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KDN)를 발간한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은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신문의 항일 비판 수위를 더욱 높여 나갔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을 전후해 ‘대세가 기울었다’며 일부 조선 언론이 스스로 친일 성향을 드러내던 것과 정반대의 행보였다.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은 멀쩡한 석탑을 조각내 훔쳐가고 조정에 억지로 차관을 도입하게 해 빚더미에 앉게 했다. 무력했던 조선 정부가 이렇다 할 대응을 못하자 베델이 분개해 나섰다. 국제열강 가운데 상대적으로 힘이 약해 주변국 여론에 민감하다는 일제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반일 기사를 쏟아냈다.
▲ 1907년 일본으로 밀반출되기 전 개성 경천사 터에 온전한 모습으로 서 있는 경천사지 10층 석탑.
서울신문 DB
●‘문명 제국’ 일본의 반달리즘을 꼬집다
대표적인 사례가 ‘경천사지 10층 석탑 반환’이다. 현재 이 석탑은 원래 위치인 개성 경천사를 떠나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 와 있다.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높아 국보 제86호로 지정돼 있다. 베델이 없었다면 이 석탑은 지금도 일본에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다.
원래 이 탑은 1348년 고려 충목왕 때 경천사에 13.5m 규모로 세워졌다. 경천사는 고려 왕실의 기일에 제사를 지냈던 곳이다. 1907년 1월 일본 궁내대신 다나카 미쓰아키는 당시 조선 황태자였던 순종의 결혼 축하를 위해 조선에 왔다. 하지만 속내는 우리 문화재인 경천사 석탑을 일본에 가져가려는 것이었다. 그는 2월이 되자 군대를 동원해 석탑을 140여점으로 조각냈다. 주민들이 반발했지만 일본은 이들을 총칼로 제압했다. 조각들은 달구지로 실어 항구가 있던 제물포까지 운반한 뒤 배로 일본에 반출했다.
▲ 2005년 복원 작업이 완료돼 서울 용산구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진 경천사지 10층 석탑.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우리 국민들로서는 분한 일이지만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자 신보가 나섰다. 같은 해 3월 7일자 기사로 석탑 밀반출 사건을 전하며 “다나카는 우리 국민을 만만히 봤다. 조선 인민은 그 만행과 모욕에 결연히 항거할 것”이라고 울분을 토했다. 이후 신보와 KDN은 10여 차례 기사와 논설을 실으며 일본의 석탑 밀반출 만행을 집요하게 파헤쳤다.
그는 신보와 KDN 보도 이후 일본의 독립성향 신문 ‘재팬 크로니클’에 4월 4·18일자에 각각 ‘일본이 한국에서 보인 반달리즘(문화 파괴)’, ‘사라진 탑과 다른 사건들’이란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베델과 함께 개성 경천사를 다녀와 쓴 르포 형식의 글이었다.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점을 세세히 기록해 감성에 호소했다. 베델과 허버트의 노력 덕분에 미국의 워싱턴포스트가 6월 2일자로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전 세계도 주목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세계 여론이 일본에 불리하게 흘러간다는 사실을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1852~1919)도 모를 리 없었다. 스스로 ‘문명화된 제국’임을 강조하던 일본이 이런 일로 조선 지배에 발목이 잡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미치자 조선총감부도 마지못해 “석탑을 제자리로 돌려놓으라”고 일본 정부에 요청했다.
베델의 첫 보도 뒤 10년쯤 지난 1918년 11월 경천사 석탑은 조선에 되돌아올 수 있었다. 처음에는 경복궁에 있었지만 이후 방치되다가 2005년 최종 복원돼 국립중앙박물관에 자리잡았다.
배설은 심장마비로 37세에 요절했다.
