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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

[문화유산 답사기]천연기념물 제336호. 천연보호구역인 독도는 문화재청에서 관리하는 한국의 문화재다.

문화재방송 2021. 10. 25. 00:10

 

독도 항공 촬영

독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동쪽에 있는 작은 돌섬이다. 크기도 5만5000여 평에 불과하고
 
사람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인간적'인 섬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사람 중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독도를 모르는 사람은 없거니와 환경생태적으로나

자원 측면에서, 그리고 국방.외교 등 국토관리면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기 때문이다.

국가적으로 일찌감치 1982년 11월 16일 제336호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당시 표면적 지정 사유는 해조류 번식지로서 보호가치가 있다는 것이었다. 관리도 해경이

담당했다.

그러다 99년 6월 독도관리지침을 제정하면서 문화재청으로 관리권이 넘어갔고,
 
그해 12월 '독도천연보호구역'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독도의 날(10.25.) 기념 공동기획전 개최

 

- 독도 관련 국공사립 기관들과‘독도천연보호구역’주제 공동전시 10.25.~12.31. -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지병목)는 독도의 날(10.25.)을 맞이하여 독도의 과거, 현재, 미래를 주제로 관계 기관들과 함께 공동기획전 ‘독도천연보호구역’을 10월 25일부터 12월 31일까지 대전 천연기념물센터 기획전시실에서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문화재청이 주최하고, 국립문화재연구소와 환경부 국립생물자원관, 울릉군 독도박물관, 동북아역사재단 등 독도와 관련된 국‧공‧사립기관들이 공동 주관하며 문화체육관광부와 해양수산부의 후원으로 이루어진다.


  전시는 독도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3부로 나누어 보여줄 예정이다. 먼저, ▲ 제1부 ‘독도의 과거’에서는 독도가 우리나라의 영토로 표기된 지도 가운데 최근 스페인에서 공개되어 화제가 되었던 ‘조선왕국도’를 비롯한 9점의 고지도와 동해가 표기된 고지도 7점 등 총 16점을 한자리에 선보인다. 전시하는 고지도는 동북아역사재단과 독도박물관에서 제공한다.


  ▲ 제2부 ‘독도의 현재’는 천연기념물센터가 보유한 흑비둘기, 팔색조, 새매 등 10종의 천연기념물인 조류 박제표본과 국립생물자원관에서 제공한 괭이갈매기 표본, 독도에 서식하는 동식물의 세밀화 등을 선보일 예정이며, 특히, 흑비둘기 박제표본은 일반에 처음으로 공개된다.


  ▲ 제3부 ‘독도의 미래’는 문화재청과 독도박물관이 보유한 항공 영상과 홍보 영상, 동북아역사재단이 제공한 만화영상 등 독도와 관련된 총 18편의 영상과 다양한 사진들을 전시할 계획이다.


  코로나19로부터 안전한 관람을 위해 동시 입장 가능인원은 7명으로 제한하며, 마스크 착용과 발열 확인, 안전거리 유지 등 방역수칙을 준수하여 관람해야 한다.
또한, 오는 11월 2일부터 온라인으로도 공개할 예정으로 추후 국립문화재연구소 누리집(http://www.nrich.go.kr)과 천연기념물센터 누리집(http://www.nhc.go.kr:1500/main/main.do)에서 별도 공지할 계획이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앞으로도 우리나라의 자연유산을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홍보하고자 여러 기관과 꾸준히 협력할 예정이다. 아울러 더 많은 국민이 자연유산을 누리고 즐길 수 있도록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하고 제공해 나갈 계획이다.

국방.외교적 측면을 제외하고 순수 천연기념물 쪽에서 독도의 중요성과 가치를 보면

뭐니 뭐니 해도 생태적 보고라는 점이다. 울릉도에서 87.4㎞(일본 오키군도에선 157.5㎞)

떨어진 곳에 위치, 두 개의 주섬과 78개의 돌섬.암초로 구성된 독도는 화산섬 고유의 식생을

갖추고 있어 귀중한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가장 최근 실시된 중앙일보의 조사를 포함,

지금까지의 학술조사 보고를 종합하면 현재 독도에 살고 있는 식물은 모두 69종으로 돌피군락,

돌피-왕해국 군락, 돌피-섬제비쑥 군락, 섬제비쑥-왕해국 군락 등이 있다.

