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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

[문화유산 답사기]후삼국 가운데 가장 광활한 영토를 통치했던 후고구려, DMZ에 갖힌 궁예의 궁궐터를 언제나 다시 볼 수 있으랴

문화재방송 2020. 10. 11. 16:53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맺어지면서 한반도의 허리를 가로질러 철책선이 쳐지고 약 900평방킬로미터의 땅은 접근할 수 없는, 사라진 땅이 되었다. DMZ에 민간인통제구역까지 더해진 이곳은 일반인들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었다. 사람들이 사라진 이 땅의 새로운 주인은‘자연’이 되었고, 수십 년 동안 생태계가 복원돼 원시 자연에 가까운 모습으로 되살아났다.

 

- 철새들의 안식처

 

여름철의 토교저수지는 그저 거대한 물웅덩이에 불과해 보이지만, 겨울이 되면 이곳의 진짜 주인이 나타난다. 특히 동이틀 무렵이면 잠을 자던 두루미가 일제히 날아오르며 장관을 연출한다. 독수리와 청둥오리, 기러기 등의 새들도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철원에 이처럼 철새가 많이 찾는 이유는 일 년 내내 일정 온도의 물이 뿜어져나오는 샘통을 중심으로 얼지 않고 마르지도 않는 자연 연못이 많은 데다가 사람들로부터 안전하기 때문이다. 자연의 천적인 ‘인간’이 통제되어 원래 주인들이 마음놓고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철원의 동물들을 보다 자세하게 알기 위해 월정리역에 있는 철원 두루미관으로 향한다. 입구에 들어서면 박제된 두루미와 고라니, 독수리 등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생각보다 훨씬 거대한 두루미의 크기에 놀라고, 희고 고운 자태에 감동하게 된다. 이처럼 멸종 위기에 처해 쉽게 볼 수 없는 동물들을 실제 크기로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놀라운 경험이다. 보호를 소홀히 하다 보면 이런 동물들을 전시관이나 사진첩 속에서만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설명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 화산 활동이 만들어낸 비경

 

 

철원은 남한에서 제주도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화산 활동에 의해 형성된 현무암 지형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제주와 달리 이곳의 현무암은 철분을 많이 함유하여 색이 붉고 무게도 훨씬 무거운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한탄강변에서는 수직으로 깎여 단면이 드러난 주상절리의 독특한 풍경을 볼 수 있는데, 송대소 주변에는 이러한 주상절리를 더욱 가깝게 볼 수 있도록 산책로와 자전거 코스를 조성해놓았다. 승일교에서 출발해, 고석정을 거쳐 송대소, 직탕폭포로 이어지는 한여울길은 계절마다 다른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한다.

 


- 세월이 멈춘 듯한 오지 마을

 

 

비수구미 마을을 찾아가는 길은 꽤나 험난하다. 꼬불꼬불한 산길을 넘어 비포장도로를 한참이나 타고 들어가야 작은 마을이 나온다. 단 네 가구만이 사는 오지 중의 오지 마을인 이곳이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은 한 방송사 프로그램에 나오면서부터다. 이후 많은 사람들이 때 묻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풍경을 찾아 어려운 발걸음을 하기 시작했고 작은 민박집도 북적이게 됐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 험난한 길을 돌고 돌아 이곳에 오는 이유는 와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자연의 고즈넉함 때문이다. 마치 세상과 단절되어 시간이 멈춘 듯한 마을과 자연이 만들어낸 천혜의 아름다움은 그 모든 수고로움을 잊게 하기에 충분하다.

 


- 열목어가 사는 천연의 계곡과 숲

 