▲ 양화진으로 가는 배설 선생의 상여를 조문객들이 뒤따르고 있다. (사진제공: (사)배설(베델)선생기념사업회) |
양화진 외국인 묘지의 배설 묘
배설 묘비문
아! 여기 대한매일신보 사장 배설 공의 묘가 있도다. 그는 열혈을 뿜고 주머귀를 휘둘러서 2천만 민중의 의기를 고무하며 목숨과 운명을 걸어놓고 싸우기를 여섯 해 동안이나 하다가 마침내 한을 품고 돌아갔으니, 이것이 곧 공의 공다운 점이고 또한 뜻 있는 사람들이 공을 위하여 비를 세우는 까닭이로다. 공은 서기 1872년에 영국에서 탄생하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이 가난하여 상업에 종사하더니 나이 열일곱에 일본에 건너와서 누거만(累巨万)의 재산을 모았으나 얼마 후에 실패에 부딪쳐 울적한 마음을 금하지 못하다가 마침 일로전쟁이 터지게되매 서울에 와서 신문사를 창설하였으니 때는 정히 광무 8년 7월 이러라. 가재(家財)를 털어 사용(社用)에 충당하며 용왕매진(勇往邁進)하여 감히 기휘(忌諱)에 부딪치는 말을 직필(直筆)하매 이럼으로써 책책(嘖嘖)한 명성이 널리 세상에 떨치게 되었더라.
그러다가 필경 남의 모략에 걸려 상해 감옥에 구금되었고 수십일 후에 석방되었으나 이로 인하여 통분한 나머지 병에 걸리게 되어 드디어 다음 해에 영서(永逝)하고 말았으니 때는 곧 1909년 5월 1일이요 나이 겨우 37세라 양화진에 장사지내니라. 임종 직전에 유언하기를 “나는 죽지만 신문은 영속시키어 한국동포를 구호하기 바란다”하였으니 애닯기 그지 없도다.
유족으로는 아들 하나이 있어 겨우 여덟 살이었다. 내 일찍이 상해에서 그를 만나 날이 새도록 함께 통음(痛飮)할 적에 비분강개하여 그 뜻이 매우 격렬하더니 이제 공의 묘를 위하여 글을 쓰게 되매 허망한 느낌을 이기지 못하겠도다. 이제 명(銘)하여 가로되 드높도다 그 기개여 귀하도다 그 마음씨여. 아! 이 조각돌은 후세를 비추어 꺼지지 않을지로다.
그는 죽으면서,
"내가 죽더라도, 신문은 살려 한국을 구해야 한다" 라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배델의 아내는 남편이 죽자, 모든 재산을 그대로 두고,
고종황제가 하사해 남편의 관을 덮었던 태극기,
신문사에 게양했던 영국기,
그토록 사랑하던 한국 사람들이 전국에서 보낸 책,
남편이 발행한 빛바랜 신문들만을 들고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부인은 영국으로 돌아가 남편의 의지를 따라 서방언론에,
남편의 항일투쟁, 일제의 만행, 침략상을 폭로하였습니다.
한국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한국을 위해 몸바친,
영국인 청년 배설, 그를 기억합시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했다
꿈에서 본 동물이 왕릉 앞에… 그날 백제의 꺼져가던 맥박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아무튼, 주말] 발굴 50주년 맞은 무령왕릉
공주박물관 특별전을 가다
입력 2021.10.09 03:00
전시장 한복판에 재현한 무령왕릉 무덤 속 모습. 왕과 왕비의 목관이 나란히 전시됐고, 무덤 방으로 들어가는 널길에는 무덤을 지키는 진묘수와 동전 한 꾸러미가 놓여 있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1971년 7월 4일 밤 김영배 국립박물관 공주분관장은 기이한 꿈을 꾸었다. 돼지인지 해태인지 모를 괴상하게 생긴 짐승이 자신에게 달려드는 꿈이었다. 이튿날 오전 그는 공주 왕릉원(옛 송산리 고분군) 배수로 공사 현장에서 다급한 연락을 받는다. 공사 도중 인부의 삽날에 단단한 물체가 걸렸다는 것이다. 현장에 달려가 조심스레 파보니 벽돌을 쌓아 만든 아치형 구조물이 보였다.
