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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중계]볍씨 뿌리기에서부터 모내기, 벼수확, 탈곡 등 영농 과정을 농악으로 재현하는 농사풀이 농악, 국가무형문화재 제11-4호'강릉농악'

문화재방송 2021. 7. 23. 17:09

기획. 취재. 촬영. 편집:헤리티지 / 내레이션:한성희

강릉농악(국가무형문화재 11-4호, 1985년 12월 1일 지정) 강릉은 오랜 옛날부터 해마다 단오날(음력 5월 5일)이 되면 단오제 행사를 성대하게 베풀어 오고 있는데 농악이 전체행사의 분위기를 북돋아 줄 뿐 아니라 주민들 전체를 흥겹고 즐겁게 해주며 친목과 화합의 기틀을 다져 주는데 큰 몫을 하고 있다. 강릉농악이라 함은 어느 한 마을의 농악이 아니라 강릉 지역 전체 농악의 내용을 포괄하여 연출한 것이다. 강릉농악의 예능 보유자는 박기하 1985년에 인정되었고 이후 김용현 1989년에 인정(2003년에 작고), 정희철 2006년에 인정되어 있고 전수교육조교로는 차주택, 최동규, 김남수, 손호의가 그 뒤를 잇고 있다. 강릉농악보존회의 농악대로는 1985년도에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두산동농악대, 월호평동농악대, 저동 농악대, 사천하평답교농악대가 있다가 행정구역 통합으로 명칭 개편과 함께 증설되어 현재는 강남동, 경포동, 성덕동, 하평답교, 달맞이, 교동, 홍제동농악대가 있다. 마을농악대는 강릉단오제를 비롯하여 각종 행사에 참여하고 있으며 전국 5대농악 축제 행사에는 강릉농악단(상설농악단)이 강릉을 대표하여 전국단위 행사에 출전하고 있다. 이들은 농기, 풍물, 풍물패, 운영조직들을 독자적으로 갖추고 있으며, 평상시에는 각각 마을을 중심으로 운영된다.


▲시안 화청지(華淸池)에 세워진 양귀비 동상, 통통하다던 얘기와는 달리 칠등신 서양식 미녀를 세워 놓았다.


[해외 문화재 탐방]  시안(西安)에서 만난 진시황(秦始皇)과 양귀비(楊貴妃)

 

시안은 중국의 서북(西北)지방, 섬서성(陝西省, 샨시성)의 성도(省都)로 장안(長安)이라고도 불렸으며 실크로드의 시발점이다. 샨시성은 중국 문명의 탄생지로 3황 5제의 황제, 염제, 복희, 요 임금 등이 터전을 잡았고 당 태종, 한 무제 같은 인물이 나온 곳이며 현재의 중국 시진핑 주석과 마잉주 대만 총통도 이곳 사람이라고 한다.

▲시안 성벽, 명나라 때에 완성된 성벽으로 많이 파손된 것을 최근 복원하였는데 높이 12m, 너비 12~18m, 길이 14㎞이다. 성벽 사방에는 각기 문이 있는데 남문은 황제만이 다닐 수 있고, 북문은 사절단이 오가는 문, 동문은 지방에서 올라오는 공물들, 서문은 실크로드를 향해 열린 문으로 서방의 상인들이 낙타를 타고 출입했다고 한다.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불경을 가지고 돌아왔을 때는 황제가 남문을 열고 친히 나가 맞이했다고 한다.

3,000년의 역사를 가진 시안은 서주(西周), 진(秦), 전한(前漢), 신(新), 서진(西晋), 전조(前趙), 전진(前秦), 후진(後秦), 하국(夏國), 서위(西魏), 북주(北周), 수(隋), 당(唐)까지 13개 왕조의 수도였는데 가장 번성한 때는 당나라의 수도 장안(長安) 때였으며, 100만 명이 넘는 인구와 계획적인 성곽도시로 서역까지 이름을 떨쳤지만 이후 수많은 중국 왕조의 흥망성쇠를 지켜보아야만 했다.


