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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

[유네스코 세계 유산] 1500년 동안 천연색이 그대로인 고구려 왕릉의 벽화는 살아 있다./ 언제나 북한의 고구려 왕릉을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을까

문화재방송 2021. 12. 1. 00:03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고구려 고분

  (The Complex of the Koguryo Tombs; 2004)

                                                                     

     동명왕릉(東明王陵)

고구려 고분군(高句麗 古墳群)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북한에 있는 고구려시대 후기의 고분군이다. 대부분이 평양직할시와 평안남도 남포에 걸쳐 있다. 2004년 7월 1일, 유네스코 세계유산 위원회(WHC) 쑤저우(蘇州) 회의에서, 중국 랴오닝 성과 지린 성에 걸쳐 소재하는 고대 고구려 왕국의 수도와 무덤군과 함께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세계 유산에 등재된 북한의 고구려 유산은 5개 지역 고분 63기(벽화 고분 16기 포함)로 구성되어 있는데 중국에 있는 고구려 유산에 비해 규모는 적은 편이다. 강서 대묘(江西大墓)를 포함해 동명왕릉(東明王陵), 쌍영총(雙楹塚), 약수리 무덤, 수산리 무덤 등이 대표적이다. 안악 3호분처럼 많은 무덤 안에 아름다운 벽화가 있다. 벽화는 10,000여 개의 고구려 고분 중 90곳에서만 발견된 매우 드문 것으로 고분군의 주인은 왕족이거나 계급이 높은 귀족일 것으로 여겨진다.

강서대묘

안악 3호분

 

무용총

중국과 한반도에서 발견된 10,000기 이상의 고분들 중에서 거의 절반이 고구려 고분이며, 이러한 고분들은 왕을 비롯한 왕족, 귀족들의 시신을 매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고분의 벽화는 당시의 생활상을 독특한 방식으로 보여 주는데 많은 고분 중에서 90기에서만 이러한 벽화를 찾아볼 수 있다. 북한의 5개 지역에 있는 63개의 고분이 고구려 고분에 포함되는데 이들은 5~6세기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중 강서 삼묘(江西三墓)와 동명왕릉, 그리고 16개의 다른 고분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고구려의 범위는 오늘날 중국 북동부의 지린(吉林) 성에서부터 북한의 평양시까지 아우르고 있으므로, 양국의 역사 유적들은 오랫동안 고구려의 역사적 기원을 둘러싼 분쟁의 소재가 되었다. 북한이 역사적인 증거를 바탕으로 고구려가 한반도의 옛 왕국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중국의 역사가들은 고구려의 유물들이 지리적으로 중국 국경 안에 있으며 중국이 소유하고 관리해 왔다는 점에서, 고구려가 중국 역사의 일부라고 주장해 왔다.

양국은 각자의 영토에 모두 속한 고구려의 유산을 별도로 세계유산목록에 등재하는 것을 ‘비정치적’인 행위로 여기는 데 동의했고, 현재 유적을 보존하는 동시에 관광지나 연구 자원으로 활용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당시에 한반도의 삼국 중 하나였던 고구려는 700년 동안 26명의 왕이 통치하며 존속했다. 그들은 모두 고구려인의 행복을 향상시키는 동시에 군사력을 증강하려고 노력했다. 고구려는 북방의 침략자들에 대항해 싸워야 했기 때문에 고구려 사람들은 조직적으로 단결되어 있고, 전술 또한 잘 습득하고 있었다.

