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취재. 촬영. 편집:헤리티지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18호 진도북놀이
전라남도 진도 지방에서 전해오고 있는 북놀이. 북을 장구처럼 비스듬이 어깨에 메고 쌍북채를
사용하여 자유로운 가락과 묘기를 변화무쌍하게 구사하는 북놀음의 일종이다.
북놀이의 유래는 모북(일명 모방고)에서 시작하여 모북을 칠때는 삿갓을 쓰고 모꾼앞에서 북채를 양손에
갈라쥐고 북채를 지휘봉 삼아 뜬포나 줄틀린 모폭을 지적하여 북을 치며 모소리(일명 상사소리)에 맞추어
부르며 북놀이춤의 모심가를 하면서 피로를 느끼지 않고 작업이 진행될 때 꽹과리·징·북 등은 필수 타악기로
구성되며 모방고굿·농작굿·길군악 등에 춤사위가 곁들여지고 북춤놀이·북춤굿이 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진도는 섬지역으로서의 강인한 생명력과 기예에 뛰어난 무속인이 많이 존재하며 지역민들의 편의를 도모할
뿐만 아니라 이들은 기예가 뛰어나 마을의 여러 예능과 놀이들을 재창조하는데 일조를 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 씻김굿, 관가, 다시래기, 북춤, 신청농악 등은 그들의 창조물이다.
이러한 놀이들은 마을 축제나 장례, 결혼 등 의식절차나 농사과정에서 행하여졌고 이런 문화의
원류는 무굿과 풍물놀이에서 시작되었고 그 중에서 북춤은 가장 오래된 놀이이며 소리와 춤사위로
모든 민속예술의 기초가 되었다.
체계적이고 방대한 백과사전의 백미白眉 임원경제지
19세기 조선에서는 각종 백과사전이 많이 만들어졌다. 그 가운데서 단연 이채를 띠는 것이 '임원경제지'이다. 근대 이전의 백과사전들을 유서(類書)라고 한다. 유서는 국정의 자문에 필요한 내용을 한데 모으거나, 시문을 제작할 때 필요한 어휘들을 한데 모으거나, 일상생활의 여러사항들을 한데 모아서, 일정한 체계를 세워 항목을 분류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그런데 서유구(1764~1845)는 농촌생활과 관련하여 문헌에 나오는 사실과 현실에서 경험한 사항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이 '임원경제지'를 이루었다. 곧, 이책은 농업, 선축, 요리, 의학, 공학, 상업 등 당시 조선 사회의 각 방면에 걸친 지식들을 종합하여 분류한 백과사전의 백미白眉이다. 그 16부의 하나인 '정조지'에는 각종 음식, 밥, 죽, 구이 등 당시 한 성인 남자가 알았다고 보기에 믿기 어려울 정도의 다양한 음식 정보를 실어두었다. 임원경제지의 정보는 17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진행형이다. 21세기에도 유용한 임원경제지의 정보와 문제의식을 조명해본다.
01,02 김홍도필 풍속도 화첩(보물 제527호)중 <벼타작>과 <생상>. '임원경제지'는 서유구가 엮은 농업 백과사전으로 농업은 물론, 상업, 건축, 요리, 의학, 공학 등 당시 사회 각 방면에 걸친 지식들이 수록되어 있다.
『임원경제지』의 체제
서유구는 1806년(순조 6) 이후 홍만선의『산림경제』를 토대로 한국과 중국의 저서 900여 종을 참고로 하고 향촌에서 목격한 자료와 수집한문헌 자료를 정리하기 시작해서 1827년(순조 27)에『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를 엮었다. 모두 113권 52책 250여 만 자에 달한다.