진시황제(秦始皇帝)

BC 259년, 진나라 군주인 장양왕(莊襄王)의 아들로 태어나 31대 왕이 되었으며 이후 전국을 통일하여 중국 최초의 황제가 되었다. 그의 어머니 조희는 조나라 기생으로 거상 여불위(呂不韋)가 데리고 있었으나 여불위는 그녀를 장양왕에게 바쳤으며 그때 조희는 이미 여불위의 아들을 임신하고 있었으나 이를 숨겼으니 그 아들이 진시황, 즉 진시황이 여불위의 자식이라는 것이다.

여불위는 그때만 해도 후계자가 아닌 장양왕을 보위에 올려놓았으며, 즉위 3년 뒤에 장양왕이 사망하자 진시황이 13세의 어린 나이로 진나라의 제31대 국왕의 자리에 올랐고 이후 36년간 재위하다가 50세에 사망하니 즉위 초 5년간은 아버지 때 승상에 오른 여불위(呂不韋)가 섭정을 하였는데 여불위는 마음대로 국사를 휘두르고 심지어 모친 조태후와도 각별한 사이였다고 한다.

게다가 여불위는 자신의 수하 중 노애라는 건장한 남성을 환관으로 꾸며 조태후에게 들여보내니 노애와 조태후는 은밀히 지내면서 둘 사이에 2명의 아들을 낳기도 하였으며 그 노애는 시황제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군사들에게 제압당하고 능지처참 되었으며, 어머니 조 씨마저 죽이려 하였으나 신하들의 만류로 죽이지는 않은 채 감금하였으며 노애와의 사이에 낳은 아들 2명도 살해하였다.

그리고 승상의 자리에 있던 여불위를 자결케 하니 BC 237년 마침내 여불위는 자결하고 시황제는 비로소 친정을 시작하였고 이후 주변의 나라들을 하나하나 점령하여 39세가 되는 BC 221년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전 중국을 통일하는 위업을 달성하였다.


최초의 황제

전국을 통일한 시황제는 국왕(國王)라는 칭호가 어울리지 않는다며 더 높고 고귀한 칭호를 원하였는데 여러 가지를 고심하다가 최종적으로는 중국의 전설적 삼황오제에서 따온 황제(皇帝)로 정하였으며, 자신이 처음 황제이니 시황제(始皇帝)라고 부르라 하였다. 그리고 죽은 후에 신하들이 선왕의 시호를 짓는 것은 옳지 않다면서 후대황제들은 2세, 3세 황제로 부르게 하였지만, 통일제국 진은 그가 죽은 지 4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으니 영원무궁 이어나가리라던 그의 바람은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다.


폭군 시황제

시황제는 도량형과 화폐, 문자 등을 통일하고 전국을 군현제로 나누어 조직적으로 다스리는 등의 치적도 없지 않으나 아방궁 건설과 만리장성 축조 등 지나치게 크고 많은 대규모 토목공사로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고 나라의 재정이 어려움에 부닥치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역사를 거스르는 폭정이 일어나니 바로 분서갱유(焚書坑儒)이다.

자신의 통치에 반발하고 이의를 다는 학자들을 단속한다는 이유로 학자들의 책을 불사르고(분서, 焚書), 학자들을 잡아들여 구덩이를 파고 생매장하니(갱유, 坑儒) 마침내 시황제가 희대의 폭군이 되는 역사적인 사건들이다. 시황제는 이를 진언하는 황태자도 변방으로 보내버리고 재임 중 법을 엄히 적용하니 그 대표적인 형법이 연좌제로 한 사람이 죄에 연루되면 그 가족들까지 죄를 물어 몰살시키거나, 한 집이 법을 어기면 그 마을 모든 가구를 함께 처벌하는 등으로 죄인이 넘쳐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불로불사(不老不死)의 꿈

