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문화재방송.한국 www.tntv.kr

동영상

[동영상 다큐] '끝나지 않은 전쟁, 소리없는 총성' 미성년 학도병 홀대, 그리고 6.25 전쟁 고아가 미국 백악관 안보보좌관이 되기까지

문화재방송 2021. 6. 24. 15:45

기획. 취재. 촬영. 편집:헤리티지 / 내레이션:한송이

625 한국전쟁, 71년 전의 우리나라에 있었던 비극.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날을 맨주먹 붉은피로.... 과연 625 노래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많은 것을 잃게 한 전쟁의 역사.. 6.25전쟁


1945년 독립과 함께 찾아온 국토의 분단에 의해서

우리는 국방비문제부터, 미군의 주둔, 전시작전권, 탈북자 문제 등..

끊임 없는 북한과 관련된 논쟁속에 살아가고있다.

저 머나먼 아프리카 작은 나라에서 부터 영국, 미국 등의 서방 주도국가 들이 참전하였다.
3년간 지속된 전쟁에서 우리는 남은 것이 없다할 만큼 많은 것을 태워버렸다.

 

 

 

 

전쟁은 많은 상처를 남긴다. 쏟아지는 포탄과 끊임없는 총성 속에서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고, 대대로 이어온 삶의 터전을 잃었다. 그뿐 아니라 아군과 적군으로 나뉘어 총칼을 겨눈 사람들은 큰 트라우마를 안고 평생을 살아간다.
포탄과 총성은 잠시 끊겼지만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전쟁의 한가운데로 들어간다.


 

- 사라진 옛 도시의 흔적을 찾아

 

 

경원선을 달리는 기차는 백마고지역에서 멈추어 섰다가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사람도 마찬가지. 분단을 상징하는‘가로막힌 땅’ 철원에는 발이 묶여 돌아서야 하는 우리의 모습이 담겨 있다. 군사분계선에 가로막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발걸음뿐만이 아니다. 전쟁을 겪으며 무너진 현장은‘민통선’이라는 이름으로,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고 전쟁 당시의 과거에 고스란히 묶여 있다.
지금은 철원이 군사도시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한국전쟁 이전만 하더라도 비옥하고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고 남과 북을 잇는 철도가 지나는 대규모 도시였다. 철원 근대문화유산 건물터를 둘러보면 그 당시 철원의 모습을 짐작해볼 수 있다.
오늘날 은행에 해당하는 ‘구 철원 제2금융조합 건물터(등록문화재 제137호)’, ‘철원 농산물검사소(등록문화재 제25호)’, ‘철원 얼음창고(등록문화재 제24호)’를 비롯해 신도 수가 500여 명에 달했던 ‘철원 감리교회(등록문화재 제23호)’ 등의 흔적은 이 지역이 경제·문화 중심지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일제가 물러가고 난 이후 철원은 38선 이북인 북한 지역에 속해 있었는데, 이때 지은 ‘철원 노동당사(등록문화재 제22호)’도 아직 남아 있다. 치열했던 전쟁의 포화 속에서 인근의 다른 건물들이 대부분 파괴되고 거의 흔적만 남은 것에 비해, 이 건물은 비교적 양호하게 골조와 외벽이 남아 있다. 당시 공산당이 자신들의 위력을 과시하기 위해 공을 많이 들여 견고하게 지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곳에서는 주민들을 대상으로 온갖 수탈과 핍박이 이어져 “이곳에 들어가면 성한 몸으로 나오지 못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과거엔 돈과 사람이 모이는 중심가였지만 지금은 인솔자를 따라 줄지어 다니는 관광객이 지나가고 나면 가끔 농부나 군인들의 트럭 외엔 지나는 발길이 거의 없다. 전쟁이 바꾸어놓은 이 같은 풍경은 휴전선이 걷히고 나면 다시 옛 영광을 찾을 수 있을까?