또 작으나마 술패랭이꽃 군락, 번행초 군락, 왕호장 군락, 땅채송화-왕해국 군락 등도 있다.

나무 종류로는 사철나무와 섬괴불나무가 독도 환경에 적응해 작은 군락을 형성하고 있으나

나머지는 단목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이곳에서 발견되는 새종류로는 이곳을 번식지로 삼고 있는 괭이갈매기.슴새.바다제비 말고도

천연기념물 제215호 흑비둘기와 천연기념물 제323호 매를 비롯, 환경부 지정 보호종인

솔개.물수리.쇠가마우지 등 129종이다. 또 호리꽃등에.꼬마꽃등에.긴꼬리꽃벼룩.

넉점물결애기자나방 등 58종의 각종 곤충이 살고 있다.

이 같은 육상 생태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수산자원적 가치다. 북쪽에서 내려오는 북한

한류와 남쪽에서 북상하는 쓰시마 난류가 교차해 모두 86종의 플랑크톤이 살고 있어

특히 회유성 어족이 풍부하다. 연어.송어.대구를 비롯해 명태.꽁치.오징어.상어가 주종을

이루고 해삼과 전복.문어 등도 많이 잡힌다.

 

괭이갈매기와유조

독도는 이와 함께 특이한 지질학적 특성으로 인한 관광지로서의 가치도 남다르다.

지금부터 460만~250만 년 전인 신생대 3기 플라이오세 기간에 해저 화산활동으로 생긴

까닭(제주도나 울릉도보다 오래됨)에 조면암.안산암.관입암 등으로 구성된 '암석학의 보고'를

이루고 있다. 특히 주상절리와 해식아치 등이 많아 해면화산의 진화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세계적 지질 유적으로서뿐 아니라 관광자원으로서도 훌륭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여기에다 97년 12월 러시아과학원 소속 무기화학연구소가 독도 주변 해역을 포함한 동해바다

밑에 일종의 고체 천연가스인 하이드레이트가 매장돼 있을 것이란 발표를 하는 등 해저자원

발굴의 전진기지로서도 각광의 대상이 되고 있다.

슴새

 

바다제비

 

 

괭이갈매기

 

1908년 日지도, 독도를 대한제국 영토로 표시

    • 유석재 기자
      • 강동철 기자
      •  
      • [오늘 독도의 날… 우리 영토 증명하는 지도 공개 잇따라]

        1844년 만든 日지도엔 동해를 '조선해'로 표기


        새로 발굴된‘대자명세 제국이정전도’중 한국 지도(부분). 1908년 일본 오사카에서 발행된 이 지도는 울릉도(죽도)와 독도(송도)를 대한제국의 영토인 것으로 표기했다(왼쪽 위). 일본의 세계지도‘신제여지전도’(오른쪽·1844)와 우리나라에서 만든‘해좌전도’(왼쪽 아래·19세기)의 일부분. 신제여지전도에는 동해가 조선해로 표기돼 있고, 해좌전도에는 울릉도와 독도(우산도로 표기)가 그려져 있다. 국가기록원이 25일 독도의 날을 맞아 기존의 자료를 복원·복제해 공개했다. /변규창씨 제공·뉴시스
        이상태 한국고지도연구학회장은 "일본이 1905년 독도를 시마네(島根)현에 강제 편입한 직후 제작된 일본 측 지도라는 점이 중요하다"며 "당시에도 일본인이 독도를 여전히 한국 영토로 인식했음을 입증하는 자료"라고 말했다.

        한편 국가기록원은 독도의 날(10월 25일)을 맞아 이미 학계에 알려진 독도·동해 관련 고(古)지도 두 점을 복원·복제해 24일 공개했다. 이 중 일본 최고 학자였던 미쓰쿠리 쇼고(箕作省吾)가 1844년 만든 세계지도 '신제여지전도(新製輿地全圖)'에는 조선과 일본 사이의 해역을 조선해로 표기했다. 동해를 조선해로 표기한 일본 지도는 이 지도 외에도 지구만국산해여지전도설(1785), 신정만국전도(1810) 등이 있다.