DMZ에서는 차갑고 가장 맑은 물에서만 산다는 열목어도 볼 수 있다. 열목어 최대 서식지로 손꼽히는 두타연으로 가는길, 출입통제소에서 나눠주는 위치추적기를 목에 거니 이곳이 민간인통제구역이자 잠시 멈춘 전쟁의 한가운데라는 사실이 새삼 와 닿는다. 우거진 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노라니 “지뢰 미확인 지역이기 때문에 정해진 길로만 다니고 물에도 절대 들어가지 말라”는 설명이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그렇게 사람들의 발길이 통제된 덕분에 열목어는 강물을 자유로이 헤엄칠 수 있었을 것이다. 인간이 자연에 얼마나 해를 끼쳐왔는지 새삼 미안해진다.
안내소를 지나 우거진 숲 사이 비포장도로를 한참 달려 도착한 두타연은 자연 그대로인 계곡 사이로 투명하게 흐르는 물이 신비로울 지경이다. 두타연은 굽이치던 물길에 의해 한 부분이 절단되면서 작은 폭포가 되고 그 아래 물웅덩이가 만들어진 지형으로, 그 일대에는 생태 탐방 코스가 조성되어 있다. 양구 전투위령비와 조각공원을 지나 징검다리도 건너고, 출렁다리도 건너보면 천혜의 자연 한가운데 있음을 만끽할 수 있다.

 

 


- 자연이 만든 신기한 땅

 

 

‘펀치볼마을’이라는 재미있는 이름을 가진 마을을 찾아나선다. 역시 굽이굽이 산길을 올라야 하지만 산 중턱에 시원하게 뚫린 터널이 마을로 가는 길을 훨씬 단축시켜준다. 마을의 모습을 제대로 보려면 터널의 맞은편 을지전망대에 오르는 것이 좋다.
을지전망대에 올라 마을을 내려다보면 ‘해안’이라는 원래 이름 대신에 왜 펀치볼이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알 수 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 종군기자가 산으로 둘러싸여 분지를 이룬 모습이 마치 오목한 화채그릇 같다고 해서 ‘펀치볼(Punch bowl)마을’이라는 이름으로 언론에 소개한 데서 유래되었는데, 참으로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이곳 펀치볼 마을은 19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출입증을 받은 사람들만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오지에 속했지만, 지금은 누구나 자유롭게 왕래가 가능하고, 독특한 마을의 모습을 보러 찾아오는 여행객들도 꽤 많다. 마을을 한 바퀴 도는 둘레길도 마련돼 있어 여유롭게 길을 따라 걸으며 마을의 모습을 좀 더 가까이에서 느낄 수도 있다.

 

 

- 남북의 거물들이 선택한 호수

 

 

화진포에는 유명한 세 개의 별장이 있다. 북의 김일성과 우리나라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과 부통령 이기붕의 별장이다.
그만큼 아름답고 자연을 벗해 휴식을 취하기에 좋다는 뜻일것이다. 화진포는 동해안을 따라 만들어진 자연 호수들 중에서 가장 큰데, 갈대밭이 넓게 자리하고 있어 철새들이 찾기에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다. 특히 백조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고니가 호수에서 노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잔잔한 호수의 물결과 함께 마음도 평온해진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할수록 자연이 제 모습을 유지하고, 동물들도 활기차게 살아간다는 당연한 사실을 DMZ에서 새삼 깨닫는다. 아름다운 자연과 신비를 간직한 생명들을 보면서 감탄하는 동시에, 인간이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에게 얼마나 몹쓸 짓을 해왔는지 돌아보게 된다. 전쟁과 분단이라는 비극이 만든 것이기는 하지만, 덕분에 지킬 수 있었던 자연을 앞으로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 숙제가 남는 여행길이다.

 


- 함께 가보면 좋을 곳들

 

 

 

● 길에서 만난 이야기

 

궁예 궁궐 모형도

[민통선 문화유산 기행](16) 태봉국도성(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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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06.22 16:12

 

“저기가 비무장지대가 맞나요?”

강원 철원 홍원리 필승전망대. 의외였다. 비무장지대란 높고 깊은 산악지대, 즉 사람들의 발길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는 게 일반상식인데…. 게다가 이곳은 ‘철의 삼각지대’가 아닌가.

“적(북한·중국)의 생명선인 철원·김화·평강의 ‘철의 삼각지대(Iron Triangle Zone)’를 깨뜨려야 합니다.”(밴플리트)

한국전쟁때 밴플리트 장군이 이름 붙인 바로 그 유명한 요충지인데…. 하지만 해발 220~330m 위 용암대지에 펼쳐진 드넓은 평원이다. 금방이라도 가서 썩썩 농사를 짓고픈 충동이 일어날 만큼.

하지만 평야를 품에 안고 있는 저편 고지와 능선의 이름, 그리고 사연을 알게 되면 나른한 평온이 깨진다.

