시했지만 해마다 낙방했기 때문이다. 이 가엾은 남자는 산사(山寺)에서 책을 읽다가 아내가 너무 보고 싶어 편지를 썼다. 눈만 감으면 꿈에 그녀가 나타나 마음이 어지럽기 때문이었다. 편지를 받은 아내는 답장을 썼다.
"옛사람은 글 읽다 편지가 오면 시냇물에 던져 버렸지요/ 그대를 처음 보내며 이런 뜻을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베틀 위에서 짜던 실이 아직 베가 되지 못했소이다/ 그대 다시는 악양자의 아내가 베를 자르는 것 같이 하진 마소서."
▶ 공부하는 남편은 자꾸 보채시고
그러나 얼마 후 남편은 다시 편지를 보냈다.
"죽기로 결심한 마음인데/ 손에 든 시와 편지가 자꾸만 중얼거립니다/ 밤마다 그리운 생각 어디에 있나/ 오색구름에 단정히 앉아있는 저 미인에게 있네."
다시 매몰찬 답장이 날아왔다.
"여자들이란 여려서 흔히 마음이 잘 상합니다/ 그래서 그리우면 늘 시를 읊는 것이지요/ 대장부라면 당연히 몸이 바깥에 있는 법/ 고개 돌려 규방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신랑은 '그래도 그리운 걸 어떡해' 하고 물었다.
삼의당의 답장은 이랬다.
"편지 속에 그리움(相思)이란 말을 쓰시다니요/ 그건 집안 여자들에게나 있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독수공방을 하면서도 어쩌면 이렇게 의연할 수 있었을까. 그녀는 하립을 자신의 분신이나 대리인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한날 한시에 태어난 사람이니 하립은 바로 삼의당의 '아바타'이며, '남자 삼의당'이다. 여자인 그녀가 조선에서 사회적으로 성취하는 길은 바로 저 아바타를 통하는 것밖에 없지 않는가. 하립이 과거에 합격하는 것은 삼의당 자신의 욕망을 달성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용을 써도 안 되는 데야 어쩔 수 없었다.
이같이 참담한 과거 실패는 하립이라는 사람의 기본적인 재능과 산만하고 우유부단한 성정에도 그 원인이 있었겠지만, 그보다 당시 시험제도의 구조적 부패에도 이유가 있었다는 지적이 있다. 과거를 통해 지방 선비들이 중앙 정계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던 조선의 인재등용시스템은 중기(中期)를 넘어서면서 중앙의 권문세가들이 벼슬이 독점하는 구조로 바뀌어갔다. 시골의 배경 없고 재력 없는 과거 고시생들에겐 상대적으로 크게 불리한 게임일 수밖에 없었다. 하립은 그 벽을 넘어서지 못했던 것이다.
▶ 기생처럼 권주가 부르고, 그리워 눈물이 빗물처럼
과거에 실패한 뒤 낙향한 하립이 다시 시험을 보러 한양으로 떠나는 날, 삼의당은 술상을 차려놓고 마치 기생처럼 권주가를 불렀다.
술을 권합니다
술을 권하니 님은 사양치 마소
유령과 이백도 모두 무덤의 흙이 되었으니
한잔하자 권할 자 없소이다
술을 권합니다
술을 권하니 님은 또 마시소서
인생의 즐거움이 몇 번이나 되겠소
나는 님을 위해 칼춤을 추리라
하립은 이 시를 들으며 말 없이 술만 벌컥벌컥 마셨을까. 참았던 눈물이 술잔 뒤로 주르르 흐르며 아내를 문득 껴안았을 것이다. 여인의 마음속에 깃든 깊고 사무친 동정(同情)이 폐부를 찔렀을 것이다. 이번엔 기어코 해내고야 말리라. 여보, 미안하오. 그렇게 다짐하고 하립은 올라갔다. 삼의당은 남원 땅에서 날짜만 세고 있었다. 시험날이 지났는데 어떻게 되었을까?
문 앞에 백마가 돌아왔네
당연히 서울구름을 밟고 왔겠지
아이를 불러 소식을 물어볼까
요순임금을 만난 이가 누굽니까
답답한데 1년이 지나도 통 무소식이었다.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는 다시 시를 썼다.