이렇듯 천하를 통일하고 무자비한 형법으로 폭압을 일삼으며 아방궁을 지어 호화로움과 사치, 향락으로 지새우던 시황제에게도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늙지 않고 죽지 않는 묘약이었다. 불로장생약을 구해오면 후한 상을 내린다는 황제의 칙령에 따라 수많은 주술가들이 모여들고 별난 약재들이 바쳐졌지만, 효험이 없을 뿐 죽음에 처한다고 한들 불로장생약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그중 서복이라는 자가 전설의 산 봉래산에 가서 불로장생약을 구해오겠노라고 금은보화에 동남동녀(童男童女) 500명씩을 싣고 배를 타고 떠났으니 제주도 서귀포에도 이 자가 들렸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으나 끝내는 돌아오지 않은 채 전설처럼 전하는 말은 유구 지방(지금의 오키나와)으로 가서 왕국을 이루고 잘 살았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전해진다.


시황제, 세상을 떠나다

이렇듯 천하를 손에 넣은 후 시황제의 관심은 불로장생이었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만이 그의 바람이었다. 그는 재위 중 다섯 차례나 전국을 순행하였는데 이때도 역시 주관심 사항은 불로장생약이었다. 시황제의 지나친 욕심과 닦달, 그리고 포상을 노린 수상한 자들의 아첨으로 끊임없이 몸에 좋고 생명을 연장한다는 약을 마셨는데 이것이 시황제에게 치명적인 독(毒)이 되었으니 바로 수은 중독이다. 결국, 시황제는 50세의 나이에 수은 중독으로 사망했다는 것이 학자들의 의견이다.

폭군으로 일컬어지는 시황제는 실제로 살해하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으며 그래서 그는 늘 다섯대에 이르는 황제 수레를 대열 중에 운행하면서 자신이 어디에 탔는지 모르게 하였으며 그러던 중 마지막 순행은 BC 210년으로 승상 이사와 환관 조고, 막내아들 호해를 동행하였는데 사구 지방에 이르러 위독해진 시황제는 환관 조고에게 유언장을 쓰라 하며 옥새는 적장자인 부소에게 전하고 부소로 하여금 자신의 장례를 치르도록 유언을 남긴 뒤 7월 22일, 50세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러나 이사와 조고, 호해는 시황제의 죽음을 숨긴 채, 심지어 시신 썩는 냄새를 감추려고 바다 생선을 함께 운반하면서 생선 썩는 냄새로 위장하였으며 환관 조고는 시황제의 유서를 조작하여 적장자인 황태자 부소를 자결하게 하고 막내아들 호해가 즉위하게 하니 그가 2세 황제이다.

▲진시황릉, 즉위 후 건조를 시작해 천하 통일 후 수형자 70만 명을 동원하여 36년간 만들어 완공하였다. 능위에는 석류나무가 가득하여 시안을 석류의 도시로 만들었고 사방에 백양나무가 둘러 심어 하나의 야산으로 보인다. 주변 둘레가 25km나 되는 거대한 무덤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으며, 현재 내부는 공개하지 않고 있다.

 

▲병마용(兵馬俑), 1974년 한 농부가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한, 흙으로 빚어진 병사와 말을 가리킨다. 진시황의 명령으로 그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3개의 전시관으로 연결되었는데 아직도 일부는 발굴 중이다.

 

▲흙으로 빚어진 병사와 말들은 발굴과 동시에 산화하여 색이 바래고, 대부분이 부서진 채 나와서 정밀한 작업으로 되살리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온전하게 발굴되어 보물급 대우를 받는 몇몇 토용들이 전시되어 있다. 지금까지 50억 명 이상이 관람하였다.

이렇듯 세상을 모두 내 손에 쥐고도 모자라는 마지막 한 가지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에 대한 욕심이었다. 영원히 살기 위하여 온 세상을 수소문하고 별난 약재를 다 지어 올렸지만, 그 약효는 잠시 잠깐, 시황제의 몸속에 차곡차곡 쌓이는 것은 수은중독이었다. 차라리 여염집에서 평범한 곡식과 채소로 끼니를 때웠다면 더 건강하게 더 오래 살았을 수도 있겠지만, 시황제는 치명적인 독(毒) 수은이 체내에 쌓이면서 천하를 좌지우지하는 권력에도 불구하고 그야말로 객지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비참한 영웅이었다.

