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문화재방송.한국 www.tntv.kr

문화유산 답사기

[문화유산 답사기] 국보 제76호 '亂中日記'의 현장을 가다

문화재방송 2020. 10. 18. 22:41

충무공 이순신 장군 표준 영정(아산 현충사)
일생 단 한 번 보기도 어렵다는강릉 오죽헌의 대나무꽃을 충무공 이순신 장군 영전에 올립니다(사진=강릉시청 제공)

자료 출처 월간조선  http://simjeon.kr/xe/21258

李舜臣의 常勝 뒤에 숨은 절대 고독

● 국보 제76호 亂中日記(아산)
● 국보 제304호 鎭南館(여수)
● 국보 제305호 洗兵館(통영)

軍艦, 상륙정, 여객선, 시외버스, 개인택시를 번갈아 타고 亂中日記에 기록된 李舜臣의 戰勝地 남해안과 多島海 횡단 답사 7박8일. 劣勢함대로 優勢함대를 격파, 壬辰倭亂을 勝戰으로 종결시킨 李舜臣의 常勝戰略을 추적했다

글 : 鄭 淳 台 月刊朝鮮 편집위원〈st-jung@chosun.com〉
사진 : 韓 相 一 자유기고가

 

順天鄕大學 李舜臣연구소 찾은 까닭

7월22일 새벽부터 폭우가 쏟아졌다. 아침 7시20분 서울고속버스터미널에서 한상일 기자와 만났다. 溫陽(온양) 가는 고속버스는 7시30분 정각에 출발했다(1인 요금 5000원). 오전 9시, 온양에 도착하여 터미널 부근에서 잠시 요기하고 택시 편(요금 1만원)으로 牙山市(아산시) 신창면 읍내리 소재 順天鄕(순천향)대학교에 내려 부설 「李舜臣(이순신)연구소」로 찾아갔다.

오전 10시, 이순신연구소 소장 權淳庸(권순용) 교수와 연구위원 이건영·박현규 교수를 만났다. 필자는 이번 亂中日記(난중일기) 현장 답사기간(7월22∼29일) 가운데 처음 2박3일간을 순천향대학교에서 주최하는 「李충무공 전승지 해상·국토 순례」(7월22∼26일)를 따라가기로 했다. 순례에는 전국에서 지원한 고교생 104명 그리고 순천향大 학생 21명 등 모두 165명이 참가한다.

오후 1시, 순례단원들은 순천향대학교 강당에 집합했다. 오후 3시, 관광버스 세 대에 분승한 순례단은 아산시 염치면 백암리 사적 제155호 李忠武公 遺墟(이충무공 유허)에 도착했다.

이곳의 성역화는 1966년, 朴正熙(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주도로 이뤄졌다. 境域(경역)이 10만여 평으로
크게 확장되고, 顯忠祠(현충사)와 유물전시관이 새로 건립되었다.

먼저 李충무공의 영정을 모신 사당 현충사로 갔다. 사당 안에는 장우성 화백이 그린 장군의 영정이 중앙에 모셔져 있다. 단아한 선비의 모습이다. 벽면에는 문학진·정창섭·장우성 화백이 합작으로 그린 「한산대첩도」 등 기록화 10폭이 전시되어 있다. 한글 현판 「현충사」는 朴正熙가 썼다. 순례단은 빗발을 피해 처마 밑에 도열하여 조별로 참배했다.

이곳에 이순신의 사당이 처음 설립된 것은 숙종 32년(1706)이었다. 이듬해 왕은 현판 「顯忠祠」를 내렸다.


亂中日記는 水軍 지휘를 위한 메모

이어 유물전시관으로 갔다. 이곳엔 국보 제76호 亂中日記를 전시하고 있다. 난중일기는 충무공 이순신이 임진왜란·정유재란을 겪으면서 쓴 일기다. 난중일기가 시작된 날은 선조 1592년, 곧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 음력 1월1일(이하 이순신 및 壬亂 관련 일자는 모두 음력)이다. 일기가 끝난 날은 왜적과의 마지막 싸움에서 전사하기 이틀 전인 1598년 11월17일이다.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은 武官이면서도 달필이며, 文體(문체)는 간결체다. 後世(후세)의 누군가가 읽을 것을 의식하여 쓴 글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일기에는 왜(why), 어떻게(how) 등을 과감하게 생략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순신 연구로 저명한 키타지마 만지(北島萬次) 日本公立女大 교수는 『난중일기는 이순신이 조선 水軍을 지휘하기 위한 메모』라고 평한 바 있다.


난중일기에는 「조선왕조실록」에 나오지 않는 얘기가 많다. 조선 水軍의 현황과 왜란에 대처하기 위한 준비, 특히 이순신 휘하의 목수·石工·弓匠(궁장) 등 職人(직인), 노비, 피난민, 승려, 병졸 등의 역할도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다.

난중일기는 바쁜 陣中생활 틈틈이 기록한 것이지만, 문장이 유려하다. 그는 兵法書(병법서) 한 권을 손에
잡으면 하룻밤을 밝혀 독파하는 독서인이었던 만큼 그런 문장력을 구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국보 제76호의 정식 명칭은 「李忠武公 亂中日記 附 書簡帖 壬辰狀草」(이충무공 난중일기 부 서간첩 임진장초)다. 그가 상부에 전황을 보고하고 지시를 청한 문서인 壬辰狀草, 가족·친지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書簡帖과 더불어 국보 제76호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李충무공의 유물로는 장검 2점, 玉鷺(옥로: 갓 위에 다는 해오라기 모양의 玉 장신구) 1점, 腰帶(요대) 1점, 桃盃(도배) 1쌍 등이 전시되고 있는데, 보물 제326호로 일괄 지정되어 있다
. 장검은 1594년 4월 閑山島(한산도) 진중에서 太貴連(태귀연), 李茂生(이무생)이 만든 것으로, 칼몸에 다음과 같은 이순신의 친필 劒銘(검명) 16자가 새겨져 있다.

三尺誓天 山河動色(석자 되는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물이 떨고)

一揮掃蕩 血染山河(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인다)



牙山은 어머니의 친정 있던 곳

「李충무공 유허」에는 그가 기마술을 연마했다는 치마장, 궁술을 연마했다는 활터,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온 宗家(종가)와 旌閭(정려)가 있다. 이순신의 셋째 아들로서 1597년 牙山에 침범한 왜군과 맞서 싸우다 21세의 나이로 전사한 이면의 묘도 있다.

현충사 참배를 끝내고 순례단은 李충무공 묘소로 이동했다. 묘소는 현충사에서 9km 떨어진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 중턱에 있다. 묘소 참배를 끝내고 순천향대학교로 되돌아왔다. 고교생·대학생들과 어울리는 일은 매우 즐겁다. 순천향대학교 기숙사에서 1박했다.

이순신은 1545년(인종 원년) 3월8일(음력·이하 동일) 서울 乾川洞(건천동: 지금의 중구 인현동 1가)에서 德水(덕수) 李씨 貞(정)의 4남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지금, 그의 생가 터에는 왕년의 名배우 신영균씨 소유의 명보극장이 들어서 있다. 소년기 이순신의 행적에 관해서는 동네아이들과 함께 南山에 올라가 전쟁놀이를 하면서 대장 역할을 했다는 정도의 일화 이외엔 이렇다 할 기록이 없다.

그는 소년기에 충남 牙山으로 이주했다. 그렇다면 이순신 집안의 형편을 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순신의 조부 白祿(백록)은 깨끗한 선비로서 명망이 있었는데, 中宗(중종) 때 급진 개혁주의자 趙光祖(조광조) 일파를 숙청하는 己卯士禍(기묘사화)에 얽혀들어 큰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그의 아버지 李貞은 스스로 결심한 바가 있어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白頭(백두: 평민)로 지냈다.

이순신의 어머니는 草溪(초계) 卞씨 守琳(수림)의 딸로 그녀의 친정이 아산고을 백암리(지금 현충사가 있는 뱀밭 마을)에 있었다. 서울생활이 어려워지자 李貞은 부인의 친정이 있는 이곳으로 옮겨 살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이순신에게는 외가인 牙山 백암리가 그의 고향처럼 되어버렸다.

牙山 이주 당시 이순신의 나이에 대해서는 8세, 13세, 16세, 18세 說(설) 등이 있는데, 필자는 열여섯 전후로 추측한다. 왜냐하면 1591년 좌의정 柳成龍(류성룡)이 『이순신과는 이웃에 살아 일찍이 그의 인물됨을
잘 안다』면서 그를 宣祖에게 임란 1년2개월 전 전라좌수사로 천거했기 때문이다.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의 품성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천거하려면 적어도 청년기 초입까지는 지켜보아야 할 것 아니겠는가? 류성룡은 이순신보다 세 살 위로서 이순신의 둘째 형 堯臣(요신)의 친구였다.

 

李舜臣이 걸어온 軍人의 길

牙山에서 이순신은 21세 때 寶城(보성) 군수를 지낸 방진의 딸과 결혼했다. 방진은 武班(무반) 출신으로 이순신의 인생행로에 상당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그가 무예에 뜻을 두고 騎射(기사) 연습과 병법서 연구에 정진한 것은 결혼 이후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壬亂 직전까지 그가 걸어온 군인의 길을 간단하게 짚어 보아야 난중일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1572년(선조 5년) 8월, 그는 28세의 나이로 훈련원 別科(별과) 시험에 응시했다. 시험 도중에 落馬(낙마)하여 불합격했다. 4년 뒤인 1576년(선조 9년) 봄 2월, 32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했다. 성적은 합격자 28人 중 중간 정도인 丙科(병과)의 제4등이었다. 그런 정도의 성적이라면 종전 같으면 實職(실직)을 제수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시대가 어수선하여 武官의 수요가 늘어난 것 같다. 북쪽 변경에서는 여진족의 침입이 잦았고, 남쪽 해안 지방에서는 왜구가 준동했다. 급제 10개월 만인 그 해 12월에 그는 함경도 童仇非堡(동구비보)의 權管(권관: 종9품)이 되었다. 당시로선 어지간히 나이 먹은 초급장교였다. 그 후 그는 함경도의 변경과 훈련원의 하급직 등을 전전했다.


1580년 7월, 36세 때 전라도 鉢浦(발포: 지금의 전남 고흥군 남단)의 水軍萬戶(수군만호)로 올랐다. 萬戶라면 종4품 무관직이다. 그러나 武官 천시 풍조 때문에 종4품 만호에서 종6품인 현감으로 전보되어도 榮轉(영전)으로 치던 시대였다.

그런 발포만호 재직도 불과 1년8개월로 끝났다. 1582년 1월, 서울로부터 軍器敬差官(군기경차관)이 내려와서 軍器 관리를 잘못했다고 트집을 잡아 그를 파직시켰기 때문이다.

「원칙장교」였기 때문에 그의 하급 武官시절은 대체로 불우했다. 그는 時俗(시속)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먼 친척이었던 栗谷 李珥(율곡 이이)가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한번 만나자고 해도 『그가 인사권을 맡아 보는 자리에 있는 동안에는 찾아뵐 수가 없다』고 거절했다. 발포만호 자리에서 쫓겨난 일만 해도 그의 훈련원 奉事(봉사: 종8품) 재직 시절에 그의 상관이었던 徐益(서익)이 그의 항의로 情實人事를 하지 못한 데 앙심을 품고 있다가 배후조종을 했기 때문이라는 說이 있다.

이순신은 그해 5월에 복직하여 다시 훈련원 봉사가 되었다가 1583년 7월에 함경도 병사 이용 막하의 군관이 되었다. 다시 그해 10월에 함경도 乾原堡(건원보: 지금의 경원군) 權管이 되어 여진족 鬱只乃(울지내)의 침입을 막아 공을 세웠다. 다음달 11월에 정례승진으로 훈련원 參軍(참군: 정7품)이 되었으나 15일 아버지가 73세를 일기로 작고하여 고향 牙山으로 내려가 3년상을 치렀다.

 

첫 백의종군

1586년 1월, 42세 때 복직하여 함경도 造山堡(조산보) 만호로 부임했다. 다음 해 8월에는 鹿屯島(녹둔도: 지금 러시아와의 국경지대)의 屯田官(둔전관)을 겸임했다. 그해 가을 식량약탈을 노린 여진족이 대거 남침하여 많은 양민을 학살했다. 기습을 받은 이순신은 이들과 맞서 싸워 포로가 된 양민 60여 명을 구출했다.

그러나 함경도병사 李鎰(이일)은 이순신의 병력
증원요청을 묵살한 자신의 과실을 덮기 위해 피해의 책임을 이순신에게 돌려 그를 옥에 가두고 사형에 처할 것을 조정에 상신했다. 조정에서는 이순신의 억울함을 알았지만, 일단 그에게 책임을 물어 白衣從軍(백의종군)을 하라고 명했다.