트레일블레이저 미드나잇

 

철원 남방한계선에서 바라본 태봉국도성 동벽의 흔적(원 안). 휴전선과 경인선 철로가 동서남북으로 가르고 있는 분단의 상징이기도 하다. <철원|이상훈기자>

 

▲ 태봉국도성, 백마고지

전망대에서 맨 왼쪽에 자리잡고 있는 곳이 백마고지다. 넓은 철원평야에 기댄 채 해발 395m에 불과한 야트막한 고지였고 평범한 야산이었다. 하지만 한국전쟁 발발 후 철의 삼각지대 가운데 철원 꼭지점의 어깨부에 해당되는 요충지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이 야산을 빼앗기면 2억평에 달하는 철원평야는 순식간에 적의 감제 아래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군의 병참선인 3번도로(서울~원산)를 비롯, 보급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1952년 10월6일부터 백마고지를 둘러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열흘간 12차례의 쟁탈전 끝에 고지의 주인이 7번이나 바뀌었다. 피아간 1만70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고지에 쏟아진 포탄만 27만5000발에 이르렀다. 고지는 벌집이 되었다.

마침내 한국군 9사단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백마고지는 지금 민간인들은 갈 수 없는 남방한계선 북쪽에 있다. 주변의 산인 고암산(780m)은 일명 김일성 고지이며, 곁의 능선 별칭은 피의 능선이다. 또 이어 저격능선, 낙타고지…. 그리고 또 하나, 철의 삼각지대 맨위 꼭지점인 평강(지금은 북한).

▲ 핵무기 가상표적

이곳은 한국전쟁 때 미 극동사령부가 핵무기 사용을 고려하여 지목한 핵무기 가상표적이기도 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중공군이 참전하자 기자회견을 통해 “핵무기 사용도 늘 적극적으로 고려해왔다”고 언급한다. 비록 영국 등의 반대로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쩔 뻔 했단 말인가. 비극의 현장이 될 뻔한 평강이다.

이런저런 상념에 빠질 무렵, 한국국방문화재연구원 이재 원장과 이우형 연구원이 손가락을 내민다.

“저깁니다. 저기 나무 하나 보이시죠?”

손에 닿을듯, 금방이라도 뛰어가면 10분도 걸리지 않을 곳, 바로 그곳을 가리킨다.

“나무를 따라 쭉 이어진 윤곽이 보이죠? 저기가 바로 태봉국도성 외성의 흔적입니다.”

아! 태봉국도성. 풍운아 궁예가 1100년전 저기 보이는 풍천원 너른 들판에 도읍을 정하고 대동방국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바로 그곳이라지.

“어마어마한 들판 아닙니까. 이곳을 한번 보면 왜 궁예가 이곳에 도읍을 정했는지 깨닫게 되죠.”

아니 이원장의 말처럼 왜 다른 왕조가 이곳에 도읍을 정하지 않았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태봉국도성이 단순히 비운의 왕 궁예의 야망과 좌절을 묻은 곳이라는 의미에서만 주목을 끄는 것은 아니다.

한마디로 태봉국도성은 전쟁과 분단이 갈라 놓은 비극의 상징이다. 남북 분단과 냉전의 상징인 휴전선(군사분계선)이 딱 반으로 도성을 가르고 있으니 말이다. 휴전선을 중심으로 남북 2㎞씩 물러난 공간 사이, 즉 북방한계선과 남방한계선 사이에 팔자 센 도성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그뿐 이런가. 그것도 모자라 서울~원산간 경원선 철도도 도성을 갈라 놓았다.

▲ 휴전선으로 쪼개진 도성

남북으로는 끊어진 경원선이, 동서로는 휴전선이 도성을 잘라 놓은 것이다. 비운의 궁예는 죽어 1000년이 훨씬 지나 백골이 진토가 되었을 텐데도 사지가 잘리는 신세에 놓여있는 것이다.