그리워 괴로워 그리워 괴로워
닭이 세 번 울고 북은 다섯 번 울고
또록또록 잠은 달아나고 원앙베개만 보네
눈물이 빗물처럼 눈물이 빗물처럼
▶ 여보 내가 죽일 놈이요, 벼슬 포기 합시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고개가 땅바닥까지 처진 남편이 터덜터덜 걸어 대문으로 들어왔다. 삼의당은 버선발로 뛰어나가다가 왈칵 눈물부터 돋았다. 마당에 선 하립이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여보, 내가 죽일 놈이오. 나는 정말 안 되는가 보오.” 그들이 서른 세 살 되던 1801년, 드디어 두 사람은 과거 시험을 포기하기로 했다. 가망 없는 일에 인생을 소모하느니 차리라 깨끗이 꿈을 접고 새로운 삶을 살자는 데에 합의했다.
집안 살림은 더욱 거덜 나 있었다. 땅값이 비싼 남원을 떠나 진안으로 이사를 갔다. 하립이 과거를 포기하자마자 하씨 집안에는 초상이 이어졌다. 맏딸이 죽고, 조카딸이 죽고, 시아버지 하경천이 돌아가고, 그 다음 넷째 동서까지 세상을 떴다. 집안의 기둥이 벼슬할 것을 기대하던 사람들이 모두 낙심한 듯 쓰러지며 줄초상이 난 것이다. 특히 맏딸은 아버지 과거 뒷바라지를 하느라 인생을 바친 처녀였다.
삼의당이 쓴 제문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우리 집에는 심부름하는 아이도 없어 밥 짓는 일도 네가 맡아서 했고 길쌈도 네 몫이었다. 일이 아무리 힘들어도 너는 마다하지 않았고 아무리 어려워도 피하지 않았다. 네가 죽은 지 한 달이 되어 서울에서 청혼서가 왔으니 미처 다 펴보지도 못하고 나는 정신을 잃었노라."
농사꾼으로 살았던 진안 시절은 행복했다. 세상의 욕심을 버리고 들어앉으니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 없다. 야심가 삼의당은 어땠을까? 오히려 농사도 그녀가 더 적극적이었다. 삼의당이 남편을 바라보며 시를 썼다.
고운 노을은 비단 같고 버들은 연기 같아라
사람 사는 곳이 아니라 천국이로다
서울서 10년 바삐 뛰어다니느라 수고하셨소 그대
오늘 초가집에 신선으로 앉으셨구려
'신선'이라고 하니, 결혼 첫날밤 두 사람이 나눴던 시가 생각났을 것이다. 하립도 추억에 잠겨 답시를 썼다.
초가집 사방으로 풍경이 아름답소
저녁나절 시집 펼치며 스스로 즐기니
구구하게 뭘 구할 게 있겠는가
내 몸이 편안한 곳이 바로 신선 아니던가
▶ 농사일도 마누라가 한 수 위였다
가만히 보면 아내의 '신선'과 남편의 '신선'이 조금 뉘앙스가 다르긴 하다. 삼의당은 시골이라도 풍경이 좋은 곳이니 신선이라 할 만하다는 위로이고, 하립은 그놈의 지긋지긋한 시험 굴레에서 벗었으니 그 기분이 바로 신선이라는 얘기다. 그들은 햇살이 잘 드는 산모퉁이 땅을 사서 모내기를 했다. 농사일도 하립보다 삼의당이 더 잘했다.
당신이 잡은 모는 한 자도 못 되는데
내가 잡은 모는 손바닥같이 평평하네요
모 싹의 힘이 고르지 않은 게 아니니
고르지 않다고 물에 버리지는 마세요
1810년 9월 42세의 하립이 드디어 향시에 합격했다. 그때까지도 꿈을 버리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본시험인 회시를 보기 위해 서울로 갔다. 삼의당은 등뒤에서 이렇게 시를 읊었다.
"다시 서울로 웃음 지으며 가는 그대/ 여관에서 눈물 만들어 돌아오지 않기를."