즉시 발굴 조사단이 구성됐다. 조사단장은 서울서 내려온 김원룡 국립박물관장. 8일 오후 4시 막걸리에 북어 세 마리, 수박 한 통 올려놓고 위령제를 지냈다. 김원룡 단장과 김영배 분관장이 맨 위쪽 벽돌 두 장을 빼내자 하얀 수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오후 4시 15분 어두컴컴한 무덤 안을 손전등으로 비추던 김 분관장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꿈에서 본 그 짐승이 서 있는 것 아닌가. 곧이어 두 사람 눈에 띈 지석(誌石)에는 무덤 주인을 알리는 글씨가 선명했다. ‘영동대장군백제사마왕(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 “사마왕? 아 아.. 무령왕이다!” 백제 제25대 임금인 무령왕(武寧王·재위 501~523)과 왕비의 합장 무덤이 1442년의 긴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전시장 한복판에 재현한 무령왕릉 무덤 속 모습. 왕과 왕비의 목관이 나란히 전시됐고, 무덤 방으로 들어가는 널길에는 무덤을 지키는 진묘수와 동전 한 꾸러미가 놓여 있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발굴 50년 만에 모든 출토품 한자리에
20세기 한국 고고학을 뒤흔든 기념비적 사건이 올해 50주년을 맞았다. 충남 공주 국립공주박물관에서 ‘무령왕릉 발굴 50년: 새로운 반세기를 준비하며’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발굴 이후 처음으로 무령왕릉 출토 유물 5232점 모두가 한자리에 나왔다. 가방 하나 훌렁 메고 공주 여행에 나선 이유다. 연꽃과 신선 세계가 정교하게 새겨진 은잔(銀盞), 용과 봉황이 장식된 큰 칼, 왕과 왕비의 베개와 발받침... 백제 문화의 정수를 눈에 담느라 발길이 부지런히 움직인다.
무령왕릉 발굴 당시 가장 먼저 발견된 진묘수. 뿔과 날개가 달린 상상의 동물이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한수 국립공주박물관장은 “화려한 금·은 장신구 사이에서 뜻밖에 가장 인기 있는 유물은 무덤 입구를 지키던 동물상인 진묘수(鎭墓獸)”라고 귀띔했다. 얼핏 돼지를 닮았지만, 뿔과 날개가 달린 상상의 동물이다. 무덤을 지키고 죽은 사람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역할을 했다. 어둠 속 조사단 눈엔 “그로테스크한 괴수”로 보였지만, 50년 뒤 관람객들은 귀엽고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스마트폰으로 찍기 바쁘다. 몸통은 돌을 깎아 만들었고, 머리에 달린 뿔은 철로 만들었다. 무게가 무려 48.5㎏. 윤지연 학예연구사는 “혼자선 못 들고 남자 학예사도 두 명이 맞들어야 한다”고 했다.
전시장 한복판에 무령왕과 왕비의 목관(木棺)이 나란히 놓였다. 무덤 방으로 들어가는 널길에 놓인 지석과 동전 한 꾸러미, 진묘수가 발굴 당시 모습대로 재현돼 실제 무령왕릉에 들어온 느낌이다. 왕과 왕비의 목관은 크기, 뚜껑판의 개수, 못과 고리의 재질과 형태 등에서 차이가 난다. 무령왕의 목관은 뚜껑이 5개의 판재로 이뤄지고 관을 고정한 못머리도 금으로 입혔다. 왕비의 목관은 뚜껑이 3개의 판재로만 이어져 있고, 못머리도 금이 아닌 은판을 씌웠다.
'받침이 있는 은잔'의 뚜껑을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 중첩된 연꽃잎 가운데에서 또 피어나오는 연꽃봉오리가 연상된다. /국립공주박물관
왕의 금귀걸이. 아래에 크고 작은 하트 모양 꾸미개 3개가 달려 있다. /국립공주박물관
◇동아시아 문물 교류의 보고
삼국시대를 통틀어 유일하게 무덤 주인공이 확인된 왕릉이 도굴되지 않은 채 발견된 것은 천우신조였다. 학계에선 “무령왕릉 발굴은 꺼져가던 백제 역사의 맥박을 되살렸을 뿐 아니라 고대 동아시아의 찬란한 문명 교류사까지 복원해냈다”고 말한다. 중국 도자와 청동거울, 일본산 금송으로 만들어진 목관, 동남아산 원료가 포함된 유리구슬은 무령왕릉이 동아시아 문물 교류의 보고임을 보여준다.