게다가 믿고 있던 신하들도 주군을 배신하고 유서를 조작하여 황태자를 없애버리고 유약한 왕자를 즉위케 하니 영세 무궁토록 이어갈 줄 알았던 천하대제국이 진시황 사후 4년 만에 멸망하고 마는 무서운 역사를 우리는 한 편의 영화, 한 편의 전설처럼 듣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은 진시황의 절반도 안 되는 돈과 명예, 권력을 잡으려고 부나비처럼 뛰어다니다가 넘어지고 자빠진다.

여전히 현대를 사는 과학인들도 불로장생을 찾아다니고 일신의 영달을 위하여 금은보화가 곧 행복이라고 눈에 불을 켜고 움켜지려고만 하니 연금술과 불로장생 묘약은 인류역사상 끊이지 않은 수수께끼이자 끝내 버리지 못하는 마지막 욕심인지도 모른다. 과연 진정한 행복, 삶에 대한 만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무엇으로 건강해지고 고통과 질병에서 자유로워지거나 최대한 멀리 벗어날 수 있을까?

부귀공명에 눈과 귀가 먹지 않고 영생불멸에 현혹되지 않으며 그야말로 자연 속에서 천수(天壽)를 즐기는 삶은 어려운 것인가? 몇 천 년의 역사가 아직도 뚜렷하게 남아있는 시안, 진시황을 만나고 와도 풀리지 않는 화두(話頭)를 앞에 놓고 쉽사리 답을 구하지 못한다.

늘 여유로운 휴식과 섭생, 나를 놓아주는 여유를 즐겨보는 여행, 그리고 자연 친화적인 삶 속에서 질병으로부터 멀리하는 건강유지. 피폐하고 고단한 삶 속에서 쌓여가는 고통과 불안, 불행하다고 느끼는 마음들을 치유하며 살 수 있는 작은 행복을 터득하는 지혜가 필요한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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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문화재 탐방]  시안(西安)에서 만난 양귀비(楊貴妃)

 

    시안(西安)에서 두 번째 만난 인물은 중국의 4대 미인이자 최고의 요부, 경국지색(傾國之色)으로 일컬어지는 양귀비이다. 시황제가 전국을 통일한 이래 천 년쯤 지난 후 시안은 당(唐)나라의 수도 장안(長安)이 되었는데 6대 황제 현종은 자신의 며느리였던 절세미인 양옥환(楊玉環)을 강제로 빼앗아 자신의 후궁 귀비(貴妃)로 삼은 후 그녀를 향한 총애가 남달랐다.

    ▲시안 화청지(華淸池)에 세워진 양귀비 동상, 통통하다던 얘기와는 달리 칠등신 서양식 미녀를 세워 놓았다.

     

    그동안 칭송을 받으며 잘 해오던 정치를 멀리하고 여색에 빠진 채 그녀의 혈육과 양아들 등에게 지나친 권세가 집중되니 나라는 도탄에 빠지고 서로 간의 권력다툼으로 한쪽이 군사반란을 일으키니 황제와 함께 몽진 중에 사태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결국은 목을 매 죽고만 여인이다.


    양옥환(楊玉環)

    719년 당 현종(685~762) 집권 초기, 쓰촨 성에서 태어났으며 하급관리를 지내던 부친 슬하에 아들 없이 세 언니와 함께 살았다. 그러나 부친은 일찍 죽어 숙부 집에서 자라면서 나름대로 교육도 잘 받았으며 특히 기생 출신 하녀에게서 가무도 배웠다고 한다. 양옥환은 친척 양신명의 집 연회에 자주 초대되었는데 그 연회에서 황실 일족들과 친하게 되었으며 그러던 중 현종의 제18황자 李瑁(이모)와 혼인하게 되어 현종의 며느리가 되었다.


