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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

[10월 9일 한글날 특집]일제하 '훈민정음 해례본' 번역 연재가 끝나자 조선일보 강제 폐간 /'훈민정음 해례본' 에 얽힌 비화/ 헐버트 선교사 순 한글 교과서 발행

문화재방송 2021. 10. 5. 00:05

서울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 왼손에 든 책은 세계기록유산.국보 제70호 훈민정음해례본이다.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 동상 아래 지하의 '세종대왕 이야기'

한글은 수많은 의혹과 오해속에서 언문(상스런말), 암클(여자의글), 아햇글 (아이들의 글)등 천한 글자 취급을 받아왔다,

지구상 수천개의 언어중에 백여개의 말만이 글자를 가지고 있으며, 만든 목적과 만든 사람 만든때를 알고있는 문자로 한글이 유일하다.

근대화를 통하여 상당한 정도의 물질적 성취를 이루고, 한글이 디지털시대를 맞아 가장 과학적이고 효율적 문자로 인증을 받는 시점이지만,

한글 창제 575돌을 맞아 이제 내가 누구인지? 한글은 내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도 다시 돌아볼 때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이야기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며 사람은 세모나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간송 전형필에 의해 1943년에 세상에 나오게 된다

간송은 10만석 부호가의 상속권자로 그의 재산으로 그는 우리 문화재가 일본에 유출되는 것을 막았다.

그가 문화재를 집중적으로 수장하던 1930∼40년대는 일제의 수탈이 최고조에 이른 시기였는데, 문화재 감식에 뛰어난 오세창과 함께 모은 것이 '청자상감운학매병'(국보 68호)·'혜원전신첩'(국보 135호) 등 12점의 국보와 10점의 보물 등 다수의 문화재였다.

​그중 가장 눈여겨봐야할 것은 1943년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제70호,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을 손에 넣던 이야기가 유명하다.

당시로선 존재 사실만 알려져 있던 훈민정음 해례본이 경북 안동에서 나왔는데 조선시대 이한걸 가문에 소장되어 있었다. 그의 선조 이천이 여진을 정벌한 공으로 세종이 하사했다고 한다.

훈민정음 해례본

표지 2장에 본체 33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로 20센티미터,세로 32.3센티미터 크기이고, 처음 두 장이 망실되었는데 연산군의 기훼제서율을 피하기 위한것이라 한다.

​간송은 이한결이 선조가 하사받은 것을 훈민정음 해례본인줄 알면서도, 그 가치를 알지 못하여 생활고 때문에 1000원으로 내 놨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1000원은 서울의 기와집 한 채 값으로, 고서 가격치곤 비싸다는 주위에 만류에도 불구하고 소개한 이에게 사례로 1000원, 해례본 값으로 1만원을 쳐 주며, "훈민정음" 같은 보물은 적어도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런 연유로 좋은 문화재가 나오면 상인들은 간송에게 제일 먼저 보였다 한다. 간송이 해례본을 세상에 내놓기 전까진 그 누구도 훈민정음의 창제원리를 알지 못했다.

창제시 “고전(古篆, 옛글)을 모방했다.”는 말에 따라 여러 학설이 있었는데, 인도 구자라트 문자나 산스크리스트어, 몽골의 파스파문자, 갑골문자를 모방했다는 설부터 문고리나 창살모양을 본 땄다는 설까지 분분했다.

훈민정음 해례본을 통해, 한글이 천지인 삼재(三才)의 원리와 태극, 음양오행의 원리를 담고 있음이 밝혀졌다.

이후 훈민정음 해례본은 간송에겐 지켜야할 목표로서 6‧25 전쟁 당시에도 오직 이 책 한권을 오동상자에 넣고 피란을 떠났으며, 잘 때도 베게삼아 잤다고 한다.

간송의 이런 행적과는 반대로 지난 2008년 7월 배모씨가 "집을 수리하던 중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을 발견했다"고 공개하면서 복마전이 시작됐다.

상주본은 현재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국보 제70호 훈민정음 해례본(간송본)과 동일한 판본으로, 서문 4장과 뒷부분 1장이 없어졌지만, 보존 상태가 좋아, 전문가들이 "가치가 1조원도 넘을 것"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또 하나의 이야기는 한글 사랑에 평생을 바쳐온 주시경 선생이 어느집 안방 벽에 도배로 붙여진 몇장의 해례본 내용을 찾아내어 한글의 문법을 최초로 정리하고,

1894년 갑오개혁 때 언문을 국문이라 개칭한것을, 1913년 국문을 한글이란 이름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1928년 주시경이 세운 조선 어학회에서 “가갸날”을 한글날로 바꾸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조선 세종 28년(1446)에 새로 창제된 훈민정음을 왕의 명령으로 정인지 등 집현전 학사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한문해설서이다.