1588년 윤 6월에 北邊(북변) 생활을 청산하고 귀향, 한거하던 그는 이듬해 2월, 전라도 순찰사 李洸(이광)에게 발탁되어 군관이 되고, 11월에 선전관을 겸했다가 12월에 井邑縣監(정읍현감: 종6품)이 되니 그의 나이 45세 때였다.

임진왜란 1년2개월 전인 1591년 2월에 珍島郡守(진도군수)로 임명되어 부임도 하기 전에 加里浦(가리포: 지금의 완도읍) 첨사로 전직, 그것 역시 부임하기도 전에 같은 달 12월 전라좌도 수군절도사(水使)로 임명되어 左水營(좌수영: 지금의 여수)에 부임했다. 불과 13일 사이에 종6품 현감에서 정3품 수군절도사로 6계단을 뛴 것이다.

왜 이런 파격 승진이 가능했던 것일까? 그만큼 시대의 풍운이 급박해졌기 때문이었다. 일본 전국의 통일정권을 이룩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중국과 인도를 아우르는 「大아시아帝國 건설」이란 허황한 꿈을 꾸면서 조선에 대해 明나라를 치러 가겠으니 길을 빌려 달라고 협박하고 있었다. 조선으로서도 전란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 조정은 將材(장재)를 찾았다. 좌의정 류성룡이 이순신을 강력히 천거했음은 앞에서 썼다.

 

전략가인 동시에 유능한 행정가

7월23일 아침 5시30분에 기상하여 일조점호를 한 다음 기숙사 식당에서 아침을 먹었다. 오전 7시 관광버스에 승차, 남하하여 정오 무렵에 해군사관학교에 도착했다. 오후 2시, 예행연습을 거쳐 입교식을 마쳤다.

이어 海士 부두에 정박해 있는 實物의 2분의 1인 거북선에 올라 그 내부를 참관했다. 거북선은 왜군이 長技(장기)로 삼는 登船肉薄戰(등선육박전)을 막기 위해 당시 조선 水軍의 主力 戰船인 板屋船(판옥선)의 갑판 위에 철판을 둘러씌운 돌격선이다.

박물관도 둘러보았다. 현재 두 개 남아 있는 天字銃筒(천자총통) 중 하나도 소장하고 있다. 천자총통은 壬亂 당시 海戰에서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던 대형 화포다.


석식 후에는 李敏雄(이민웅) 해사 교수로부터 강연 「이순신과 리더십」을 들었다. 현역 해군소령인 李교수는 2002년 논문 「임진왜란과 海戰史(해전사) 연구」로 서울大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소장 학자이다. 필자의 면담 요청에 그는 『마침 당직근무이니 밤 8시30분 교수연구실에서 만나자』고 했다. 다음은 李교수와의 대담 요지이다.

―이순신은 어떤 유형의 장수라 해야 할까요.

『智將(지장)이죠』


―난중일기의 이순신과 三國志(삼국지)의 諸葛亮(제갈량)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어요. 둘 다 將帥(장수)인 동시에 뛰어난 행정가였죠. 屯田(둔전)을 만들어 군량을 자급자족하고, 兵器(병기) 개발에도 적극적이었으며, 信賞必罰(신상필벌)에 철저했어요.

『난중일기와 壬辰狀草를 읽어 보면 이순신은 대단한 지적 능력을 가진 장수인 데다가 휘하에 유능한 지휘관과 참모를 두었어요. 勇將 녹도만호 鄭運(정운), 경상도 물길에 능통한 광양현감 魚泳潭(어영담), 순천부사 權俊(권준), 방답첨사 李純信(이순신), 사도첨사 金浣(김완) 등을 적재적소에 배치·활용했거든요. 이순신의 屯田(둔전) 경영과 관련해 주목할 인물은 丁景達(정경달)입니다. 善山府使(선산부사) 재직시 능력을 발휘한 그를 이순신은 從事官(종사관)으로 스카우트하여 屯田의 경작을 맡겨 성공을 거두었어요. 이순신으로선 제일류 병참참모를 곁에 둔 겁니다』


 

日本 軍船을 압도한 板屋船과 銃筒

―이순신의 리더십도 탁월했지만, 화포·戰船(전선) 등 무기체계에 있어서도 이순신 함대는 일본 함대를 압도했습니다.

『이순신의 뛰어난 점은 미리 준비하는 자세입니다. 壬亂을 앞두고 거북선 제조, 화기검열, 군사조련, 군기확립 등 대비에 철저했음은 난중일기에 잘 기록되어 있잖아요. 조선 수군은 건국 이래 왜구에 대한 방비책으로 국왕과 조정의 주도下에, 즉 국가적 차원에서 통일성을 갖고 발전된 것이 특징입니다. 태종과 세종代에는 화기의 개발과 군선 개량에 노력을 기울였어요. 특히 明宗 10년(1555) 乙卯倭變(을묘왜변)을 계기로 板屋船(판옥선)과 대형 총통이 개발되어, 이것이 임진왜란 해전의 핵심 무기체계가 되었습니다』


―板屋船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배의 밑면이 평탄한 平底船(평저선)이죠. 평저선은 尖底船(첨저선)에 비해 물 속에 잠기는 吃水(흘수)가 깊지 않고 선회반경이 작아 배의 움직임이 자유로운 것이 특징입니다』

―판옥선의 핵심부분인 板屋의 구조는 어떠했습니까.

『갑판 위에 上粧(상장)갑판을 설치하고 그 좌우에 女牆(여장: 성가퀴)을 설치한 겁니다. 이 구조는 戰船에 승선한 전투원과 非전투원을 구분하여 전투원은 上粧갑판 위에, 非전투원은 上·下 갑판 사이에 위치하도록 함으로써 적의 공격에 노출되지 않는 장점이 있었죠』

―판옥선의 크기는 얼마쯤 되었을까요.

『壬亂 당시 사용된 戰船의 크기에 관한 기록에 의하면 일반 판옥선의 경우 底板(저판)의 길이가 15∼21m였습니다. 승선인원은 100명 안팎이었죠』

―일본의 주력 軍船(군선)인 安宅船(안택선: 아타케)이나 關船(관선: 세키부네)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판옥선은 일본의 아타케나 세키부네에 비해 선체가 높아 왜구 이래 일본 수군의 자랑인 登船肉薄戰術(등선육박전술)을 어렵게 한 것이죠. 또 판옥선은 일본 軍船에 비해 강한 구조를 가졌어요. 外板(외판)의 겹이음 구조와 木釘(목정; 나무못)을 이용한 결과, 강도에서 일본 軍船을 압도한 거죠』


―일본 군선은 구조물의 이음새 부분을 凹凸로 만들어 서로 끼우고 「ㄷ」자 형 꺾쇠로 양쪽을 이었죠. 건축가들은 그걸 우리말로 「사춤 넣기」, 영어로 Dove-tail join이라고 하더군요. 일본 함선은 우리 판옥선과 부딪치기만 하면 깨져 버렸죠.

『난중일기에 「中船」이라고 표현된 關船은 壬亂에 참전한 일본 군선들 중에 가장 많았는데, 조선의 판옥선보다 크기와 높이가 모두 작았죠. 이 때문에 일본 수군은 판옥선에 뛰어올라 그들의 장기로 삼는 칼싸움을 벌이는 데 실패했고, 오히려 높은 위치에서 날아오는 판옥선의 화살 공격에 고전했던 겁니다』

―난중일기에 「大船」이라고 표현된 安宅船은 어떠했습니까.

『크기는 대체로 조선의 판옥선과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안택선은 대개 大將船이거나 指揮船(지휘선)이었기 때문에 조선 수군의 집중 공격을 받았고, 특히 갑판 위의 2·3층 누각은 화포 공격의 타깃이 되었어요』



火砲에서 日本水軍 압도

―판옥선과 安宅船, 어느 쪽의 속력이 빨랐다고 보십니까.

『당시 양국 軍船 간에 속도 차이는 별로 없었습니다. 선박의 속도는 櫓役(노역) 방법과 帆裝(범장)에 의해서도 좌우됩니다. 판옥선은 돛이 두 개인데, 일본 군선은 대개 하나였어요. 또 판옥선의 경우 櫓 한 자루에 4∼5명이 배치되었는데, 일본 군선에서는 한 명이 원칙이었습니다』

―일본 수군은 해적 집단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겠죠. 예컨대 히데요시의 직속 水軍을 대표하는 구키(九鬼嘉隆), 해전에서 이순신 함대와의 전투에서 사살된 구루시마(來島通之) 형제, 그 밖에 스가(菅達長), 호리우치(堀內氏善) 등 다수의 수군장들이 해적 출신이었거든요.

『일본의 해적 집단들은 戰國시대를 지나면서 통일정권 휘하의 직속 수군, 혹은 지방 다이묘에 속한 수군으로 재편되었죠. 이러한 이중적인 구조는 壬亂에 참전한 수군 편성에도 그대로 이어졌는데, 이것이 일본 수군이 통일적인 지휘체계를 확립하지 못한 한계점으로 작용했습니다』

―왜군은 이미 3교대에 의한 연속사격 등의 전술에 숙달해 있었죠. 일본은 1543년 種子島(종자도)로 표류한 포르투갈 상인들로부터 鳥銃(조총)을 입수한 이래 꾸준히 개량하여 實戰(실전)에 사용하면서 대량생산체제에 들어갔어요. 임진왜란 도발 당시 조총은 세계에서 가장 명중률이 높은 소총이었습니다. 조총을 가진 왜군은 육상전투에서 연전연승했는데, 왜 이순신 함대와의 해전에선 연전연패했을까요.

『조총의 명중률이 높다지만 물결 때문에 흔들리는 해상에선 조준사격이 어렵고, 유효사거리도 50m여서
조선의 화포에 비해 위력과 사정거리가 뒤졌거든요. 조선은 1555년 을묘왜변 이후 1563년(명종 18년)까지 화포 제조에 거국적인 노력을 기울여 적어도 10만 근 이상의 銅鐵(동철)을 소비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특히 명종 12년부터는 해전에 사용할 天·地·玄·黃字 등의 대형 화포를 제작했는데, 이때 만든 총통류가 임란 해전에서 사용되었어요』

―그런데도 임란의 초전에 경상좌수사 朴泓(박홍)과 경상우수사 원균은 왜 싸워보지도 않고 戰船들을 불태우고 도주했을까요.


『700여 척의 왜선이 새까맣게 몰려오니 박홍과 원균은 싸우기기도 전에 워-포비아(war-phobia: 전쟁공포증)에 걸린 것입니다』

―박홍과 원균의 함대는 기습을 받고 휘하의 僉使營(첨사영)·萬戶營(만호영)의 戰船을 한 번 집결시켜 보지도 못한 채 궤멸했어요. 만약 이순신이 임란 발발 당시 경상좌수사 혹은 경상우수사였다면 상황이 어떠했을까요.


『적어도 박홍이나 원균 같지 않았을 거예요. 이순신은 7년 전쟁기간을 통해 적 함대의 동향을 항상 먼저 알고 있었습니다. 기습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名將의 조건이죠. 그리고 이순신은 신중하여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이길 만한 곳으로 적을 끌어들여 싸웠어요. 특히 임란 초년도인 1592년의 전투에서 이순신의 전공은 눈부셨어요. 10전10승을 했습니다. 특히 한산해전에서는 일본의 정예함대와 싸워 완승을 거두었죠. 그 결과 南海의 제해권을 장악하였고, 곡창 전라도 방어와 局面 전환을 달성할 수 있었어요』

7월24일 오전 7시 해군부두에 도착하여 30분 만에 「비로봉함」에 승선을 완료했다. 배수톤수로 2660t이라니까 상선이라면 5000중량톤쯤 되는 상륙함(LST)이다. LST는 자동차 전용선처럼 船首를 열고 그 통로로 사람이나 차량 등을 실어 흔히 「아가리」라고 불린다.



壬亂 최초의 승전지는 玉浦조선소 자리


오전 8시, 비로봉호가 출항했다. 진해만의 水路(수로)를 따라 바깥 바다로 나오니 동쪽으로 이순신의 전적지인 安骨浦(안골포)와 加德島(가덕도)가 보인다. 비로봉함은 경제속력인 시속 14노트로 항진했다.

바로 눈앞으로 거제도가 장쾌하게 펼쳐진다.
거제도라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이다. 거제도 북단의 永登浦(영등포)·장문포(長木面)가 시야에 들어오더니 곧 세계 제1의 경쟁력을 지닌 玉浦(옥포) 대우조선소의 모습이 활짝 펼쳐진다. 최신예 초대형 클레인 「골리앗」의 모습이 참으로 장쾌하다. 옥포조선소 자리가 바로 이순신 함대가 첫 승전을 기록한 玉浦해전의 현장이다.