『임원경제지』의‘임원’이란 전원, 곧 농촌을 말하고‘경제’는 삶의 물질적 기반을 말한다. 곧 이 책은 사대부가 시골에서 자족적인 생활을 살아가는 방법을 탐색한 것이다. 서유구는 이 책의「예언例言」에서, 자신이 이 책을 엮은 것은 국정 운영에 직접 도움을 주려는 데 있지 않고‘향촌에 생활하면서 뜻을 기르는 일’에 도움을 주려는 데 있다고 밝혔다. 서유구는 또한 부部를 나누고 목目을 세워 자료를 수집해서 채웠다. 즉, 본리지本利志13권, 관휴지灌畦志4권, 예원지藝志5권, 만학지晩學志5권, 전공지展功志5권, 위선지魏鮮志4권, 전어지佃漁志4권, 정조지鼎俎志7권, 섬용지贍用志4권, 보양지 養志8권, 인제지仁濟志28권, 향례지鄕禮志5권, 유예지游藝志6권, 이운지怡雲志8권, 상택지相宅志2권, 예규지倪圭志5권 등 16부분으로 분류하였다. 전체를 16부분으로 나누었으므로『임원십육지』또는『임원경제십육지』라고도 한다.
『임원경제지』는 우선「본리지」에서 농업 일반을 다루었다. 이어서「관휴지」에서 채소,「예원지」에서 꽃을 다루고,「만학지」에서 열매를 주로 다루었다. 다음으로「전공지」에서 의생활에 필요한 농잠, 직조, 염색에 대해 알아보고,「위선지」에서 농사에 가장 중요한 날씨와 절후를 다루었다. 다시「전어지」에서는 축산과 수렵, 어업에 대해 알아보고,「정조지」에서는 요리법과 조미료, 술 담그는 법을 살폈다. 다음으로「섬용지」에서 집짓기, 집짓는 재료와 공구, 세간 살이, 조명 기구, 출입에 필요한 말, 가마, 배 등에 관한 사항을 정리하였다. 그리고 몸을 보신하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보양법」에서 건강하게 사는 법을 살피고,「인제지」에서 의약의 처방과 치료에 관해 조목조목 논하였다. 다시, 향촌에서의 삶은 여러 예법을 필요로 하므로,「향례지」에서 관혼상제, 향음주례, 향사례, 향약을 다루었다. 이어서 개인의 정신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방법에 주목하여,「유예지」에서는 취미 활동을 다루고「이운지」에서는 문방사우와 창작활동에 관해 서술하였다.「상택지」에서는 살 곳을 고르는 방법, 살 터전을 마련하는 방법 등을 소개하고,「예규지」에서는 경제활동과 상업의 사항을 다루었다.
문헌과 경험사실의 종합으로 이루어낸 근대적 백과사전
서유구는 1805(순조 5)년 12월에 김달순 옥사가 일어나서 서유구의 숙부 서형수가 연좌되자, 1806년 1월 홍문관 직을 사직하고, 오랫동안 재야에 있다가 1824년(순조 24)에 친구 남공철의 주선으로 회양부사가 되었다. 1834년 전라감사로 있을 때는 강필리의 「감저보」, 김장순의 「감저신보」, 중국과 일본의 관계 농서 등을 참고한 『종저보』를 편찬하였다. 서유구는 17년간 고향인 장단의 금화, 서울 외곽의 반계 등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또한 아들 서우보의 도움을 받아 저술활동을 하였다. 아들은 그보다 일찍 죽었으나, 마침내 『임원경제지』113권 52책을 이루었다.