 


- 남과 북이 하나로 연결되는 다리

 

  

철원에는 다리의 반절이 각각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승일교가 있다. 승일교는 1948년 철원에 주둔해 있던 공산군이 인근 주민들을 강제 동원해 놓기 시작했다. 당시 이곳 주민들은 농사나 공장 일을 마치고 나면 어김없이 다리 건설 현장으로 와서 정해진 양의 돌을 날라야 했는데, 매일 밤늦게까지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다고 한다. 그러나 1950년 전쟁이 발발하자 공사가 중단됐고, 이곳은 남측 영토가 되었다. 끊겼던 다리는 1958년 나머지 절반의 공사를 마무리하면서 드디어 이어지게 됐다.
이렇게 만들어진 다리는 북측 절반은 옛 소련식으로, 남측 절반은 미국식으로 지어져 각기 다른 교각 아치를 볼 수 있다. 남과 북이 함께 만든 이 다리처럼 언젠가는 모든 길이 다시 연결되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기를 꿈꾸며 승일교를 건넌다.


 

- 낡은 이념이 만들어낸 바보댐

 

30대 후반 이상의 국민이라면 누구나 ‘평화의 댐’을 기억할것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둔 시점, 북에서 금강산댐을 만들어 많은 양의 물을 한 번에 흘려보내면 서울이 물바다가된다는 이야기에서 댐 건설이 시작됐는데, 이후 이 모든 것이 사기에 가까운 과장과 왜곡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지금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지만 그 논란의 주인공은 어마어마한 규모로 우리를 놀라게 한다. 평화의 댐은 2005년 보강 공사 이후 약 26억 톤의 물을 저장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는 육지의 바다라 불리는 소양강댐의 29억 톤에 육박하는 양이다.
그러나 이 댐은 소양강댐이 만든 ‘바다 같은 호수’의 그림은 만들어내지 못한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댐으로, 평소에는 물을 저장하지 않고 그냥 흘려보내는 건류댐이기 때문이다. 홍수 조절이나 전력 생산 등 댐의 원래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바보댐’이라는 굴욕적인 별명을 얻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2010년 강원 북부 지역의 집중호우와 2002년, 2005년 북의 예고 없는 금강산댐 방류 시에 제법 그 기능을 톡톡히 해 재평가되기도 했다.
댐 전망대 옆에는 커다란 종이 걸려 있는데, 세계 각 지역의 전쟁 현장에서 수거한 탄피를 모아 만든 것이다. 방문객은 세계 평화와 우리나라의 통일을 기원하며 종을 울릴 수 있는데, 공원을 넘어 울려퍼지는 웅장한 종소리가 왠지 슬프게 들리는 것은 그 안에 담긴 아픈 이야기들 때문일 것이다.

 


-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북한 땅

 

양구 을지전망대는 군사분계선에 가장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곳 중 하나다. 가파른 경사를 굽이굽이 올라가면 해발 1,000미터의 높이에서 주변을 살필 수 있다. 발 밑으로는 남측한계선이 지나고 바로 코앞으로 군사분계선이, 그 바로 너머엔 북한 군인들의 초소가 있다. 발을 뻗어 내디디면 바로 닿을 것 같이 가까운 곳에 북한 땅, 북한 사람이 있다니 쉽게 믿기지 않는다.
이렇게 남과 북이 가까이 마주하고 있는 탓에 을지전망대에서는 유난히 심리전이 강하게 전개됐다고 한다. 남측 초소에서 마주 보이는 북한 쪽 산 계곡에 폭포가 하나 있는데, 그곳에서 우리 군인들의 심리를 혼란케 하기 위해 여자들이 목욕을 하곤 했다는 것이다. 우리도 이에 질세라 맞은편 가칠봉 정상에 수영장을 만들고, 이곳에서 미스코리아 수영복 심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지금 들으면 웃음이 나는 해프닝이지만 아직까지 긴장감이 가시지 않은 휴전선 부근에서는 마냥 즐거울 수 없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 금강산 가는 길, 고성 통일전망대

 

1998년부터 2008년까지 금강산 관광이 이뤄지던 당시, 고성 통일전망대 근처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때 사용하던 출입국사무소 등을 지나다 보니 지금은 더 이상 왕래할 수없는 현실이 더욱 안타까울 따름이다. 하지만 바닷가 언덕 위에 있는 통일전망대에 오르자 넓게 펼쳐진 동해와 해변을 따라 북으로 이어지는 해금강의 절경이 멀리서나마 그 모습을 드러낸다. 맑은 날이면 금강산의 일부 봉우리를 볼 수 있어 직접 가지 못하는 아쉬움을 그것으로나마 달래보려고 하는 실향민들이 많이 찾아온다. 언제쯤이면 저곳에 자유롭게 가볼 수 있을까? 지구상 어느 곳이든, 심지어는 달나라 우주여행도 가는 지금, 유일하게 갈 수 없는 땅 북한을 눈앞에 두고 다시 발길을 돌린다.