        19세기 중엽 우리나라에서 제작한 해좌전도(海左全圖)에는 울릉도와 독도(우산도)가 표기돼있고, 여백에는 우산국(울릉도와 독도)이 신라 때 편입된 사실도 기록돼 있다. 이 지도에는 울릉도의 크기, 울릉도 내의 촌락 규모, 울릉도와 울진 사이의 뱃길도 표시돼 있다. 박강국 국가기록원장은 "독도가 역사적·지리적·국제법적으로 우리나라의 고유 영토라는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는 자료"라고 말했다.
      • 기사원문 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10/25/201310250026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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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공문서가 밝힌 '한국의 섬' 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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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정치학
      입력 : 2016.08.17 03:09 | 수정 : 2016.08.17 08:57

    •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태평양전쟁에 패했고 한국은 해방되었다. 그때 독도가 한국 영토로 돌아왔다. 그런데 일본은 독도를 일본 영토로 만들기 위해 연합국 측에 섬 이름은 '다케시마'이고 한국 이름은 없다고 죽 거짓 보고를 했다. 이름이 영유권의 소재를 나타내므로 일본은 독도라는 명칭을 숨긴 것이다.

      독도의 원래의 이름은 우산도였다. 그러나 1882년 이후 울릉도로 이주한 사람들이 독도를 돌섬으로 부르기 시작했고 돌섬을 한자 표기한 석도(石島)가 1900년 10월 25일 반포된 칙령 제41호에 독도의 명칭으로 기재됐다. 1904년 9월 25일엔 일본 군함 니타카가 항해 일지에 '독도'라는 이름을 최초로 이렇게 적어 놓았다. '한국인은 이것을 독도라고 쓰고, 본방 어부들은 줄여서 리안코도라고 칭한다.'

      이 자료는 도쿄의 국립공문서관이 소장한 일본 공문서다. 일본은 1905년 2월 이름도 주인도 없는 섬이라며 독도를 시마네현 오키섬에 편입했으나 사실 1904년 9월 이미 '독도'라는 명칭이 있었고 그 주인이 한국임을 확인한 것이다. 반면 1904년 당시 독도의 일본 이름은 없었다. 그래서 독도를 프랑스가 이름 붙인 '리앙쿠르 록스'를 줄여서 리안코도라고 부른다고 기록한 것이다. 이 사실은 늦어도 1904년 9월 한국이 작은 바위섬을 독도라고 부르며 실효 지배했고 일본은 독도를 소유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일본은 17세기에 독도를 불렀던 그들의 이름 '마쓰시마'를 잊어버린 상태였다. 즉 당시 일본은 독도에 대한 영유권 개념 자체가 없었다. 니타카의 항해 일지는 독도라는 한국 명칭을 확인해 준 사실을 넘어 한국이 일본보다 먼저 독도를 실효 지배한 국가라는 증거가 되는 귀중한 자료다.

      그런데 일본은 패전 후 독도라는 명칭의 존재를 계속 숨겼다. 미국 국무부 문서 '한·일 간 리앙쿠르 록스(다케시마 혹은 독도)에 대한 논쟁'(1952년 2월 4일 작성)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1947년 일본 정부는 일본에 인접하는 작은 섬들에 대한 연구를 공표했다. 이 연구는 일본인들이 마쓰시마, 현재는 다케시마라고 부르는 섬에 대해 옛날부터 잘 알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 그러나 이 섬에 대한 한국인들의 이름이 없다고 일본 정부는 주장한다.' 이 기록은 일본 정부가 1947년 미국에 영토 주장을 하는 과정에서 다케시마에는 한국 이름이 없으니 한국 땅이 아니라고 우긴 사실을 보여준다. 미국은 1951년 8월 주한 미국 대사인 존 무초에게 조회하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독도'라는 한국 명칭이 존재함을 확인했다.

      국제법적으로 지명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미국지명위원회는 주권이 인정되지 않은 땅에는 그곳의 주권을 주장하는 나라가 붙인 지명도 인정하지 않는다. 좋은 사례가 센카쿠(尖閣)열도다. 이곳을 실효 지배하는 나라 는 일본이지만 중국과 대만은 이에 항의하며 '댜오위다오(釣魚島)'라고 부른다. 미국은 중국과 대만의 주장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미국지명위원회의 센카쿠열도 페이지에는 댜오위다오라는 명칭 자체가 없다. 지명은 주권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1904년 9월 25일의 일본 공문서는 독도의 주인이 처음부터 한국이었음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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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8/16/201608160347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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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대통령, 현직 대통령 첫 독도 방문

    • 김지혜 기자 
      입력 : 2012.08.10 16:10

 

이명박(71세) 대통령이 10일 현직 대통령 중 최초로 울릉도와 독도를 방문했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이 대통령이 오늘 중 울릉도를 방문한다. 날씨가 좋으면 독도도 들를 예정이다"고 밝혔다. 일본 NHK 인터넷판은 10일 "오늘 오후 2시쯤 이 대통령이 독도에 도착했다"고 보도했다.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중 독도를 방문한 건 이명박 대통령이 처음이다. 이날 방문엔 환경부 장관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소설가 이문열 씨와 김주영 씨 등이 동행했다.