왕의 관 꾸미개. 인동초 줄기가 아래로부터 퍼져 올라가서 불꽃이 타오르는 것처럼 역동적이다. 달개 장식이 달려 화려하다. /국립공주박물관
왕비의 관 꾸미개. 가운데 꽃병에서 연꽃이 피어나는 모습이다. 달개 장식 없이 정적이고 단정한 느낌을 준다. /국립공주박물관
국보로 지정된 유물만 17점. 화려한 자태를 자랑하는 왕과 왕비의 관 꾸미개는 금 함유량 98% 이상으로 순금에 가깝다. 나란히 전시된 왕과 왕비의 것을 비교 감상하는 재미가 있다. 왕의 꾸미개는 인동초 줄기가 아래로부터 퍼져 올라가서 불꽃이 타오르는 것처럼 역동적이다. 반면 왕비 것은 가운데 꽃병에서 연꽃이 피어나는 모습이라 정적이고 단정하다. 둘 다 얇은 금판을 오려 무늬를 만들었지만 왕의 꾸미개는 달개 장식이 달려 화려하고, 왕비의 것은 달개가 없다.
'왕비의 베개와 봉황 머리 장식'이 전시된 모습.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1400년 넘는 세월에도 목재가 바스러지지 않은 것은 옻칠의 힘. 무령왕비 베개를 장식한 봉황 두 마리는 검은색으로 칠한 후 정수리 깃과 목에 금박 띠를 돌렸다. 베개의 우아한 붉은 빛과 봉황의 고고한 검은 빛깔의 조화가 당시 백제의 칠기 문화가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보여준다.
전시장 곳곳에 공주를 대표하는 나태주 시인의 시구가 붙었다. “공주라 무령왕릉 천오백년 잠을 깨어/ 하늘 아래 연꽃으로 둥그스름 피었으니...” 이번 특별전을 기념해 시인은 ‘무령왕릉’을 주제로 시 4편을 새로 썼다.
연꽃무늬 벽돌. 무령왕릉 입구를 막은 벽돌은 모두 614점이었다. /국립공주박물관
◇사상 최악의 졸속 발굴
무령왕릉 발굴은 ‘사상 최악의 졸속 발굴’이라는 오명도 함께 갖고 있다. 발굴 당시 현장에서 눈치를 챈 한국일보 기자가 1971년 7월 8일 자 1면 톱기사로 ‘새 백제왕릉 발견’이라는 특종 기사를 냈다. ‘물먹은’(낙종한) 기자들에 구경꾼까지 몰려들면서 현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청동 숟가락이 부러지는 등 통제 불능 상황으로 치닫자 다급해진 조사단은 철야 작업을 강행했다. 큰 유물만 대충 수습하고 나머지는 바닥에 엉킨 풀뿌리째 자루에 쓸어담아 나왔다. 하룻밤 새 왕릉 발굴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김원룡 국립박물관장은 생전에 “나의 실수였고 고고학자로서 평생의 아쉬움의 하나다. 나라와 국민에게 큰 죄를 저질렀다”고 뼈아픈 반성문을 남겼다.
1971년 7월 8일 무령왕릉 발굴 당시 맨 위쪽 막음벽돌을 빼내는 모습. /국립공주박물관
옆 전시실에선 이 긴박했던 발굴 과정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당시 현장에서 문화재관리국에 보낸 긴급 보고서도 나왔다. 1971년 7월 5일 오전 10시 30분, 발견자 김영배 공주분관장 등은 “시급히 조사 작업을 진행치 않으면 도굴 및 파괴의 우려가 있으니 긴급 조치 바람”이라고 썼다. 벽돌을 들어내고 목관을 반출하는 사진, 발굴장에 모여든 사람들과 열띤 취재 경쟁까지 흑백사진으로 고스란히 남았다.
권오영 서울대 교수는 “당시 우리 기관과 학계가 감당하기 어려웠던 발굴이었지만, 역설적으로 고고학의 인식과 수준을 한 단계 성숙시킨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무령왕릉 발굴을 반면교사 삼아 2년 뒤 경주 천마총 발굴 등에선 체계적인 조사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전시는 “반세기 동안 무령왕릉과 함께 한국 고고학과 보존과학도 성장했다”며 “반성과 회한을 넘어서 새로운 반세기를 열어가야 할 때”라고 말한다. 내년 3월 6일까지.
[50년 전 무령왕릉 조사단도 이 국밥 먹으며 발굴했다고?]