책이름을 글자이름인 훈민정음과 똑같이 ‘훈민정음’이라고도 하고, 해례가 붙어 있어서 ‘훈민정음 해례본’또는 ‘훈민정음 원본’이라고도 한다.

전권 33장 1책의 목판본이다.

구성을 보면 총 33장 3부로 나누어, 제1부는 훈민정음의 본문을 4장 7면으로 하여 면마다 7행 11자씩, 제2부는 훈민정음해례를 26장 51면 3행으로 하여 면마다 8행 13자씩, 제3부는 정인지의 서문을 3장 6면에 1자 내려싣고, 그 끝에 ‘정통 11년’(1446)이라 명시하고 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훈민정음은 세종 25년(1443)에 왕이 직접 만들었으며, 세종 28년(1446)에 반포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이 책에서 서문과 함께 정인지가 근작(謹作)하였다는 해례를 비로서 알게 되었다. 또한 한글의 제작원리도 확연하게 드러났다.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어 있는 『훈민정음(해례본)』은 국보 제71호로 지정되어 있는 『동국정운』권1, 6과 함께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주촌의 이한걸(李漢杰) 씨 댁에 전래되던 것이다. 1940년에 발견될 당시 원 표지와 첫 두 장이 떨어져 나가고 없었는데 그 후 보충하여 끼워 넣는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다.

세종 서문의 마지막 글자 ‘이(耳)’가 ‘의(矣)’로 잘못 씌어지고, 구두점과 권성이 잘못되었거나 빠진 것도 있다. 이 책에는 구점(句點; 右圈點)과, 두점(讀點; 中圈點) 및 파음자(破音字)의 성조를 표시하는 권성(圈聲)도 정확하게 표시한 책이다. 구두점과 권성을 다 표시한 것은 『성리대전(性理大全』(1415년)의 체재와도 일치한다. 최근에 이 책 외에 또, 다른 『훈민정음(해례본)』 한 책이 경북 상주에서 발견된 바 있다. 훈민정음은 1997년 10월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국보 제71호 동국정운<권1,6>

동국정운<권1,6>(東國正韻<卷一,六>)-서울 성북구 (간송미술관)-

조선 세종 때 신숙주, 최항, 박팽년 등이 왕의 명으로 편찬하여 세종 30년(1448)에 간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표준음에 관한 책으로, 6권 6책이며, 활자본이다.

중국의 운(韻)에 관한 책인 『홍무정운』에 대비되는 것으로, ‘동국정운’이란 우리나라의 바른 음이라는 뜻이다. 당시 혼란스럽던 우리나라의 한자음을 바로잡아 통일된 표준음을 정하려는 목적으로 편찬, 간행되었다.

이 책은 세종 29년(1447) 9월에 완성되자 간행하라는 임금의 명이 있었고, 이듬해인 세종 30년(1448) 11월에 성균관, 사부학당 등에 보급되어, 이 책이 간행되고 보급되었던 시기를 알 수 있다.

현재 이 책은 전 6권 가운데 1권과 6권만이 남아있다. 내용을 보면 본문의 큰 글자는 나무활자이고, 작은 글자와 서문의 큰 글자는 갑인자이다. 글자체는 큰 글자가 진양대군의 글씨이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한자음을 우리의 음으로 표기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지고 있으며, 국어연구자료로서의 중요성도『훈민정음』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또한 한자음의 음운체계 연구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훈민정음의 글자를 만든 배경이나 음운체계 연구에 있어서 기본자료가 된다.

세종대왕 기념관 홈페이지에 액자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세종대왕기념관(홈페이지 http://www.sejongkorea.org)

조선시대 세종대왕의 성덕과 위업을 추모하고 이를 길이 보존하기 위해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1970년 11월 준공하고 1973년 10월 개관하였다. 갖가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세종대왕기념관에는 한글실, 과학실, 국악실, 일대기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옥외전시물에는 ‘세종대왕신도비(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2-1호)‘ 와 ‘수표(수위측정기)(보물 838호)‘ 등이 있다.