고구려에는 독특한 문화와 더불어 높은 수준의 교육, 사회, 정치, 군사 체계가 발달했다. 고구려의 고분 벽화들은 풍부한 색채와 색조를 갖추고 있다. 벽화에 그려진 춤추는 여인, 훈련 중인 전사, 하늘의 새와 용, 강의 물고기, 숲의 짐승, 바람, 구름 등은 매우 현실적이고 생생하여 마치 그림 속에서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덕흥리 고분

 

용강대묘

 

약수리 고분

 

동명왕릉

 

  고구려는 기원전 277년부터 서기 688년까지 1,000여 년 가까이 존속한 왕국이다. 중국 랴오닝(遼寧) 성 환런(桓仁) 현에 세워진 고구려는 3세기에 지린 성 지안(集安) 시의 국내성으로 수도를 옮겼다가 427년에 오늘날의 평양시 태성산 지역으로, 그 후에는 오늘날 평양시 중심부의 장안성이 있는 곳으로 수도를 옮겼다.

평양 지역은 오랫동안 고대 왕국 고조선의 수도로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라는 전략적 위치를 점하고 있기 때문에, 고구려는 수도를 이곳으로 옮겨와 국가 발전에 무척 힘을 썼다. 고구려는 중국 북동부에서부터 한반도의 절반에 이르기까지 영토를 확장시키며 동아시아의 강력한 왕국으로 부상했다가 668년에 멸망했다.

고구려에서 가장 유명한 문화유산은 돌과 흙으로 된 봉분으로 덮인 수백 개의 석조 고분들이다. 고구려가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흙 봉분이 덮이고 벽화들이 그려진 고분이 일반화되었고, 다른 지역에서도 이러한 고분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고구려 고분은 대개 지난 수천 년 동안 몰래 발굴되어 왔기 때문에, 과학적인 방법에 의해 발굴된 고분은 그 수가 매우 적다. 따라서 발굴된 유물 역시 온전한 것이 매우 적다. 많은 고분이 일반인들에게 공개된 1905년에 이르러서야 고구려 고분은 비로소 세계적인 관심을 끌게 되었다.

이 시기는 일제강점기였기 때문에 최초의 과학적인 연구 및 기록은 1911년과 1940년대 사이에 일본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정기적인 연구와 발굴, 기록은 1945년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고분에 들어가는 것을 제한하거나 새로운 입구를 만드는 등의 소소한 보존 조치는 1940년대 초반에 이루어졌다. 정기적인 관리와 보호, 보존 활동은 적절한 법적 조치가 마련되고 유산 관리자를 지정한 1946년에 시작되었다.

 

 고구려 고분은 왜 페르시아 양식을 닮았을까

권오영의 21세기 고대사

 

▶ 권오영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직접 유적을 발굴하는 고대사 학자로, 역사학과 고고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 자연과학과 공학적 연구를 역사 탐구에 활용하는 학제 간 융복합 연구에 관심이 많다.

 

평안남도 남포시 용강에 있는 고구려 고분 쌍영총의 무덤방의 천장을 아래에서 쳐다본 모습. 들여쌓기 방식으로

쌓은 말각조정식 천장이 우물 내부처럼 보인다. 이런 방식은 페르시아 문화권 건축물에 흔하다. 권오영 교수

 

말을 타고 몸을 비틀어 활을 쏘는 이른바 ‘파르티안 샷’이 그려진 고구려 고분 무용총의 벽화. 파르티안 샷은 페르시아

계통의 파르티아에서 전래된 활쏘기 방법이다. 권오영 교수 제공

다보탑과 석가탑의 또 다른 진실

왜 불국사 쌍탑만 모양이 다를까

  • 이광표 서원대 교양대학 교수 kpleedonga@hanmail.net

[동아DB]

 

석가탑(釋迦塔)과 다보탑(多寶塔)은 왜 모양이 서로 다를까. 사찰에서 쌍탑은 보통 모양이 똑같거나 아주 흡사하다. 그래서 이름도 ○○사 동탑, ◯◯사 서탑이라고 부르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왜 유독 불국사(佛國寺)에서만 두 탑 모양이 다르고 이름도 다르단 말인가. 그리고 다보탑은 과연 몇 층 탑일까. 이 궁금증에 다보탑과 석가탑의 미학이 있다.

