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당놀이는 꼭두쇠(우두머리)를 비롯해 최소 40명에 이르는 남자들로 구성된 유랑연예인인 남사당패가 농·어촌을 돌며, 주로 서민층을 대상으로 조선 후기부터 1920년대까지 행했던 놀이이다. 남사당놀이는 서민사회에서 자연 발생한 민중놀이로, 양반들로부터 박대를 당해 마을에서 공연하는 것도 자유롭지 못했다.
남사당패는 꼭두쇠를 정점으로 공연을 기획하는 화주, 놀이를 관장하는 뜬쇠, 연희자인 가열, 새내기인 삐리, 나이든 저승패와 등짐꾼 등으로 이루어지지만, 남사당놀이는 풍물, 버나, 살판, 어름, 덧뵈기, 덜미 등으로 구성된다. 풍물은 일종의 농악놀이로 공연 시작을 알리면서 구경꾼을 유도하기 위한 놀이라 볼 수 있다. 버나는 쳇바퀴나 대접 등을 막대기나 담뱃대 등으로 돌리는 묘기이다. 살판은 오늘날의 덤블링(재주넘기)과 같은 땅재주로, 잘하면 살판이요 못하면 죽을 판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어름은 줄타기 곡예를 이르는 말로 얼음 위를 조심스럽게 걷는 것만큼 어렵다 하여 남사당패내에서만 쓰여지던 말이었으나 점차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게 되었다. 덧뵈기는 탈을 쓰고 하는 일종의 탈놀이이다. 인형극을 이르는 덜미는 인형극에 나오는 중요등장인물에 따라 꼭두각시놀음, 박첨지놀음, 홍동지놀음이라고 부른다. 특히 꼭두각시놀음은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오고 있으며, 우리나라 전통인형극이 남사당놀이밖에 없다는데 역사적 의미가 크다.
남사당놀이는 서민층에서 발생하여 서민들을 위해 공연된 놀이로서 당시 사회에서 천대받던 한과 양반사회의 부도덕성을 놀이를 통해서 비판하며 풀고, 민중의식을 일깨우는 역할을 했다.
조선 명기(名技)들의 시(詩)
부안기생 매창
그대에게
봄 오고 그댄 오지 않으니
바라보아도 바라보아도 덧없는 마음
들여다 보는 거울엔 먼지가 끼어
거문고 가락만 달아래 흐르네
취하신 님께
취하신님 사정없이 날 끌어단
끝내는 비단적삼 찢어놓았지
적삼 하날 아껴서 그러는게 아니어
맷힌정 끊어질까 두러워서그렇지
성천 기생 채소염
말위에서 시를 읋는다
성천 길 위에 말 멈추니
꽃지는 봄날 두견새 시름일세
물길은 평양으로 통하고
땅은 강선루에 잇닿았네
송도기생 황진이
상사몽
산은 옛산이 로되
물은 옛물이 아니로다
주야(晝夜)에 흐르그든 옛물이 있을소냐
인걸(人傑)도 물과같도다
가고 아니 오노 매라
어져 내일이야 그릴줄 모르던가
이시라 하더면 가랴마는 제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기생 송이
내 사랑 남 주지 말고 남의 사랑 탐치마소
우리 두사랑에 잡사랑 행여 섞일세라
아마도 우리사랑은 류가 없는가 하노라
일생에 이사랑 가지고 괴어 살려 하노라
진주기생 계향
먼곳에 있는 님에게 부치다
헤어진뒤 (雪山)설산 막혀 아득한 저길
꿈속에서나 님곁에서 웃어봅니다
깨고나면 베겟머리 그림자도 볼수없어
옆으로 몸돌리면 등잔불도 쓸쓸해요
평양기생 매화
죽어서 잊어야 하랴 살아서 잊어야 하랴
죽어 잊기도 어렵고 살아그리기도 어려워라
저 님아 한 말만 하소서 사생 결단 하리라
매화 옛 동절에 봄철이 돌아온다
옛 피든 가지 마다 핌적도 하다마는
춘설(春雪)이 난 분분하니
필동 말동 하여라
평양기생 장연화
놀이터의 노래에 목이 쉬어
돌아와서 화가 나 함부로 뜯는
가야금이여 줄이 끊어지도록 뜯어며
뜯어며 이밤을 새일거나
송도기생 황진이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일도 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해설
<이상 인터넷 검색창에서 전재했습니다>
인류 보편적 가치를 지닌 그림
<세한도>는 왜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것일까? <세한도>를 되찾은 극적인 이야기 때문만은 아니다. 세한의 시간과 송백의 마음이라는 <세한도>에 담긴 인류 보편적 가치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세한도>는 누구에게나 역경이 닥칠 수 있으며, 변치 않는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려주는 명작이다. “세한연후(歲寒然後) 송백지후조(松柏知後凋)” 즉,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된 다음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라는 공자의 말은 예로부터 즐겨 인용되었다. 그러나 그림으로 그려진 예가 거의 없었다. 김정희는 ‘세한’과 ‘송백지후조’를 평생 쌓아 온 지력과 필력으로 해결했다.