 

 

570년 세월 그대로… 世宗의 숨결 느낀다

[간송 전형필 소장본 '훈민정음 해례본'… 한글날 앞두고 복간]

1940년 안동서 간송 전형필 발견… 방종현·홍기문, 本紙에 단독 보도

간송미술문화재단·교보문고 제작
"일반인 접하기 어려운 국보 70호… 곁에 두고 역사의 소중함 느끼길"

이한수 기자

입력 2015.10.07 03:00 | 수정 2015.10.07 10:52

1940년 7월 30일 조선일보에 놀라운 기사가 실렸다. 1446년(세종 28년) 간행 이래 자취가 드러나지 않았던 '훈민정음(訓民正音)' 해례본(解例本)이 494년 만에 실체를 드러냈다는 특종 기사였다. '원본 훈민정음의 발견'이라는 제목의 기사는 원본 발견 소식과 함께 해례본의 내용을 번역해 8월 4일까지 5회에 걸쳐 연재했다. 기사는 조선일보 출신의 국어학자 방종현이 썼다. 그는 조선일보 학예부장을 지낸 홍기문과 함께 해례본을 한글로 번역했음을 밝히고 "누구의 이름으로 되든지 공동 노작'이라고 적었다. 조선일보는 해례본 번역 연재를 마친 직후인 8월 10일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됐다.

복간된 간송본 훈민정음 해례본. 한지에 인쇄하고 옛 방식으로 제본해 최대한 원본에 가깝게 만들었다. 1446년 간행된 해례본은 1940년 간송 전형필이 발견·구입해 494년 만에 존재가 알려졌다.

국보 70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훈민정음 해례본을 그대로 복원한 복간본이 한글날(9일)을 앞두고 나왔다. 해례본을 소장한 간송미술문화재단이 기획하고 교보문고가 제작을 맡았다. 간송본과 동일하게 한지에 인쇄하고 4침안정법(4개의 구멍을 뚫어 실로 꿰매 책을 만드는 방법)으로 제본해 최대한 원본에 가깝게 복간했다. 훈민정음 연구자인 김슬옹 워싱턴 글로벌대학 교수가 해제한 해설서 '한글의 탄생과 역사-훈민정음 해례본'도 함께 출간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1446년 음력 9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 창제 사실을 알린 뒤 정인지·신숙주·성삼문 등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창제 목적과 글자의 원리 등을 설명한 한문 해설서다. 해례본은 책 표지에 '훈민정음'이라고만 되어 있으나 '훈민정음 해례'라는 목차 아래 글자의 제작 원리와 사용 방법 등을 적고 있어 '언해본'과 구분해 '해례본'이라고 부른다.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로 잘 알려진 언해본은 해례본의 앞부분인 '어제(御製) 서문'과 '예의편(例義篇)'만을 한글로 번역해 세조 이후 만든 책으로 여러 판본이 있다.

(위 왼쪽부터)전형필, 방종현, 홍기문. (아래)훈민정음 해례본 발견을 단독 보도한 조선일보 1940년 7월 30일자.

훈민정음 해례본은 실록 등 역사서에 기록돼 존재가 알려져 있었지만 간송 전형필 선생이 1940년 경북 안동에서 발견해 구입하면서 처음 실체가 알려졌다. 전형필은 소유주에게 책값 1만원과 별도 사례금 1000원을 주고 해례본을 구입했다. 당시 기와집 한 채 값이 1000원이었다. 당시 조선일보 기사는 소장자를 '시내 모씨'라고만 썼다. 김슬옹 교수는 "소장자를 익명으로 처리하고 사진도 없이 보도한 것은 우리말과 글의 교육을 금지한 일제 치하 상황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간송본은 훈민정음 해례본의 유일본이다. 지난 2008년 경북 상주에서 또 다른 판본(상주본)이 발견됐으나 간송본에 비해 훼손된 부분이 많고 이후 도난에 이어 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배모씨의 집에 화재가 나면서 현재 행방이 묘연한 상황이다. 해례본의 발견으로 세종대왕이 창틀과 문고리를 보고 한글을 만들었다는 일부 일본 어용학자들의 억측을 반박할 수 있게 됐다. '어금닛소리 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 등으로 글자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에 대해 세계 언어학자들은 한글의 과학적 원리를 극찬하고 있다.