 

 

- 손잡고 함께 가자

 

고성에서 남쪽으로 향하면 속초 아바이마을에 닿는다. 북에서 피난을 내려온 사람들이 모여서 정착한 마을로, 고유의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60년이 넘게 돌아가지 못하고 이곳에 살게 되리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가로막힌 휴전선은 열릴 줄 모르고 세월은 또다시 흘러간다.
바닷가 모래언덕 위에 지어진 마을이라 짧은 거리지만 갯배를 타고 가야 하는데, TV 드라마와 오락 프로그램에 소개된 이후 관광객 수가 부쩍 늘었다. 아바이순대라고 불리는 오징어순대와 함흥냉면 같은 이북의 맛을 찾아오는 손님들도 많다. 아바이마을을 나와 큰길로 접어들면 속초수복기념탑을 볼 수있다. 전쟁과 관련된 탑인 만큼 으레 군인들의 용감무쌍한 모습을 상상하기 쉬운데, 주인공부터 의외다. 높게 솟은 탑 위에는 두 손을 꼭 잡고 북을 향해 손짓하며 걸어가는 어머니와 아들이 있는데, 분단의 아픔, 통일을 염원하는 간절한 마음이 한데 어우러져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 함께 가보면 좋을 곳들

 

 

 

● 길에서 만난 이야기

 

 

 

◈ 6.25전쟁고아가 백악관 안보보좌관으로 ◈




<14세 고아의 사랑과 리더십>
6 25전쟁 때 부모님이 인민군에 총살 당하는 모습을 보고
서울중학 다니던 임종덕은
14살때고아가되어 소매치기 절도를 하면서
서울역에 모인 100여명의 고아들을 먹여 살리고 있었다.

< 미군 비밀가방 절도로 화이트장군을 만난 소년 >

하루는 미군 장군 찝차가 서울역에 왔다.
순간 임종덕은 불과 몇초 사이에 뒷좌석의 가방을
소매치기 하고 사라지다..
그 장군은 625전쟁에 공군을 총지휘하는
5공군 사령관 스티브토마스 화이트 중장이며
그 가방은 당시 미 공군 특급작전계획 1급비밀문서가 든 가방이다.

미군은 즉시 한국경찰에 의뢰하여 경찰에서는
소매치기 왕초인 임종덕의 소행으로 알고 조사를 했다.
임종덕은 가방에 카메라와 서류가 있어서 서류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카메라는 남대문 시장에 팔았다고 하여
경찰이 쓰레기장에가서 서류를 찾았다,

<자신보다 거지아이 사랑을 위한 소년 >
경찰서에서 조사 받는 동안 수십명의 전쟁고아가
우리 형님 살려달라는 아우성을 하여
화이트사령관은 임종덕의 처지를 알고 임종덕을
하우스보이(하우스보이는 의식주가 해결되는 당시 최고의 자리다)
가자고 하니여기 아이들 위해 떠날수 없다는 말을듣고
화이트 장군이 그 고아들을 미군이 운영하는 제주도 고아원으로
보내고 임종덕을 자기 하우수보이로 채용했다.

< 화이트장군과 하나님을 만나고 두 아버지를 갖게 된 고아>
이렇게 만난 인연으로 임종덕은 성실함을 보여서
그의 양아들이 되고 서울중학교를 재학하고
일요일에 ?獰틜痴? 화이트장군을 따라 여의도비행장에 있는
미국교회에 갔다 미군들의 예배가 끝나자
바로 한국 공군 장병들의 예배가 시작되었다.

이날 예배석 제일 앞줄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김정열 국방장관,
김신 공군참모총장 그리고 화이트 장군과 그외 외국 고관들이 앉았다.
한국 공군 군종감 임동선 목사의 설교에 감동받고
하나님을 마나서 평생 인생지주로 영적 아버지로 삼았다.