김정희는 둥근 문이 있는 집 좌우로 소나무 두 그루, 측백나무 두 그루만 그려서 화면의 반이 여백으로 남아 있다. 집조차 너무 허름해서 추워 보인다. 한겨울의 메마름을 물기가 거의 없는 바짝 마른 까슬까슬한 붓질로 표현했다. 이처럼 물기 없는 마른 붓에 진한 먹물을 묻혀 그리는 필법은 그가 59년 동안 갈고 닦아 이루어낸 필력에서 나온 것이다. ‘송백지후조’는 소나무와 측백나무 잎이 기운차게 솟아올라 있는 모습으로 전달했다. 단순해 보이는 그림이지만, 확대해 보면 필치의 단단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파란만장한 명작의 여정
울타리 밖을 나갈 수 없던 김정희에게 책은 유일한 지식의 보고였다. 또한 책은 이전의 윤택했던 삶과 연결되는 통로로 그는 책을 보면서 세한의 시간을 잊을 수 있었을 것이다. 계속 새 책을 보내주는 역관 이상적에게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1844년 김정희는 <세한도>를 제작해서 한양으로 보냈다. 이상적은 <세한도>를 받고 감격했고 그해 음력 10월 일곱 번째 중국 출장길에 이를 가져갔다. 1845년 음력 1월 그의 연경 방문을 축하하기 위해 중국인 친구들이 모임을 열었다. 이 모임에서 이상적은 <세한도>를 보여주었다. <세한도>의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에 공감한 중국인 지인 16명이 감상 글을 남겼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세한도>는 개성에 있었다. 1914년 김준학이 쓴 글이 <세한도> 두루마리 제일 앞에 있는데, 개성에서 작성한 것이다. 이외에도 중국인들의 감상 글 사이에 그의 글 2개를 더 찾을 수 있다. 이들 글에서 그의 부친이 자역관 김병선이 <세한도>를 소장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시문에 뛰어났던 김병선은 이상적의 양자 이용림과 모임을 함께하는 사이였다. 아마도 이러한 인연으로 김병선이 <세한도>를 소장했고, 아들 김준학에게 이를 물려주었을 것이다. 이후 휘문의숙을 설립한 민영휘의 아들 민규식이 <세한도>를 소장했다고 하나 정확하지는 않다. 1932년 <세한도>의 소장자는 일본인 후지쓰카 지카시였다. 그는 김정희를 제대로 연구한 첫 번째 학자였다.
그는 <세한도> 외에도 김정희의 여러작품을 소장했는데, 그와 교유한 문예계 인사들이 그의 연구와 수집을 도왔다. 김병선의 사후 <세한도>를 소장했을 그의 아들 김상준은 후지쓰카에게 19세기 역관들이 시문과 편지등 일괄 자료를 팔았다. 후지쓰카는 김정희 업적을 알리고자 노력했고 <세한도> 영인본 100부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는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그는 <세한도>와 함께 여러 자료를 가지고 갔다.
기가 막힌 <세한도> 환수 그리고 기증에 이르기까지
1944년 말 진도 출신 서화가 손재형은 <세한도>를 찾기 위해 미군의 공습이 이어지던 일본 도쿄로 후지쓰카를 찾았다. 약 3개월 동안 노력을 기울인 손재형은 드디어 <세한도>를 얻게 되었다.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난 1945년 3월 미군의 공습으로 후지쓰카의 연구소가 불에 타버렸으니 아찔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손재형은 목숨을 걸고 정성을 다해 설득했고, 후지쓰카가 이를 이해했기에 <세한도>가 극적으로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949년 손재형은 이시영, 정인보, 오세창에게 <세한도>를 보여주고 글을 받아 덧붙여서 지금의 모습으로 장황하게 된 것이다. 손재형은 미군의 일본 공습과 6.25전쟁의 포화 속에서 <세한도>를 지켜냈지만, 안타깝게도 채 30년도 소장하지 못했다. 그는 1958년부터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과 당선을 거듭하다가 돈이 궁해지자 수집품을 저당잡혔다가 되찾지 못했다.
1974년 <세한도>가 국보로 지정될 때 소장자는 개성 출신 사업가 손세기였다. 손세기는 동향 출신 사채업자 이근태에게서 <세한도>를 구입했다. 손세기는 고서화 수집에 관심이 많아서 간송미술관 전시를 매우 오랫동안 관람했다고 한다. 그의 아들 손창근도 고서화 수집을 이어갔다. 손창근은 정성을 기울여 수집한 소장품을 2005년과 2010년 두 차례에 걸쳐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했다. 2018년 202건 304점 기증에 이어 2020년에는 <세한도>를 아무런 조건 없이 기증했다. <세한도> 기증을 결심할 수 있었던 데에는 부인 김연순 여사의 조언이 큰 힘이 되었다. 이제 <세한도>가 국민의 품으로 오게 되면서 <세한도>의 176년 여정이 아름답게 마무리된 것이다.
글. 이수경(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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