    당(唐) 현종(玄宗)

    양옥환의 시아버지 당나라 6대 황제 현종은 원래 3남으로 적장자가 아니어서 황태자가 되거나 황제에 오를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현종의 할아버지인 3대 황제 고종과 할머니인 측천무후 이후 나약한 황제들의 즉위와 폐위, 복위와 살해가 반복되는 등 혼란한 정국을 해결한 공로로 큰 형의 양보를 받아 황태자가 되었다가 6대 황제로 즉위한 사람이다.

    즉, 현종에게는 할머니인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사실은 그 이전에 증조할아버지인 2대 황제 태종의 후궁이었다가 어떻게 되었는지 황태자와 눈이 맞았고 그 황태자가 황제(고종)로 즉위하자 후궁이 되었다가 황후와 다른 비빈들을 모두 처치하고 황후가 된 여인이다. 즉 아버지(태종)의 후궁에서 아들(고종)의 후궁이 되었다가 황후까지 되어 훗날 근친상간의 시비에 말려들게 된 사연이다.

    이렇게 황후가 된 측천무후는 남편 고종이 병약해지자 권력을 장악하였으며 자기 아들을 중종으로 즉위시켰다가 폐위시킨 후 다른 아들을 예종으로 즉위시켰지만 역시 폐위시킨 후 마침내는 스스로가 황제가 되어 15년 동안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다가 모반을 일으킨 대신들과 장군들의 강요로 다시 중종을 복위시킨 후 물러났다가 측천무후는 사망하였지만, 이번에는 중종의 황후 위 씨가 제2의 여황제(女皇帝)를 꿈꾸면서 무능한 남편 중종(현종의 큰아버지)을 독살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되자 현종이 군사를 일으켜 큰어머니인 위 황후 일파와 아직도 남아서 권세를 부리던 할머니 측천무후 일파를 모두 소탕하고 물러나 있던 아버지 예종을 다시 복위시킨다. 그러자 큰형이 태자 자리를 현종에게 양보하였으며 2년 후 예종이 사망하자 현종이 즉위하여 당나라의 6대 황제가 된 것이다.


    개원의 치(開元의 治)

    황제에 오른 현종은 연호를 개원(開元)으로 바꾸고 유능한 관리들을 등용하여 민생 위주의 정치를 베풀었다. 당 태종 이세민이 이룩했던 태평성대에 버금가는 치세로 후세사람들은 당시의 연호를 따서 '개원의 치(開元의 治)'라고 불렀으니 현종은 당나라의 번영과 강성함을 이끌었으나 이후 절세미인, 천하의 요부 양귀비를 만나 몰락과 쇠퇴의 길로 빠져들게 된다.


    양옥환(楊玉環)과의 만남

    태평성대와 훌륭한 치세에 대한 칭송이 자자하자 현종은 이내 거만하게 된다. 특히 유능한 관리들을 적재적소에 쓰던 그가 어느 때부터인가 아첨과 아부에 귀를 기울이고 직언을 멀리하기 시작하면서 아첨꾼 승상 이임보는 무려 19년간이나 현종을 따돌리고 정치의 모든 것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 주물렀지만, 현종은 눈이 멀고 귀가 먹어 보고 듣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총애하는 무혜비(사후 황후로 추존)가 사망하고 현종은 실의에 빠져 무기력하게 되자 환관 고력사(高力士)가 이를 눈치채고 현종과 양옥환의 만남을 주선하게 되는데, 양옥환 부부가 화청지 온천으로 나들이 간다는 것을 알게 된 환관 고력사는 현종을 화청지로 보내 양옥환을 만나게 한다.

    현종은 양옥환의 출중한 미모에 반하고 춤과 노래에 흠뻑 빠져 양옥환이 며느리임에도 마음에 들어 하며 이를 어쩌면 좋을지 환관 고력사에게 속을 털어놓는다. 황제의 마음을 알게 된 고력사는 다시 양옥환을 만나 넌지시 그 속을 떠보게 되는데 태자도 아닌 먼 황자의 아내보다는 황제의 애첩을 택하기로 하였는지 이날 이후 양옥환은 현종의 후궁이 된다.