국립공주박물관 학예사들이 꼽은무령왕릉 인근 먹거리&볼거리
유네스코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일부인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옛 송산리 고분군). 가운데 솟은 무덤이 무령왕릉이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40세 늦은 나이에 왕위에 오른 무령왕은 풍전등화에 빠진 백제를 일으켜 세웠다. 당시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의 남침으로 한성이 함락된 후 쫓겨 웅진(공주)으로 천도해 있었다. 무령왕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여러 번 승리를 거둔 뒤 521년 사신을 양나라에 보내 ‘갱위강국(백제가 다시금 강국이 되었다)’을 선언한다. 올해는 무령왕의 갱위강국 선포 15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국립공주박물관 학예사들이 ‘무령왕의 도시’ 공주를 알차게 즐기는 법을 들려줬다. ‘무령왕릉 발굴 50주년’ 특별전이 한창인 공주박물관에서 차로 3분 거리에 실제 무령왕릉이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일부인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옛 송산리 고분군·041-856-3151)이다. 바닥에 그려진 진묘수 그림을 따라 구릉 위로 올라가면 무령왕릉을 포함해 백제 고분 7기가 있다. 초록으로 뒤덮인 완만한 능선의 고분을 따라 천천히 산책하는 기분도 색다르다.
'고가네 칼국수'의 대표 메뉴인 평양식 만두전골과 보쌈수육.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박물관에서 차로 7분 거리에 있는 고가네 칼국수(041-856-6476)는 학예사들이 만장일치로 꼽은 ‘공주 맛집’이다. 주인 김영란씨가 고씨 집안으로 시집온 뒤, 시댁에서 운영하던 직물 공장을 리모델링해 지금의 칼국수 집으로 만들었다. 개운하고 시원한 평양식 만두전골과 보쌈수육이 인기 메뉴. 한수 관장은 “무령왕 시대의 공주 중심지가 바로 제민천이었다”고 했다.
구도심인 제민천에 조성된 '나태주 골목길'.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인근에 조성된 나태주 골목길에선 소소한 골목 여행의 묘미를 느낄 수 있다. 나태주 시인의 시와 그림이 곳곳에 숨어있는 골목이다. 하얀 담벼락에 손으로 써내려 간 시구에서 몽글몽글 감성이 피어오른다. ‘힐링 장소’로 소문난 한옥 카페 루치아의 뜰(041-855-2233)에선 시간도 느리게 흘러간다. 건축가 임형남·노은주 부부가 구도심의 오래된 집을 고쳐 차를 나누는 문화 공간으로 꾸몄다. 도심 골목길 재생 프로젝트의 성공 사례다.
카페 '공다방' 창가에 앉으면 정면으로 보이는 공산성 뷰.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제민천에서 차로 4분만 가면 공산성이다. 공산의 능선과 계곡을 따라 쌓은 성벽인 공산성은 웅진 백제 시기(475~538)를 대표하는 고대 성곽이다. 백제 땐 ‘웅진성’으로, 고려 시대엔 ‘공주산성’으로, 조선시대 인조 이후엔 ‘쌍수산성’으로 불렸다고 전해진다. 금강을 내려다보며 공산성 성곽길(2660m) 전체 한 바퀴 도는 데 1시간~1시간 30분 걸린다. 매표(어른 1200원, 청소년 800원, 어린이 600원) 후 금서루에서 오른쪽 길로 올라 쌍수정⋅왕궁지⋅진남루⋅영동루⋅광복루⋅만하루와 연지⋅영은사⋅공북루⋅공산정 전망대를 거치는 코스가 정석이다.
정면으로 공산성 뷰가 보이는 카페 '공다방'.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성곽길 걷기가 부담스럽다면 공산성이 한눈에 들어오는 공다방으로 간다. 안민자 학예연구사는 “정면으로 보이는 공산성 뷰가 예술이라 요즘 가장 뜨는 카페”라며 “창가 자리에 자리 잡으면 공산성 보며 멍 때리기 좋다”고 소개했다. 이름에서 풍기는 레트로(복고) 감성과 달리 내부는 모던한 분위기. 공산성 야경이 예쁘니 밤에 가도 좋다. 월요일 휴무.