간송 소장본은 광복 직후인 1946년 이후 몇 차례 영인본이 발간됐지만 원형 그대로 복간본이 나온 것은 처음이다. 전형필 선생의 손자인 전인건 간송미술문화재단 사무국장은 "연구자만이 아니라 국민들이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우리의 소중한 역사와 문화를 체감할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원문보기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5/10/07/2015100700025.html

한글의 역사와 가치를 널리 알리기 위한 박물관인데요, 한국인은 물론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에게도 참 좋은 놀이터가 될 것 같네요.^^

박물관에서 어떤 내용들을 볼 수 있는지 구경해 볼까요?

여기는 국립한국박물관이에요. 외관이 아주 멋지죠?

지하1층부터 3층까지 있는데요.

1층에는 한글누리 도서관, 2층에는 상설전시실 및 아름누리(한글 문화상품점, 찻집), 3층에는 기획전시실과 어린이를 위한 한글놀이터, 외국인을 위한 한글배움터가 있어요.

▲ 전시실 층별 안내 (출처: 국립한글박물관 홈페이지)

한글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았다. 상설전시실의 '한글이 걸어온 길'

립한글박물관의 전시장을 둘러보면 세종대왕이 뿌린 '한글'이라는 씨앗이 어떻게 현대의 한글문화를 꽃피우게 되었는지 알 수 있어요.

먼저, 상설전시실에서는 '한글이 걸어온 길'이라는 주제로 한글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고, 미래를 생각하는 전시가 열리는데요. 유물, 영상, 조형물 등을 통해 한글 자료를 만날 수 있습니다.

용비어천가
▲세벌식 공병우 1호 한글타자기 (제공: 문화체육관광부)

한글 역사에서 중요한 「훈민정음」, 용비어천가, 월인석보 뿐 아니라, 생활 속 한글 사용을 엿볼 수 있는 한글 편지, 한글 악보, 한글이 새겨진 도자기·소반 같은 생활용품, 옛 시가집 등 700여 점의 유물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어요.

상설전시실을 더 알차게 즐길 수 있는 방법 하나 알려드릴게요.

전시실 입구에 가면 유물지도와 한글 이야기가 담긴 이야기책이 있어요. 이 두 가지를 활용하면 전시관람을 보다 알차게 하실 수 있을 거예요.

전시 관람 인원 축소 안내
수도권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 시행으로 관람 인원이 조정됩니다.
- 국립한글박물관(전체): 회차당 90명
- 한글놀이터: 회차당 33명
* 4단계 격상 이전 관람 예약하신 분들은 전시 관람 가능
박물관 이용에 너른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자세한 내용은 국립한글박물관 누리집(www.hangeul.go.kr)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미지제공=국립한글박물관>

▲ 영상출처: 국립한글박물관 홈페이지( www.hangeul.go.kr )

우문성

-호머 헐버트박사와 한글 띄어쓰기-

중국의 한문원서를 번역할 때 종종 오역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이유 중 하나는 한문에 띄어쓰기가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신다.”는 문장을 띄어쓰기를 잘못하면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가 되듯 한문을 번역할 때 띄어쓰기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뜻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우리도 오랜 옛날부터 줄곧 한문만 쓰다가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시자 처음에는 중국한문의 표기방식을 그대로 차용하여 띄어쓰기가 없었다.
“나라 말씀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맞지 않으니...”로 시작되는 훈민정음 서문부터 띄어쓰기도 없고 쉼표도 없는 문장이다.
이렇게 띄어쓰기도 없고 쉼표도 없는 문장을 읽는 것은 매우 불편한 일이다.

이런 불편을 개선해 준 사람이 바로 미국인 호머 헐버트 박사(Homer Hulbert; 1863~1949)였다.

'헐버트'박사는 우리 한글이 띄어쓰기를 하지 않아 불편하다는 사실을 알고, 영어식으로 띄어쓰기를 하도록 계도했다.
'헐버트' 박사가 그렇게 계도해 주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아직도 띄어쓰기와 쉼표가 없는 불편한 중국식 문장을 그대로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중국 한문은 지금도 띄어쓰기와 쉼표가 없는 것을 보면 능히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23세의 청년이었던 '헐버트' 박사는 조선의 청년들에게 서양문화와 영어를 가르쳐 달라는 조선정부의 요청을 받고 1886년, 제물포를 통해 조선에 입국했다.
그렇게 조선에서의 생활을 시작한 '헐버트' 박사는 조선인보다도 조선을 더 사랑했던 사람이다.