이 시험을 본 뒤에 하립은 웃고 왔을까, 울고 왔을까? 이후 삼의당의 시는 보이지 않는다. 마흔이 넘어 늦둥이 아들을 얻었고 그녀는 끝까지 농사꾼의 아내로 살았다.
▶ 남편은 죽 쒔지만, 그래도 출세는 포기 못해
삼의당이 둘째딸을 시집 보낼 때 적어준 계녀서(戒女書:딸에게 조심할 것을 부탁하는 글)는 조금 엉뚱해 보인다.
"지금 우리 순찰사가 임금님의 명을 받고 와서 호남에 교화를 편지 2년 만에 이 고을에는 좋은 다스림의 유풍이 퍼져 있고 시골에도 세상살이에 대한 탄식이 없으니, 소남(召南)의 교화를 오늘날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더욱이 그 은혜를 많이 입고 또 너를 순찰사 가까이 계신 곳으로 보내게 되었구나."
이게 무슨 얘기일까? 삼의당이 시골 농투사니가 되어 생활하면서도 야망과 자부심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라 할 만하다. '우리 순찰사'라고 불린 사람은 전라감사 심상규를 말한다. 아마도 둘째딸은 전라감영이 있던 전주 부근으로 시집을 간 모양이다. 딸에 대한 훈계를 하지 않고, 저 권력실세를 들먹이고 있는 모습은 묘한 감회를 불러일으킨다. 삼의당은 한때 남편을 출세시키기 위해 친정 집안과 세교가 있던 정치가 심상규를 찾아가 만나게 했다. 과거란 것이 정치적 배경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난 이후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시기가 좋지 않았다. 1796년 심상규는 웅진현감으로 좌천되었다. 하립은 웅진으로 그를 다시 찾아갔다. 삼의당은 그곳의 문중 사람을 동원해 웅진현감에 대한 좋은 여론을 만들어 심상규의 마음을 사라는 코치까지 했다. 그런데 정치적 곤경에 빠진 심상규는 1801년 남원에 유배되고 만다. 하립이 과거를 드디어 포기했을 무렵의 일이다. 해배되어 서울로 돌아간 심상규는 1805년에 전라감사가 되어 전주로 왔다.
둘째딸이 시집을 가는 것은 두 해 뒤인 1807년이니 진안 시골 생활을 6년 정도 했을 무렵이었다. 그녀는 짐짓 신선처럼 산다는 말을 했지만 마음속에는 세상의 권력을 향한 센서를 여전히 열어두고 있었다. 결국 남편도, 집안도 일으키지 못한 채 1823년 생을 마감했다. 그녀는 스스로의 사회적 성취가 크지 못했다고 쓸쓸한 눈으로 생을 돌아보았을까?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삼의당은 조선이 낳은 빼어난 감각파 시인이었다.
▶ 유럽에 살았다면 바이런과 셸리가 울고갔을 감성
뽕 따는 성남의 언덕
가늘가늘 흰 손이 살짝 나왔네
소년의 휘둥그레 놀란 눈
훔쳐보네 괜히 오래 머물며
採桑城南陌 纖纖映素手 少年飜驚目 相看住故久
채상성남맥 섬섬영소수 소년번경목 상간주고구
뽕 따는 여인을 슬며시 지켜보는 한 소년의 눈길을 빠른 스냅으로 잡아챘다. 이 시 한 수로 그 시대의 감수성이 얼마나 발달해 있었는지 알 만하다. 이런 시인이 유럽에 있었다면 바이런, 셸리, 키츠가 울고 갔을지 모른다.
아시아경제 티잼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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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asiae.co.kr/article/2017060214585821174
[여자의 역사①] 조선음식 146가지 레시피를 남긴 장계향
원문보기 http://www.asiae.co.kr/article/2017050913592743457
[여자의역사②]몽골을 삼킨 고려여인, 기황후는 왜 이 땅의 원수가 됐나
원문보기 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7051110262768257
[여자의역사③]도끼를 옆에 놓고, 왕에게 '적폐청산' 상소 올린 15세 기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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