법화경을 탑으로 구현하다

경북 경주 불국사 경내에 있는 석가탑(왼쪽)과 다보탑. [동아DB]

 

다보탑은 불교 경전 ‘법화경(法華經)’에서 유래한다. 법화경에는 다보여래(多寶如來)와 석가여래(釋迦如來)가 등장한다. 다보여래는 과거의 부처(과거불), 석가여래는 현재의 부처(현세불)다. 법화경 가운데 ‘견보탑품(見寶塔品)’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다보여래는 평소 “내가 부처가 된 뒤 누군가 법화경을 설법하는 자가 있으면 언제라도 그 앞에 탑 모양으로 솟아나 그 내용이 진실하다는 것을 증명하겠다”고 서원(誓願)했다. 다보여래는 훗날 석가모니가 ‘법화경’의 진리를 설파하자 정말로 그 앞에 화려한 탑으로 불쑥 솟아났다. 그 탑의 높이는 500유순(由旬)이요 평면 넓이는 250유순이다. 온갖 보물과 5000개의 난순(欄循·난간), 1000만 개의 감실(龕室)로 장식돼 무척이나 화려했다. 옆으로 깃발이 나부끼고 줄줄이 구슬이 늘어져 있고, 보배로운 방울들이 달려 있다. 또한 사방으로 아름다운 향이 풍겨 세계에 가득 찼다.

법화경 견보탑품 내용을 요약하면, 석가탑은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하는 내용을 표현한 탑이고, 다보탑은 과거의 부처인 다보여래가 불법을 증명하는 것을 상징하는 탑이다. 다보탑은 따라서 다보여래가 머무는 환상적인 궁전인 셈이다. 다보여래는 석가여래와 한 쌍을 이루기에 다보탑은 석가탑과 한 쌍이다. 
 

불국사의 다보탑과 석가탑은 법화경의 이 내용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것이다. 기단부의 계단과 난간(현재는 난간 기둥만 남아 있다), 네 마리의 사자상, 4각과 8각의 난간 장식, 연꽃잎과 그걸 받치는 대나무줄기 모양의 기둥, 뒤집힌 신발 모양의 기둥 등 일반적인 석탑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다채로운 장식을 넣어 화려하게 꾸민 것도 법화경 내용을 충실하게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다보탑은 마치 노련한 목조건축물을 보는 듯하다. 
 

다보탑 석가탑은 불교건축이고 불교미술이다. 불교미술, 기독교미술 같은 종교미술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격식과 틀이 중요하다. 작가의 창의성보다 종교 이념을 중시하고, 종교 이념과 교리를 드러내기 위한 규칙이 있다. 종교미술은 모두 그 규칙을 따라야 한다. 지나치게 감각적이어서는 안 되고, 지나치게 인간적이어서도 안 된다. 창의성보다 규칙이 우선이다. 

그런데 다보탑은 무척 독특하다. 이런 모양의 탑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다. 경전 내용을 탑으로 표현한 적도 없다. 게다가 사찰에 쌍탑을 배치하면서 이렇게 서로 다르게 조성한 것도 전무후무한 일이다. 사찰 건축의 핵심이 되는 탑을 조성함에 있어 새롭고 파격적인 형식을 보여줬다. 이렇게 새로운 형식이 어떻게 신라 땅, 경주에서 나타난 것일까.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곳, 경주

천년고도 경주의 고분. [동아일보 양회성 기자]

답을 찾으려면 경주 도심을 거닐어봐야 한다. 경주 도심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대형 고분이다. 도심 한복판 도처가 죽은 자의 무덤이다. 경주 도심을 걸으면서 불국사에서와 같은 질문을 던져보자. 죽은 자의 무덤이 왜 이렇게 도심 한복판에 있는가. 신라 사람들은 왕궁 바로 옆에, 일상 공간 바로 옆에 왜 무덤을 만들었는가. 