<하나님, 이승만 대통령, 한국공군 임목사 존경>
설교중 임종덕의 마음을 뭉클게 했다.
지금 이 나라는 온갖 부정부패의 척결을 단행하지 않으면
이 자유당의 정부는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자유당의 총재인 대통령에서부터 국방장관
그리고 군종감의 직속상관인 공군참모총장까지 앉아 있는 자리에서
새파란 20대의 청년 군종목사가 거침없이 설교를 해나갔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임종덕은 마음 속으로
저 목사님은 오늘 당장 형무소 가겠구나하고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예배가 끝나자 이승만 대통령은
강대상에서 내려온 군종목사를 덥석 안으면서
아주 훌륭한 설교였소,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들이
목사님의 설교를 모두가 다 깊히 생각하고
각자의 소임을 성실히 해 나가십시오
하면서 다시 군종목사의 손을 잡고 목사로서 애로 사항이 있다면
말해보라고 하여 그날 만난 하나님, 목사님, 대통령을 존경하게되였다.

< 대통령이 대방동에 한국 공군교회부터 건축지시 >
그는 공군초대 군종감의 입장에서 제일 큰 애로사항으로
교회가 없어 미군 교회를 빌려쓰는데
하루빨리 우리공군도 자체 교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승만 박사는 앞으로 서울 대방동에 건설될 공군본부 건설 때
공군 교회부터 먼저 건축하라고 공군참모총장에게 지시했다

<부모의 조국을 떠날 수 없다고 한 소년의 효심과 애국심 >
화이트 사령관이 미국 발령으로 같이 가야 한다고 할 때
어린 소년은 부모가 살해당한 조국을 떠날 수 없다고 하자
화이트장군이 더욱 감격하여 미국에 가서
조국을 도울 수 있다고 하여 미국으로 갔다.

< 하바드 대학 박사 논문에 감동한 미국대통령과 장군들의 눈물 >
미국에 가서 조국을 생각하며 친구들 놀때도 공부를 열심히하여
고등학교 우등생으로 졸업하고 하바드 대학에서
미래의 중국에 대한 논문이 백악관까지 감동하고
졸업식에 미군 최고의 합참의장이 된 아버지의 아들 축하를 위해
사상 가장 많이 참석한별들의 잔치였다.

이날 화이트 장군은 6 25전쟁 고아의 처지에서
이렇게 성장한 아들에 감격해서 껴안고 울면서
하나님이 도와주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내 아들 종덕아 빛내주어 고맙다,
훌륭하게 교육시킨 하바드대학에 감사한다하며
펑펑 울고 참석자 모두가 감격의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인류평화를 위해 월남 그린베레로 악전고투 구사일생으로 생존 >
하바드 논문으로 빛난 임종덕박사는 초청하는 곳이 많았지만
군에 지망하여 월남전 그린베레에 참전하고 월남전에서
부하 3명을 살리기 위해 자진해서 월맹군 포로가 되어
월맹군이 죽이려고 머리에 권총을 대고 쏠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했드니 불발로 살아 난 것이 세 번 있었고,

탈출을 위해 4초계획 (감시자 4명을 1초에 1명씩 처치하고
도망계획)을 기도하고 탈출 때 기총사격을 받았으나 상처하나받지 않고 ,
정글에서 살기위해 뱀과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죽을 고비를 수차례 격었으나
항상 성경을 암송하며 기도하므로 하나님이 그 때마다 기적적인
간섭으로 죽음을 모면하게 되었고 구사일생으로 살게 하였다.

< 백악관 초대 은성무공 훈장 받고 특진 후 대통령 안보비서관 됨>
존슨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처음으로 백악관에 가서
은성무공훈장을 받고 특진하였다,
존슨 대통령이 화이트장군에게 어떻게 이렇게 훌륭한 아들을
두었냐고 해서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이라라고 하였다.
5년후 닉슨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두 번째 백악관에 가서
대통령 안보비서관 임명을 받고
전 미 국무장관 키신저와 함께 외교활동을 했다.

<세계평화를 위한 미국 중국 핑퐁 외교로 극비합의 성공 >
미국과 중국이 적성국가로 외교가 단절된 상태이고
당시 중국은 모택동의 문화혁명으로
외국의 어떤문화도 침투할 틈이 없었는데
오직 탁구경기만이 중국정부와 국민이 거부반응이 없어서
임종덕비서관은 미국 탁구선수단을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등지로
순방하면서 탁구를 통한 양국의 스포츠 교류를 서서히 진행시켰다.

임종덕비서관은 당시 중국총리 주은래를 여러번 만나면서
주은래가 동생처름 호의를 베풀면서
임종래라는 이름도 지어주고 모택동도 다섯 번 만났다.