    도교(道敎)로의 입문

    그러나 세상에는 눈이 있고 귀가 있으며 민심이 살아 있는 법, 아무리 황제라 해도 며느리를 바로 후궁으로 취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할머니 측천무후의 경우 태종의 후궁이었다가 아들 고종의 후궁이 되어 근친상간의 시비가 붙은 것을 알지 않는가? 이럴 때는 또 영악한 간신배들이 실력을 발휘하는 법, 그들은 양옥환을 바로 황궁으로 데려오지 못하고 도교의 사원으로 출가시켜 먼저 남편과 떼어 놓은 후 궁궐에 도교 사원을 지어 양옥환을 이곳의 여관(女冠)으로 불러들이는 수순을 밟는다.

    당시 도교에 입문하면 그 이전 현실 세계의 모든 것은 없어진다는 이야기가 있었다는데 아마도 이를 노려 며느리의 신분 탈색을 위한 과정이 아니었던가 싶다. 일설에 현종은 충(忠)과 효(孝)를 강조하면서 '나라를 위하여는 충성을 하고 부모에게는 효도하니 좋은 것은 부모에게 바쳐야 하지 않느냐?'는 시(詩)를 지어 아들에게 좋은 것(양옥환)은 아버지 현종에게 바치라는 암시도 했다고 한다.


    양옥환, 귀비(貴妃)가 되다

    이렇게 양옥환과 현종이 만났을 때가 각각 22세, 57세였다. 이후 현종은 양귀비의 품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게 되어 양옥환의 자매들도 모두 국부인으로 책봉하고 사촌오빠 양소에게는 국충(國忠)이라는 이름을 하사하니 그는 간신 이임보나 환관 고력지와 결탁하여 숱한 관직을 독점하고 세도정치의 핵심으로 부상하게 된다.

    이렇게 한구석이 썩어가는 줄도 모르는 61세의 현종은 27세의 양옥환을 귀비에 봉하게 되는데 이때 황후가 공석이었으므로 양귀비는 사실상 황후의 자리에 앉은 기쁨을 누리게 되며 어느새 그의 사촌오빠 양국충은 승상의 자리에까지 올라 양귀비 세력이 대당(大唐)제국을 좌지우지하게 된 것이다.


    양귀비를 내친 현종, 다시 화해하다

    양귀비에게는 세 언니가 있었는데 모두 국부인이라는 높은 지위를 하사받았다. 그런데 그중 셋째 언니 괵국부인 양옥쟁의 미모 또한 뛰어나서 현종이 입궁시키라고 하자 양귀비는 질투심으로 이를 거절하고 언니의 입궁을 방해하다가 결국 내침을 당하게 된다. 궁에서 내쳐진 양귀비는 양국충의 집에 머물었으며, 사촌오빠 양국충과 환관 고력사가 머리를 맞대고 양귀비의 환궁을 모의하여 현종과 양귀비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화청지에서 다시 만나게 하니 두 사람은 함께 목욕하면서 결국 화해하여 환궁하였다고 한다.

    ▲온천인 화청지(華淸池)에 남아있는 귀비지(貴妃池), 현종이 하사한 양귀비 목욕탕이다.

     

    ▲황제 목욕탕인 연화 탕(蓮華湯), 황제와 妃는 따로 목욕하는 것이 원칙인 듯하다.

     

    ▲씻기를 마친 양귀비가 올라 현종을 기다리며 지긋이 내려다보던 누각이라고 한다.