“천우 2년(905년)에 새 서울(철원)에 들어가 대궐과 누대(樓臺)를 수리하였는데 극히 사치로웠다.”(삼국사기 열전 ‘궁예조’)

“궁예는 혹독한 혹정으로 백성을 다스리며~국토는 황폐해졌는데 오히려 궁궐만은 크게 지어~원망과 비난이 일어난 것이다.”(고려사 태조 원년)

굳이 옛 사료를 들추지 않아도 태봉국도성의 규모는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제때 지도를 보면 도성의 외곽성은 12.5㎞, 내곽성은 7.7㎞에 이른다. 백제의 풍납토성(3.5㎞), 신라 월성(1.8㎞), 고구려 국내성(2.7㎞)에 비할 바가 아니다. 조선의 서울성곽(17~18㎞)에 견줘도 그리 손색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금단의 땅. 그저 먼발치로 도성의 흔적만을 추측할 뿐이다. 곁눈질로 힐끔힐끔. 비무장지대의 관할권이 유엔사 정전위에 있고 비무장지대 출입 자체가 정전협정상 금지되어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 먼발치에서 본 궁예의 흔적

행사차 평양까지 드나들었던 유홍준 문화재청장조차 우여곡절 끝에 태봉국도성을 친견할 수 있었다. 그것도 군 수색로를 따라 먼발치에서…. 현재 가장 잘 남아있는 흔적은 바로 기자가 서 있는 이 필승전망대에서 볼 수 있는 도성의 동남벽 부분.

지금까지 4번 태봉국도성을 조사한 이재 원장의 말을 들어보자.

“흙으로 쌓은 흔적입니다. 사다리꼴 단면으로 성벽 단면 하단폭은 6~7m, 상단폭은 5m 정도이며, 높이는 1.2m 정도 남아 있었습니다.”

물론 성 자체가 비무장지대 안쪽인 데다 지뢰지대인 만큼 이원장도 제한된 수색로를 따라가며 제한된 지역만을 먼발치에서 확인했을 뿐이다. 끊어진 경원선과 3번 국도의 흔적은 잘 남아 있었다. 남북이 합의한다면 경원선과 3번국도 복원사업은 어렵지 않게 이뤄질 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궁궐터도 짐작할 수는 있었는데 유구를 확인할 수 있는 거리는 안됐다.

일제가 만든 ‘조선보물고적도보’를 보면 태봉국도성터에서 많은 유적·유물이 확인됐음을 알 수 있다. 왕궁성 부근에 있었던 석등은 일제 때 국보 118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외성 남대문터에서는 귀부(거북모양의 비석 받침돌)가 확인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왜 궁예는 철원 풍천원 벌판에 이토록 어마어마한 왕궁을 세웠을까. 궁예가 과연 꿈꿨던 것은 어떤 세상이었을까.

〈이기환|철원 풍천원에서〉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6221612271&code=900308#csidx6f209036b5291208f2d3661a5d377f0

[민통선 문화유산 기행](17) 태봉국도성(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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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방국의 기치… 궁예는 역사의 패륜아일까-

태봉국 도성 안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경원선 철로 흔적. 최근 유홍준 문화재청장과 함께 도성을 답사하면서 찍은 사진이다.

 

“신라는 운수가 다하고~뭇 도적이 고슴도치 털처럼 나타났다. 가장 악독한 자들이 궁예와 견훤 두 사람이었다.”(김부식의 사론)

궁예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각박하기 이를 데 없다. 한때는 “사졸들과 고락을 함께 했으며, 인사에도 사사로움 없어 백성들이 추앙했다”(삼국사기)는 호평을 들었는데…. 이쯤해서 역사는 늘 승자의 편임을 상기하자. 궁예가 웅지를 펼 무렵 중국 중원은 혼란기였다. 당나라에 망조가 들고 중원은 5대10국시대(907~979년)에 접어들고 있었다. 천년왕국 신라는 망해가는 나라였다.

궁예는 처음에는 “평양 구도(舊都)에 잡초만 무성하니 반드시 원수를 갚겠다”고 선언하고는 국호를 고려라 했다. 고구려 재건의 기치를 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야망은 커진다.

# 대동방국

904년엔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바꾸었고, 911년엔 태봉(泰封)으로 다시 고친다. 마진은 ‘摩訶震檀’의 줄임말. ‘마하’는 범어로 ‘크다’는 뜻이고 ‘진단’은 동방을 말한다. 또 주역에는 ‘태(泰)는 천지가 어울려 만물을 낳고 상하가 어울려 그 뜻이 같아진다’고 했고, 봉(封)은 봉토를 뜻한다. 결국 궁예는 ‘영원한 평화가 깃든 평등 세계’, 즉 대동방국의 기치를 높이 든 것이다.