전라좌도 水軍, 즉 이순신 함대는 1592년 5월4일 새벽 2시경에 여수의 左水營(좌수영)을 출발, 경상도 해역으로 출전했다. 함대의 세력은 板屋船 24척, 狹船(협선) 15척, 鮑作船(포작선) 46척으로 모두 85척이었다. 협선은 승선인원이 5명 정도의 소형 부속선이고, 포작선은 글자 그대로 어선에 불과했다.

이순신 함대는 5월6일 唐浦(당포)에서 경상우수사 元均 휘하의 판옥선 4척과 협선 2척과 합류했다. 이로써 전라좌도-경상우도 연합함대의 세력은
판옥선 28척, 협선 17척으로 증강되었다.

5월7일 정오, 옥포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 右척후장 金浣(김완)이 神機箭(신기전)을 쏘아 일본 軍船의 발견을 보고했다. 이로써 전라좌수영을 떠난 지 4일 만에 첫번째 해전이 시작되었다.

이순신 함대에 맞선 일본 함대는 30여척으로 옥포만 일대에 상륙하여 주변 지역을 약탈하던 중이었다. 왜군은 옥포만으로 돌입하는 이순신 함대를 발견하고 급히 승선하여 선봉 6척이 먼저 응전했다. 조선 수군은 이들을 포위하면서 銃筒(총통)과 화살을 쏘았고, 일본 수군은 鳥銃(조총) 등을 발사했다.


이순신 함대는 옥포해전에서 일본 수군의 대선 13척, 중선 6척, 소선 2척 등 모두 26척을 격침시켰는데, 특히 조선수군의 撞破(당파)전술이 위력을 발휘했다.

옥포해전은 임란 발발 이후 조선군이 기록한 최초의 승전이었다. 옥포전투에 이은 合浦(합포: 진해시 院浦洞)·赤珍浦(적진포: 고성군 거류면 堂洞里) 전투에서도 이순신 함대는 완승했다. 이순신 함대는 제1차 출전의 세 차례 전투에서 일본의 대선 26척, 중선 9척, 소선 2척, 기타 선박 7척 등 모두 44척을 격파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히데요시의 特命


이순신 함대의 피해는 全無했다. 일본 水軍이 막강한 줄 알았는데 싸워 보니 별 거 아니더라는 자신감―이것이 1차출전(1592년 5월4∼9일)에서 거둔 가장 큰 소득이었다.

우리 순례단을 태운 비로봉함은 거제도 동쪽
해안을 우회하는 항로를 항해했다. 제1차 출전시 이순신 함대가 취한 항로를 거슬러 내려가는 코스다. 이순신연구소의 교수들이 순례단원들을 갑판에 집결시켜 이순신의 전승지 개황 등을 브리핑했다. 출항한 지 두 시간 반 만에 비로봉함은 거제도의 남단 거제 해금강과 매물도 사이의 해역에서 우회전하여 다시 북상했다.

비진도, 용초도가 차례로 나타나고, 그 너머로 거제도의 서남단 가배량이 보인다. 가배량은 임란 발발 당시 元均의 경상우수영이 소재했던 곳이다. 용초도에는 6·25 동란 때 포로수용소가 있었다. 용초도의 바로 윗섬이 閑山島(한산도)다. 한산도 앞바다가 세계 해전사에서 빛나는 한산대첩의 현장이다.

開戰(개전) 이후 유독 海戰에서만 연패 소식을 접한 히데요시는 긴급대책으로 陸戰에 참가 중이던 水軍將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 가토오 요시아키(加藤嘉明)에게 즉각 남하하여 이순신 함대와 결전하도록 특명을 내렸다.


그때 일본 수군 장수 셋은 조선 水軍을 안중에 두지도 않고 육군을 따라 북진하고 있었다. 특히 와키사카는 경기도 龍仁에서 불과 1500명의 병력으로 전라·충청·경상 3도 연합군 5만 명을 기습공격 한번으로 붕괴시켜 기고만장하고 있었다.

이때 먼저 전투태세를 갖춘 와키사카는 7월6일 구키와 요시아키가 군선 정비 등을 하는 동안 단독으로 김해를 떠나 출전을 감행했다. 와키사카가 거느린 함대는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 등 73척으로 지금까지 해전에 나선 일본 함대 중 가장 큰 세력이었다.

한편 이순신 함대는 제2차 출전(1592년 5월29일∼6월10일)을 마치고 본영으로 귀환한 이래 軍船을
정비하면서 일본 수군의 동태를 탐문했다. 그 결과 가덕도·거제도 해역에서 일본 군선 수십 척이 출몰하고 있다는 첩보를 얻었다.

이에 이순신 함대는 일본 수군을 공격하기 위해 전라우수영의 李億祺(이억기) 함대와 좌수영에서 7월4일 합류했다. 연합함대는 7월6일 역사적인 제3차 출동에 나섰다. 연합함대는 남해의 露梁(노량)에 이르러
元均의 戰船 7척이 합류했다. 결전을 앞둔 조선의 연합함대와 일본 함대 간의 거리는 좁혀지고 있었다.

판옥선 56척으로 구성된 연합함대는 출항 이틀째인 7월7일 저녁 무렵에 미륵도의 唐浦(당포: 지금의 통영시 산양면 삼덕리)에 머물렀다. 바로 이날 밤 이순신은 이 섬의 목동 金千孫(김천손)으로부터 중대 첩보를 얻었다. 『일본 군선 70여 척이 오늘 오후 2시쯤 영등포(거제도 북단) 앞바다를 지나 見乃梁(견내량: 고성반도와 거제도 간의 협수로)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었다.


閑山대첩의 현장

첩보에 따라 연합함대는 7월8일 아침 일찍 일본 함대가 집결한 견내량을 향해 이동을 개시했다. 견내량에는 첩보 내용대로 일본 수군의 함선 73척이 대열을 이루고 있었다.

이순신은 와키사카의 함대를 넓은 바다로 유인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먼저 戰船 5~6척을 투입하여 일본 함대의 선봉과 전투를 벌이다 짐짓 약세를 보이며 퇴각하자, 일본 함대는 돛을 펴고 추격에 나섰다. 그들이 한산도 앞 넓은 바다에 이르자, 이순신 함대는 일시에 大선회하여 鶴翼陣(학익진)을 펴면서 돌격을 감행했다. 학익진은 함대의 공격력을 최대화할 수 있는 橫列陣(횡렬진)의 한 형태다. 모든 전선이 地字(지자)·玄字(현자)·勝字(승자) 총통을 발사하여 먼저 일본 군선 2~3척을 격파하자 일본군의 사기가 꺾여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견내량은 좁았다. 연합함대가 포위 공격을 가하자, 일본 함대는 퇴로가 막혀 참패했다.

한산대첩의 결과를 종합하면 연합함대는 일본의 대선 35척, 중선 17척, 소선 7척 등 59척을 격침시켰다. 일본 함대를 지휘한 와키사카는 대선 1척과 중선 7척 등 14척을 수습해 金海 방면으로 탈출했다. 와다나베(渡邊七右衛門) 등 와키사카의 副將 둘이 전사하고, 선장 중 하나는 한산도에 상륙했다가 할복자살했다. 일본 수군의 전사자는 최소한 2000명 이상일 것으로 추정되었다.

한산대첩을 거둔 날 연합함대는 견내량에 진을 치고 밤을 보냈다. 다음날인 7월9일, 安骨浦(안골포: 지금의 진해시 안골동)에 왜선 40여 척이 머물고 있다는 探望船(탐망선)의 보고가 들어왔다.

7월10일 새벽에 출항하여 안골포에 도착하니 선창에 일본 함대의 대선 21척, 중선 15척, 소선 6척 등 42척이 정박 중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임란 당시에도 안골포는 포구의 진입로가 병 주둥이처럼 좁고 수심이 얕아서 판옥선 규모의 戰船은 쉽게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이에 이순신은 밀물 때를 이용하여 전선을 교대로 포구에 투입하여 각종 총통과 불화살 등으로 일본 함대에 집중공격을 가했다. 일본 군선은 불타고, 잔존병력은 육지로 도주했다.


고뇌하는 인간의 悲歌

연합함대는 한산-안골포 해전, 즉 제3차 출동에서 적선 101척을 격파했다. 이순신의 壬辰狀草(임진장초)에 따르면 조선 수군 측 피해는 전사 19명, 부상자 116명이었으며, 軍船의 피해는 없었다.

비로봉함은 덩치가 커서 수심이 얕은 한산도의 포구에는 접안할 수 없다. 거북선 모습의 등대 남방에서 정박하고 있는 비로봉함 곁으로 「물개」라고 불리는 ○○상륙정이 물살을 헤치고 다가와 도킹했다. 순례단 일행 165명은 상륙정에 승선했다.

한산도는 이순신이 한산대첩 다음해인 1593년 7월 制勝堂(제승당)을 짓고 3道 수군의 본영으로 삼았던 곳이다. 물개(상륙정)가 豆乙浦(두을포: 지금의 한산면 頭億里 포구)에 접안하여 순례단 일동이 상륙했다.

포구에는 한산면장, 통영시 공무원, 문화재 해설사 등이 나와 우리 순례단을 환영했다. 순례단은 閑山門을 지나 大捷門(대첩문)에 이르는 높은 돌계단을 올라 制勝堂 앞에 섰다.

제승당은 이순신의 후임 통제사였던 원균이 漆川梁(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한 1597년 7월 초토화했다. 이로써 폐진되었던 제승당은 142년 후인 英祖 15년(1739) 통제사 趙儆(조경)이 중건하고, 유허비를 세운 이래 1959년 정부가 사적 113호 「한산도 李충무공 유적지」로 지정했다. 1975∼1976년, 정부는 境域을 확장하고 보수하여 성역화했다. 제승당 내부에는 이순신의 전적을 그린 다섯 폭의 벽화가 있다.

순례단은 제승당에 이어 李충무공의 영정을 모신 忠武祠(충무사)를 참배했다. 필자는 다시 제승당 쪽으로 되돌아 나와 그 서편의 戍樓(수루)에 올랐다. 바로 이 수루에서 이순신은 그 유명한 閑山島歌(한산도가)를 읊었다.

이순신은 武人이면서도 깊은 문학적 소양을 지닌 인물임을 閑山島歌 하나만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悲歌(비가)는 문학적 재능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절대고독 속에서 잠 못 이루며 고뇌하는 인간이 아니라면 이런 詩作은 불가능하다. 그 무렵, 그에겐 최악의 시기가 도래했다.

임란 발발 2년째인 1593년부터는 식량 부족과 전염병 창궐로 참전 3개국 모두가 전쟁을 계속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기아에 시달린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明·日 양국은 조선 국왕 宣祖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화교섭을 진행했다. 전쟁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이 시기에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도 전염병 만연에 의해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한때 1만8500명에 이르던 병력이 5000명 수준으로 감소했다. 소모된 병력은 대부분 항해와 전투에 숙달된 土兵이나 잠수질로 해산물을 채취하는 보자기 출신이었다. 도망병도 적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계사년(1593) 봄에 시작하여 을미년(1595)까지 계속되었다. 거듭된 출전에 따른 피로와 식량 부족, 더욱이 좁은 공간에서 집단 근무해야 하는 水軍의 특성에 의한 희생이었다.

이순신은 휘하의 수군과 함대는 국가적 지원이 全無한 가운데 증강시켜야만 했다. 그의 한산도 진중생활은 참으로 다망했다. 난관 극복을 위해 그는 군량 확보, 병력 충원, 戰船 건조, 무기 제작, 진법훈련 등 전력 증강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특히 군량 확보를 위해 屯田을 경영하고, 魚鹽(어염)을 생산했다.


신경성 위장질환 앓은 名將

이순신은 强骨(강골)의 건강체질은 아닌 듯하다. 한산도로 진을 옮겨 설치한 1593년 7월14일과 15일, 그리고 18일의 亂中日記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14일 丙寅, 맑더니 늦게 조금 비가 왔다. 한산도 두을포로 진을 옮겼다. 몸이 몹시 불편해서 종일 신음했다>

<15일 丁卯, 홀로 배뜸 밑에 앉았노라니 마음이 몹시 산란하다. 달빛은 뱃전에 비치고 정신도 맑아져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이에 어느덧 닭이 울었다>

<18일 庚午, 맑음. 몸이 불편하여 앉았다 누웠다 했다>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이 질병을 앓았던 날이 무려 120일에 달한다. 무과 급제 직후(32세)만 해도 쓰러진 돌장승을 혼자의 힘으로 일으켜 세웠다는 이순신이지만, 40대 말에는 벌써 백발이 성성했고 토사곽란 등으로 자주 신음했다. 내과 전문의들은 『이순신은 걱정을 앞질러 하는 성격으로 신경성 위장염을 앓았던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휘하 장병들과의 술자리를 자주 가졌던 장수였다.