    ㅇ안록산(安祿山), 안사(安史)의 난(亂)

    이렇게 현종은 양귀비의 치마폭에 싸여 정사를 멀리하고 조정은 양귀비와 양국충 일가의 전횡이 극에 달하였으며 환관 고력사와 함께 환관 정치, 외척정치로 나라를 좌지우지할 때, 변방의 절도사로 당시 군사의 1/3 이상을 장악하고 있던 안녹산이 황궁에 들어와 현종으로부터 극진한 환대를 받는다. 이 자리에서 안녹산을 처음 본 양귀비는 당당한 그에게 호감을 느껴 자주 불렀고 친해지면서 마침내 안녹산을 양아들로 삼게 되니 십 년 이상 나이 먹은 건장한 무장(武將)이 아들이라며 귀비의 처소를 수시로 들락거리게 되었다.

    양귀비의 사촌오빠 양국충은 당시 조정 권력을 모두 손에 쥐고 있었으나 변방의 절도사로 군사력을 가진 안녹산이 나타나 양귀비와 친밀해지자 그를 잘라내려고 수차례 모함하고 고변하였지만, 그때마다 양귀비가 막아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권력은 양국충에게서 요지부동으로 떠나지 않자 안녹산은 부하 사사명과 함께 '간신 양국충을 토벌하자'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켜 당나라 수도 장안(長安)을 점령하고 스스로 황제를 칭하며 나라 이름을 연(燕)이라고 하니 바로 안사의 난(安史之亂)이다.

    이후 안녹산은 그 아들 안경서에게 살해당하고 안경서는 사사명이 죽인다. 그러나 사사명도 아들 사사의에게 살해당한 후 사사의 마저 자결함으로써 9년간 끌어왔던 안사의 난은 마무리되었지만 그 과장에서 당나라는 급격히 쇠약해져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장안(長安)을 버린 몽진 길에서 양귀비(楊貴妃) 자결하다

    반란을 일으킨 안녹산의 군대가 수도 장안으로 다가오자 양국충이 현종에게 몽진(피난)을 건의하여 쓰촨 성으로 떠나게 되는데 일설에는 백성들 몰래 도망가듯 빠져나갔다고 한다. 그러나 황제를 호위하고 피난을 떠나던 군사들 간에 이 모든 환난은 양국충과 양귀비가 원흉이라며 이 둘을 처치하고 나서야 가겠다는 모반이 일어나고 환관 고력지와 대신들도 이에 동조하니 현종도 어쩔 수 없이 양국충은 끌어내려져 죽임을 당하였으며 군사들은 양귀비도 내어놓으라고 하지만 현종은 몇 번이나 이를 변명하며 살리려고 하였다.

    그래도 군인들은 수용하지 않고 소요는 진정되지 않았으며 환관 고력지도 역부족이라고 진언하자 마침내 현종은 양귀비에게 자결을 명하여 근처 나무에 목을 매 죽으니 마침내 천하의 요부 양귀비가 죽었다고 병사들은 만세를 부르며 그제야 몽진을 계속하였다.

    이렇게 반란을 맞아 수도 장안을 버리고 몽진을 떠난 현종은 피난길에 양국충과 양귀비를 버려 죽게 하였으며, 마침내는 대신들의 재촉으로 태자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태상황으로 물러나 있다가 장안으로 돌아와서도 쓸쓸한 나날은 보내다가 78세에 승하하였다.


    양귀비와 당 현종의 사랑을 노래한 장한가(長恨歌)

    당 현종이 죽은 지 50년이 지나 그들의 사랑을 주제로 장편 서사시를 지었으니 바로 장한가(長恨歌)이다. 둘이 만나 사랑하고 귀비가 되어 총애를 받고 지내다가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 양귀비가 죽는 과정과 그 후 황제 현종의 쓸쓸한 나날들을 그리고 있으며 현종이 사후에 선녀가 된 양귀비와 만나는 이야기를 120구 840자의 서사시로 지은 것이다.

    둘의 사랑 이야기를 애절하게 그렸는데 특히 마지막 구절을 보면 [上天願作比翼鳥 하늘에선 날개를 짝지어 날아가는 비익조가 되게 해주소서/ 在地願爲連理枝 땅에선 두 뿌리 한 나무로 엉긴 연리지가 되자고 언약했지요] 라고 하면서 사랑을 잘 표현한 것을 알 수 있다.