“비겁한 자의 친구가 되느니 정직한 자의 원수가 되는 게 낫다”고 설파한 궁예. 그는 철원(896년·현재 구철원 동송)~송악(898년)에 이어 905년 다시 철원(이곳 풍천원)에 도읍지를 정했다. 철원에만 두번이나 도읍을 정한 것이다. 궁예가 뜻을 폈던 시기에 신라 천년왕국이 뿌리째 무너지면서 백성들은 유리걸식하고 있었다.

백성들은 미륵불을 자처하고 나타난 궁예에 홀딱 빠졌다. 세상이 끝나는 날 홀연히 출현하여 세상을 구원하는 미륵불이 현신했다니까. 그는 세상을 구원한다는 원대한 포부를 세운 것이다.

철원 환도 이후 궁예는 907년 무렵 삼한 땅의 3분의 2를 품에 안았다. 실로 대단한 기세였다.

하지만 너무 과속했던 탓일까. 궁예에게 귀부했던 고구려 부흥세력, 즉 왕건을 중심으로 한 송악세력이 반발의 기미를 보인다. 당초 궁예가 구철원에서 송악으로 도읍을 옮긴 이유는 왕건세력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 북원(원주)을 중심으로 영향력을 떨친 양길을 제압하려면 송악 호족들과의 제휴가 필요했던 것이다.

# 비참한 최후

태봉국 도성 남문지 옆에 있었던 석등. 일제 때 찍은 것이다. 월정전망대 우측 전방에 있었으나 현재는 확인하기 어렵다. 일제시대 국보였다.

하지만 궁예는 뜻을 이루자 다시 철원으로 복귀했다. 그러면서 청주지역의 1000가구를 철원 땅으로 이주시킨다. 이것은 궁예가 송악세력 말고도 새로운 지지세력을 확보하려는 뜻이었다. 남으로 남으로 세력을 키워간 궁예로서는 ‘고구려 세력’만으로는 천하를 경영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자 그동안 궁예를 도왔던 송악세력, 즉 고구려 부흥세력은 불안에 떤다. 게다가 도읍지 건설에 엄청난 공력을 쏟았고, 때마침 흉년이 들면서 민심이 돌아섰다.

불승들도 관심법(觀心法)을 내세워 신하들과 심지어 부인, 아들까지 죽인 궁예를 외면했다. 결국 궁예는 918년 보수 호족들에 의해 축출된다. 그의 최후는 너무도 비참하다.

“궁예는 암곡(巖谷)으로 도망하여 이틀 밤을 머물렀는데, 굶주림이 심하여 보리이삭을 몰래 끓여 먹다가 부양(평강)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했다.”(고려사)

과연 그럴까. 물론 역사서는 한결같이 궁예를 역사의 패륜아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철원지역에서 지금도 채록되는 구비전설은 궁예왕을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인물로 전한다. 백성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전설은.

“구레왕(궁예왕)이 재도(再圖)할 땅을 둘러보는 데 어떤 중이 나타나자~이에 왕이 혹시 용잠호장(龍潛虎藏)할 땅이 없겠느냐 하매 중은 이 병목 같은 곳에 들어와 살 길을 찾는 것이 어리석다 하자~ (궁예가) 아아 천지망아(天之忘我)로다 하고 심연을 향해 몸을 던지니~우뚝 선 채로 운명하였다.”

육당 최남선이 궁예왕 묘가 있는 삼방협(평강~안변 사이의 협곡)에서 채록하여 쓴 ‘풍악기유(楓嶽記遊)’의 한 토막이다.

풍악기유는 또한 “(궁예왕은 이후) 이 지방의 독존신(獨存神)이 되었다”고 했다. 유인순 강원대 교수의 채록을 살펴보자.

“금학산(철원 동송읍·947m) 밑에 도읍했으면 300년은 갈 건데, 고암산(780m) 밑에 세워 그 양반(궁예왕)이 망했다는 거야” “(왕건과 강비의 사통이) 들키니까~왕건을 죽일 수 있지만 자기를 보살펴준 사람이기 때문에~.”