그러나 女色은 멀리한 듯하다. 南海 현감 奇孝謹(기효근)의 好色함을 안 그는 기효근과 경상우수사 원균과 싸잡아 이렇게 비난한다. 『예쁜 색시를 배에 태우고 놀아나다니… 그 대장인 元均부터가 그러니 어쩌랴』

이순신은 부인 方씨와의 사이에 3남1녀, 소실과의 사이에 2남2녀를 두었다. 그런데도 수도사처럼 陣中 생활을 했다.

英雄好色(영웅호색)이라는 俗說(속설)도 있지만, 이순신은 어떻든 담백했다. 그의 陣中(진중)생활은 시종 나라 일을 걱정하며 준비 또 준비하는 나날을 보내는 것이었다. 오랜 세월, 이순신은 문필가들에 의해 완전무결한 인격체로만 묘사되어 왔다. 물론 그가 「救國(구국)의 英雄」인 것은 틀림없다. 다만 너무 미화되어 보통사람들에겐 「가까이 하기엔 너무나 먼 聖人(성인)」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순례단의 고교생들이 삼삼오오 자리를 잡고 앉아 한산도와 이순신을 주제로 하는 글짓기 대회에 참가하고 있는 동안, 필자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한산 앞바다가 가장 잘 내려다보이는 問語浦(문어포) 산정에는 거북선을 臺座(대좌)로 한 높이 20m의 한산대첩 기념비가 우뚝 서 있다. 이 기념비는 1979년 朴正熙 대통령의 지시로 국비 1억5000여만원을 들여 건립된 것인데, 그해의 10·26 사태로 그는 준공을 보지 못하고 별세했다.


국보 제305호 洗兵館

이제 필자에게 순례단과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다.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수택고등학교의 盧炳檜(노병회) 교장선생이 필자에게 석별의 맥주 한 잔씩을 나누자며 끌었다. 盧교장은 순례단원의 유니폼 차림으로 순례단원들과 행동을 함께 한 분이다. 盧교장과 선창가 목로에 마주앉았다. 그는 『오늘날 세태를 보고 걱정했는데, 이번 이순신 장군 전승지 순례를 통해 그것이 杞憂(기우)임을 느끼고 힘과 용기를 얻었다』고 말했다.

이날 필자는 통영시내를 돌아다녔다. 향토역사관 길 바로 건너편에 국보 제305호 洗兵館이 있다. 먼저 金一龍 관장을 만나 자료를 얻었다.

金관장이 필자 일행을 세병관으로 안내했다. 세병관은 제6대 통제사 李慶濬(이경준)이 통제영을 한산도에서 이곳 頭龍浦(두룡포)로 옮겨 온 1604년에 지은 客舍(객사)로서 이후 統制營(통제영)의 으뜸 건물이 되었다.

客舍는 왕권을 상징하는 闕牌(궐패: 「闕」 자를 새긴 나무 패)를 봉안하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望闕禮(망궐례)를 올리던 곳이다.

세병관에 들어가려면 止戈門(지과문)을 통과해야 한다. 「止戈」라면 「싸움을 멈춘다」는 뜻이 아닌 것인가? 그러나 金관장은 또 다른 숨은 뜻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즉, 止戈는 武의 破字(파자)로서 止戈門=武門이라는 것이다. 武가 바로 평화를 담보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 아닌가.

세병관은 長臺石 기단 위에 정면 9칸, 측면 5칸의 단층 팔작지붕으로, 현존하는 조선시대 목조건물 가운데 경복궁 慶會樓(국보 제224호), 여수 진남관(국보 제304호)에 이어 세 번째로 규모가 큰 목조건물이다.


唐浦해전의 현장

이제, 唐浦해전의 현장 답사를 서둘러야 했다. 세병관을 나서니 곧 명정동에 있는 사적 제236호 統營忠烈祠(통영충렬사)가 보인다. 선조 39년(1606) 제7대 통제사 李雲龍(이운룡)이 왕명을 받들어 李충무공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통영충렬사 안에는 明나라 神宗이 李충무공의 위업을 기려 보내 준 八賜品(8사품: 보물 제440호)이 보존되어 있다. 팔사품은 都督印(도독인)·令牌(영패)·斬刀·督戰旗(독전기) 등 모두 8종, 15점이다.

승용차는 통영시가지와 미륵도를 연결하는 통영대교를 지나 山陽관광도로로 진입했다. 통영대교에서 20리 거리에 있는 통영시 산양읍 삼덕리 앞바다가 당포해전의 현장이다. 지금의 삼덕포구는 욕지도로 운항하는 선박의 뱃머리로 이용되고 있다. 포구에서 차도 건너 동남방 언덕 위로 石城의 모서리가 드러나 있다. 唐浦城(당포성)은 임란 발발 직후 왜군에게 점령당했으나 제2차 출동 때 이순신이 탈환했다.

1592년 6월2일, 아침 8시경 이순신 함대는 『왜선들이 당포 선창에 정박하고 있다』는 첩보를 듣고 오전 10시쯤 그곳으로 진출함으로써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 함대는 왜선 21척을 불태웠다. 이것이 제2차 출동의 두 번째 싸움인 당포해전이다.

당포해전에 이어 연합함대는 적을 추격하여 당항포(고성군 동해면) 해전에서 적선 26척, 이어 거제도의 율포해전에서 적선 7척을 격침시켰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이때의 水軍將 구루시마 미치유키(來島通之)는 자신의 함대가 전멸하자 할복 자결했다(실제론 해전 중 사살된 것으로 추정됨).

연합함대는 제2차 출동의 11일 동안 네 차례의 해전에서 일본 군선 72척을 격파하고 수급 수백을 벤 전과를 거두었다. 이후 당포는 해전 전후 이순신 함대의 중요 기항지가 되었다.

산양관광도로 21km를 일주하고 충무교를 건너 통영시가지로 다시 진입했다. 충무교 아래로는 미륵도와 통영시가지를 연결하는 해저터널이 있다. 호수와 같은 바닷물 위로는 배들이 다니고, 그 바다 밑으로 뚫린 해저터널엔 사람이 걸어다니며, 바다 위로 놓인 공중다리(충무교)로는 자동차가 다니는 「통영운하」는 하늘과 바다와 바다 속 통로가 어우러진 우리나라 유일의 3중 교통로다.


順天의 왜성을 향해


한상일 기자는 『거제도의 직장에서 일하는 옛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면서 승용차에서 먼저 내렸다. 그가 택시로 거제도에 가려면 거제대교를 건너야 하는데, 그 대교 아래가 바로 한산해전 때 일본 함대의 진입로이자 퇴각로인 견내량이다.

7월25일 아침 7시30분경 노크 소리에 잠을 깼다. 객실 문을 따 주니 한상일 기자가 들어왔다. 그는 새벽 2시30분경에 모텔에 도착, 옆방에서 잤다고 했다. 둘은 선창가 수정식당에서 복국(6000원)으로 해장을 했다. 손가락 크기의 생복으로 끓인 것이라 개운했다.

통영시외버스터미널로 나가 오전 10시 發 晉州行 버스를 탔다(1인당 요금 5100원).

낮 12시가 조금 못 되어 버스는 진주 시외버스터미널에 당도했다. 때마침 폭우가 쏟아졌다. 그동안 수집한 자료 등으로 여행가방은 두 손으로 옮기기 어려울 정도로 불어나 있었다. 개인택시 경남 14바 2301호에 올랐다. 운전기사에게 진주-순천-남해-진주 일주 코스의 요금을 물었다. 그는 정차시간은 무료, 미터기에 나오는 주행요금만 받겠다고 했다.

순천의 曳橋(예교)는 필자가 꼭 한번 가보고 싶어 하던 곳이었다. 예교 해안에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농성했던 倭城이 있다. 1598년 9∼11월 예교성은 육지 쪽으론 明나라의 西路軍에게 포위당하고, 바다 쪽으로는 朝·明 연합함대에 의해 봉쇄당해 고립되었다.

서로군과 조·명 연합함대의 예교성 공격은 9월20∼22일 전개되었으나 서로군의 최고지휘관 劉綎(유정)은 적극적인 공격을 하지 않았다. 협상에 능한 고니시로부터 뇌물을 먹었기 때문이었다.

서로군의 예교성 공격은 다시 10월1일부터 4일까지 나흘간 계속되었다. 이때 이순신 함대와 陳璘(진린)이 지휘한 明의 水路軍은 합동으로 해상에서 적극적인 공세를 벌여 한때 고니시 軍을 절체절명의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육전을 맡은 유정이 후퇴, 일본군의 반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결국 朝·明 수륙 양면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당시의 전투상황은 난중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0월2일, 맑음. 오전 6시경 진군하였는데, 우리 水軍이 먼저 나가 오정까지 싸워 적을 많이 죽였다. 사도첨사 黃世得이 적탄에 맞아 전사하고, 李淸一도 죽었다. 제포만호 朱義壽, 사량만호 金聲玉, 해남현감 柳珩(유형), 강진현감 宋尙甫는 적탄에 맞았으나 죽지는 않았다>

이어 10월3일에도 연합함대가 출동하여 해상에서 공격했는데, 潮水(조수)가 물러가는 시간을 놓친 진린 휘하의 戰船 40여 척이 뻘 위에 갇혔다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대부분 소실되고 수백 명이 전사했다.

朝·明 연합함대는 10월4일 또다시 예교성을 공격했으나 육상의 西路軍이 호응하지 않아 전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격분한 진린은 직접 유정을 찾아가 항의, 두 지휘관의 관계가 전보다 더 험악해졌다.

1598년 10월18일 침략의 원흉 히데요시가 병으로 죽었다. 히데요시의 遺訓(유훈)을 받은 「五大老」는 조선에서의 철군을 결정하고, 조선에 출병 중인 여러 장수에게 「和議」를 성립시키고 11월 중순까지 귀국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순신은 침략의 선봉장 고니시를 사로잡기로 결심했다. 이후에 전개되는 「노량 해전」은 뒤에서 다룰 것이다.

개인택시는 진주IC를 통해 남해안고속도로에 진입, 순천1C로 빠져나와 17번 국도를 탔다. 순천시내에 들어 점심을 먹은 뒤 남하하니 순천시 海龍面(해룡면)의 월전삼거리가 나온다. 순천시농산물공판장에서 좌회전하여 新城(신성)마을 삼거리에서 남쪽 길로 잡으면 바다 쪽으로 돌출한 구릉 위로 예교성이 보인다. 순천시농산물공판장에서 10리 남짓한 거리다.

예교성은 정유재란(1597) 때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가 축조하고, 고니시가 수비한 성이다. 축조한 지 400여 년의 세월이 흘러 폐허화했지만, 성벽과 將臺(장대)의 石築(석축)은 아직도 완연하여 그 웅대한 규모를 엿볼 수 있다

 

 

李舜臣의 死生觀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만 하면 죽는다』

● 國寶 제76호 亂中日記
● 國寶 제304호 鎭南館

李舜臣을 死地로 몰아넣은 小西行長의 計略, 패망한 水軍을 白衣從軍 후 再建한 李舜臣의 시간과의 싸움. 鳴梁해전, 倭橋城, 露梁해전의 現場

글 : 鄭 淳 台 月刊朝鮮 편집위원
사진 : 韓 相 一 자유기고가

 

多重性格의 선봉장 小西行長

전남 順天의 曳橋城(예교성)에 오르면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생각난다. 고니시는 宣祖(선조) 조정에 절묘한 離間策(이간책)를 구사하여 李舜臣(이순신)을 獄死(옥사) 직전의 상황에 빠뜨렸었다. 죽을 위기를 거쳐 통제사로 재임명된 이순신은 이제 고니시를 예교성에 몰아넣고 그의 목을 겨냥하고 있었다.

이순신과 不俱戴天(불구대천)의 惡緣(악연)을 쌓은 고니시의 動線(동선)이야말로 東洋3국의 무수한 生靈(생령)들의 피로써 지옥도를 만든 壬辰倭亂(임진왜란)의 핵심 현장이었다. 그렇다면 그를 歷史의 法廷(법정)에라도 세워야 할 것 아니겠는가.


<被告(피고) 고니시, 너의 아비는 일찍이 약장수를 하다가 임진왜란의 主犯(주범) 히데요시(豊臣秀吉)에 눈에 들어 그 밑에서 財政(재정)을 담당했다. 너도 무역업을 하면서 때로는 유명짜한 해적 두목 구루시마(來島通之) 형제 등과 결탁했으니 적어도 해적의 동업자라는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무튼 너는 바다를 통해 닦은 기반으로 히데요시의 家臣(가신)이 되었고, 점차 신임받는 직속의 다이묘(大名)로 성장했다.

또한 너는 이른바 戰國武士(전국무사)로선 색다르게 문자께나 익혔고, 「어거스틴」이란 세례명을 가진 천주교 신자였다. 1592년 4월13일(음력: 이하 임란 관련 일자 同一) 오후, 너는 침략군(15만 병)의 先鋒將(선봉장)인 제1군의 대장으로서 부산포에 상륙하면서 「프로이스」라는 이름의 포르투갈 神父(신부)까지 종군시켰다. 너는 참으로 多重性格(다중성격)의 武將이었다.