청와대에 따르면 이 대통령의 이번 울릉도·독도 방문은 우리 국토에 대한 자연 환경보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다. 일부에선 8·15 광복절을 닷새 앞두고 '독도는 우리 땅'이란 사실을 대내외에 널리 알리기 위한 행보란 분석을 내놓고 있다.

이와 관련, 일본 정부는 즉각 반발에 나섰다. 겐바 고이치로 일본 외무상은 "이 대통령의 독도 방문은 일본의 입장과 맞지 않는다"며 방문 중단을 요구했다. 일본 현지 언론들은 "양국 간 관계 악화가 예상된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日 눈치 보나"…독도 입도지원센터 건립사업 7년째 방치

등록 2021.09.23 10:58:48

기사내용 요약

2014년 이후 매년 센터 건립 예산 편성 후 전액 불용 처리
위성곤 의원 "입도지원센터 건립. 더 이상 미룰 명분 없어"

[독도=뉴시스] 사진공동취재단 = 지난 2일 오후 경상북도 울릉군 독도가 빼어난 절경을 뽐내고 있다. 2021.09.06.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박성환 기자 = 정부가 독도입도지원센터 건립을 7년째 방치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지난 2014년 이후 매년 관련 예산이 편성되고 있으나, 전액 불용 처리되고 있기 때문이다.

'독도 입도지원센터 건립'은 일본이 2006년부터 매년 '죽도의 날' 행사를 개최해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거짓홍보에 대응하기 위해 독도에 센터를 건립해 입도객 안전관리 및 독도 학술연구 등을 위해 추진하는 사업이다.

23일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위성곤 의원이 해양수산부로부터 제출받은 '독도 입도지원센터 건립 관련 예결산 내역'에 따르면 2014년 이후 매년 센터 건립을 위한 예산이 편성되고 있으나, 전액 불용 처리되는 것으로 확인됐다.

연도별로 ▲2014년 29억9900만원 ▲2015년 20억7500만원 ▲2016년부터 2020년까지 각 20억5500만원이 불용된 것으로 드러났다. 2014년에 100만원이 집행된 것을 제외하면 사실상 사업비 전액을 7년간 한 푼도 집행하지 않은 것이다.

반면 독도수호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입도하는 국민들은 2015년부터 올해 8월까지 102만6833명으로 집계됐다. 연도별로는 2015년 13만3657명, 2016년 17만4503명, 2017년 15만9016명, 2018년 20만3110명, 2019년 23만684명, 2020년 5만6364명, 2021년 6만9499명 등이다. 독도 명예주민증은 같은 기간 총 5만7680명에게 발급됐다.

특히 코로나19가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이전인 2019년 입도 인원(23만684명)은 2015년(13만3657명)에 비해 172% 증가했고, 최근 2년(2020~2021년 8월)간의 독도 입도 인원 역시 117%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기상불량 등의 이유로 입도하지 못하고 선회한 인원은 최근 7년(2015~2021년 8월)간 22만6774명이고, 독도 명예주민증은 최근 7년(2015~2021년8월)간 총 5만7680명에게 발급된 것으로 확인됐다.

위성곤 의원은 "일본은 2006년부터 매년 죽도의 날 행사를 열어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어불성설을 늘어놓고 있다"며 "우리도 이에 대응하기 위해 2008년부터 독도입도지원센터 건립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나, 지금까지 사업이 전혀 진행되지 않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위 의원은 "주무부처인 해수부는 센터 건립을 위해 관계자들과 여러 차례 간담회 개최를 했다고 밝히고 있으나, 간담회 개최 기록조차 제시하지 못하는 등 소극적 태도만을 고집하고 있다"며 "독도 수호를 위한 국민의 관심에 전혀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해수부의 소극적 태도는 자칫 독도 문제에 대한 정부의 소극적 태도로 비춰 질 수 있고 늘어나는 입도객 안전관리 역시 시급하다"며 "이를 감안해 해수부는 사업이 조속히 추진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원문보기

https://newsis.com/view/?id=NISX20210923_0001590652

공감언론 뉴시스 sky0322@newsis.com

 

"日 눈치 보나"…독도 입도지원센터 건립사업 7년째 방치

[서울=뉴시스] 박성환 기자 = 정부가 독도입도지원센터 건립을 7년째 방치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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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의해 멸종된 독도강치를 알고있나요

 

*독도강치란?