대부분 긍정적인 내용이다. 구비전설은 물론 궁예왕의 실정을 대궐터 선택의 잘못, 방탕한 여성관계, 가학증세, 그로 인한 민심의 이반과 왕건과 갈등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원인에 대해서는 역사서와는 분명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

# 각박한 평가

유교수는 “전설 전승 집단의 의식 속에 왕건에 대한 강한 부정의식이 숨어 있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또한 구비 및 지명전설에는 궁예왕이 추종세력과 함께 보개산성(포천 관인), 명성산성(철원 갈말), 운악산성(포천 화현) 등에서 치열한 항전을 벌인다.

“궁예 관련 지명전설을 보면 무려 네곳의 대궐터가 보입니다. 풍천원 벌판을 비롯해 왕건 세력과 치열하게 싸운 명성산성과 보개산성, 그리고 운악산성 등이 그곳입니다. 궁예는 쫓겨난 뒤 바로 죽은 게 아니라 왕건과 10~15년가량을 더 항전했다는 자료입니다.”

지금도 왕건과 대치하며서 여우처럼 엿보았다고 해서 붙은 ‘여우고개’, 200명이 들어갈 수 있다는 ‘궁예왕굴(명성산)’, 궁예가 자신의 운세와 국운을 점치려 ‘소경과 점쟁이’들을 불렀다는 ‘소경의 절터’, 궁예와 왕건이 투석전을 벌였다는 운악산 인근의 ‘화평장터’, 대패한 궁예군의 피가 흘렀다는 ‘피나무골’ 등…. 유교수는 이 모두가 궁예왕에 대한 주민들의 승모와 연민, 안타까움을 상징하고 있다고 본다.

궁예는 원대한 포부를 지닌 개혁가였다. 하지만 기득권 세력과 대결에서 끝내 패했다. 또한 역사서는 승자의 기록 아닌가. 궁예를 어떻게 폄훼하든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좀 옹졸하다는 생각은 든다. 저 유명한 역사가 사마천은 무려 2000년 전에 쓴 ‘사기’에서 유연한 사고를 보여준 바 있다. 그는 ‘사기’의 세가(世家)에 제후와 왕의 흥망성쇠를 담았다. 그런데 진나라 말 농사꾼의 신분에서 일어나 한때 천하를 호령했던 미완의 혁명가 진섭(陳涉)을 당당히 ‘세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러면서 이유를 달아놓았다.

“진섭이 죽었으나 그가 봉립하고 파견한 왕후장상(항우와 유방이 대표적)이 마침내 진을 멸망시켰다. 이것은 진섭에 의해 처음으로 반란이 시작되어 그런 결과를 촉진한 것이다. 고조(유방)때는 진섭을 위해 분묘를 간수하는 30가구를 배치해놓고 지금도 가축을 잡아 진섭을 제사지낸다.”

승리자로서, 최소한 이 정도의 아량은 베풀 수 있지 않을까.

〈이기환 선임기자|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6221612271&code=900308#csidx6f209036b5291208f2d3661a5d377f0

 

 

<철원 풍천원 벌판을 바라보며〉

-과거·현대·미래 함축된 곳… 풍천원 벌판을 도읍지 삼아-

어찌 홍곡(鴻鵠)의 뜻을 연작(燕雀)이 알리오.

궁예가 철원 풍천원 벌판을 도읍지로 삼은 뜻을 보통의 우리가 짐작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임진강·한탄강 유역의 독특한 환경을 살펴보자. 이곳의 지리적인 특징은 서울∼원산간의 단층대인 추가령곡과 대륙충돌대라는 일정한 방향성을 가진 두 습곡단층대에 의해 결정된다. 너무도 예민한 접촉대다. 그러니 서로 다른 세단계의 화산암 분출이 시간의 폭을 두고 이 지층구조의 중심선 취약부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이에 더하여 임진강·한탄강을 중심으로 하는 인간의 역사 역시 뜨겁게 흘러왔다.