너의 딸 「마리아」는 너의 副將(부장)이며 對馬島主 소오 요시토모(宗義智)의 아내였다. 요시토모 역시 세례명 「다리오」란 천주교 신자였으며, 왜란 직전에 弱冠(약관) 20세의 正使(정사) 자격으로 漢城에 들어와 너를 접대한 예조판서 李德馨(이덕형) 등에게 과대망상가 히데요시의 「침략 의도」를 귀띔해 주기도 했다. 물론, 너와 네 사위는 對馬島의 對조선 무역의 독점권을 계속 누리기 위해 그랬을 터이지만, 어떻든 네가 利文이 남지 않는 무익한 전쟁만은 가능한 한 회피하려 했음은 굳이 부인하지 않겠다.




死易假道難



1592년 4월14일 오전, 너는 제1군(선봉부대) 1만8700명으로 釜山鎭城(부산진성)을 에워싼 다음에 첨사 鄭撥(정발)에게 다음 내용의 서찰을 보냈다.

「우리는 北京(북경)으로 통하는 하나 밖에 없는 이 길을 통과하게 해주길 바랄 뿐이다. 그리하면 우리들은 스스로의 규율을 지켜 곡식 한 톨이라도 건드리지 않고 통과할 것이다」

명분 없는 전쟁을 도발한 데 대한 자기 합리화의 수단이라고 할지라도 참으로 치졸한 문투였다. 너도 애시당초 정발이 너의 요구를 들어줄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을 터이다.

4월14일 오전, 너는 반나절의 공격으로 釜山鎭城을 함락시켰다. 이어 너는 東萊城(동래성)으로 진격, 동래부사 宋象賢(송상현)을 상대로 또다시 흥정을 벌이려 했다. 너의 수하 騎兵(기병) 하나가 성문 앞으로 다가와 깃발을 땅 위에 꽂았다.

戰則戰不戰則假我道(전즉전부전즉가아도)

「싸우려면 싸우자,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 달라」는 뜻이 아니더냐. 송상현은 즉시 깃발에다 다음 다섯 글자를 적어 네 앞으로 내던졌다.

死易假道難(사이가도난)

「죽는 것은 쉬우나 길을 빌려주는 것은 어렵다」

너는 4월15일 하루 만에 동래성을 함락시켰다. 송상현은 文官이었지만, 최후까지 항전하다가 네 부하의 칼을 맞고 장렬하게 전사했다. 그래도 너는 용감한 城主에 대한 예우로 송상현의 시신을 거두어 땅에 묻고 墓表(묘표)를 세워 주기는 했다.

확실히 너, 고니시는 상인 출신답게 흥정을 좋아했다. 너는 이 날 싸움에서 포로로 붙잡은 울산군수 李彦誠(이언성)을 풀어 주면서 일본군이 조선 조정과 교섭할 의향이 있다는 내용의 서한을 지참토록 했다. 그러나 이언성은 뒤탈이 두려워 너의 서찰을 조정에 전하지 않았다.

고니시, 너는 4월24일 尙州(상주)전투에서 조선 조정에서 급파한 순변사 李鎰(이일)의 부대를 일격에 궤멸시키고 一路北上했다. 4월26일, 충주 彈琴臺(탄금대)에서는 背水陣(배수진)을 친 都巡邊使(도순변사) 申砬(신립)의 부대마저 궤멸시켰다. 신립은 그때까지 조선 제1의 장수로 알려진 인물이 아니더냐.


『大王의 수레는 어디로 가시려는지』


너는 히데요시의 侍童(시동) 출신인 가토오 기요마사(加藤淸正)와 애시당초 앙숙이었다. 탄금대 전투 다음 날, 너와 제2군 대장 가토오는 漢城 공략을 위한 진로를 놓고 협의했다. 그 자리에서 가토오는 네가 약장수 가문 출신인 것에 빚대어 너를 능멸했다. 지도에 「藥店」(약점)이란 지명이 보이자 일부러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당신은 이 길로 공격하는 것이 어떻겠소』라고 했다. 너는 『무사에게 있어 家風(가풍)은 문제되지 않는다』고 차갑게 맞받기는 했다.

忠州에서 漢城으로 가는 길은 두 갈래였다. 죽산-용인-서울 남대문에 이르는 左路, 그리고 여주-楊根(양근: 오늘의 양주)-서울 동대문의 右路였다.

너는 가토오에게 제비뽑기로 공격로를 결정하자고 제의했다. 가토오는 『아하! 과연 장사꾼다운 방법』이라고 다시 빈정거렸다. 발끈한 너는 가토오를 치려고 칼까지 뽑으려 했다. 副將들의 만류로 너는 분함을 삭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너는 右路, 가토오는 左路로 진격하면서 漢城 제1번 入城(입성)을 다투었다. 5월3일, 네가 먼저 漢城에 입성했다. 참으로 임란의 初戰(초전)은 너의 독무대였다.

너는 평양성 공략에 앞서서도 또다시 너의 습관적 행태를 되풀이했다. 너는 李德馨(이덕형)을 협상상대로 指名(지명)하여 회담을 제의했다. 이덕형과 너의 부장 겐소(玄蘇)·야나기가와(柳川調信)가 대동강 한복판에 띄운 배 안에서 만났지만, 애시당초 타협이 無望한 회담이 아니었더냐.

6월18일, 평양성이 너에게 함락되고, 조선 국왕 宣祖는 압록강변 義州(의주)로 몽진했다. 너는 宣祖에게 교만과 조롱으로 가득찬 다음 내용의 서찰을 보냈다.

「일본 水軍 10만이 또한 西海로 북상하여 오는 길이니 이제 大王의 수레는 어디로 가시려는지?」

그러나 너는 조선에 李舜臣이 있음을 아직 몰랐다. 너도 알게되다시피 일본 水軍은 한산해전(1592년 7월8일)에서 이순신 함대에게 대패한 후 대마도-부산 항로만 겨우 유지했다.

이순신의 활약에 놀란 히데요시는 대번에 水軍에 대해 海戰 금지령을 내렸지 않았더냐. 더욱이 이순신은 9월1일 일본 함대 450척이 집결한 부산포를 공격하여 일본 함선 130여 척을 격파했다. 히데요시의 水陸竝進戰略(수륙병진전략)이 빚나가고 만 것 아닌가.

겨울이 닥쳐오는데, 평양성에 入城한 너는 이제 군량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너도 들에 곡식 한 톨 남기지 않는 조선 傳來(전래)의 淸野(청야)전술이 얼마나 매운 것인지, 그제야 깨달았을 터이다. 군량의 현지조달은 불가능한데, 너를 위한 보급선이 西海-大東江의 물길로 올라올 가능성은 全無하지 않았더냐.

육상 兵站路(병참로)도 의병장들이 起兵하여 부산포- 漢城 간의 곳곳을 틀어막고 있었으니, 고니시 너는 이제 배고픈 거지부대의 대장이 될 수밖에 없지 않았느냐.

그래도 너는 한동안 善戰(선전)했다. 明 구원군의 선발대로 祖承訓(조승훈)의 騎兵 5000명을 너는 평양성 전투에서 대파했다. 하지만 너는 군량 부족으로 더 이상 北上할 수 없었다. 너는 明의 병부상서 石星(석성)의 심복으로서 遊擊將軍(유격장군)이란 벼슬을 달고 조선에 파견된 책사 沈惟敬(심유경)과의 휴전협상에 잔뜩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러다가 너 고니시는 李如松(이여송)이 지휘한 明의 지원군(4만5000명)이 압록강을 건너 평양성에 접근하고 있음을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 朝-明 연합군의 기습을 받은 너는 평양성을 버리고 도주했다.

그때 만약 柳成龍(류성룡)의 건의대로 황해도의 조선군이 퇴로를 차단했다면 너는 속절없이 포로가 되었을 터이다. 그러나 황해도의 육군은 너의 武名에 겁먹고 伏兵(복병)전술을 회피했다. 너의 敗軍은 배를 곯아 길가에 쓰러져 죽은 병사를 유기한 채 겨우 漢城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너는 이순신의 제해권 장악에 의한 병참선 차단으로 병력 피해가 가장 큰 장수로 기록되었다. 1924년 일본 참모본부가 발간한 「日本戰史 朝鮮役」(일본전사 조선역)에 의하면 1592년 4월13일 부산포 상륙 당시 1만8700명이던 너의 제1군 병력은 1593년 3월 현재 6626명으로 줄어들어 감소율 64.6%를 기록했다. 함경도 국경까지 침범했던 가토오 제2군(2만800명)도 의병봉기와 寒波(한파)로 고전하여 병력감소율이 40%에 달했지만, 너보다는 훨씬 적었다.

明·日 양군은 전쟁 계속이 불가능함을 알고, 1593년 초부터 講和(강화) 국면에 들어갔다. 양측 협상의 주역은 沈惟敬(심유경)과 너였다. 히데요시는 이 해 3월10일 서울 철수를 허락했다. 4월 중순까지 너와 심유경은 龍山에서 몇 차례 만나 강화회담을 벌였다.

5월1일, 히데요시는 너희 장수들에게 강화조건을 지시하는 동시에 진주성을 再공격하여 기어이 함락시키고 곧 복귀해서 남해안 연안에 축성할 것을 명했다. 제2차 진주성 전투(1593년 6월20∼29일)에서 너와 가토오, 구로다(黑田長政)가 거느린 왜병 10만 명은 농성했던 조선의 軍·官·民 6만여 명을 도륙했다.

제1차 진주성 전투(1592년 10월5∼11일)의 패배를 복수하여 휴전협상에서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라고 다그친 히데요시의 發狂(발광)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피의 광란은 너무나 참혹했다. 그런 네가 설사 告解聖事(고해성사)를 한다고 해서 너의 神으로부터 용서받을 수 있겠는가? 어떻든, 이후 너희 침략군은 남해안 지역에 성을 쌓고 장기전에 돌입했다.

심유경과 너는 히데요시의 강화조건을 조선은 물론 明의 조정에서도 받지 않을 것임을 잘 알았다. 그것은 漢江 이남 4道를 일본에 할양할 것, 明의 황녀를 일본으로 시집보낼 것, 對明무역의 再開를 허락할 것,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할 것 등이 아니더냐.

심유경과 너는 각각 본국의 지휘부를 기만하고 협상을 진전시켰다. 심유경은 히데요시가 원하는 것은 단지 일본 국왕으로 책봉받는 것이라고 본국 조정에 허위 보고했다. 그러나 너희 둘의 사기극은 어찌 들통나지 않을 리 있었겠느냐.

1596년 9월, 明의 정사 楊方亨(양방형)과 부사 심유경이 오오사카성에 가서 히데요시에게 「너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勅書(칙서)를 내렸을 때 고니시 너의 가슴은 콩알만 했을 터이다. 너는 글을 모르는 히데요시를 기만하기 위해 통역을 맡은 승려에게 허위 번역을 부탁했으나 거절당하고 말았지 않았더냐.

칙서의 내용을 뒤늦게 안 히데요시는 불같이 화를 냈다. 그때 만약 히데요시가 총애한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의 도움이 없었다면 너의 목은 대번에 달아났을 터이다. 1597년 초부터 시작된 정유재란은 이런 과정을 거쳐 발발했으니 너는 반드시 공을 세워 히데요시의 신임을 회복해야만 했다.


李舜臣 제거하기 위한 離間策

1596년 12월, 너는 다시 바다를 건너 조선에 들어와 이순신을 제거하기 위한 절묘한 離間策(이간책)을 연출했다. 경상우병사 金應瑞(김응서)의 軍門에는 네가 파견한 이중첩자 요시라(要時羅)가 들락거리고 있었다. 要時羅는 너와 가토오의 갈등 상황과 그의 渡海(도해) 일자에 대한 엉터리 정보를 흘리면서 함대를 출동시켜 가토오를 해상에서 잡으라고 권했다.

너의 허위첩보에 속은 김응서는 이를 곧이곧대로 宣祖에게 복명했다. 이순신에겐 왕명이 떨어졌다. 그러나 이순신은 고니시가 판 함정이라 판단, 가토오에 대한 요격을 포기했다. 이에 宣祖는 어리석게도 『지금, 가토오(淸正)의 목을 베어 오더더라도 이순신의 죄는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격노했다.

1597년 1월21일, 宣祖는 備忘記(비망기)를 내려 이순신을 붙들어 국문하고 元均(원균)을 통제사로 삼을 것을 備邊司(비변사)에 논의하도록 명했다.