몸길이 2.5m 내외이다. 군집을 이루어 생활하며, 낮에는 대부분 연안(沿岸)의 육지로 올라와 휴식을 취하거나 바다에 들어가 먹이를 사냥한다. 멸치·오징어·꽁치·고등어  어패류를 먹는다. 일부다처제 방식으로 짝짓기를 한다. 수명은 약 20년이다.
좁게는 캘리포니아강치와 일본강치로도 불리는 독도강치(Zalophus japonicus), 갈라파고스강치가 여기에 속한다. 독도강치는 독도를 비롯한 동해 연안에 서식했으나 바다사자의 가죽을 얻으려는 무분별한 남획으로 그 수가 급격히 줄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절멸한 것으로 본다. 









[출처] 역사스폐셜(2011.10.27)



*요약

독도강치는 독도와 동해 연안에 사는 우리나라 고유의 강치야.그런데 일본이 강치를 돈의 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연간 몇백마리에 이르는 무분별한 포획을 했고 그 결과 우리는 더 이상 강치를 못 보게 되었어. 그리고 유일하게 있는 독도강치 1마리의 박제는 일본이 가지고 있어 ^^
그런데, 최근 제주어민들의 증언으로는 바다사자와 같은 형체를 가진 것이 떼를 지어 보이기 시작했대.
그리고 경북 울진군에서 독도강치 한마리가 발견되어서 현재 희귀.멸종동물 복원전문가와 한국해양동물연구소에서 다른 곳으로 떠나있는 강치를 찾으려 노력하고 있어.


지난 8월 우리가 광복절 행사가 계속됐을 때 일본 시마네현에서는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 등 주요 SNS를 통해 독도 왜곡 광고를 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광고 전면에는 이미 멸종된 독도의 '강치'를 내세우고, "일본인은
"에도시대부터 다케시마(竹島-독도의 일본식 이름)에서 강치잡이를
하던 일본 땅"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강치가 얼마나 중요하기에 그들이 강치를 잡던 자기네 섬이라고
주장하고 있을까요?

독도강치는 19세기에만 대략 5만 마리 정도가 독도에서 서식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독도강치는 그 당시 일본
어부들의 주된 수입원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강치들을 잡아 강치의 가죽을 벗겨 비싼 가죽제품으로
만든후 일본 호사가들에게 팔았지요. 당시 강치가죽은 고급가방으로
만들거나 물을 뜨는 바가지로 만들어져 각광을 받았고 특히,
가죽가방은 당시 '파리박람회'에서 금상을 받을 정도로 가치를
인정받았다고 합니다.

뿐만아니라 강치의 피하지방은 기름으로 만들었고 강치의 살과 뼈는
비료로 이용했을 정도로 어떤 부위도 버릴 것이 없었던 강치1마리가
당시 황소 열마리의 값과 맞먹을 정도였습니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무자비한 강치도살에 나섰지요
일본 시마네현의 어부였던 나카이 요사부로는 독도 강치잡이가
큰돈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곧바로 독도 강치 포획을 시작했지요.

나가사키는 자신의 예상대로 강치잡이를 통해 엄청난 수입을 올리게 됐고
수입이 늘어갈수록 더큰 욕심이 생긴 그는 아예 독도 어업권을 독점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가장 먼저 일본 '농상무부'로 찾아갔습니다.

일본 해군성의 수로부장 기모츠키 가네유기 제독은 나카이에게 어이없는
제안을 했습니다.

독도는 주인없는 섬이기 때문에 먼저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편입한 후
일본정부에 독도 어업권을 요청하는 서류를 제출하라고 한것입니다.
독도가 대한제국의 영토임을 모를리 없었던 일본해군은 나카이의 독도
어업권을 빌미삼아 독도를 빼앗을 계획을 추진한 것이지요.