전곡을 중심으로 하는 구석기 중심의 선사벨트, 고구려·백제·신라와 북방계의 남하에 의해 조용할 날이 없었던 역사적 쟁패의 사례. 그리고 지금도 한국전쟁과 냉전, 분단의 기구한 사연이 두 강을 중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과거와 현재, 미래의 역사가 농축돼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엄청난 에너지 충돌의 한 복판에 궁예의 태봉국도성이 위치한다. 도식적인 국도풍수의 이론은 이곳에서 통하지 않는다.

미완의 혁명가였던 궁예의 배포와 추종했던 싱크탱크 그룹의 청사진을 만족할 만한 공간이 철원벌의 풍천원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용암벌판에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풍천원을 보면 국토의 중심이며 삼재 소통의 매개 공간인 오리산을 진산으로 하고, 청정했던 지장신앙의 메카인 보개산을 앞에 두었다.

궁예는 이곳에서 미륵 세상을 펼치려 했다. 철원 도피안사 비로자나불상을 도성의 품에 안아 반야용선을 띄우며 해가 지지 않는 불국토를 건설하려 했다. 이런 궁예의 웅대한 설계를 상상한다면 궁예가 마냥 폭군의 이미지요, 실패한 정치가요, 허황된 종교인라고 매도한다는 것은 너무 단견일 수 있다.

습곡단층대가 일으키는 땅의 봉합점이자 열에너지가 분출하는 중심부에 위치한 태봉국도성. 918년 6월인 바로 이맘때 숨어서 보리 이삭을 훔쳐 먹던 궁예의 최후와, 철책 안에 가둬진 태봉국도성의 침묵이 던져주는 화두가 더 없이 무겁기만 하다.

〈이우형|한국국방문화재硏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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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6291445381&code=900308#csidx365be414ed2cc939bca5f1b53f37e59

 

DMZ에 갇힌 궁예의 꿈…"남북 함께 발굴하자"

 


조을선 기자

입력 : 2015.10.18 21:12
<앵커>

강원도 철원 비무장지대 한가운데 1천 100년 전 궁예가 세운 '태봉국' 도성터가 있습니다. 개성 만월대 공동 발굴에 이어 태봉국 도성터의 남북 공동 발굴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조을선 기자입니다.

<기자>

강원도 철원 평화 전망대에서 바라본 비무장지대입니다.

북쪽 비무장지대 풀숲 사이에 1천 100여 년 전 후고구려, 태봉국의 도성터가 감춰져 있습니다.

고구려의 후손을 자처한 궁예는 서기 905년 나라 이름을 태봉으로 짓고 철원으로 도읍을 옮겨 도성을 지었습니다.

태봉국 도성이 비무장지대에 고립돼 있다 보니 1천1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태봉국 도성은 외성과 내성으로 이뤄진 국내 유일한 이중구조 성으로, 외성 둘레만도 12.5km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재/국방문화재연구원 원장, 현장조사 실시 : 현무암들이 줄줄이 남아 있습니다. 성터죠. (성터를 따라) 식물들도 꽃을 피운 게 눈으로 명확하게 들어와요.]

최근 고려 궁성터인 개성 만월대 남북 공동 발굴에 이어 정치권을 중심으로 태봉국 도성터의 공동 발굴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원유철/새누리당 의원, 외교통일위 : 이러한 남북한의 문화적 교류를 통해서 DMZ가 분단과 대립의 상징이 아닌 통일과 화합의 상징으로 발전돼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통일부도 남북관계 상황을 고려해 적절한 시기에 북측과 협의하겠다는 입장이어서 공동 발굴 움직임이 조만간 가시화될 전망입니다.

(영상취재 : 김승태, 영상편집 : 김지웅, 화면제공 : G1)
출처 : SBS 뉴스 / 원본 링크 :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3222182&plink=ORI&cooper=DAUM&plink=COPYPASTE&cooper=SBSNEWSEND


검은 선으로 보이는 철책선 위의 땅이 궁예의 왕궁 터

1년만에 다시 열린 파주 DMZ관광…"분단 현실 느껴진다"

송고시간2020-09-25 13:31

 

노승혁 기자

주민들 "ASF·코로나로 지역경제 최악…관광 재개돼 다행"

파주시, 당분간 하루 10회·회당 20명 제한 운영

(파주=연합뉴스) 노승혁 기자 = "북한이 이렇게 가까운 줄 몰랐어요. 직접 눈으로 보니 신기할 따름 입니다."