이순신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것은 2월25일 전후로 추정된다. 그 시기에 신임 통제사 원균과 이순신이 인수인계 절차를 마쳤기 때문이다. 서울로 압송된 이순신은 1차 문초에서 고문까지 받으며 1개월 넘게 옥살이를 했다. 이순신의 목숨은 위태로웠다. 만약 곧은 大臣 鄭琢(정탁)의 강직한 반대 상소가 없었다면 이순신은 너의 계교대로 2차 문초에서 고문으로 치명상을 입었거나 처형되었을 것이다.

그 무렵에 이미 宣祖는 영의정 柳成龍을 중심으로 한 南人 세력을 견제하려 했다. 宣祖의 속뜻을 받들어 西人의 영수 尹根壽(윤근수) 등은 이순신의 처형을 주장하지 않았더냐.

4월1일, 이순신은 감옥에서 풀려나와 白衣從軍(백의종군)의 길에 올랐다. 南下하던 중 모친상을 당했지만, 상례도 치르지 못했다. 너, 고니시는 이순신에게 不俱戴天(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의 모략전을 탓할 생각은 없다. 전쟁에 나선 장수라면 敵을 속이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 것 아니더냐. 실은 조선 조정에서도 『明조정이 가토오를 곧 일본 국왕에 책봉할 것』라는 허위첩보를 흘리고 있었다. 너와 가토오, 그리고 히데요시와 가토오가 반목케 하는 反間之計(반간지계)였다.

한심한 것은 너에게 逆이용당한 宣祖 조정이었다. 그렇다고 네가 免罪符(면죄부)를 받은 건 아니었다. 너, 고니시는 임란 종전 후 2년도 못 돼 내란의 와중에서 치욕스런 참수형을 당했다. 그것이 바로 天罰(천벌)인 까닭에 내가 여기서 主犯 히데요시의 하수인인 너를 더 이상 질책해야 무엇하겠는가.>


조선 水軍의 몰락


『소수의 수군 함대가 가덕도에만 진출해도 가토오를 잡을 수 있다』고 장담하며 이순신을 모략했던 元均이 후임 통제사가 되었다. 그러나 통제사가 된 후 원균의 생각은 달라졌다. 원균은 갑자기 水陸竝進論(수륙병진론)을 들먹이면서 조정과 도원수 權慄(권율)에게 安骨浦(안골포)의 敵을 육상에서 먼저 공격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런 상황에서 宣祖는 원균에게 敵의 집결지인 부산포 공격을 재촉했다.

원균은 6월18일 이후 안골포와 가덕도 해역 등에서 몇 차례 소규모 해전을 벌여 사소한 전과를 거두었지만, 그의 함대도 적지 않은 손실을 입고 있었다. 조선의 劣勢(열세)함대가 물길이 험한 낙동강 하구의 海路를 횡단하여 부산포를 직격한다는 것은 거의 무모했다. 그러나 宣祖는 수군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漆川梁(칠천량) 해전 직전에 도원수 권율이 출전을 머뭇거리는 통제사 원균을 불러 곤장을 치면서까지 부산포 공격을 재촉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아무리 도원수라지만, 오늘날의 해군참모총장 겸 작전사령관인 통제사를 부하들 앞에서 매질한다는 것은 조선왕조의 군사문화가 저급했음을 드러낸 일이었다.

7월14일, 원균은 이순신이 육성해 놓은 全함대 180여 척을 이끌고 출전했다가 일본 함대의 유인전술에 말려들고 말았다. 부산 앞바다의 물마루(水宗)까지 추격했지만, 거센 풍랑을 만나 일부 함선이 흩어졌던 것이었다. 원균 함대는 회항 중 식수를 구하러 가덕도에 상륙했다가 일본의 복병에게 걸려들어 일시에 400여 명이 살해되고 식수도 얻지 못했다. 지친 원균 함대는 7월16일에 이르러 칠천량에 매복 중이던 일본 함대의 포위공격을 받고 궤멸했다.

元均은 도주하여 고성땅 秋元浦(추원포)에 상륙했으나 매복 중인 왜병의 칼을 받고 죽었다. 칠천량 해전에서 전라우수사 李億祺(이억기), 충청수사 崔湖(최호) 등 지휘부도 거의 전사했다. 경상우수사 裵楔(배설)만 10여 척의 전선을 거느리고 敵前 도주했다.


국보 제304호 鎭南館


曳橋城(예교성)을 뒤로 하고 순천시농산물공판장이 소재한 월전 삼거리로 되돌아 나왔다. 순천까지 내려와서 여수에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壬亂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의 중심기지 鎭南館(진남관)까지는 불과 30km다. 여수 시내 끝에서 돌산도를 연결하는 돌산대교 앞에서 좌회전하면 곧 언덕배기 위로 국보 제304호 鎭南館(여수시 군자동 472번지)이 보인다.

진남관은 선조 32년(1599) 삼도통제사 李時彦(이시언)이 건립한 客舍(객사)인데, 원래 그 자리엔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본영인 鎭海樓(진해루)가 있었다. 진남관은 1718년(숙종 44년) 이제면 수사가 재건했고, 그후 여러 번 중수되었다.

진남관은 현존하는 지방관아 건물로서는 최대의 규모인 데다 건축미가 뛰어나 1963년 보물 제324호로 지정되었고, 2001년에 다시 국보로 승격되었다.

석축 계단을 올라 前門인 望海樓(망해루)에 들어서면 진남관의 웅자가 펼쳐진다. 정면 15칸(53.6m), 측면 5칸(12m), 높이 40척, 넓이 240평, 기둥 68본으로 단층 팔작지붕이다. 통영의 洗兵館(세병관)보다 1.5배쯤 크다.

평면의 양측에서는 移住法(이주법: 건물 양측의 기둥인 高柱를 뒤로 옮기는 수법)을 사용하여 내부공간의 효율성을 살렸다. 架構(가구)의 짜임은 간결하면서도 건실한 部材(부재)를 사용하여 웅장함을 더해 준다. 양측면에는 2개의 衝樑(충량: 측면보)을 걸어 구조적으로 안정된 기법을 구사했다 각 部材에 남아 있는 단청 문양도 우아하다.

진남관의 임란 유물전시관에 들러 직원 金淑씨에게 자료를 요청했다. 그녀는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관계자료를 복사해 주고, 길 건너 언덕 위(여수시 고소동 620번지)에 있는 보물 제571호 좌수영대첩비와 보물 제1288호 墮淚碑(타루비)까지 동행하며 안내해 주었다.

대첩비는 李충무공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광해군 12년(1620)에 건립한 비석이다. 비문은 白沙 李恒福(백사 이항복)이 지었는데, 대첩비로서는 국내 최대 규모로 높이 약 3m이다. 타루비는 李충무공 막하에서 복무했던 수졸들이 장군의 덕을 흠모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세운 비석이라 하여 그렇게 명명되었다.


임진왜란 최후의 決戰 노량해전


필자 일행은 17번 국도를 통해 여수에서 北上, 남해고속도로에 진입하여 달리다가 河東IC 를 빠져나와 南海섬으로 가는 19번 국도를 타고 남해대교 중간에 이르러 하차했다. 남해대교 밑 협수로가 바로 임란 최후의 전투가 벌어진 露梁(노량)이다. 협수로를 사이에 두고 양쪽 포구 모두 「노량」이라는 지명을 사용하는데, 이곳 사람들은 하동 쪽을 舊노량, 남해 쪽을 新노량이라고 구분한다.

순천 예교성에 四面 포위된 고니시는 철군 기한인 1598년 11월 중순이 다가오자 11월13일, 10여 척의 선발대를 부산 쪽으로 출발시켰으나 앞바다의 柚島(유도: 지금은 주변 해역이 매립되어 육지와 이어짐) 뒤에서 포진 중인 이순신 함대에게 격퇴당해 되돌아오고 말았다. 고니시는 다시 흥정을 시작했다.

그 수법은 明의 西路軍 대장 劉綎(유정)에게 썼던 방법대로 명의 水路軍 대장 陳璘(진린)과 이순신에게 뇌물을 써서 퇴로를 열어주도록 간청하는 것이었다. 진린은 퇴로를 열어주는 代價를 요구했는데, 고니시는 그 알려지지 않은 요구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었다. 이순신은 고니시의 요청을 一言之下에 거절했다.

궁지에 빠진 고니시는 진린의 묵인下에 빠른 배를 보내 泗川(사천)에 주둔 중인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시마즈라면 침략군의 제4군 대장으로 사천의 선진성 전투에서 董一元(동일원)이 지휘하는 明의 中路軍을 대파한 맹장이었다.

이 사실은 곧 이순신에게 알려졌다. 그는 여러 장수들을 모아 대책을 협의했다. 시마즈의 구원군이 오면 앞뒤에서 협격을 받게 되므로 예교성에 포위된 고니시軍보다 시마즈軍을 먼저 공격하기로 하고, 이순신은 함대를 노량해협 근처로 이동시켰다.

진린도 고니시와의 협상에서 타협점을 찾지 못해 이순신 함대를 따라 노량해전에 나섰다. 이순신 함대는 해협 우측인 남해 觀音浦(관음포) 위쪽에 포진하고, 진린 함대는 노량해협 좌측에 대기했다.

일본 함대는 사천의 시마즈, 昌善島(창선도)의 소오(宗義智), 그리고 부산에 주둔했던 데라자와(寺澤正成) 등이 연합한 500여 척의 대규모 세력이었다.

노량해전은 피아간에 500여 척의 大함대가 맞붙은 壬亂 최후의 결전이었다. 전투는 11월19일 새벽 2시경에 양측 함대가 노량해협에서 조우하면서 시작되었다. 서로 전력을 다해 싸우는 양상이 한동안 지속되었는데, 朝-明 연합함대가 火攻(화공)을 펴면서 전황이 급전했다. 이 날 火攻은 겨울철에 부는 북서풍을 이용한 것이었다. 風上(풍상)에 위치한 朝-明 연합함대가 風下에 위치한 일본 함대를 압도했다.

일본 함대는 퇴로를 찾아 관음포 쪽으로 도주했다. 그쪽으로 가면 바닷길이 뚫리는 것으로 오판했다. 하지만 그곳은 바다의 막다른 골목(灣)이었다.

여기서 임란 史上 가장 처절한 접근전이 전개되었다. 격전 중에 이순신이 왼쪽 가슴에 敵의 총탄을 맞았다. 죽음의 순간에도 그는 名言을 남겼다.

『전투가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전투는 11월19일 낮 12경에 끝났다. 朝-明 연합함대의 대승이었다. 예교성에 포위되었던 고니시는 전투가 한창일 때 묘도 서쪽 水路를 통과, 남해섬의 남쪽을 우회하여 부산 방면으로 도주했다. 이로써 임란 7년 전쟁이 끝났다.

좌의정 李德馨(이덕형)은 노량해전 직후에 현지를 돌아보고 일본 軍船 200여 척이 격침했고, 왜군의 사상자가 수천 명이라고 조정에 보고했다. 朝-明 연합함대의 손실도 적지 않았다. 이순신 휘하에선 副將級 10여 명, 진린 휘하에선 부장급 3명이 전사했다.


露梁 협수로의 처절한 夕陽


왜, 이순신은 고니시에게 退路(퇴로)를 열어주는 척하면서 그의 뒤통수를 치지 않았던가? 원래, 戰場(전장)에 나선 장수는 속임수를 싫어하지 않는다(兵不厭詐: 병불염사). 또한 「궁한 쥐는 쫓지 말라(窮鼠勿迫: 궁서물박)」는 戰訓(전훈)도 있지 않은가. 이순신도 길을 열어달라는 고니시의 간청을 받아들이는 체하면서 철수하는 고니시軍의 꼬리를 때렸다면 오히려 그를 잡았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이순신이 생리적으로 속임수를 싫어하는 儒將(유장)이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든지, 戰後에 예상되는 숙청을 당하기보다는 깨끗한 이름만이라도 남기려고 죽을 자리를 스스로 선택해서 그랬을 것이라는 등의 臆斷(억단)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필자는 바로 이 대목에서 인간 이순신을 짙게 느낀다.

이순신은 왜군, 특히 고니시만은 기어이 잡으려 했던 같다. 그런 증오감은 그가 가장 사랑했던 셋째아들 이면의 戰死 이후 더욱 응결되었던 것으로 느껴진다. 이후 그는 戰場의 장수로선 너무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1597년 10월14일 그의 일기엔 이렇게 쓰여 있다.

<저녁에 사람이 天安으로부터 와서 집안의 편지를 전하는데, 봉한 것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혼란하다. 겨우 겉봉을 뜯고 차남 열의 편지를 보니 겉에 「痛哭」(통곡) 두 자가 쓰여 있어 면이 전사한 줄 알겠다. (中略)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의 마땅함인데, 네가 죽고 내가 사니 이런 어그러진 이치가 어디 있느뇨! 천지가 캄캄하고 햇빛이 안 보이네. (中略) 아직은 참고 연명이야 한다마는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아 울부짖는다. 통곡, 통곡하노라>

관음포의 언덕배기 위에 있는 李충무공의 사당 李落祠(이낙사: 남해군 설천면)에 올라 셋째 아들의 부음을 듣고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았다』고 통곡한 인간 이순신을 다시 생각했다. 그는 모함을 당해 감옥살이를 하다 풀려나던 날의 일기(1597년 4월1일)에서조차 所懷(소회) 한 마디 기록하지 않을 만큼 喜怒哀樂(희로애락)의 표현을 냉엄하게 절제한 인간이었다. 그런 그도 자식의 죽음 앞에서는 평소 그렇게 굳세게 누르고 눌러오던 인간 원초적 감정을 폭발시키고 있지 않은가!