공산성 인근 국밥집 '새이학가든'의 대표 메뉴인 '공주 국밥'.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무령왕릉 발굴 50년’ 특별전을 감상한 이들에겐 공산성 인근 국밥집 새이학가든(041-855-7080)을 추천한다. 50년 전 무령왕릉을 발굴한 조사단이 이곳 국밥을 먹으며 작업했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한수 관장은 “서울에서 내려온 김원룡 국립박물관장에게 이 집을 소개한 사람이 김영배 공주분관장”이라며 “65년 전부터 공주시장(市場)에서 유명했던 ‘이학식당’이 이름을 바꿔 현 위치로 옮긴 것”이라고 했다. 푹 고아 녹아 있는 대파와 무가 담백하면서도 깊은 맛을 낸다. 박정희 전 대통령도 공주에 오면 꼭 들렀다고 한다. 공주국밥 9000원. /공주=허윤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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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chosun.com/national/weekend/2021/10/09/7YZY6AQ6NBGDHHJEI4344QSRWI/
다시 ‘궁이 온다’ 제7회 궁중문화축전_가을 개최
- 16일간(10.16.~31.) 경복궁 일원과 온라인으로 궁 문화 경험 -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본부장 정성조)가 주최하고, 한국문화재재단(이사장 최영창)이 주관하는 올해 하반기 궁중문화축전이 오는 16일부터 31일까지, 16일간 ‘2021년 제7회 궁중문화축전_가을’로 지난봄에 이어 올해 두 번째로 국민 곁을 찾는다.
해마다 봄에만 열리던 궁중문화축전이 올해부터는 봄과 가을 두 차례로 열리게 되면서 이번 축전은 가을에 열리는 최초의 궁중문화축전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5월에 열렸던 봄 축전에서는 ‘궁, 마음을 보듬다’라는 주제로 온라인과 다양한 현장 행사를 통해 약 20만 명 이상의 시민에게 일상 속 휴식을 전한 바 있다.
코로나19 이전 관람객이 궁궐과 종묘를 직접 방문하여 다양한 축전 현장을 즐기던 일상을 뒤로 하고, ‘제7회 궁중문화축전_가을’은 온라인 중심의 프로그램을 통해 궁궐이 국민에 다가간다는 의미를 담아 ‘궁이 온다’를 주제로 정했다. 이에 따라 코로나19 예방을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에 대비해 프로그램 전반을 기획단계에서부터 비대면으로 준비하여 온라인과 현장 모두를 아우르도록 준비하였다. 지난해에도 처음으로 온라인과 현장 운영을 병행하여 안전하게 즐기는 축제의 선례를 남겼던 만큼 올해도 문화유산을 활용한 비대면 축제로서 새로운 모습을 선보일 것이다.
‘궁중문화축전_가을’은 15일 오후 7시 궁중문화축전 유튜브에서 진행하는 온라인 개막식을 시작으로 대면(현장) 프로그램이 9일간, 비대면(온라인) 프로그램이 16일간 이어진다. 주요 현장 행사로는 먼저, 경복궁 내 7개 장소에서 여러 지자체와 연계하여 지역을 대표하는 전통문화를 선보이는 시각 예술 전시 <궁으로 온 팔도강산–대동예(藝)지도>가 있다. 새롭게 선보이는 지역 연계형 행사로, 경복궁 곳곳에 안전하게 조성된 동선에 따라 도보로 즐기는 비대면 관람 행사다.
원주 한지, 이천 도자기, 진주 비단, 나주 천연염색, 담양 대나무, 보성 차, 제주 생태 등 지역의 대표 문화유산을 기본요소로 하여 흥례문, 근정전, 수정전 등 경복궁 전각을 배경으로 전시관을 조성, 7개 지역의 대표 전통문화를 소개하고 이를 시각예술로 구현한 전시를 선보이는 행사이다.
염색장 보유자들과 도예가, 한지공예가, 죽계공예 장인 등 전통문화 장인들의 작품이 경복궁 곳곳을 아름답게 꾸밀 예정이며 무엇보다도 궁중문화축전이 수도권 뿐 아니라 비수도권인 전국의 전통문화까지 아우르는 시도로 축전이 전 국민에게 사랑받는 축제로 거듭날 것으로 기대된다.