어떻게든 독도 어업권 획득에만 관심 있었던 나카이 요사부로는
1904년 9월 29일 일본 해군성의 권유에 따라 일본 정부에 '독도 영토편입
및 사용허가 요청서'를 일본 정부에 제출했습니다.

그리고 1905년 1월 10일 . '무인도 소속에 관한 건'이 일본 내각에 올려졌고
1905년 1월 28일 일본 내각의 결정을 통보받은 일본 내무성은 1905년 2월
15일자 훈령 제 87호로 각료회의의 결정을 관내에 고지할것을 시마네현
지사에게 지시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직도 일본이 독도가 자신들의 영토라는 근거로 내세우는
시마네현 고시 제 40호입니다.

그러나 시마네현 고시 40호는 일반에게 널리 알려진 고시가 아니라 관계자
몇몇이 돌려본 ‘회람(回覽)’에 불과하였다는 전문가들의 주장입니다.

진주성의 치열한 역사와 함께한 촉석루(矗石樓)

진주 촉석루는 평양 부벽루, 밀양 영남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정(樓亭)으로 일컬어진다. 왜 우리의 선인들은 아름다운 승지에 누정을 지었을까. 비록 강산이 아름답고 성곽이 장엄해도 누정이 없다면 울울한 회포를 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에 따르면 영남의 진주는 지리산 동쪽에 있는 큰 고을이며, 장수와 정승이 될 만한 인재가 많이 나왔고, 땅이 기름지고 강산이 아름다우므로 사대부는 넉넉한 살림을 자랑하며, 집과 정자 꾸미기를 좋아하여 비록 벼슬은 못했으나 한가롭게 노니는 귀공자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고 했다.

 

바로 이 진주의 젖줄인 남강 바위 벼랑 위에 장엄하게 자리 잡고 있는 영남 제일의 아름다운 누각이 촉석루다. 촉석루라는 이름은 남강의 가운데에 뾰족뾰족한 돌이 있는 까닭에 붙여졌다고 한다. 조선 후기의 저명한 시인인 신유한(申維翰)은 촉석루의 아름다운 경관과 역사적 사실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진양성 바깥엔 강물은 동으로 흘러가고 晋陽城外水東流
울창한 대 꽃다운 난초는 푸르러 모래섬에 비치도다 叢竹芳蘭綠映洲
천지엔 충성 다한 삼장사가 있었고 天地報君三壯士
강산엔 객을 머물게 하는 높은 누각 우뚝 섰네 江山留客一高樓
병풍치고 노래하니 햇살에 잠자던 교룡은 춤추고 歌屛日照潛蛟舞
병영 막사에 서리 들이치니 졸던 해오라기 수심 깊네 劍幕霜侵宿鷺愁
남으로 북두성 바라보니 전쟁 기운은 사라졌고 南望斗邊無戰氣
장군단엔 피리 불고 북 치며 중춘에 노닌다네 將壇笳鼓半春遊

 

촉석루는 고려 말에 창건되어 나라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진주성을 지키는 장수의 지휘소로 사용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군은 일본군과 그해 10월과 이듬해 6월에 진주성에서 두 차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 두 차례 전투에서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 의병장 김천일(金千鎰) 등은 순국하였고, 진주의 관민 6만여 명이 희생되었다. 김성일(金誠一)은 진주성 전투 때의 역사적 상황을 아래와 같이 칠언절구 한 수로 읊고 눈물을 흘리면서 크게 통곡하였다.

 

촉석루 누각 위에 올라 있는 세 장사 矗石樓中三壯士
한 잔 술로 웃으면서 장강 물을 가리키네 一杯笑指長江水
장강의 물은 도도히 쉬지 않고 흘러가니 長江之水流滔滔
물 마르지 않음이여 우리 넋도 영원하리 波不渴兮魂不死

 

전쟁이 끝나고 진주성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한 진주목사 김시민, 창의사 김천일 등의 여러 신위(神位)와 군졸들의 신위를 안치하기 위하여 1595년 경상감사 정사호(鄭賜湖)는 사당을 건립하였다. 1607년에 이 사당은 창렬사(彰烈祠)란 사액을 받았다. 한편 김시민의 신위를 모신 충민사(忠愍祠)는 1652년(효종 3)에 건립되어 1667년(현종 8)에 사액되었으나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자 창렬사에 신위를 옮겨 모셨다고 한다.

