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파 방정환선생 동상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어린이에게 10년을 투자하라" 고 말씀하신 방정환 선생님
어린이대공원 숲 속 무대 뒤편 언덕에 방정환선생님의 동상이 있는데요, 책 속에서 봤던 그 동상이 숲 속 무대 계단 뒤에 세워진 것을 발견하고 어찌나 반갑던지요. 그리고, 숙연한 마음으로 소파 방정환선생님 상 앞에 섰습니다.
방정환 선생은 일제 강점기 때, 어린이 잡지를 만드셨고, 연극, 이야기 잔치, 강연회 등 어린이를 위한 많은 일을 하셨을 뿐만 아니라, 일본 도쿄에서 뜻을 같이 하는 젊은이들과 ‘색동회’를 조직하여 어린이 운동에 앞장 선 것도 빼놓을 수 없는 그 분의 공적 중 하나지요.
방정환 선생은 1917년 천도교 3대 교주인 손병희 선생의 셋째 딸과 결혼을 했고, 그의 사위가 되어 보성전문학교 (지금의 고려대학교)에 입학하여 가난으로 중단할 수 밖에 없던 공부도 계속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후 방정환 선생은 뜻을 같이한 친구들과 '경성청년구락부'를 만들어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토론하기도 했고, 집에서 몰래 <독립신문>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잡혀가기도 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어린이야말로 나라의 희망이자 미래임을 깨닫고 '인내천'을 가르치는 천도교 내에서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이러한 생각을 나누었습니다.
1920년 9월, 방정환 선생은 천도교에서 펴내는 잡지 <<개벽>>의 특파원이자, 도쿄의 천도교 청년회 담당자로 일본에 가게 됩니다. 도요대학에서 공부도 계속하였는데 이 때, 우리보다 서양 문화의 영향을 먼저 받은 일본에는 어린이를 위한 책이 참 많다는 것을 발견하고 조선의 어린이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귀국 후,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 운동 모임인 '색동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색동회는 1923년 5월 1일을 제 1회 어린이날로 정했고, 방정환 선생은 강연회가 열릴 때마다 재미있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구연동화로 생생하게 들려주며 아이와 어른 모두 다 귀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이'라는 말은 방정환 선생님 덕분에 생겨난 말입니다. 그전까지만 해도, 아이를 부르는 말은 '녀석'이나 '놈' 같은 하대하는 말뿐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어린아이를 대접하여 귀하게 부르는 ‘어린이’라는 말을 만들어 널리 알리게 되었습니다.
이토록 어린이를 사랑하였던 방정환 선생님은 33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였고, 지금까지 명실공히 '어린이의 아버지' 라 불리고 있습니다.
능동 어린이대공원에는 어린이헌장비가 두 개 있는데요, 하나는 1957년 5월 5일에 제정ㆍ선포된 어린이헌장비이고, 다른 하나는 1988년 5월 5일에 개정된 어린이헌장비입니다.
너무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내용의 어린이헌장의 내용이지만 이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되기까지 그 밑거름을 주신 분, 방정환 선생님이 계셨음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어린이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대표적인 글로 '어린이 헌장'이 있습니다. 1957년 5월 5일 어린이날 전문(前文)과 9개 항의 헌장을 마련한 것을 1988년 제66회 어린이날을 맞아 내용을 전문과 11개 항으로 전면 개정, 수정 공포하였지요.
'대한민국 어린이 헌장은 어린이날의 참뜻을 바탕으로 하여, 모든 어린이가 차별없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니고, 나라의 앞날을 이어나갈 새 사람으로 존중되며, 아름답고 씩씩하게 자라도록 함을 길잡이로 삼는다'
어린이 헌장 전문(前文)입니다.
사실 '어린이'란 말도 예전에는 없던 말이었습니다. 1920년 소파 방정환 선생이 처음 사용한 말이지요. 처음 그 단어가 생겼을 때는 생경스런 말이었답니다. 배곯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당시 어린이를 가리키는 말로는 '애들', '어린아', '얼라', '어린애', '어린애기' 등과 한자어로 소아(小兒)·유아(幼兒)·동치(童稚)·유몽(幼蒙) 등이 있었습니다.
어린이란 말은 '늙은이'처럼 '높은 사람'의 의미를 갖고 있는 '이'를 '어린'이란 글자에 붙여 '어린이'를 존중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어린이란 글자를 사용하면서 1923년 5월 1일 어린이날 행사를 전국적으로 처음 치르게 됐습니다. 5월 1일이 노동절이기에 1927년부터 5월 첫째 일요일을 어린이날로 행사를 치르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1939년 중단되었습니다. 1946년 부활된 어린이날은 1961년 공식적으로 어린이날로 정하고, 1975년부터 휴일로 지정되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국민소득의 성장만큼이나 어린이들에게 대한 예우는 달라졌습니다. 일 년에 하루 '어린이날'만 그야말로 어린이들을 위해 어른들이 노력한 예전에 비한다면 지금은 과잉보호랄 정도로 매일매일 어린이날이나 다름없는 시대입니다.
어린이가 있는 집을 방문해보면 집안 분위기를 온통 어린이 중심으로 꾸며져있지요.
많은 책과 고운 색깔의 옷, 하물며 방 전체를 장난감 방으로 꾸며놓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어린이를 위해 외식과 나들이를 아낌없이 합니다.
그런데 이런 풍경 이면에는 상대적 빈곤에 빠져 있는 어린이들도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입니다.
부천 초등생 사망 사건, 계모에 의한 원영이 살인 사건 등에서 보듯 우리 사회는 어린이에 대한 학대, 그리고 가난에 따른 상대적 빈곤이 눈에 드러나지 않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5월을 맞으며 가정과 기관, 관변 단체에서는 '어린이 헌장'11항을 기도하듯 여러 사람과 낭송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린이는 우리의 내일이며 소망이다.
나라의 앞날을 짊어질 한국인으로,
인류의 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는
세계인으로 자라야 한다'
어린이대공원
서울 컨트리클럽의 골프장 부지였던 총 0.72㎢의 대지에 울창한 수림과 잔디광장을 비롯해 각종 시설물을 조성하여, 1973년 5월 5일 어린이날에 개장했다. 이곳은 순종의 비인 순명황후 민씨의 능터였던 유강원(裕康園) 자리로, 석물·석상·지석(誌石) 등이 남아 있다.
그동안 공원면적이 축소되어 1990년 현재의 면적은 0.59㎢로 수림지구 0.22㎢(38%), 잔디지구 0.18㎢(30%), 시설지구 0.19㎢(32%)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당시 창경원 외에는 어린이들을 위한 놀이시설이 없던 서울시민의 새로운 가족 단위 휴식공간으로 큰 역할을 하여 왔다. 공원 내에는 동화실·과학실·미술실·민속실·영사실 등이 있는 '새싹의 집', 120여 종의 동물 3,000여 마리를 수용하고 야외방사장을 갖춘 동물원, 360종 4,300여 그루의 식물이 있는 식물원, 한강민물고기전시장 등이 있다.
다채로운 놀이시설로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높은 놀이동산과 5,000여 명이 관람할 수 있는 야외음악당이 있다. 어린이대공원 옆에는 재단법인 육영재단에 의해 1975년 10월에 개관한 어린이회관이 있다.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우리가 자라면 나라의 일꾼
손잡고 나가자 서로 정답게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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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들의 숨결 어린 문화재
"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은 애국심입니다"
www.문화재방송.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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