25일 오전 경기 파주시 도라전망대 옥상 전망대에서 만난 관광객 김소현(26·경기 용인시)씨는 북측의 개성 송악산과 개성공단 등을 바라본 소감을 이같이 말했다.

재개된 파주 안보관광

(파주=연합뉴스) 임병식 기자 = 파주지역 안보관광이 재개된 25일 경기도 파주시 도라전망대에서 관광객들이 비무장지대와 북한 일대를 바라보고 있다. 2020.9.25 andphotodo@yna.co.kr

지난해 아프리카돼지열병(ASF)에 이어 올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까지 확산하면서 11개월 넘게 중단된 파주 비무장지대(DMZ) 평화관광이 이날 재개됐다.

김씨는 "남자친구와 최근 개장한 임진각 평화 곤돌라를 타고 임진각 평화누리를 구경하다 '도라전망대와 제3땅굴이 재개한다'는 주변 관광객의 말을 듣고 임진각에서 관광버스를 탔다"며 "남측 대성동마을에 내걸린 대형 태극기 북측의 기정동 마을의 인공기를 보니 분단의 현실이 느껴진다"고 설명했다.

 

경기 의왕시에서 도라전망대를 찾은 변성훈 씨도"군 생활을 전방지역인 강원 화천에서 했는데, 이곳 도라전망대에서는 북측이 훨씬 더 가깝게 보인다"면서 "북측의 아름다운 송악산과 함께 부서진 개성공단 종합지원센터의 모습을 보니 분단의 현실이 피부로 느껴진다"고 말했다.

지인과 도라전망대를 찾은 그는 "도라전망대 등 중단된 파주 평화 관광이 1년 만에 재개되는 것을 모르고 방문했다"면서 "오늘 날씨도 좋고, 역사의 현장을 좀 더 공부해 다음에 재방문하겠다"고 덧붙였다.

이날 오전 도라전망대를 찾은 관광객은 32명이다.

오후에도 20여명이 찾을 예정이다.

재개된 파주 안보관광

(파주=연합뉴스) 임병식 기자 = 파주지역 안보관광이 재개된 25일 경기도 파주시 도라전망대에서 관광객들이 방역 절차에 따라 입장하고 있다. 2020.9.25 andphotodo@yna.co.kr

이완배 파주 통일촌 이장은 "작년 9월 발병한 ASF로 10월 2일 민통선 관광이 중단되고, 올해 초 코로나19 확산으로 접경지 지역경제가 최악"이라며 "거의 1년 만에 평화 관광이 재개돼 기쁘다"고 말했다.

이어 "당분간은 관광객이 제한적이겠지만, 하루빨리 코로나19 상황이 개선돼 예전처럼 많은 관광객이 찾길 희망한다"며 "마을주민들도 방역과 소독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파주시는 이번 DMZ 평화관광 재개에 앞서 ASF 재발 방지를 위해 관계부처와 합동 점검 및 예방조치를 마쳤다.

또 코로나19에 대응하기 위해 매표-이동-관람 등 관광객의 모든 동선에서 발열 체크를 비롯한 2∼3중의 대인 방역을 거치도록 했다.

지난 14일에는 육군 제1사단과 시간대별 20명씩 관광 시뮬레이션을 해 관람 시설의 밀집도 등을 점검하고 최종 조율을 마쳤다.

재개된 파주 안보관광

(파주=연합뉴스) 임병식 기자 = 파주지역 안보관광이 재개된 25일 경기도 파주시 도라전망대에서 관광객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20.9.25 andphotodo@yna.co.kr

특히 코로나19 확산세 상황을 고려해 당분간 하루 10회, 1회 투어 인원 20명으로 제한하고 단체관광은 사전예약제로만 운영하기로 했다.

최종환 파주시장은 "관광 재개 중에도 ASF와 코로나19 상황에 따라 추가 방역 조치와 관광객 밀집도 완화시책을 병행할 것"이라며 "힘들게 관광이 재개된 만큼 방역에 최선을 다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ns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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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yna.co.kr/view/AKR20200925086300060?input=1179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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