 

진주성 전투에서 특기할 만한 사실은 논개(論介)의 활동이다. 그는 기생의 몸이었지만 오직 나라를 위한 일념에 불타있었다. 그는 아름답게 단장하고서 남강의 절벽 바위 위에 앉아 왜장을 유인하여 마주 안고 한바탕 춤을 추다가 왜장을 끌어안고 절벽을 뒹굴어 남강에 빠져 장렬하게 순절하였다. 1740년에 영조는 논개에게 ‘의기(義妓)’라는 정표를 내렸고, 이어 경상우병사 신덕하는 순절한 논개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촉석루 옆에 논개의 사당을 건립하였다. 지금까지 촉석루를 찾는 이들은 임진왜란 당시의 역사를 회상하며 논개의 높은 순절과 민족혼을 얘기하고 있다.


예술작품에 자주 등장한 평양의 백미, 부벽루(浮碧樓)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 유홍준 교수는 1997년 9월 평양을 방문하여 여러 명승을 답사했는데, 당시에 부벽루는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었다고 전하면서 을밀대에 올라가서 부벽루를 바라보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북한문화유산답사기』에 부벽루에 대해 소개하면서 두 가지 사항을 특기하였다. 그 글에 따르면 부벽루에 걸려 있는 편액 글씨는 평양 사람 조광진(曺匡振)의 것이고, 김황원(金黃元)의 시구는 현재 부벽루가 아니라 연광정에 원문과 번역문이 주련으로 걸려 있다고 한다.

 

대동강 청류벽(淸流壁) 위의 부벽루에 올라서면 그 아래 유유히 흐르는 맑은 강물과 강 건너로 펼쳐진 들판, 멀리 크고 작은 산들이 보이는 전경이 매우 아름답다. 고려 예종 때의 시인 김황원은 부벽루에 올라가 시심(詩心)을 억누를 수 없어 “장성 한쪽 면은 넘실넘실 흐르는 물이요(長城一面溶溶水), 너른 들 동쪽 머리는 점점이 박힌 산이네(大野東頭點點山)”라는 두 구절을 읊고는 아름다운 경치에 그만 넋을 잃고 내려왔다고 전한다. 세상 사람들은 평양의 아름다운 경치가 이 두 글귀에 다 표현되었으므로 오랜 시간이 흘러도 다시는 한 구절이라도 덧붙이는 이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고려 말의 대문호인 이색(李穡)은 부벽루에 올라가 천고의 절창(絶唱)을 남겼다.

 

어제 영명사를 들렀다가 昨過永明寺
잠시 부벽루에 올랐었네 暫登浮碧樓
빈 성엔 한 조각 달이요 城空月一片
오랜 돌엔 천추의 구름이네 石老雲千秋
기린말은 떠난 뒤 돌아오지 않으니 麟馬去不返
천손은 어디에서 노닐고 계신가 天孫何處遊
휘파람 길게 불며 바람 부는 비탈에 기대니 長嘯倚風磴
산빛은 푸르고 강물은 절로 흘러가네 山靑江水流

 

조선조의 학자인 허균은 이색의 부벽루 시 작품은 별로 수식하거나 탐색한 흔적이 없이 저절로 음률에 맞아서 읊으면 신일(神逸)하다고 했고, 정사룡은 절묘하여 사람을 감동시킨다고 했다. 이 부벽루 시의 시어(詩語)인 석(石:朝天石), 인마(麟馬), 천손(天孫) 등은 고구려 동명성왕의 고사를 표현한 것이다. 부벽루가 있는 곳에 동명성왕의 궁궐이 있었다고 하니 유구한 역사를 지닌 우리 민족의 성지인 것이고, 이색은 그 사실을 평이하면서도 절묘하게 시로 읊었던 것이다.

 

조선조에 이 부벽루에서는 평안감사가 주최하는 다양한 연회가 열렸고, 그때마다 관료와 문인들의 수많은 작품이 지어지고 또 지어졌다. 조선 후기에 평안감사의 부임을 환영하기 위해 베풀어진 연회의 모습을 그린 〈평양감사환영도(平壤監司歡迎圖)〉 등을 통해 우리는 당시의 멋과 풍류를 마음껏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부벽루 역시 촉석루처럼 전란 시에는 호국의 보루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평양에서도 조선과 일본의 군대가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다. 부벽루는 임진왜란 당시 불에 타 버렸으나 1614년(광해군 6)에 중건되었다.