그는 조선에 들어온 지 3년 후인 1889년에 '선비와 백성 모두가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이라는 뜻의 '사민필지 (士民必知)'를 저술했는데, 이 책은 순 한글로 만들어진 조선 최초의 교과서라 할 수 있다.
미국인 선교사로서 짧은 시간에 한글학자가 된 그는 미국에 한글 교본을 출간하는 등, 다수의 논문을 통해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기 시작했고 서재필(徐載弼, 松齋; 1864~1951), 주시경(周時經, 白泉; 1876~1914) 등과 함께 ‘독립신문’을 발행했는데, 그 신문은 최초로 띄어쓰기를 한 한글신문이었다.

누구보다 한글의 우수성을 잘 알고 있었던 '헐버트' 박사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중국인들이 익히기 어려운 한자를 그만 버리고 한글을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까지 말할 정도였다.
그랬던 그는 1949년 8월 5일, 서울에서 눈을 감았고 대한민국 정부는 1949년 8월 11일, 역사상 최초로 ‘외국인 사회장’을 거행한 후, 현재의 양화진(楊花津) 외국인 묘지에 안장했다.
그리고 1950년에 외국인으로는 최초로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또 2014년 한글날에는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그가 죽은 지 50년이 되는 1999년에 세워진 기념비에는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고 자신의 조국보다 한국을 위해 더 헌신했던 '빅토리아' 풍의 신사 '호머 헐버트' 박사 이곳에 잠들다.' 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글자에만 쉼표와 마침표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쉼표와 마침표가 없으면 숨이 막혀 살지 못한다.
쉬는 일요일이 있어야 하고 친구들과 차 한 잔을 나눌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

하루 일과도 쉼표와 마침표가 있는 과정이고 작품도, 여행도, 농사도 모두 쉼표와 마침표가 있는 과정이다.
쉼표 없는 인생, 마침표와 재출발이 없는 인생, 그런 인생은 지옥 중의 상지옥이다.

우리말에는 '바쁠수록 둘러가라'는 속담이 있고,
영어에는 'Slow and steady wins the race. (천천히 꾸준히 가는 자가 이긴다)'라는 경구가 있다.

인생 일장춘몽(人生一場春夢) 이라고들 하지만, 인생 100년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마음의 여유를 가지며 일하고, 한 가지 한 가지씩 마무리를 지어가면서 새 마음, 새 기분으로 도전해 가자!

‘틀림없이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뜰 것이다.’

천억 원을 요구하는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의 미스터리

  • 기자명 이선기 기자 
  •  

 

YTN화면캡쳐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이라 불리는 이유는?

행방이 묘연했던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의 실체가 밝혀지면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최근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을 갖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고서적 수집상 배익기 씨가 “정부가 1000억 원을 보상해 주면 상주본을 내놓겠다”고 문화재청에 의사를 전했다.

배 씨는 문화재청이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의 가치를 1조 원 이상이라고 밝힌 만큼 자신에게 10%를 보상해 주면 나머지 90%는 국가에 헌납하겠다는 것.

배 씨는 개인 재산인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을 그냥 내놓으라고 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10%인 천억 원 정도는 보상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문화재청은 “보상 금액이 너무 크다”면서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의 실물을 먼저 공개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여기서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은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와 사용법을 기록한 책으로 국보 70호로 지정된 ‘간송본’과 함께 딱 2권 뿐 인 귀중한 문화재로 지난 2008년 7월말 경북 상주에서 발견돼 '상주본'으로 불린다.


서문 4장과 뒷부분 1장이 없어졌지만 상태가 좋고 간송본에는 없는 표기, 소리 등에 대한 연구자의 주석이 있어 학술적 가치가 더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상주본은 세상에 알려졌을 때부터 줄곧 배씨가 보관해 왔지만 골동품 상점을 운영하던 조씨가 "자신의 가게에서 훔쳐간 것"이라며 민사소송을 제기해 소유권을 확정받았다. 이에 배씨는 2011년 상주본을 훔친 혐의(문화재보호법 위반)로 구속기소됐다가 지난 2014년 대법원은 훔쳤다는 확실한 이유가 없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대법원이 소유권자로 인정한 조 씨는 사망했고, 배 씨는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절도범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국가에 기증할 의사가 있다는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배씨는 무죄를 선고받은 이후에도 상주본의 존재만 확인해줄 뿐 행방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게다가 배씨의 집에 화재가 일어나 상주본의 상태를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원문보기

http://www.sisafoc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4569

 