이탈리아 로마, 일본 교토(京都), 중국 시안(西安) 등 세계 어느 곳을 다녀도 도심 한복판에 이처럼 대형 무덤이 즐비한 곳은 없다. 우리의 고도(古都) 역시 마찬가지다. 설령 고분이 있더라도 도심에서 약간 벗어난 근교 쪽, 평지가 아닌 구릉지대에 조성돼 있다. 경주처럼 도심 한복판 평지에 무덤을 조성한 곳은 찾아보기 어렵다. 

경주 사람들은 21세기 첨단 디지털 시대에도 무덤 사이로 출근하고 퇴근하고, 유모차를 끌고 고분 옆에서 휴식을 취하고, 죽은 자를 바라보며 차를 마신다. 대릉원(大陵苑) 무덤 옆에 ‘황리단길’이 생겨 이제는 젊은이들이 신라인의 무덤 옆에서 낭만을 논한다. 경주에서 살고 경주를 즐기는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죽음과 함께 살아간다. 참으로 대담하고 파격적이지 않은가. 묘한 매력이다. 신라 사람들은 이처럼 성찰적이었고 경주는 이미 철학적인 공간이었다. 

이번엔 바닷가로 나가보자. 경주 감포 앞바다에 가면 대왕암이 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년)의 수중릉(水中陵)이다. 아들 신문왕이 아버지 유언에 따라 동해 가운데 큰 바위에 장사를 지낸 곳이다. 문무왕은 죽고 나서도 용이 돼 나라를 지키고 싶은 마음으로 바다에 장사 지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에 따라 동해 바위틈에 유골함을 매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 역사에 수중릉은 없다. 그런데도 수중릉을 만들 생각을 했다니, 이 또한 파격적이고 도발적이다. 

경주에서 울산 쪽으로 가다보면 큰길 옆으로 괘릉(掛陵)이 있다. 신라 원성왕(재위 785~798년)의 무덤으로 알려진 곳이다. 능 앞에는 좌우 두 줄로 무인, 문인, 사자를 형상화한 돌조각이 세워져 있다. 모두 무덤 주인공을 지켜주는 상징적인 존재다.

서역인과 신라인이 격구를 즐기던 곳

경주 괘릉을 지키는 무인석. 얼굴이나 옷차림으로 보아 이 무인은 서아시아 아랍계 사람을 모델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 무인석 한 쌍의 모습이 독특하다. 신라인, 한반도인 얼굴이 아니라 무시무시한 외국인 얼굴이다. 눈은 깊숙하고 코는 우뚝 솟았다. 이른바 심목고비(深目高鼻)다. 귀밑에서 턱으로 내려간 수염 역시 우리 모습이 아니다. 곱슬머리를 동여맸고 아랍식의 둥근 터번까지 썼다. 헐렁한 상의에 치마 같은 하의를 걸쳤다. 전체적으로 서아시아 아랍계 사람의 얼굴이다. 당시 용어를 빌리자면 서역인(西域人)의 얼굴. 서역은 중국의 서쪽 지역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신라왕의 무덤을 신라인이 아니라 서역인 무사가 지키고 있다니,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무덤 앞 무인상을 서역인으로 표현한 걸 보면 무덤 주인공은 살아 있을 때 서역인과 특별한 관계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죽고 나서 그의 무덤 앞에 서역인 조각상을 세울 까닭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원성왕이 살아 있을 때, 원성왕을 경호하는 호위무사가 서역인이었다는 얘기가 된다. 서역인이 왕의 경호실장을 맡았던 셈이니, 파격이 아닐 수 없다. 

경주에는 이외에도 서역인 조각상이 여럿 전해온다. 헌덕왕릉 무인상(9세기), 흥덕왕릉 무인상(9세기), 서악동 고분(8, 9세기)의 묘실 문 서역인상, 구정동 석실분의 서역인상(9세기) 등. 이 가운데 구정동 석실분의 모서리 기둥에 조각된 서역인상이 특히 흥미롭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에 전시돼 있는 이 돌기둥엔 방망이를 어깨에 걸친 무사 한 명이 조각돼 있다. 그런데 그 방망이를 잘 들여다보면 끝 부분이 폴로 혹은 하키 스틱처럼 휘어 있다. 