저녁 7시가 가까웠다. 한상일 기자는 다른 일로 이 날 저녁 8시 대구行 고속버스 막차를 타야 했다. 19번 국도로 북상하여 河東 노량에서 우회전하여 1002번 지방도로로 접어들었다. 붉게 물든 석양의 노량 협수로가 필자에겐 사무치도록 처절했다. 진교IC에서 남해고속도로로 진입하여 晉州까지 가서 고속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한상일 기자와 헤어져 필자는 진주시 주약동 숙소 앞에서 개인택시에서 내렸다. 미터기에 표시된 택시요금은 17만7400원이었다.

8월26일 아침 西門을 통해 진주성에 올랐다. 진주성 內에는 「임진왜란 전문 박물관」을 표방하는 국립진주박물관이 있다. 여기서 오는 10월 「李舜臣 특별전」을 개최할 예정이라고 한다.

진주박물관은 임란 당시에 사용되었던 銃筒(총통)을 구색대로 거의 다 소장하고 있다. 특히 국내에 두 개밖에 없는 대형 天字총통(明宗 때 제작) 한 개를 비롯해 地字총통·玄字총통·黃字총통을 한 개씩, 그리고 소형 勝字(승자)총통은 여러 개를 전시하고 있다.

조선의 총통은 특히 일본 수군이 매우 두려워했던 重화기였다. 천자총통은 砲身(포신)의 길이가 130cm로서 鐵羽(철우)가 달린 길이 113cm의 大將軍箭(대장군전)을 발사했다. 地字총통은 포신의 길이 89.5cm로서 100.9cm의 將軍箭 1발 또는 새알탄(鳥卵彈) 200발을 한꺼번에 발사할 수 있다.


統制使 재임명 후 조선 수군 再建


권율의 元帥府(원수부)에서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이 통제사 再임명의 敎書(교서)를 받은 곳은 진주시 수곡면 원계리에 있는 鼎蓋山城(정개산성) 건너편 孫景禮(손경례)의 집이었다. 그는 수하의 10여명을 데리고 「즉시」 길을 떠났다. 그 行步의 속도에 國運(국운)이 걸려 있다는 사실은 곧 밝혀진다. 그 날이 1597년 8월3일이었다.

元均의 칠천량 패전으로 3道 수군이 궤멸한 이후 한산도 本營(본영)이 불타고 南海의 제해권도 일본군이 장악했던 만큼 이순신에게는 定處(정처)가 없었다. 그 무렵은 그가 머무는 곳이 바로 통제사의 行營(행영)인 것이었다. 그에겐 戰船도 部隊도 없었다. 亂中日記 8월3일자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곧바로 출발하여 豆峙(두치)로 가는 길로 직행하다. 초저녁에 行步驛(행보역)에 이르러 말을 쉬게 하고 자정에 출발하여 두치에 도착하니 날이 새려 한다. (中略) 雙磎洞(쌍계동)에 이르러 길에 돌이 어지러이 솟아 있고, 비가 와서 물이 불었다. 간신히 건너 石柱關(석주관)에 이르니 李元春과 柳海守가 엎드려 인사하고 敵을 토벌할 일에 대해 말을 많이 한다. 저물어 求禮縣(구례현)에 이르니 근처가 온통 적막하다(後略)>

8월26일 오후 2시, 晉州의 친구가 운전하는 승용차를 타고 통제사로 再임명된 후 노량해전에 이르기까지의 행로를 답사하기로 했다. 왜 이순신은 밤잠도 자지 않고 강행군을 했을까. 그것은 水軍 재건을 위해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지금의 경남 하동군 橫川面(횡천면) 여의리 삼거리가 이순신이 말을 쉬게 한 행보역이다. 여의리 삼거리 옆으로 이순신이 말에게 물을 먹였을 횡계천이 흐르고 있다. 이곳 촌로에 의하면 日帝 때 횡계천 바로 건너 돌산 위에 호랑이 한 마리가 출몰했다고 한다. 이순신은 지금의 58번 국도를 따라 지금의 河東邑 두곡리에 닿았다. 하동읍의 뱃머리가 있던 두곡을 당시엔 豆峙라 불렀다.

참으로 운명적이었다. 이순신이 두치를 출발한 후 불과 한나절 만에 南原城을 치러가던 일본군이 두치에 상륙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左軍과 水軍이 전라도의 요충지 南原城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일본 水軍은 조선 水軍이 완전히 궤멸된 것으로 보고 陸戰에 참전하는 전략상의 잘못을 범했다.

이순신은 흔히 알려진 것처럼 두치에서 배를 타고 섬진강을 건너 전라도로 들어간 것이 아니다. 섬진강변의 육로 80리를 따라 하동군 화개면 花開장터에 이르렀다. 그가 물이 불어 간신히 건넜다는 雙磎洞은 쌍계사 계곡 쪽에서 내려오는 花開川이다. 지금은 그 위로 花開다리가 놓여 있는데, 그 일대의 覆蓋(복개)로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화개천은 화개장터 바로 밑에서 섬진강 본류에 합수된다.

화개장터에서 섬진강변을 따라 19번 국도를 20여 리 달리면 천험의 요새 石柱關(석주관: 전남 구례군 파도리)이 있다. 이순신은 전라좌수사 재임 때부터 의병과 인근 燕谷寺(연곡사)의 승병을 파견하여 석주관을 지키게 했었다. 석주관에 당도한 이순신에게 『적을 토벌할 일에 대해 말』한 柳海守(바다 「해」 지킬 「수」―이름이 근사하다) 등은 혹시 그런 의병들이 아니었겠는가.

이후 이순신의 행로 석주관-구례읍-압록강원-곡성읍-옥과-순천-낙안-보성-해남읍-전라우수영(해남군)으로 이어지지만 필자는 개인적인 일로 일단 석주관에서 승용차를 돌렸다. 토요일인 이 날 오후 5시 지리산 七佛庵 寺下村(칠불암 사하촌) 민박집에서 옛친구들과 만날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鹿島 만호 鄭運을 생각하며

8월28일 월요일 오전 9시, 친구가 운전하는 승용차를 타고 다음 날 개통식을 갖는 「南道大橋」(남도대교)를 통해 섬진강을 건너 전라도 쪽 강변길을 따라 남진, 광양을 거쳐 筏橋(벌교)로 달렸다. 교통요지인 벌교 시외버스 정류소에만 가면 전남 지역 어디든 갈 수 있는 버스편이 있다.

그러나 벌교에 오니 생각이 달라졌다. 여기까지 와서 고흥을 지나쳐 갈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지금의 고흥은 당시의 興陽(흥양)으로서 전라좌수사 재임 당시 이순신 관할의 5官5浦 중에 1官4浦이 밀집했던 海防(해방)의 요충지였다.

5官은 순천부(도호부사 종3품), 낙안군(군수 종4품), 보성군(군수 종4품), 광양현(현감 종6품), 흥양현(현감 종6품)이다. 5浦는 종3품이 지휘관인 방답진(여수시 돌산읍 군내리)·사도진(고흥군 영남면 금사리), 종4품이 지휘관인 여도진(고흥군 점암면 여호리)·발포진(고흥군 도화면)·녹도진(고흥군 도양읍 녹동)이다.

亂中日記를 보면 鹿島(녹도) 만호 鄭運(정운)의 용맹이 두드러진다. 녹도는 지금의 고흥반도 끝에 있는 鹿洞(녹동)이다. 임란 발발 직후 경상우수사 원균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순신은 勝算(승산)도 없이 출전부터 하고 보는 장수가 절대 아니다.

이순신은 여러 鎭浦의 장수들을 水營을 모이게 하여 작전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 諸將들은 『倭勢(왜세)가 심히 날카로우니 경솔하게 출전하는 것은 불가하오』, 『임금께서 이미 西行을 했으니 배를 서쪽으로 몰아 임금을 호위해야 하오』, 『후퇴하여 병사를 보호하다가 정세를 보아 출전함이 타당하오』 등의 避戰論(피전론) 일색이었다.

이때 鄭運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영남도 우리 땅이요, 호남도 우리 땅인데, 넘어다보기만 하고 구원하지 않을 수 있겠소? 급히 군사를 동원 반격하여 호남도 방어하고 영남도 구원하는 것이 옳을 것이오』라고 외쳤다.

이순신 함대는 5월4일 새벽에 출전했다. 임란 初年, 鄭運은 이순신 함대의 10회 海戰에 모두 참가하여 武名을 떨친 勇將이었다. 그 해의 부산해전에서 그는 앞장서 돌격하다가 적탄을 맞고 전사했다.

녹동에만 가면 해남이나 진도에 가는 배편을 잡을 수 있을 것으로 지레 짐작했다. 도중에 도덕면 우체국 앞에서 잠시 하차하여 그동안 자료 등으로 잔뜩 불어난 여행가방을 서울집에 택배로 부쳤다. 택배요금 6000원에 이렇게 몸과 마음이 홀가분할 수가 없다.


녹동-사동-도장-마량 航路


녹동新港에 가보니 진도나 해남으로 가는 배편은 요즘엔 없다. 오후 1시에 출항하는 金日島(금일도)行과 오후 4시30분에 출항하는 莞島(완도)行 선편만 남아 있었다. 어느 곳이든 이순신 함대의 기동로였던 多島海(다도해)가 아닌 것인가? 금일도行 배표(4000원)를 사놓고 뱃머리의 횟집에 갔다. 2만원짜리 매운탕 한 냄비를 주문했다. 출항시간이 임박한 바람에 맛깔스러운 매운탕을 몇 숟가락 대어 보지도 못하고 평화페리호에 승선했다.

평화페리호는 나환자촌이 있는 소록도를 돌아 남행하여 출항 1시간 30분 만인 오후 2시45분 금일도 남단의 사동리 부두에 입항했다. 다시마 재배가 主수입원인 금일도는 제법 큰 섬이다. 완도 가는 배는 섬의 동북단에 있는 도장항에서 타야만 했다. 지프형 택시 편으로 도장항으로 달렸다(요금 7000원).

도장항에 도착하니 완도行 배는 오후 4시30분에 출항 예정이고, 강진군 남단의 마량항으로 가는 배는 오후 3시20분 출항 예정이었다. 마량 부두 바로 건너편 섬이 임란의 마지막 해인 1598년 이순신의 통제영과 明의 水路軍 대장 진린의 본영이 설치된 고금도이다. 마량항으로 가는 배를 탔다(선임 4000원).

협승페리호는 생일도와 조약도의 포구에 잠시 기항했다가 고금도 해역으로 접어들었다. 조약도-고금도-마량 간의 연육교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조약도의 우두리와 연결하는 교각 공사가 진행 중인 고금도의 忠武里가 보인다. 이곳이 바로 이순신의 통제영이 설치되었던 자리다. 협승페리호는 10분 늦게 출항하여 1시간 10분 만인 오후 4시40분 마량항에 닿았다.


「Only one Point」 鳴梁해협

하선 즉시 마량 버스정류소에 나가 강진읍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탔다. 강진만은 깊어 마량에서 강진읍까지 50리, 버스요금 3000원이다. 오후 5시40분 강진읍 터미널에 도착했다.

차질이 생겼다. 해남 가는 버스가 10분 전에 출발해 버렸다는 것이다. 다음 버스는 저녁 7시30분에 출발 예정이었다. 개인택시(전남 25바 1006호)를 탔다. 운전기사 김인중씨는 『얼마가 나올지 몰라도 미터기 요금보다 할인해 주겠다』고 했다.

개인택시는 18번 국도를 따라 西進했다. 도중에 강진군 도암면 茶山草堂(다산초당) 앞을 지난다. 大실학자 다산 丁若鏞(정약용)은 천주교 신자로 찍혀 1801년 이후 강진에서 18년간 귀양살이를 하면서 이곳에다 草堂을 짓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한편으로 牧民心書(목민심서) 등을 썼다.

1597년 8월3일, 통제사 再임명의 교서를 받은 이순신 빠른 行步로 전남 일대를 돌아가며 右水營(우수영)에 도달한 것은 다 까닭이 있었다. 그것은 조선 水軍 재건을 위한 필사적인 行步였다.