 

훈민정음 해례본을 가슴에 품다, '간송 전형필'

전형필 (全鎣弼, 1906-1962) 호 간송(澗松) 직업 문화재 수집가, 교육자 학력 와세다 대학 법학부 상훈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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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필(全鎣弼, 1906-1962)  간송()

직업 문화재 수집가, 교육자

학력 와세다 대학 법학부

상훈 대한민국문화포장(1962), 대한민국 문화훈장 동백장(1964)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2014)

​- 훈민정음 목판본, 국보급 고려 청자들, 추사 김정희의 글씨,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의 그림과 같은 우리의 대표급 문화재가

이국땅을 떠도는 비극을 막았던 진정한 문화재 수호자였다.

 

- 훈민정음 해례본에 관한 일화와

존 개츠비의 소장품인 고려청자의 수집에 대한 일화가 유명하다.

1. 생애..

 

서울의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나

휘문고등보통학교와 와세다 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 졸업 후 일제 식민 통치 아래 말살되어 가는 민족정기를 되살리기 위해

우리 민족 문화 전통을 단절시키지 말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 민족 문화의 결정체인 미술품이 인멸되지 않게

한 곳에 모아 보호하여야 한다는 각오로

1932년 서울 관훈동의 한남서림(翰南書林)을 인수하고,

​문화재들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문화재들을 구입하기 시작한다.

 

​- 문화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휘문고등보통학교 스승이던

춘곡 고희동 독립운동가 위창 오세창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 1934년엔 장차 우리 미술사 연구의 요람을 건설한다는 포부로

성북동에 북단장()을 개설하여 필요한 부지를 확보하고,

1938년 일제의 강력한 물자 통제령에도 불구하고

북단장 내에 보화각()을 건축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을 설립한다.

- 1940년엔 보성고보를 인수,

광복후 1945-1946년까지 1년 동안 보성중학교 교장을 맡기도 했다.

 

- 문화재보존위원회 제1분과위원에 선출되기도 하였으나(1954)

항상 공직에 나가는 것을 피하였고,

 1960년에는 이전부터 그를 돕던 김상기, 김원룡, 최순우, 진홍섭 등과 함께

'고고미술 동인회'를 만들고 운영의 핵심을 담당하면서

1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고,

'고고미술'이란 동인지를 발간하기도 하였다.

- 고고미술동인회는 한국 최초의 미술사학회로

현재의 한국미술사학회의 전신이 된다.

(사진: 간송미술관)

2. 사후..

 

- 사후 그의 자제와 동학들이 ​전형필의 수집품인

전적, 고려청자, 조선백자, 불상, 그림, 글씨, 부도, 석탑 등을 바탕으로

그가 마련해 놓은 연구 자료를 토대로 미술사 연구를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 1966년 보화각은 한국민족미술연구소로 개편되었고

연구소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1971년부터 간송미술관의 이름으로

봄과 가을 일년에 두차례 일반공개를 하고 있다

​3. 훈민정음 해례본

- 1942년 경북 안동에 소재되어 있던 훈민정음 해례본

원래 광산 김씨 종가의 긍구당 서고에 보관되어 오던 광산김씨 문중의 가보였다,

세종이 광산김씨 문중에 여진정벌의 공로를 치하하는 의미로 내린 서책이었다.

그런데 당시 이 집안의 사위였던 이용준이 매월당집 등을 비롯하여

훈민정음 해례본을 몰래 빼돌려 안동의 자택에서 보관하고 있다가

태준을 통해 전형필 선생에게 훈민정음 해례본만 만원에 판매하였다.

최초 판매가로 천원을 제시하였으나

원래 문화재의 가치를 정확히 치르는 것으로 유명했던 전형필은

금액이 너무 적다고 생각하여 거간 노릇을 한 김태준에게 천원을,

그리고 훈민정음 해례본의 가격으로 만원을 치렀다. 

 

- 이후 학계에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면서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일던

한글 창제 원리가 이 훈민정음 해례본에 의해 밝혀졌다.

훈민정음 해례본 1962년 대한민국 국보 제 70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문화재방송.한국(www.tntv.kr) 캠페인]

문화재에는 우리 민족의 얼과 혼이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은 애국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