폴로는 통일신라시대 인기 스포츠의 하나였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격구(擊毬)다. 그럼 왜 서역인이 폴로 스틱을 쥐고 있는 것일까. 사산조 페르시아에서 시작된 폴로가 실크로드와 중국을 거쳐 통일신라 당시 한반도에 상륙했고, 많은 신라인이 외국의 신종 스포츠에 열광했음을 일러준다. 이 무덤 주인공은 생전에 격구를 무척 좋아했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의 무덤에 이런 모습을 조각해 넣었을 리가 없다. 무덤 주인공은 이란 페르시아에서 건너온 서역인과 함께 격구를 즐겼음에 틀림없다. 흥미로운 사실이다. 

경주 용강동 석실분(8세기)에서는 문관상 토용(土俑)이 출토됐다. 홀(笏)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인데 긴 턱수염과 얼굴 모습이 분명 서역인이다. 이 토용의 모델, 즉 서역인은 8세기 신라의 문관 공무원으로 일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한번 상상을 해본다. 8, 9세기 서역인들은 경주에 들어와 왕의 호위무사로 일했다. 공무원으로 일하는 이도 있었다. 퇴근 후 그들은 경주 사람들과 어울려 대형 고분 옆에서 격구를 즐겼다. 그러곤 틈틈이 불국사 나들이도 했을 것이다. 그 대담한 개방성과 파격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8, 9세기 신라 땅 경주는 이런 곳이었다.

8세기 경주의 여유와 파격

신라의 문화 수준을 알려주는 석굴암, 성덕대왕신종, 다보탑 사자상(왼쪽부터). [사진 제공·경주시, 동아일보 이광표 기자, 동아일보 김병기 기자]

통일신라는 불국토를 지향했다. 8세기 중반 조성한 불국사는 신라인의 내면을 응축한 공간이다. 그렇기에 불국사는 대중이 가장 즐겨 찾는 곳이었다. 신라의 조탑공(造塔工·석공)은 그곳에 탑 두 개를 세웠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지 70여 년이 지난 8세기 중반, 그 석공은 새로운 것에 대한 열망을 느꼈을 것이다. 기존 석탑 양식을 과감히 깨뜨리고 이제껏 보지도 경험하지도 못했던 새로운 형태를 시도하고 싶었을 것이다. 경전에만 있는 것, 실제로 볼 수 없는 것, 마음에만 있던 것을 눈앞에 실물로 펼쳐 보이고 싶었을 것이다. 그건 그 누구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다. 과감하고 창의적인 시도였다. 

불교미술의 틀을 벗어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자칫하면 파문(破門)까지 당할 일이다. 하지만 8세기 신라 불교는 석공의 도발에 가까운 창의성을 받아들였다. 대담한 발상을 하는 것도, 그 대담함을 받아들이는 것도 자신감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새로운 시도는 이전에도 없고 이후에도 없다. 다보탑 석가탑은 그 파격의 절정이다. 

이처럼 자유로운 창의성은 자신감에서 왔다. 삼국 가운데 후발 주자였음에도 삼국을 통일하고 주도권을 잡은 8세기 신라의 그 당찬 자신감일 것이다. 명작은 이렇게 파격에서 온다. 그것은 개인의 역량, 종교의 포용성뿐 아니라 시대의 힘이 응축돼 이뤄진다. 다보탑 석가탑은 이렇게 불교건축 종교미술의 획일성을 보기 좋게 날려 보냈다. 그것이 8세기 신라와 경주였다. 