8월6일, 그는 玉果에 머물면서 일본군을 정탐하고 돌아온 휘하의 宋大立으로부터 敵情(적정)을 보고받았다. 7일에는 順天으로 향하던 중 흩어져 후퇴하는 전라병사의 군사들로부터 말 세 필과 활·화살 약간을 탈취했다. 8일에는 順天府에 들어가 버려졌던 총통 등을 땅에 묻고, 가벼운 長箭(장전)과 片箭(편전)은 수행 군관들이 나눠 가지게 했다. 낙안을 거쳐 보성에 이르는 동안 순천부사 禹致績(우치적) 등이 합류했다. 장병들을 취합해서 그 수가 60명에서 120명으로 늘어났는데, 대부분 자원병이었다.

亂中日記에 따르면 8월11일에는 임란 초기부터 이순신을 수행했던 宋希立이 崔大晟(최대성)과 함께 달려왔다. 12일에는 거제현령 安衛(안위)와 발포만호 蘇季男(소계남) 등이 왔고, 13일에는 칠천량 패전 직후 가족만 싣고 도망쳤던 李夢龜(이몽구)도 나타났다. 15일엔 보성의 軍器를 검열했다. 16일엔 보성군수 등을 보내 피란갔던 관리들을 찾아오게 했다. 弓匠(궁장)인 智伊와 太貴生도 이 날 들어왔고, 金希邦(김희방)·金鵬萬(김붕만) 등도 합류했다.

8월19일에는 會寧浦(회령포: 전남 長興郡 會鎭面 회진리)에서 경상우수사 裵楔(배설)로부터 10여 척의 軍船을 인수했다. 전선을 인계한 배설은 9월2일 밤, 이순신의 앞날에 전혀 희망이 없다고 보고 도주했다. 그는 종전 후 고향 善山에서 체포되어 참형을 당한다.

이때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海戰을 포기하고 陸戰을 도와도 좋다는 왕명이 내려왔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상주했다.

『臣에게는 아직도 12척의 戰船이 있습니다』

그는 신념의 인간이었다. 각처에 흩어져 있던 水軍 장병들이 이순신의 휘하로 속속 모여들었다. 특기해야 할 것은 명량해전 때 이순신 휘하 세력으로 참전했거나 전장 해역에서 함대를 도운 피란민 세력의 존재다. 특히 피란민 선단은 군량을 지원하면서 명량해전 때 배후의 함대세력으로 위장하는 역할을 했다.

해남은 전남의 郡 가운데 가장 큰 郡이다. 右水營은 해남의 서쪽 끝 花源半島(화원반도)에서 진도로 가는 길목에 있다. 우수영(지금의 해남군 문내면 우수영) 아래가 울돌목, 한문으론 鳴梁(명량)이다. 여기서 이순신은 13척의 戰船을 거느리고 西海로 진출하려는 일본 함대를 저지했다. 이것이 칠천량 패전 후 꼭 2개월 만인 1597년 9월16일에 전개된 명량해전이다.

진도대교의 한가운데서 하차하여 명량해전의 현장을 촬영했다. 진도 쪽으로 들어가 망금산 아래 전주횟집 마당의 평상 위에 앉으니 古戰場의 모습은 더욱 一目瞭然(일목요연)하다. 명량 수로의 길이는 약 2km, 가장 좁은 곳은 300m, 최저 수심은 1.9m, 조류의 속도는 11.5노트 이다. 마침 밀물 때라 조류가 東에서 西로 빠르고 세차게 흐르고 있었다.

이곳은 『20리 밖에서도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해서 「울돌목」이라 이름하지 않았겠는가. 더구나 수심이 얕아 항해하기 어려운 狹水路(협수로)다. 그런데 묘하게도 협수로 곳곳에서 물이 동심원을 그리며 소용돌이를 치고 있었다. 해남 쪽 명량을 보니 급한 물살이 해저의 바윗돌에 부딪친 듯 맥주거품처럼 부풀어 흐르고 있다.

그렇다. 이곳이야 말로 서해 진출을 노리는 일본 함대를 막아야 했던 이순신에겐 오직 원 포인트(One Point)일 수밖에 없었다. 필자는 이순신의 戰場 선택에 경의를 표했다.


名將의 조건


명량해전 직전까지 이순신이 확보한 세력은 전선 13척과 哨探船(초탐선) 32척이 전부였다. 이순신 함대가 碧波津(벽파진 진도군 군내면 벽파리)에 머물고 있던 9월14일 任俊英(임준영)이 일본 함대 200여 척 중 55척이 어란포에 도착했다는 첩보를 전했다. 이순신은 명량 협수로를 등지고 싸울 수 없다고 판단, 진영을 벽파진에서 우수영으로 옮겼다.

8월16일, 이른 아침에 일본 함선 300여 척이 명량 협수로로 접근했다. 名將은 名言을 말한다. 이순신은 휘하 장병들의 戰意를 이렇게 북돋우었다.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만 하면 죽는다』

일본 함대 지휘부는 대형 군선인 安宅船이 협수로를 통과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따라서 중형 軍船인 關船만 133척으로 진용을 짜고 협수로를 통과, 이순신 함대를 향해 진격했다.

전단은 오전 11시경에 열렸다. 일본의 關船 여러 척이 이순신의 大將船(대장선)을 여러 겹으로 포위 공격했다. 大將船만 각종 포와 화살을 난사하며 응전했고, 휘하의 戰船들은 일본 수군의 척수와 기세에 눌려 뒤로 물러났다. 이순신은 몸소 최선봉에 나서 일본 함대에 포위당한 채 상당 시간 홀로 버텼다.

大將船이 위험해지자 거제 현령 安衛(안위)의 배가 다가왔다. 이순신은 이 대목에서도 名言을 했다.

『安衛야, 네가 軍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해서 어디 가서 살 것 같으냐?』

안위의 판옥선이 황급하게 일본 함대 속으로 돌진해 갔다. 中軍將인 미조항 첨사 金應♥(김응함)의 배도 가까이 다가왔다. 이순신은 김응함을 불러 이렇게 독전했다.

『네가 中軍으로 멀리 피하여 대장을 구하지 아니한 죄, 마땅히 참형에 처할 것이나 戰勢(전세)가 급하니 공을 세울 것을 기다린다』

안위와 김응함의 군선이 좌충우돌하자 나머지 전선 10척도 돌진하여 본격적인 접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일본 함선은 수적으로 10배여서 먼저 돌격한 安衛의 전선이 적선의 포위 공격을 받았다.

돌연, 高潮(고조)에서 잠시 멈추었던 조류가 바뀌었다. 이번에는 이순신 함대에게 유리한 흐름인 南東流(남동류)였다. 대장선을 비롯한 모든 전선이 집중공격을 펼쳐 안위의 전선을 구출하면서 잠깐 사이에 일본 군선 31척을 격파했다. 이 과정에서 이순신은 유명한 해적 출신 장수로서 선봉에 섰던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通總)를 사살하고 그 시체를 바다에서 갈고리로 낚아 올려 토막토막 자르게 했다. 이에 일본군의 기세가 꺾여 버렸다.

이순신 함대의 강력한 반격으로 31척의 군선을 상실한 일본 함대는 일단 해전을 중지하고 퇴각했다. 이순신은 1597년 9월16일 일기 끝부분에 「此實天幸」(이것은 실로 천행이다)이라고 썼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天幸만이겠는가? 미리 고민하지 않은 장수, 목숨을 걸지 않은 장수라면 어떻게 이같은 天幸을 바랄 수 있었겠는가.

이제 취재를 끝내기로 했다. 날도 어둑어둑하다. 다시 개인택시에 올라 목포로 달렸다. 저녁 8시30분, 목포 고속버스 터미널에 있는 택시정류소에서 개인택시 기사 김인중씨와 헤어졌다. 택시 미터기의 요금은 11만3300원이었는데, 그는 『뜻있는 답사에 참여하게 되어 기쁘다』면서 굳이 8만원만 받았다. 목포는 항구다. 여기서 낭만의 하룻밤을 「정박」하고 싶었다. 고속버스터미널 인근 용꿈여관(숙박료 3만원)에서 묵고 8월29일 아침 일찍 서울行 고속버스를 탔다.


壬亂에 참전한 三國 장수들의 그후 行路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순신에게 잡힐 뻔했다가 겨우 血路(혈로)를 뚫고 귀국은 했지만, 그로부터 2년 후인 1600년 7월1일 세키가하라(關ケ原) 전투에서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가 주도한 西軍에 가담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東軍과 싸우다 패전·도주·은신하다가 붙잡혀 참수되었다.

웬만하면 할복하는 사무라이답지 않게 수치스럽게 참형을 당한 그에 대한 日本 전통사회의 평판이 낮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를 위한 역사의 변호사가 있다면 그가 자살을 금하는 천주교의 신자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지 않았겠는가? 그야 아무튼 그는 이순신에게 목을 내놓았다면 훨씬 나을 뻔했다.

일본에서 「天下 판갈이 싸움」이라고 일컫는 세키가하라 전투의 승리로 이에야스는 도쿠가와 幕府(막부)시대를 열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모리 테루모도(毛利輝元) 등 조선에 출전했던 장수들의 다수가 西軍에 가담하여 戰後 이에야스에 의해 領地(영지) 감봉처분을 받았다. 반면 고니시의 라이벌이었던 가토오 기요마사는 히데요시의 侍童 출신임에도 東軍에 붙어 다이묘(大名)의 지위를 유지했다.

침략의 원흉 히데요시는 죽음에 임박하여 그의 어린 외아들 히데요리(秀賴)의 장래가 걱정되어 이에야스 등 5大老, 이시다 등 5奉行에게 충성의 서약서까지 받아냈지만, 그의 死後 그것은 하나의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다.

히데요리의 영지를 삭감하는 등 핍박을 계속 가했던 이에야스는 실로 공연한 트집을 잡아 히데요리의 居城 오사카성을 공격했다. 오사카성이 함락되자 히데요리와 그의 生母 요도기미(淀君: 히데요시의 愛妾)는 동반자살했다. 불교적으로 말한다면 그것이야말로 業報(업보)가 아닌 것인가.

고니시의 협상 상대로서 明 조정에 허위보고를 했던 沈惟敬의 행로도 기구했다. 처음에 그는 고니시에게 일본으로의 망명을 간청했으나 고니시는 「살아 있는 공범」을 받아들이기 난처하여 은근한 거부의 뜻을 비쳤다. 결국 그는 가토오에게 몸을 기대기 위해 울산으로 가던 도중에 경남 의령에서 붙들려 본국으로 끌려가 참수당했다.

임란 때 조선을 도운 明의 관료나 장수들도 대체로 불운했다. 조선에 원병을 보내는 국론 조성에 앞장섰던 병부상서 石星(석성)과 요동경략 宋應昌(송응창)은 전쟁지도상 실책 등의 이유로 투옥되었는데, 석성은 獄死했다. 초기 원군의 최고지휘관이었던 李如松은 1597년 요동총병관으로서 土蕃(토번)과 싸우다 전사했다.

東路軍 대장이었던 楊鎬(양호)는 울산 島山城(도산성) 전투에서 가토오에게 패전한 후 파면되었다가 1618년 3월 20만 병의 총수가 되어 누르하치가 지휘하는 後金(후금: 후일의 淸)軍과의 사르후(薩爾滸) 전투에서 전사했다. 西路軍의 대장이었던 劉綎(유정) 역시 사르후 전투에서 전사했다. 사르후 전투를 계기로 明은 몰락, 淸은 정복 왕조의 길로 들어선다.

사르후 전투에는 1만2000명의 조선군도 참전했으나 光海君의 密命을 받은 도원수 姜弘立이 후금軍에 항복했다. 丁酉再亂(정유재란) 직전, 이순신 타도를 위한 고니시의 술책에 넘어가 宣祖에게 허위 첩보를 그대로 아룀으로써 결과적으로 이순신을 생사의 위기에 빠뜨린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金應瑞는 사르후 전투에 副元帥로 참전했는데, 도원수 강홍립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 김응서는 敵情(적정)을 기록하여 본국으로 보내려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결국 임란은 明이 멸망하고, 淸이 흥기하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또한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정권이 망하고, 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서는 단초가 되었다. 이에야스는 자신은 임진왜란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며 조선과의 國交再開를 요청, 이후 200여 년간 양국은 대체로 평화관계를 유지했다.

이순신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갈수록 높아졌다. 국외에서도 그는 세계 제1의 제독으로 존경받고 있다. 예컨대 1905년 東海해전에서 帝政러시아의 발틱함대를 격멸하여 帝國일본의 軍神으로 추앙받은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는 그의 위업을 찬양하는 사람들에게 『英國의 넬슨과는 어깨를 겨룰 수 있으나 이순신에 비교하면 나는 下士官 정도』라고 밝혔다. 이순신은 시대를 초월하여 나라 사랑의 길과 死生觀(사생관)을 제시한 武人이다

자료 : 월간조선

[문화재방송 캠페인]

문화재에는 우리 민족의 얼과 혼이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은 애국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