경복궁 근정전 앞 회랑에서는 전시 <궁, 기록보관소>가 펼쳐진다. 시민공모를 통한 ‘궁을 즐기는 101가지 방법’에서 당선된 21가지 방법을 사진과 설명이 기록된 8개 큐브 구조물로 감상할 수 있다. 또한, 책 형태의 구조물 2개에는 영상으로 제작한 선정작이 공개된다.
상반기부터 선보이고 있는 온라인 프로그램 <아티스트가 사랑한 궁>은 가을 축전에도 계속된다. 포크가수 ‘이장희’를 비롯하여 총 5팀의 예술가들이 아름다운 궁궐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축전 유튜브에서 들려준다.
조선 태종 12년인 1412년을 배경으로 한 동서양 음악의 만남, ‘경회루판타지-화룡지몽’은 무용극에 뮤지컬 요소를 도입한 새로운 영상 <경회루판타지–화룡지몽2021>으로 재탄생한다. 재기발랄한 기획과 축전의 이모저모를 풀어내며 축전의 온라인을 책임져온 <궁궐TV> 역시 유튜브에서 계속된다. 청각적 자극을 통해 많은 이들의 심신을 위로해줄 실감형소리(ASMR) <왕비가 듣는 풍경>은 왕비가 궁궐을 거닐며 들었을 법한 여러 소리를 ‘이머시브’ 효과로 들려줘 듣는 이로 하여금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한다. 아름다운 덕수궁을 배경으로 선보이는 <덕수궁이 들려주는 대한제국 시기의 음악>은 축전 기간 만나볼 수 있으며 축전 이후에도 대한민국 100년의 음악사를 훑어보는 영상들이 계속될 예정이다
* 이머시브: 기존 최대 음향 기술인 5.1채널에서 3배 이상 확장된 16채널을 사용하여 소리의 입체감과 공간감을 구축할 수 있는 음향 기술
또한, 지난해 교육과 게임을 접목해 선보인 <랜선 어린이 궁중문화축전>는 모바일 프로그램을 추가한 ‘마크로 만나는 궁’으로 다시 돌아온다.
‘조선판 보드게임’이라고 할 수 있는 ‘쌍륙’ 놀이에 현대의 게임과 교육적 내용을 더한 ‘신(新)쌍륙’놀이를 체험 꾸러미 형태로 제작한 <궁중문화축전을 집으로 배달합니다>도 준비됐다. 신청자에게 우편으로 배달해주는 프로그램으로, 희망자는 10월 18일과 25일 오후 2시 축전 누리집에서 신청(회차당 500명, 총 1000명)하면 된다.
* 쌍륙: 조선 시대 성행하던 놀이로 두 사람 또는 두 편이 15개씩 말을 가지고 2개의 주사위를 굴려 판 위에 말을 써서 먼저 나가면 이기는 놀이
축전 공식 누리소통망(이하 SNS)에서는 한복 종이 인형, 단청 모빌 만들기, 사진작가 케이채와 협업한 ‘차이나는 PALACE(플레이스)’ 등 다채로운 온라인 콘텐츠도 선보인다. 지난 12일 웹주소 ‘pungsokdo.com’에서 미리 공개한 <모두의 풍속도>는 화가 김홍도의 풍속화에서 착안하여 만든 풍속화 속 인물을 나만의 인물화로 만들어 새로운 풍속화로 완성하는 참여형 행사로, 공개 하루만에 10만회 이상 참여가 이루어졌으며 궁중문화축전 기간에 계속 운영된다.
자원봉사자 ‘궁(宮)둥이’는 가을 축전의 대부분 행사가 비대면으로 운영됨에 따라 ‘랜선 궁(宮)둥이 기자단’으로 새롭게 모습을 갖추고 축전의 이모저모를 살피며 시민의 눈과 귀가 되는 온라인 활동을 펼칠 것이다.
‘제7회 궁중문화축전_가을’에 대한 자세한 정보와 일정은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누리집(royal.cha.go.kr), 한국문화재재단 누리집(www.chf.or.kr), 궁중문화축전 누리집(www.royalculturefestival.org)에서 확인할 수 있다. 축전 기간 내에 공개되는 온라인 프로그램은 궁중문화축전 공식 SNS와 유튜브(https://url.kr/JIL1Tt)에서 살펴볼 수 있다.
*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royalculturefestival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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