서유구는 「예언」에서, 『임원경제지』가 오로지‘우리나라를 위해서 쓴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므로 현재 적용할 수 있는 방도만을 수록하였고, 적당치 않은 것은 취하지 않았다. 또한 좋은 제도가 있어서 실시할 만하나 우리나라 사람이 아직 강구하지 않는 것이 있으면 아울러 자세히 밝혀놓아 뒤에 사람이 모방하여 시행하도록 하였다. 『임원경제지』는 유서의 형식이므로 많은 문헌들로부터 관련 자료를 초출해서 집록하였다. 중국 및 일본의 관련 서적은 물론, 조부인 서명응의 저작, 박제가, 홍만선, 이익, 박지원 등의 저술과 자신의 『금화경독기』등도 인용하였다. 그리고 안어按語와 도판을 첨부하여, 독자들이 서술 내용을 이해하기 쉽도록 꾸몄다. 서유구는 실용적인 농학을 중시하여, 토질과 농법, 농구에 대해 구체적으로 검토하고 실증적으로 연구한 정보들을 수록하였다. 또한 서유구는 중국의 사실과 조선의 사실을 비교하였다. 이를테면 중국의 건축에는 각 부분별로 표준화가 이루어져 있지만 조선의 건축에는 표준화가 이루어져 있지 않아 비효율적이라고 지적하였다. 온돌 제도에 대해서도, 박지원이『열하일기』에서 제기한 주장을 계승해서 중국 북방의 항( 캉)보다 열효율이 떨어 진다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온돌 구조가 가옥의 주거환경, 생활양식을 부정적으로 제약하는 면이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온돌을 개선할 방도를 제안하였다. 서유구는 『임원경제지』에서 ‘농촌에 거처하는 사대부층의 이상적인 삶’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사대부층의 농촌 환경을 개선하려면 향촌 전체의 삶의 조건을 개선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렇기에 서유구는 『임원경제지』를 엮으면서 사대부의 삶만이 아니라 향촌의 구성원 대다수에게 공통된 생활조건의 문제를 탐색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나라 유서類書의 역사에서 『임원경제지』가 차지하는 위치
근대이전의 백과사전인 유서類書들은 기존의 문헌에서 논평 없이 자료를 발췌하여 집성하는데 주력하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서유구는 자신이 기왕에 엮은『금화경독기』를 대폭 활용하는 동시에 서유구 자신의 논증을 첨부하였다. 이 점에서는 단순한 유서가 아니라 잡고雜考의 형식에 가깝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에 이미『고금상정예문』과 같은 유서를 만들었다. 다만, 현재 남아 있는 독자적인 유서들은 모두 조선시대에 편찬된 것들이다.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는 1554년(명종 9) 어숙권이 엮은『고사촬요』와 선조 때 권문해가 엮은『대동운부군옥』을 들 수 있다. 권문해의『대동운부군옥』(1789년 간행)은 우리나라 고사와 물명을 대상으로 충실히 전거를 밝힌 사전이다. 한편 조선후기에는『옥통』,『휘어』,『유원총보』처럼 시문학에 필요한 어구를 뽑아 엮은 유서가 나왔으나, 그 이후 역사, 철학, 문화의 다방면에 걸쳐 일상의 삶에서 필요한 지식정보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한 유서들이 다량으로 나왔다. 이수광의『지봉유설』, 이익의『성호사설』, 이규경의『오주연문장전산고』, 이유원의『임하필기』등은 한국 고금의 정치, 사회, 경제, 지리, 풍속, 언어, 역사 등에 관해 많은 정보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소중한 유서들이다.
그리고 조선후기에는 국가 주도로 유서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영조때 처음 편찬되기 시작한『문헌비고』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것은 여러 차례 수정을 거쳐 1908년(융희 2)에 홍문관에서『증보문헌비고』250권 40책으로 간행되었다. 근대 이전의 학자들은 공부할 때 우선 초록抄錄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유서를 만드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조선후기의 지식인들은 초록한 정보들을 체계화하고 사실을 확인하여 논증하는 일을 더욱 중시하게 되었다. 유형원(柳馨遠, 1622~1673) 이후로 지식인들은 인간과 역사를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개별적인 사물들을 관찰하고 경험 사실을 분석하는‘탐구의 학’을 발전시켰다.『임원경제지』는 관찰과 분석을 중시하게 된 기점에서 이루어진 백과사전으로서 매우 큰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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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심경호 (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사진. 문화재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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