    ▲현종과 양귀비가 사랑을 나누던 화청지의 장생전(長生殿).

    물론 이때 백거이는 35세로 시안지방에 내려온 관리였으며 불과 얼마 전 황제를 거론할 수 없으니 한 무제의 고사를 바탕으로 서사시를 썼으나 이는 누가 보아도 현종과 양귀비를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장예모 감독이 이를 현대화하고 재해석하여 공연물로 만든 작품이 지금 시안 화청지에서는 연중 공연되고 있다. 다만 야외공연이므로 겨울철에는 공연하지 않는다.


    양귀비를 만나고 나서

    1400년도 더 지났지만, 아직도 우리에게 익숙한 양귀비. 꽃다운 22세에 시아버지 현종을 만나 남편을 버리고(?) 그의 후궁이 된 후 27세에는 귀비가 되어 황후 못지않은 권세를 부리다가 38세의 나이에 피난길에서 나라를 망친 원흉으로 지목되어 목을 매 자결해야 했던 양귀비. 훗날 사람들은 그녀를 일컬어 한 나라를 위태롭게 만들었다 해서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고 불렀는데, 그녀는 무엇을 꿈꾸었을까? 무엇을 손에 쥐고 어떻게 살고 싶었을까?

    중국의 3대 미녀, 4대 미녀를 논할 때 대부분이 하늘거리는 몸매로 묘사하지만, 양귀비만큼은 살이 통통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시쳇말로 쭉쭉은 아니고 살집이 적당히 오른 빵빵 스타일이 아니었나 싶다. 심지어 키 155cm에 몸무게 65kg의 건강한 체형이었다고 근거를 내세우는 경우도 있는데 아무튼 자타가 공인하는 건강미녀 양귀비는 화려하게 불타올라 일국의 황제와 사랑을 나누고는 그의 눈물 속에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미인박명(美人薄命)의 대표적 사례인가.

    ▲당나라 시대의 여인상, 시안박물관에 전시된 인형을 보더라도 대부분 통통한 몸집임을 알 수 있다.

    시아버지의 유혹을 뿌리치고, 또 스스로 황제의 여자가 되려는 욕심을 버리고 황자(皇子)의 아내로 아들 낳고 딸 낳고 오순도순 살았다면 비록 황후에 준하는 자리에 올라가지는 못했겠지만, 한 나라를 쥐락펴락하는 권세는 없었겠지만 아마도 행복하게 잘 지내지 않았을까? 심지어 전남편 18황자(十八皇子) 수왕(壽王) 이모(李瑁)와의 사이에 아이도 하나 낳았다고 하는데 그 아이의 엄마가 그 아이 친할  부인이 되다니? 참으로 권세 앞에는 천륜도 의미가 없는가보다. 그런 자리 옮김을 사랑으로 표현하는 건 또 무언가.

    진실한 삶에 대한 자세와 진심 어린 사랑에 대한 무한한 의심과 이해 못 할 스토리에 아무리 애를 써봐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현종과 양귀비가 이렇게 된 것은 사실은 자기 친아들 수왕(壽王) 이모(李瑁)를 황태자에 올리려고 현종 앞에 자주 보여주게 한 그의 생모 무혜비 탓이라고 하니 결국 그 아들 이모(李瑁)는 황태자에 오르지도 못하고 부인만 빼앗기고만 기구한 운명이 된 것이다.

    이런 경우 그 전남편은 멀리 전쟁터로 내보내거나 역모에 걸어서 죽게 하는 등 비참해진다는데 그 뒷이야기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그렇게 일약 황후에 버금가는 신분상승에 성공한 듯 보이던 양귀비도 결국은 십 년 남짓한 세월 만에 피난길에 자살해서 죽어야 하는 ‘권불십년(權不十年) 화무십일홍(花無十一紅)’의 교훈을 남겨주었으니 후세인들은 이를 눈여겨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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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enior.chosun.com/site/data/html_dir/2015/12/07/201512070107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