< 한국을 위해 박정희 대통령 만남과 결혼 >
1971년 미국과 중국이 극비리에 정상회담을 합의하고
키신저가 가는 길에 "인접한 일본에도 알려야겠다"고 할때 ,
"한국도 알려야 한다"고 하자 "한국은 당신이 가서 알리시오" 해서
처음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더니
그렇게 좋아하면서 "일 하느라 장가 못간 노총각이니
중신은 내가 서겠다"고 하며 육여사에게 당부하여
한국의 전통 가문인 민씨 가문의 규수를 소개하여
결혼하고 더욱 친밀 해졌다.

<미국과 중국 양국 정상 화해로 1등공신 노벨평화상 감 >
1971년 키신저의 중국 극비방문에서 합의 한 대로
1972 2월 닉슨대통령이 중국을 공식 방문하여
양국 공식성명이 발표되었다.
불과 2.5g 의 작은 탁구공이 미중외교를 성사시킨 1등공신으로
노벨평화상감으로 선정되어 세계를 흥분시키기도 했다.

<이민동포를 위한 LA 동양선교 교회 설립>
임종덕비서관은 LA출장 중에 한국에서 온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 했다가
설교한 목사님을 본 기억이 났다.
20여년 전 1953 15살 때 이승만 대통령과 아버지 화이트장군과
여의도 미군공군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
한국공군군종감 임동선 목사의 설교를 듣고 감동받은 목사였다

임종덕 비서관은 닉슨, 포드, 카트,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안보비서관을 잘 수행했다.
중국과 친선경기로 시작한 핑퐁외교도
1979 양국간 국교가 수립되었다.

< 장군진급 포기하고 카터 대통령과 결별후 LA동양교회 장로가 됨>
카터대통령이 "주한미군을 4,5년사이 완전 철수 하겠다"고 할때
주한 미군사령부참모장 싱글러브소장이 철군반대를 주장했다.
이틀뒤 519일 카터대통령을 싱글러브장군을 소환하고
참모장 직에서 해임시킨후 카터대통령은 임종덕비서관에게
당신의조국이란 입장을 떠나서
나의 철군계획과 한반도 정책에대해 말해보시요하여
현재 4만여 미군이 주한하여 북한이 도발 못하며,
한국은 경재부흥과 더불어 미국이 바라는
민주주의국가로 성장하고 있다하였다.

또 카터가 국가안전보장 이사회에서 과거 월남전에서
도망한 도망병을 전부 사면하라는 지시에 아무도 말 안할 때
장군 진급심사를 두달 앞둔 임종덕은 싱글러브장군과 같이
불이익을 받을줄 알면서도
전투중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친 자를 대통령이 사면하면
앞으로 전쟁터에서 누가 미국을 위해 생명바치겠냐고 했다.

<풀브라이트 종군기자상으로 유명한 우물가의 소년이 임종덕 거지>
6 25 당시 밥을 얻어먹지 못하여 물배를 채우려고
종로구 내자동 우물가를 찾아가서 허기에 지처 힘없이 누어있던
임종덕 아이를 6 25타임즈 종군기자가 찍은 사진이
유명한 풀브라이트 종군기자상을 수상한 사진우물 가의 소년이다.

세계를 감동시킨 The Deer Hunte (디어헌터)영화가 임종덕 대위
포로탈출기
임종덕의 포로수용소 탈출 기자회견을 계기로 그가 겪었던
수용소 생활과 특히 러시안 룰렛 즉, 권총 살인게임 등을
소재로 한 영화가 제작 되었다.
감독에 마이클 치미노 주연 배우에는 로버트 드니로를 비롯한 존케세일,
존세비지 등이 출연한 1978년에 제작된 디어헌터는
우리나라는 물론 전세계 영화 펜들을 감동시켰다.

임종덕 소령은 당시 영화 제작사로부터 기막힌 소재를 제공한 대가로

당시 15만불을 받았고 또한 미국 육군사관학교는 임종덕의 수용소 탈출

15일간의 정글 생활에서 살아나온 과 정을 『정글 탈출기』란 책으로

만들어 육군사관학교 정식 교과서로 사용했다.
= 옮겨온 글 =

[문화재방송(www.tntv.kr) 캠페인]

문화재에는 우리 민족의 얼과 혼이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은 애국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