이런 점에서 8세기 전후는 남다른 시대가 아닐 수 없다. 불국사, 다보탑과 석가탑, 석굴암, 성덕대왕신종(일명 에밀레종) 등이 탄생했다. 이들은 모두 해당 장르에서 우리 전통미술의 전범이 됐고 한국 최고의 문화유산으로 자리 잡았다. 모두 8세기 신라의 문화적 종교적 자신감의 산물이다. 8세기학(學)을 논해야 할 정도다. 

다보탑은 어느 시대, 어느 공간에서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건 8세기 신라 경주만의 석탑이다. 불국사 대웅전 앞의 두 탑이 모두 석가탑처럼 생겼다면 어땠을까. 지금처럼 생동감이 넘치지 않을 것이다. 지금처럼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만들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명작은 이렇게 새로운 길을 열어간다. 과감하고 도발적인 파격으로, 참신한 안목으로 새로운 미를 개척한다.

다보탑은 몇 층 탑인가

다시 한번 질문을 던진다. 그럼, 다보탑은 몇 층인가. 2층탑, 3층탑, 4층탑 등 다양한 설이 있지만 아직 명쾌한 답은 없다. 일반적인 탑과 모양이 너무 달라 층수를 헤아리기 쉽지 않다. 
다보탑 맨 아래쪽 계단이 있는 부분이 기단부(받침 부분)라는 점에는 전문가들 의견이 일치한다. 그러나 그 윗부분을 놓고 의견이 엇갈린다. 기단부 위쪽의 사각 기둥 있는 부분을 기단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이것을 하나의 층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탑 중간의 난간 부분에 대해서도 의견이 갈린다. 4각 난간과 8각 난간 부분을 각각 하나의 층으로 보는 견해가 있고, 이와 달리 4각 난간과 8각 난간 부분을 합쳐 하나의 층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난간 위부터 8각 옥개석(지붕돌) 아래 부분을 또 하나의 층으로 보는 전문가도 있다. 이렇게 보는 각도에 따라 다보탑은 2층탑, 3층탑, 4층탑이 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무급(無級)의 탑, 즉 층이 없는 탑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 견해는 난간 안쪽에 숨어 있는 8각 기둥에 주목한다. 이 8각 기둥이 다보탑의 탑신(몸체)인데, 이것이 난간에 의해 가려져 있다는 점에서 탑신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견해다. 즉 다보탑의 탑신은 있으면서 없는 것이며, 탑신이 없다는 것은 층이 없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무급탑, 무층탑이라는 말이 나온다. 

다보탑이 과연 몇 층인지, 영영 그 답을 찾아내지 못할 수 있다. 바로 그렇기에 다보탑은 더 매력적이다. 8세기 중반 다보탑을 세운 신라의 석공에게 몇 층 탑인지는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다보탑을 통해 한국 석탑 미술의 미래를 활짝 펼쳐 보였다. 모든 것이 새로운 도전이었다. 그런 석공에게 기존 석탑의 층수 개념은 별 의미가 없었다. 

신라 땅 경주는 도처가 파격이다. 도심 한복판 대형 고분이 그렇고, 서역인 조각과 토용이 그렇고, 대왕암이 그렇고, 다보탑 석가탑이 그렇다. 8세기 경주는 과감하고 도발적이었다. 다보탑은 그 파격의 절정이다. 사유와 성찰과 욕망을 탑으로 시각화하다니, 그것도 화려하고 세련된 미술로 탄생시키다니. 다보탑은 이 시대에 여전히 신비와 미스터리를 남긴다. 명작은 미스터리를 낳고 그 미스터리는 명작의 가치를 더해준다. 이제, 불국사에 가면 다보탑이 과연 몇 층 탑인지 헤아려볼 일이다.


이광표
● 1965년 충남 예산 출생
●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졸업
● 고려대 대학원 문화유산학협동과정 졸업(박사)
●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
● 저서 : ‘그림에 나를 담다’ ‘손 안의 박물관’ ‘한국의 국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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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hindonga.donga.com/3/all/13/17504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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