 

평양의 부벽루와 진주의 촉석루는 우리의 선인들이 평화로운 시절에는 풍류를 즐기던 곳이었고, 유사 시에는 호국의 보루로 역할을 하였다. 평양성과 진주성은 나라의 안보를 상징하며, 부벽루와 촉석루에 걸린 시판(詩板)은 우리의 선인들이 창조한 풍류 문화의 자취들이다. 그러나 1948년 남북이 분단된 이래 아직까지 남북의 동포들은 서로 오고 가지 못하고 시와 그림 등 작품으로만 남북에 산재한 문화유산을 그려보고 있을 뿐이다. 우리 민족은 단군의 후손으로 이 땅에서 오 천여 년을 함께 살아왔기에 민족도 강역도 역사도 언어도 문화도 같다. 하루빨리 남북이 자유롭게 오가고, 통일로 이어져 촉석루와 부벽루에 올라가 그동안 가슴깊이 쌓인 울울한 회포를 풀 날이 오기를 빌어본다.

글. 권오영(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사학전공 교수)

출처:월간 문화재사랑

창경궁 춘당지 가을 전경.(문화재청 제공)

- 궁능유적본부, 10월 말~11월 초 단풍 절정 예상, 궁궐‧왕릉 곳곳에 문화행사 마련 -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정성조 본부장)는 국민 모두가 아름다운 문화유산과 함께 가을의 정취를 즐길 수 있도록 궁궐과 조선왕릉의 가을 단풍 시기를 안내하고 다양한 가을 행사를 개최한다.


  올해 4대궁과 종묘, 조선왕릉 내 가을 단풍은 이번 달 25일을 시작으로 11월 20일까지 대략 한 달간 이어질 것으로 보이며, 특히, 10월 말부터 11월 초 사이 절정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궁궐과 조선왕릉은 도심에 가까우면서도 단풍을 구경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로 손꼽힌다. 그 중에서도 으뜸은 ▲ 창덕궁 후원, ▲ 창경궁 춘당지 주변, ▲ 덕수궁 대한문~중화문 간 관람로, ▲ 남양주 광릉, ▲ 서울 태릉과 강릉, ▲ 고양 서오릉 등이며, 이밖에도 궁궐과 조선왕릉 곳곳에서 아름다운 단풍을 만나볼 수 있다.


  아울러 단풍 기간 중 궁‧능을 찾는 관람객들이 즐길만한 각종 문화행사도 마련된다. 먼저 궁궐에서는 ▲ 창덕궁 연경당에서 효명세자의 효심을 담은 춤 공연인 「연경당 진작례 재현 공연」(11.4.~5.)과 국립국악원과 함께하는 「창덕궁 풍류」(11.9.~12.)가 펼쳐지며, ▲ 덕수궁에서는 전통과 현대 미술의 절묘한 어우러짐「상상의 정원」(9.10.~11.28.) 전시가 선보이고 있다. 


  또한, 조선왕릉에서는 ▲ 동구릉 「세계문화유산 스탬프 투어 챌린지」(10.20.~11.10.)가 진행 중이고 ▲ 세종대왕릉(영릉)과 동구릉‧서오릉, 융건릉, 홍유릉 등에서 「조선왕릉문화제」(10.9.~24.)가 개최되고 있다.
  * 창덕궁, 덕수궁, 창경궁, 조선왕릉, 세종대왕유적 월요일 휴일 / 경복궁, 종묘 화요일 휴일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는 관람객들에게 ‘이용객 간 2m 이상 거리 두기’, ‘산책길 내 일방통행하기’, ‘화장실 등 다중이용시설 이용 시 마스크 꼭 쓰기’ 등 코로나19 확산 방지와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다양한 조치를 관람객들에게 꾸준히 안내하여 안전하고 청결한 궁능 관람시설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아울러, ‘위드 코로나’ 시대로의 전환을 앞두고 국민이 궁궐과 조선왕릉의 아름다운 단풍을 감상하며 마음의 여유를 찾는 시간이 되기를 기대한다.

더 자세한 사항은 각 조선왕릉관리본부 http://royal.cha.go.kr/main/index.do?siteCd=RPTCdp 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문화재방송.한국(www.tntv.kr) 캠페인]

문화재에는 우리 민족의 얼과 혼이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은 애국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